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89화 (169/2,000)

< 171. 낭만의 캠퍼스-40- >

"···예에? 나니(なに)?"

료코는 정음의 맥락 없는 인사에 당황해 일본말로 대꾸하고 말았다.

‘안녕’이라는 말 뒤에 붙은 "기분 좋아(きもち)"이라는 단어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 하지만 일본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정음은 료코가 자신의 인사를 받아 준 것이라 착각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조잖아. 기억 안 나?"

"기억하므니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태영 사마, 어제는 도와줘서 아리가또네."

료코의 한국말은 참으로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그럭저럭 의미는 알아들을 순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 도훈은 몰래 료코의 몸매를 관찰했다.

‘호오, 상당한 글래먼데? 일본 애들이 확실히 발육이 남다르단 말이야.’

[드디어 ‘인종의 도가니탕’ 위업에 도전하시는 겁니까?]

‘위업은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있다고. 근데 태영이 말 들어보니 기숙사 산다니까 시간이 제법 걸리겠어.’

[송미나 양처럼 장기공략이 되겠군요.]

‘기다리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일단은 좋은 이미지를 유지해놔야지.’

"료코 수업 같이 듣자."

"그쪽은 도운 사마?"

"도운이 아니고 도훈."

"하앗, 쓰미마셍! 도훈 사마. 기억하고 있으므니다!"

료코는 일본인 특유의 과장된 제스쳐를 선보였다. 한국 여자들에게선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에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리액션이 굉장하구나. 신음도 혹시 야동처럼 내려나?’

강의실로 들어간 일행은 뒤늦게 도착한 서현과 함께 구석에 자릴 잡았다. 서현과 정음이 앞줄, 료코와 태영 그리고 도훈이 뒷줄이었다. 도훈이 강의 준비를 위해 노트를 펼치는데 태영이 료코를 향해 말을 걸었다.

"료코상. 어제 내가 한 제안은 생각해 봤어?"

"써클 말이무니까?"

"응. 연극부 들어오면 한국 발성도 배우고 좋잖아. 또 료코 상은 귀여우니까 배역도 금방 맡을 수 있을 거야."

도훈은 태영의 적극적인 영입활동을 보며 생각했다.

‘저놈은 매사 열심히 구나. 같이 동아리 하면서 친해질 계획인건가? 미안하지만 료코도 내가 접수한다.’

료코는 태영의 연극부 제안이 썩 내키지 않은 지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와따시는 좀 더 생각을···."

"그래. 관심 생기면 연락해. 내 연락처는 알지?"

"하잇."

"도훈이 형도 연극부 들어오실래요? 이번 주까지 모집인데."

"아니. 난 그쪽으론 전혀 흥미가 없어서."

"아···. 하긴 형이 들어와도 문제겠네요."

"왜?"

"지금 주연 맡은 애들 바짝 긴장할 거 아니에요. 얼굴 되지, 몸 되지. 심지어 노래까지 잘하지."

"인마, 그만 비행기 태우고. 공부나 하자."

"넵."

잠시 후 강의실 앞문으로 손은주 교수가 들어왔다. 검은 뿔 태 안경을 끼고 온 손 교수는 적나라하게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로 순식간에 좌중을 압도해 버렸다.

‘우아, 몸매 하난 예술이네.’

[주인님 취향이신가요?]

‘저 정도 와꾸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요새 골드미스란 말이 유행하던데, 딱 손은주를 두고 한 말이네.’

도훈과 같은 마음이었던지 태영도 감탄사를 연발했다.

"교수님 패션 엄청 핫 한데요? 도저히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겠어요."

"언제는 집중하긴 했냐?"

"형! 펙폭 자제 좀."

"하긴 오늘따라 복장이 과하긴 하네."

"왜, 여학생들 도서관에 미니스커트 입고 오지 말라는 소리가 괜히 나온 건 아니잖아요. 혈기 왕성한 남학생들은 대체 시선을 어디 두라는 건지. 쩝."

교단 중앙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손은주는 자신의 늘씬한 몸매를 보란 듯 과시하더니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저번에 약속한 거 기억나죠? 여러분 이름 외워 오겠다는 말."

"교수님 정말로 다 외우셨어요?"

"Of course. 확인해 볼 친구 있나요?"

"저요!"

나서기 좋아하는 태영이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체육과 정태영 학생이군요. 맞죠?"

"엇!"

"왼편엔 일본 교환학생 우에하라 로쿄."

"우에하라?"

정음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기모찌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알고 있나?’

"그리고 오른쪽은 역시 체육과 14학번인 이도훈 군."

"정확합니다."

"혹시 또 확인해 보고 싶은 사람?"

몇몇이 손을 들었지만, 손 교수는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단번에 이름을 맞혀나갔다. 얼굴과 이름뿐 아니라 학번까지 모조리 외워버린 기억력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이햐. 똑똑하긴 엄청 똑똑하네. 이틀 전에 한 번 보고 50여명을 그세 외워 버린 거야?’

[마치 포토그라프 메모리를 보는 것 같군요.]

‘전에 말한 사진 기억? 그건 초능력 아니었어?’

[일반인 중에서도 비슷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번트 증후군에서도 가끔 나타나기도 하고요. 제 판단으론 사람 얼굴과 이름을 매칭시키는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보유한 것 같군요.]

‘영업직 같은 것 했어도 잘했겠다. 하, 그나저나 지적인 여자들이 은근 밝힌다던데, 손 교수도 그러려나?’

[손 교수 관련 미션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말 나온 김에 오늘 수업 끝나고 슬쩍 방문해 볼까?’

[주인님은 오늘도 최선을 다하시는군요.]

‘어째 뉴스 클로징멘트 같다?’

[···기분 탓입니다.]

"더 없죠?"

"아뇨. 여기요!"

강의실 맨 뒤에 앉은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왠지 자신만만한 표정이 믿는 구석이 있는 눈치였다.

"그쪽은···."

손 교수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가슴 앞에 팔짱 낀 손을 들어 안경 브릿지 부분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살짝 찡그려진 미간과 가늘어진 눈매가 어딘지 모르게 섹시한 느낌을 자아냈다.

‘캬. 저 도도한 눈빛 하며! 동작 하나하나가 색기 넘치는구나.’

[주인님 침 닦으십시오.]

‘스읍.’

"저번에 안 온 학생이죠? 공대 기계공학부 16학번 이영민 군."

"헉, 어떻게 그걸?"

"확인해줘서 고맙군요. 그러잖아도 수강 포기도 안 하고 결석한 학생이 있길래 누군지 궁금했는데···."

"윽!"

"그럼 학생들. 약속 꼭 지켜요? 다음 수업부터는 돌아가면서 커피 사 오기로."

강의실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수업에 출석하지도 않았던 학생마저 외워버리는 기억력이라니. 아니, 저건 추리의 영역일까?

도훈은 손은주가 보여주는 총기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진정한 뇌색녀로구나. 자빠뜨리는 맛이 쏠쏠하겠어.’

[주인님이 똑똑한 여잘 좋아하는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머리가 멍청해 져서 그런지 괜히 똑똑한 여자가 끌리네? 그리고 똑똑하기만 한가? 색기도 충만하잖아.’

[아무튼 분발해 보십시오.]

수업은 예상대로 빡빡했다. 손 교수는 성심성의껏 준비한 자료와 프린트물을 바탕으로 강도 높은 수업을 끌고 갔다.

도훈은 최대한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수업에 몰입할 때의 모습만큼은 전생의 이정우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얼마나 집중했던지 손 교수가 자신을 힐끔거린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체육과 이도훈이랬나. 엄청 열심힌데? 저번 시간부터 수업 태도가 아주 맘에 들어.’

은주는 도훈을 눈여겨보고는 그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수업을 듣는 척 학생과 진심으로 집중하는 학생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도훈의 경우는 후자였다.

"오늘은 조별 과제 제출로 5분 일찍 마칠게요. 칠판에 적어놓고 갈 테니 바로 가지 말고 모둠끼리 모여 상의해 보세요."

손 교수는 화이트 보드에 다음과 같이 판서했다.

<현장 답사 보고서> / 기한 3월 둘째 주.

"당연히 수업에 맞게 종교와 관련된 미술품을 주제로 해야 합니다. 답사 장소는 자유. 자세한 사항은 미술과 홈페이지에 게시해 뒀으니 확인해 보세요. 그럼 이만."

손 교수는 짤막한 설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갔다.

"현장 답사라고?"

"둘째 주 까지면 다음 주 제출이란 소리 아니야?"

"그럼 주말밖에 시간 없겠네."

갑작스레 제시된 조별 과제에 강의실은 순식간에 시장통으로 변했다. 다행히 한 데 뭉쳐있던 도훈의 조는 곧바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다.

"우리 조는 다 모인 거지?"

"그 농대 다니는 오빠 안 보여요."

"저기 온다."

도저히 도훈과 동갑으로 보이지 않는 농대생이 합류하자 도훈이 말했다.

"아무대로 답사를 가야 하니 평일은 무리겠다. 혹시 이번 주말 시간 안 되는 사람?"

"저요."

"서현이는 왜?"

"이번 주 친척 오빠 결혼식 있어요. 부산에서요."

"부조만 해 그럼."

태영의 말에 서현이 난색을 보였다.

"안 돼. 고모랑 엄청 가까운 사이란 말이야. 한 달 전부터 꼭 오라고 신신당부하셔서···. 어쩌죠, 오빠?"

도훈은 자연스럽게 조장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여섯 명의 조원 중 넷이 체육과라는 점에 기인했다.

"선약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조별 과제에 무임승차는 곤란하니까, 보고서 작성은 서현이가 맡도록 하자."

"네. 그건 할 수 있어요. 근데 같이 가본 사람이 옆에서 도와주면 좋겠는데···."

"내가 해줄 게."

도훈은 꿍꿍이속을 숨기고 말했다. 이것으로 서현과 단둘이 보낼 시간은 확보했다.

"근데 장소는 어디로 하죠? 종교 미술 답사면 교회나 성당, 절 같은 데 가야 하나?"

농대생이 의견을 냈다.

"교회나 성당은 애매할 것 같아. 솔직히 우리나라 건물에 벽화나 조각품들이 많은 것도 아니잖아. 차라리 절이 낫지 않을까?"

"절? 혹시 아는 데 있으세요?"

"응. 어머니가 잘 아시는 스님이 계신 사찰이 있는데, 작년에 템플 스테이도 했었어. 거기 꽤 괜찮아. 미술품도 많고."

도훈도 동의했다.

"괜찮을 것 같은데? 탱화나 탑, 부도 같은 것만 찍어도 상당히 적을 게 많을 거고. 그 절 어딘데?"

"근데 근교가 아니라 전라도에 있어."

"전라도?"

"어. 좀 멀긴 한데 하룻밤 묶는다고 생각하면 괜찮지 않아? 답사 내용도 풍성해질 테고."

"흠, 1박이라···."

"그리고 하루 정도는 어머니 아는 스님께서 숙식 제공해주실 거야. 어머니가 그 절에 시주 엄청 하셨거든. 차비만 있으면 돼."

도훈은 빠르게 머릴 굴렸다.

‘외박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료코를 기숙사 밖으로 끌어낼 명분이 생기겠군. 경치 좋은 곳에서 정음이 호감도도 올리기 좋을 테고. 좋아, 이거다.’

"여기서 1박 안 되는 사람?"

"전 괜찮아요."

"MT 가는 것 같고 좋은데요?"

"료코는 괜찮겠니?"

"기숙사 사감 센세께 여쭤 봐야 할 것 같스무니다."

교환학생이란 신분에 난처해 하는 료코를 향해 태영이 나섰다.

"제가 수업 끝나고 같이 가서 말해 볼게요. 수업 때문에 외박 신청하는 건데 받아 주지 않겠어요? 한국 왔으니 사찰 같은데 구경 가는 것도 재밌을 거고. 료코, 너무 걱정하지 마."

"아리가또."

"좋아. 그럼 서현이 빼고 다섯이서 토일 가는 거로 하자. 답사 보고서는 돌아와서 일요일 오후에 서현이랑 같이 마무리 할 게."

"히히. 재밌겠다."

태영은 료코와 정음과 함께하는 여행이 마음에 쏙 드는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하지만 도훈은 그런 태영의 모습에 쯧쯧 혀를 찰 뿐이었다.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태영이 넌 그저 짐꾼1에 불과하니까.’

그리고는 짐꾼2로 명명된 농대생에게 말했다.

"사찰에 미리 연락하고, 나중에 단톡방에 일정 올려줘. 이번 조별 답사는 너만 믿을 게."

"그래. 맡겨두라고."

***

도훈은 답사와 관련해 손 교수에게 물어볼 게 있다는 핑계로 먼저 자릴 떴다.

‘예술대 본관 3층이랬지? 오후 3시부턴 연구실에 있다고 했으니 지금 가면 만날 수 있겠군.’

도훈은 예술대 본관 계단을 오르며 손은주를 어떻게 공략할지 생각했다. 점심때 정음에게 정보창 스킬을 사용했기 때문에 지금 쓰긴 무리. 결국 싸이코 메트리로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똑똑똑-

"교수님. 저 종교 미술의 이해 수업 듣는 학생인데요."

"들어와요."

도훈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응접용 쇼파에 앉아 책을 읽던 손은주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도훈 학생?"

"네. 역시 기억력 좋으시네요."

"방금 같이 수업했잖아. 일단 앉아요."

손 교수가 빈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 보는 위치. 응접용 테이블 위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잔이 있었다.

"도훈 학생도 커피 좋아해? 한 잔 타줄까?"

"괜찮습니다."

"사양 안 해도 돼. 캡슐로 추출하는 거라 손도 얼마 안 가거든."

"그럼 한 잔만."

"후훗."

손 교수는 몸을 일으키더니 머신에서 커피를 추출했다. 돌아선 자세에서 엉덩이 굴곡이 여실히 드러나는 바람에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흣, 골반도 끝내주네.’

도훈이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손 교수가 돌아선 상태로 도훈에게 물었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래? 내 얼굴 보러 오진 않았을 거고."

"···네?"

"호호, 농담이야. 너 의외로 순진하구나?"

그녀는 도훈에게 새로 뽑은 커피를 건넨 뒤,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무릎 위까지 올라온 원피스가 슬쩍 말리며 허벅지 안쪽을 훤히 비추자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쏠렸다.

‘어머, 애 봐? 아주 대놓고 보네?’

은주는 도훈의 시선이 싫진 않은지 치마를 가릴 생각도 않고 도훈에게 물었다.

"왜 말이 없어? 나한테 물어볼 거 있어서 온 거 아냐?"

"네. 저기 답사 관련해서요."

"응, 답사."

은주는 이번엔 반대로 다리를 꼬았다. 팬티가 슬쩍 비칠 정도로 아슬아슬한 동작에 도훈은 점점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 171. 낭만의 캠퍼스-40-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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