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낭만의 캠퍼스-38- >
그러나 좋은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학과사무실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뭐라고요? 오늘 저녁 여자 배구부 연습경기에 참여하라고요?"
-응. 도훈이 너 배구분과 아니니? 지도교수님이 분과 애들 전원 참석하라던데?
"같이 연습 갔던 남자배구팀도 있잖아요."
-남자배구팀은 하루 더 있다 올 거래. 그래서 나도 분과장한테만 전달하면 되는데 분과장도 계속 훈련 중이라 내가 대신 전화 돌리는 거야. 아침부터 다른 일로 바빠 죽겠는데.
"······."
-아무튼 오늘 5시 체육관이야. 늦으면 안 된다? 너네 지도교수님 늦는 거 엄청 싫어하시는 거 알지?
학과사무실 보조 한솔은 자기 할 말만 마치고 냉큼 전화를 끊어 버렸다.
요지는 전지훈련에서 먼저 돌아오는 여자 배구팀을 위해 학과에 남학생이 친선 경기를 뛰라는 것.
보통 더블 스쿼드에 맞춰 여자들끼리 자체 청백전을 통해 연습해 왔으나 다음 주 개막될 대학 2부 리그를 대비, 주전 구성으로 팀웍을 맞춰본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생긴 일정으로 계획했던 스케쥴이 꼬인 것도 꼬인 거지만, 도훈의 걱정은 그보다 배구를 해야 한다는 자체에 있었다.
‘젠장, 배구공 만져본 지가 어언 20년도 넘었다고!’
전생의 이정우는 고등학교 체육 실기에서 빵점을 맞은 이후 배구와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더구나 성적으로 이미 전교 1등이었기 때문에 예체능 실기 좀 못한다고 해서 큰 흠도 아니었다. 그랬던 그가 느닷없이 경기에 출전해야 한다니···.
기억하기론 도훈의 포지션은 레프트.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밖에 없는 공격수였다.
로시가 도훈의 심경을 알아채고 그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난번 스노우 보드 탈 때처럼 몸에 남아있는 운동 기억이 알아서 이끌어줄 것입니다.]
‘그래도 이건 경우가 다르지. 보드야 혼자 하는 운동이고 균형감각만 찾으면 되는 거잖아. 배구는 팀 스포츠라고! 남들하고 호흡도 맞춰야되고 공격 전술 같은 것도 알아야 될 거 아냐? 난 진짜 아무것도 몰라. 심지어 규칙도 모른다고!’
그는 학과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할지도 모르는 생각에 두려워졌다. 복학 후 이제껏 이미지 관리를 잘해 왔는데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흐음, 물론 그런 부분도 없잖아 있겠군요. 원주인의 몸에 남은 기억은 동작에 관련된 것이지, 게임 전술이나 규칙은 아니니까요.]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차라리 지금이라도 몸이 안 좋다고 빠질까?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는 말도 있잖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겠죠.]
‘어찌 됐건 쪽팔린 것보다야 낫지. 아니지 쪽팔린 게 문제가 아니라 괜히 성수 같은 애들한테 의심받을 수도 있어. 원주인이 군대 가기 전에 계속 배구를 했다고 했잖아. 그럼 분명 그 실력을 기억하고 있을 텐데 갑자기 못한다고 생각 해봐. 나라도 수상하겠다.’
[흐음, 일리 있는 의견입니다.]
‘그렇지? 지금이라도 다시 전화해야겠어. 설마 학과에 공격수 볼 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진 않을 거 아냐? 얼른 대타 새우라고 해야지.’
도훈이 다시 폰을 집어 드는데 로시가 만류했다.
[잠시만요.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뭐? 또 아이템 사서 약 빨라고? 포인트 아까워 인마.’
[아니요. 주인님께선 이미 배구 능력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도 말했지만 단순히 몸만 반응하는 정도론 게임 운영이···.’
[허어, 마유미 양을 벌써 잊으신 겁니까?]
‘마유미라고? 아차!’
도훈은 그제야 마유미와 관계하면서 그녀의 배구 능력을 흡수한 사실을 떠올렸다. 애초 그가 얻게 된 ‘재능모방자’ 스킬부터가 마유미를 공략하면서 얻게 된 보상이었다.
[이제 기억나셨나 보군요. ‘강한 여성, 왜곡된 성욕···.’ 위업을 달성하면서 제일 처음 얻게 된 능력이 바로 마유미 양의 배구 능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미는 우리 학교 여자 배구팀 간판 공격수고!’
[그렇죠! 비록 그녀가 가진 능력의 76%라고 하지만, 주인님이 가진 피지컬과 결합 된다면 훨씬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그걸 깜빡했었다니! 근데 능력은 어떻게 사용하지?’
[재능모방자 스킬로 획득된 운동능력은 평소에도 잠재된 상태입니다. 가령 육정음 양에게서 얻은 태권도 능력으로 주인님은 훨씬 강하고 빠른 발차기를 구사 하실 수 있죠.]
‘이렇게?’
휙-휙-
[···그렇다고 대로변에서 헛발질하시진 마시고요.]
‘음, 내가 좀 흥분했나 보군.’
‘아무튼, 보다 확실한 기능 사용을 위해선 스포츠 모드를 활성화 시키셔야 합니다. 스킬 창을 확인해 보십시오.’
도훈은 로시가 지시하는 대로 자신의 정보창을 띄워 재능모방자 스킬을 터치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상세 메뉴가 나왔다.
*재능 모방자(3Lv)
-상대의 운동 재능을 모방할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획득된 운동 재능
1. 배구
2. 태권도
3. 핸드볼
4. 보디빌딩
[배구를 클릭해 보십시오,]
도훈이 배구라고 써진 1번 메뉴를 터치하자 아래의 글귀가 떴다.
-배구 모드로 활성화 시키겠습니까?
Yes or No
[Yes를 선택하십시오.]
‘Yes.’
그 순간 시야가 하얗게 변하더니 약간의 어지러움증이 동반되었다. 길을 걷던 도훈은 잠시 비틀거리다 겨우 균형을 잡았다.
‘으윽, 뭐야 이건.’
[배구 모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주인님께선 이제 마유미 양이 습득한 배구 기술과 전략, 경기 운영방법이나 규칙까지 모두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게 말이 돼? 없던 능력이 이렇게 느닷없이···.’
로시에게 핀잔을 주던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그의 머릿속에 배구에 대한 제반 지식들이 실제 경험한 것처럼 떠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는 유미가 겪었던 수많은 훈련과 실전 경기경험이었다.
‘이럴 수가!’
[그만 놀라시고 질문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공격자가 세터의 바로 옆에서 아래에서 위로 올려주는 토스를 스파이크로 연결하는 공격을 뭐라고 합니까?]
질문을 의식하기도 전에 대답부터 튀어나왔다.
‘A퀵.’
[그럼 공격자가 세터의 뒤에서 세터의 백 토스를 스파이크로 연결하는 속공은요?]
‘C퀵. 속공할 땐 강타보다 공 꼬리가 길지 않게 각도로 짧게 때려야 돼. 헐, 시발. 내가 지금 이걸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는 거야?’
[말뿐이 아닙니다. 배구 모드가 활성화된 상태에선 실제 게임의 운영방법이나 심판의 눈을 속이는 교묘한 반칙, 사기를 유지하고 분위기를 이끄는 스킬까지도 모두 사용 가능합니다. 주인님의 의식엔 마유미 양의 배구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으니까
요.]
‘우아, 이거 우습게 봤는데 엄청 대박 스킬 이었잖아?’
[비록 현재는 3레벨이라 공여자가 가진 능력의 76%까지 획득할 수 없지만, 만랩에 이르신다면 완벽한 능력의 복제도 가능합니다.]
‘그럼 프로 골퍼를 먹으면 프로 골퍼가 되고, 테니스 선수랑 하면 윔블던 출전도 가능하다는 소리네?’
[물론이죠.]
‘이, 이건 완전 사기잖아?’
[스킬이란 일종의 초능력. 주인님의 의지에 따라 무궁무진한 활용법이 있습니다.]
‘크아! 이런 능력을 가지고도 고작 선생밖에 할 수 없다는 건 너무 억울한 거 아니냐?’
[왜요? 갑자기 운동선수가 되고 싶으십니까?]
‘말이라고! 공무원 박봉인 거 몰라? 요즘 스포츠 스타들이 얼마나 잘나가는데?’
도훈은 최근 백억 대 FA를 계약한 모 선수를 떠올렸다. 짧은 전성기를 누리고 CF로만 년 간 수십억을 벌어들이는 선수도 있었다. 그에 반해 교사는···.
[어쨌든 교사가 되는 것은 원주인의 마지막 소망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뤄주지 않는다면 주인님은 남의 인생을 도둑질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거죠. 신께서도 이를 용서치 않으실 겁니다.]
‘음, 무슨 말인 줄 아니까 너무 겁주지는 마. 그냥 해본 소리니까. 근데 교사와 병행할 수 있는 직업은 없으려나? 저작권이나 특허 내는 것은 상관없잖아.’
[물론 법적으론 하자가 없죠.]
‘혹시 그럼 그런 스킬은 없어? 유명 여작가과 하룻밤 자고 글 쓰는 능력을 훔친다거나, 유명 씽어송 라이터랑 섹스하면 악상이 마구 떠오르는···.’
로시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재능모방자 류 스킬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물론 있습니다.]
‘있다고?’
[네. 그것도 종류별로요. 작곡, 작사, 연기, 발명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모방류 스킬이 존재합니다.]
‘그럼 그걸 얻을 수 있는 위업은 뭔데?’
[불행히도 위에 언급한 것 중 위업으로 얻을 수 있는 분야는 운동 적성이 유일합니다. 나머진 레벨업을 통해 랜덤하게 획득할 수 있는 스킬이고요.]
‘이런, 안타깝고만.’
[그렇다고 축 처질 필욘 없습니다. 랭커까지 오르시다 보면 분명 한 번쯤 기회가 찾아올 테니까요.]
‘그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루라도 빨리 위업을 달성하는 거겠지. 남은 위업 중에서 가장 빨리 이룰 수 있는 게 뭐가 있었지?’
[진행 중인 위업 중 가장 도달도가 높은 것은 어젯밤 시도하셨던 ‘저기요, 지스팟 좀 켜주세요.’입니다. 현재 최고 기록이 450ml니까 조금만 분발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오케이. 그건 목요일 방송 찍으면서 도전하기로 하고. 또?’
[‘밀당의 달인’ 역시 가시권에 있습니다.]
‘호감도 100 찍는 위업 말이지?’
[네. 일전에 편의점 점주였던 허영자로부터 최초 1회를 달성하셨으니 관리 중인 여성 중 한 분만 더 성공하시면 위업이 달성됩니다.]
‘호감도 100 달성이라···. 수많은 여자 중에서도 그걸 이루고 싶은 사람이 딱 하나 있지.’
[육정음 양 말씀이군요.]
‘그래. 이것으로 정음이에게 좀 더 공들일 이유가 생겼군.’
그런 생각을 하는 중 마침 도훈이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정음을 만나기로 한 학떨목 나무 아래였다.
***
사범대생들의 만남의 광장이라 불리는 학떨목엔 수업이 끝난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정음이는 아직인가?
나는 주변을 힐끔거리다 벤치에 자릴 잡았다.
스포츠 모드를 계속 활성화 시키면 평소보다 체력이 빨리 단다는 로시의 경고에 배구 모드를 해제하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도훈 선배?"
"선배 여기서 뭐 하세요?"
항상 쌍둥이 자매처럼 붙어 다니는 연두와 나연이었다.
연두는 하늘거리는 흰색 원피스로 봄 처녀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고, 나연은 무용과 출신답게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스키니진에 위에는 프릴이 너풀거리는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둘 다 눈 돌아가게 이쁘구나.
"잠시 누굴 좀 기다리는 중이야."
"누구요?"
"누군데요?"
두 사람은 각본이라도 짠 것처럼 호흡이 척척 맞았다. 벤치 한가운데 앉은 나를 향해 포위하듯 좌우로 둘러앉는 후배들. 어어 너무 붙는데?
"아···. 그게."
"혹시 여자?"
"오빠 여자 친구 있으셨어요?"
무슨 말을 꺼낼 수 없게 몰아붙이는 후배들로 정신이 산만해졌다. 육상실기 때 이지환을 꺾은 이후 두 사람은 노골적으로 나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는 것 같다.
"여자는 맞는데 여자 친군 아니고···."
"그럼 썸?"
"누군데 감히 우리 도훈 오빠를 채가려고!"
뭐야, 이것들?
나랑 친하면 얼마나 친하다고 압류 딱지 붙인 채권자 행세람? 속으로 어이없어하는데 같은 분과에 속한 연두가 물었다.
"참, 오빠 오늘 배구 시합 있으시다면서요?"
"어? 너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학과사무실 갔다가 들었어요. 저도 같은 분과잖아요. 핸드볼 종목이긴 하지만."
"저희 구경 가도 돼요? 저녁에 딱히 할 일도 없는데···."
허락을 구하는 듯싶지만, 숫제 통보에 가깝다.
[인기 많으시군요, 주인님.]
‘이런 인기는 사양이야. 이건 뭐 사생팬도 아니고···. 근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치근덕대지?’
[싫으면 싫다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희주 양에겐 잘만 하시더니.]
‘희주가 얘네랑 같냐? 걔는 얼굴이 빻았잖아.’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아니 그걸 떠나서···. 희주는 진즉 공략이 끝났고, 얘들은 아직이잖아. 그 의자왕 뭐시긴가 업적 달성하려면 팔선녀를 모두 눕혀야 한다며?’
[···비겁한 변명 같지만 믿어 드리죠.]
"다른 선배들이 그러는데 배구 엄청 잘하신다던데요?"
"누가 그런 소릴 해?"
"저희 분과 배구 하는 선배들이요. 선배가 중간에 군대 안 가고 계속했으면 지금쯤 우리 학교 남자대표로 뽑혔을 거라며···."
"아니야. 애들이 추억보정이 심하네. 게다가 군대에서 연습 전혀 못 해서 지금 하면 완전 구멍일 거야."
"에이, 그래도 오빠 운동신경을 저희가 아는데···."
"맞아요. 달리기도 빠르시잖아요. 그땐 진짜 바람이 쌩하고 지나가는 줄 알았다니까요?"
"맞아. 그날 이후 오빠 팬 된 사람 엄청 많은 걸요?"
"그건 나연이 네 얘기 아니니?"
"뭐래? 연두 너 말하는 건데?"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
"어쭈? 동기 톡방에서 네가 한 얘기 싹 다 읊어 드려?"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왜 하필 나를 사이에 두고 말다툼이람?
"오빠, 여기 계셨네요."
하필 그 때 정음이 당도했다.
모처럼 얼굴에 화장까지 한 채로.
나는 순식간에 미소녀 트라이앵글에 둘러싸여 버렸다.
< 169. 낭만의 캠퍼스-38-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