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88화 (168/2,000)

< 170. 낭만의 캠퍼스-39- >

"정음이 왔네?"

"정음이 안녕?"

연두와 나연이 정음을 향해 인사하는데 그다지 반기는 낯이 아니었다. 왜 그런 거 있잖는가, 조곤조곤한 태도로 말하지만 말 속에 비수를 숨긴 것 같은. 정음의 등장으로 빚어진 폭풍 전야와 같은 긴장감에 갑자기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피곤하게 됐군.’

정음에게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곧바로 꼬투리를 잡았다.

"어머? 근데 정음이 화장했네?"

"웬 열? 안 하던 화장을 다 하고?"

"어···. 그냥 기초화장만 좀."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협공에 정음이 주춤거리며 대답했다.

"아닌데? 입술도 칠한 거 아니니?"

"이, 이건 립글로즈야."

"그래? 요샌 립글로즈도 루즈처럼 나오는가 보지?"

"어디 제품인데? 알려줘 봐. 나도 좀 쓰게."

나연두 콤비의 집중 견제는 옆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정음이 체육과 17학번 공인 얼짱이라는 사실에 상당한 질투심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하아, 역시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하는 걸까?

보다 못한 내가 균형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정음 편을 들었다.

"정음이 오늘따라 예쁘네?"

"앗, 선배···. 고마워요."

"화장도 잘 어울리고."

"실은 엄마가 여자는 좀 꾸미고 다녀야 한다면서 화장품을 잔뜩 사 왔지 뭐예요. 저도 어색해 죽겠어요."

"아냐. 자연스러워. 피부가 원체 좋으니 화장도 잘 받네."

그러나 대놓고 정음을 편든 것은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다. 연두와 나연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싸늘해진 것이다. 아아, 여자의 질투심을 너무 우습게 봤던 걸까?

"혹시 오빠가 기다린다던 사람이 정음이었어요?"

"그랬나 보네. 근데 정음인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화장까지 다 하고 나왔을까?"

"그러게, 호호!"

두 사람의 핀잔에 괜히 정음의 입장만 난처해졌다. 이것들 가만 보니 신데렐라를 구박하는 새언니가 따로 없군.

[주인님, 실수하신 것 같습니다. 여자의 질투심을 자극해 봐야 좋을 게 없을 텐데요.]

‘낸 들 이렇게 될 줄 알았냐. 근데 쟤네 너무 심한 거 아냐? 정음이랑 딱히 척질 일도 없던 것 같은데 엄청 갈구잖아?’

[설마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이게 다 주인님 때문 아닙니까?]

‘내가 뭘?’

[주인님께 호감이 있는 두 사람에게, 정음 양은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나 마찬가집니다. 그 와중에 그녀의 외모를 칭찬했으니 당연히 집중 견제를 받을 수밖에요.]

‘흐음. 하나같이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구나.’

[명심하십시오. 남자의 성욕이 본능인 것처럼, 여자에겐 질투가 그러하다는 사실을요.]

사실 나연만 해도 리듬체조로 다져진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로 빻녀 양희주과 체육과 몸짱 투탑을 이뤘고, 연두 역시 얼굴만 놓고 보면 정음에 하등 꿀릴 게 없었다.

그 와중에 내가 유독 정음만 칭찬했으니 그에 반발심이 생긴 것도 무리가 아닌 셈. 나는 동시에 여러 여자를 만나는 자리에선 두 번 다시 개별적인 칭찬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튼 매력 터지는 여학생이 유난히 많은 체육과 17학번 중에서도 1,2,3 선발이 한데 모이자 그 여파는 엄청났다. 학떨목에 있던 타과 학생들이 미소녀 트로이카를 향해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온 것이다.

"저기 봐. 쟤들이 체육과 팔선녀야."

"팔선녀? 셋뿐이 없는데?"

"저 셋이 에이스라는 소문이 있더라고."

"쩝, 예쁘긴 엄청 예쁘네."

"근데 가운데 저 남자는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건가? 미소녀 사이에 둘러싸여 있잖아?"

"부럽다."

"나도."

대놓고 수군대는 구경꾼들 때문에 계속 있기 민망해진 내가 정음에게 말했다.

"가자. 점심 먹으러."

"오빠, 정음이랑 단둘이 먹게요?"

나연과 연두는 귀찮을 정도로 들러붙었다.

아오, 왜 하필 여기서 만나자고 했지?

"어, 오후에 교양수업 같이 듣는 게 있어서 밥 시간 맞췄어."

"저도 점심 좋아하는데···"

"점심 이야기하니까 배고프당. 저희도 사주심 안 돼요?"

두 사람의 생떼에 이번엔 정음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눈치를 보아하니 쥐어패서라도 떼놓을 기세.

그녀의 욱하는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다 싸움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얼른 말리셔야 합니다.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면 의자왕 위업 역시 차질을 빚을지도 모릅니다.]

‘낸들 어쩌라고?’

[그걸 저에게 물으시면 어쩐답니까? 애초에 사범대 학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로 약속을 잡은 주인님 잘못인 걸요.]

‘젠장, 다음부턴 그냥 식당에서 바로 만나든가 해야겠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일단은 더 관계가 틀어지지 않게 세 사람을 다독일 필요가 있었다.

"알았어. 그럼 셋 다 사줄 게."

"오에!"

"오빠 최고!"

"······."

기뻐 날뛰는 두 사람과 달리 정음은 완전히 기분 상한 표정이다. 이대로 두면 나에 대한 호감도가 하락할 게 불 보듯 뻔하다. 그럴 수야 없지.

***

‘뭐야, 오빤···. 단둘이 식사하는 줄 알고 좋아했더니만···.’

평소 하지도 않는 화장까지 하고, 예쁜 옷으로 골라 입고 나온 정음은 완전히 기분을 잡치고 말았다. 나연과 연두가 도훈을 에워싸고 있을 때부터 예감이 좋지 않더니, 결국 점심 식사까지 따라나선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아까부터 툭툭 시비를 거는 언행으로 그녀를 도발해 왔다. 마음 같아선 죽빵이라도 날리고 싶지만, 도훈의 앞이라 애써 화를 삭이는 정음이었다. 그녀가 토라진 얼굴로 식사 장소로 이동하는데 부르르 진동이 울렸다.

-도훈 : 미안. 둘이서만 먹고 싶었는데 저 두 사람을 때놓을 명분이 없네. 오늘만 이해해줘.

먼저 선톡을 보내는 일이 거의 없었던 도훈의 행동에 정음은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어졌다. 그녀는 재잘거리며 따라오는 두 사람을 피해 몰래 답장했다.

-정음 : 아니에요. 아까 제 편들어줘서 고마웠어요.

-도훈 : 마음씨 넓은 너가 이해해. 네가 너무 예쁘니까 애들이 질투 하나 봐.

-정음 : ㅎㅎ연두랑 나연이도 예쁘잖아요.

-도훈 : 너랑은 비교도 안 되지. 체육과 여신이잖아 넌.

-정음 : 민망해요.

"오빠, 근데 저희 뭐 먹으러 가요?"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중화요리요."

"난 파스타."

"야. 파스타 느끼하단 말이야."

"뭐래? 난 짱깨 싫다고!"

연두와 나연은 자기들끼리 또 티격태격했다. 가만 보면 둘이 허구한 날 싸우면서도 철석같이 붙어 다니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정음이는 뭐 먹고 싶니?"

"전 아무거나 다 괜찮아요. 선배 드시고 싶은 거 드세요."

역시 교과서적으로 훌륭한 답변이다. 이러니 정음을 안 예뻐 할 수가 있나. 이쯤에서 그녀의 정보창을 확인해봐야겠다. 그녀의 속마음은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

성명 : 육정음

나이 : 20

호감도 : 86/100

개방성 : C

성감대 : 젖꼭지, 겨드랑이, 발가락.

성욕지수 : B

공략팁

*이미 공략을 완료하셨습니다.

-그녀는 다른 여자에게 당신을 빼앗길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믿음을 줄 수 있도록 언행에 신경 쓰십시오.

-추천멘트 : "내가 제일 먹고 싶은 건 바로 너야."

------------------------------

헉! 정음에게 이런 도발적인 면이?

정보창이 제시한 추천 멘트는 너무도 파격적이라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윽. 저 말을 대체 어떻게 해? 연두랑 나연이도 같이 있는 판국에.’

[꼭 말로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럼? 아!’

나는 다시 몰래 깨톡을 보냈다.

-도훈 : 내가 제일 먹고 싶은 건 바로 너야, 정음아.

핸드폰을 확인한 정음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설마 속마음을 읽을 줄은 몰랐겠지? 크크.

그리고는 여전히 투덕거리는 나연과 연두를 향해 말했다.

"다들 의견이 너무 달라 안 되겠어. 오늘은 내가 먹고 싶은 거로 고를게."

"좋아요."

"뭔데요?"

"오늘은···."

나는 주변 음식점을 둘러보다 제일 가까이 있는 가게를 가리켰다.

"김밥인 더 헤븐!"

"윽! 분식요?"

"아~ 스테끼 써는 줄 기대하고 있었는데!"

"싫음 먹지 말든가. 갑자기 들러붙은 게 누군데 그래?"

"아, 아니에요. 오빠."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결국 우리 넷은 분식점에 들러 가볍게 점심을 때웠다. 아까의 잘못을 교훈 삼아 공평하게 세 사람을 띄워주자 다들 만족해하는 표정이다.

"근데 너희 둘은 원래부터 친했니?"

"저희가 친하다고요?"

"전혀 아닌데?"

"항상 둘이 맨날 붙어 다니길래."

"아, 그게요···."

두 사람은 어쩌다 보니 수강신청을 같이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표가 똑같아져 버렸다고.

"이럴 줄 알았음 태영이가 수강신청 하자고 할 때 같이 하는 건데."

"내 말이. 그럼 나도 도훈 오빠랑 수업 같이 들었을 거 아냐."

"나연이 너 엄청 속 보인다?"

"흥, 동기 카톡방에서 맨날 오빠 얘기만 하는 너만 할까?"

"내 얘기를 했어?"

"있잖아요, 연두 얘가 지난번에 읍읍!! 야! 그렇다고 매운 떡볶이를 입에 처넣으면 어떡해!"

"많이 드시라고요. 좀, 닥치고."

"이게 진짜!"

두 사람은 또 시비가 붙었다. 사이좋게 지내다가도 어느새 다투고 있는 둘을 보면 도무지 친구인지 웬수인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다.

‘정말 피곤한 애들이구만. 얼굴은 예쁘장한데 완전 하는 짓이 중딩이야.’

[나름 매력 있지 않습니까? 이해하십시오. 고작 스무살인걸요.]

‘암튼 저 둘을 공략할 땐 무조건 따로 만나야겠어. 쓰리썸이라도 했다간 둘이 서로 박히려고 대판 쌈 날 듯.’

[현명한 판단입니다. 남자 문제로 얽히면 절친이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기도 하니까요.]

‘그래. 팔선녀 공략은 같은 학과 동기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소문이 안 새도록 비밀리에 진행하는 편이 좋겠어. 서로가 기둥 자매인 걸 들켰다간 죽도 밥도 안될 것 같아.’

정음과 단둘이 식사로 호감도를 끌어 올리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것저것 깨달은 게 많은 시간이었다.

절대 여자의 질투심을 자극하지 말 것.

그리고 팔선녀 공략을 좀 더 치밀하게 준비해야 할 것.

짧은 식사를 마치고 서로 수업을 향해 흩어지는데 연두가 말했다.

"오빠, 그럼 나중에 봐요."

"전 응원 막대 준비해서 갈게요!"

"그래. 오후 수업 잘 들어."

두 사람과 헤어지자 정음이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나중에 본다니?"

훗. 질투하는 모습마저 귀엽네. 나는 여자 배구팀과의 연습 경기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했다.

"아···. 분과 교수님 집합이구나."

"응. 오후에 도서관에서 공부도 하고 헬스장도 가려고 했는데 완전 망했지, 뭐."

"저도 갈 수 있으면 응원가고 싶네요."

"왜? 정음이 저녁에 무슨 일 있어?"

"도장 관장님이···. 아, 그러니까 저 예전에 운동했던 데요."

"태권도장?"

"네. 담주에 고등학생들 시합 있다고 대련 좀 봐달라고 해서요."

"그런 일도 해?"

"방학 때는 사범도 잠깐 했어요. 관장님이 부탁으로요."

"정음이 바쁘구나."

"오빠만 할까요."

정음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도 내 경기를 못 보는 것에 대해 많이 아쉬워하는 듯했다. 특히나 나에게 대놓고 호감을 보이는 연두와 나연이 응원을 간다는 것에 신경 쓰는 눈치였다.

"···근데 아깐 무슨 뜻으로 그런 거예요?"

"뭐?"

"그 문자요."

정음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스마트 폰을 가리켰다. 속마음을 들켜서 놀랐나 보지?

"그냥 가장 먹고 싶은 거 말한 건데?"

"앗, 부끄럽게."

"왜? 별로야?"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지만···."

"언제 시간 되면 저녁이나 같이 먹자. 단둘이서만."

"네. 좋아요."

물론 후식은 너야. 내 의미심장한 눈빛을 알아챘는지 정음의 두 볼이 발그레 졌다. 그러고 보니 새터 이후로 정음이랑 제대로 해본 적이 없구나. 저번에 도서관에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한 것 빼곤.

"도훈이 형! 수업 가세요? 어? 정음이도 같이 있네?"

***

"도훈이 형! 수업 가세요? 어? 정음이도 같이 있네?"

강의동으로 향하던 중 도훈을 발견한 태영이 큰 소리로 인사했다. 태영은 곧 두 사람이 사이에 끼어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형형. 저 완전 대박. 어제 기모찌 양이랑 단둘이 차 마신 거 알아요?"

"기모찌양이 누구야?"

"아니 그 종교 미술의 이해 같은 조."

"와세다 교환학생 료코 말이야?"

"네네. 우연히 길다가 만났는데 잔뜩 무거운 걸 들고 가더라고요. 그래서 어디 가냐 물었더니 기숙사 가는 길이라며···."

태영은 료코와 친해진 이야기를 잔뜩 떠들었다.

정음은 잠자코 듣고 있던 중 물었다.

"근데 왜 료코가 기모찌양이야?"

"어?"

당황한 태영이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아, 그러니까 성이 기모찌라더라고. 기모찌 료코."

"오호.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사람 성씨였구나."

"으, 응. 그렇지."

도훈은 태영의 변명에 속으로 끌끌 혀를 찼다.

‘아주 야동 매니아라고 광고를 하지 그러냐? 일본 여자가 죄다 기모찌면, 러시아 여자는 무슨 다 아나스타샤야?’

그때 하필이면 같은 수업을 듣는 료코를 강의동 앞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정음은 막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는지 료쿄에게 방긋 인사했다.

"안녕! 기모찌!"

< 170. 낭만의 캠퍼스-39- > 끝

ⓒ 성난불기둥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