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80화 (160/2,000)

< 162. 낭만의 캠퍼스-31- >

"무, 무슨 그런 질문을 하고 그러니?"

실수다. 곧장 화부터 냈어야 했다.

도훈과는 이런 대화를 나눌 만큼 막역한 사이가 아니다.

하지만 미나는 당황한 나머지 화낼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왜요? 물어볼 수도 있지?"

낯짝 두꺼운 그의 반응에 미나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인제 와 정색하자니 자기만 옹졸해 보일 것 같았다.

‘전혀 안 그런 것 같더니 얘가 많이 취했었나?’

"그런 건 더 친해지고 나면···."

말로 타이르기로 했다.

술김에 말실수야 누구나 하는 법.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자기가 참아야지 어쩌겠나?

하지만 도훈은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누님이 참 모르시네."

"뭘?"

"오히려 덜 친하니까 물어볼 수도 있는 거죠."

"그게 무슨 뜻이야?"

도훈이 유난히 긴 혓바닥을 놀렸다.

"원래 남녀 사이라는 게 그래요. 너무 친하면 친한 데로 서로 조심하게 되고 너무 멀면 멀다고 거리감이 생기고. 오히려 애매한 사이니까 이런 말도 편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서로 부담 없으니."

궤변이다.

하지만 묘하게 설득력 있다.

본래 사람이란 가까운 가족끼리도 몰랐으면 하는 사실이 있기 마련. 때론 남자친구나 애인에게도 못할 말이 있고, 오랜 친구끼리도 비밀 한두 개쯤 숨기고 산다.

반면 정신과 의사나, 고해성사하는 신부에겐 거리낌 없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곤 한다. 익명의 채팅방에서 감춰왔던 고민을 토로하며,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쏟아낼 때가 있다.

가까워질수록 도리어 감추게 되는 진실들.

도훈은 지금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솔직히 언제 누나랑 이런 얘기 해보겠어요. 취한 김에 물어보는 거지."

취한 김에.

미나는 유독 그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어떤 진상을 피워도 용서가 될 것 같은 단어.

그것은 마법처럼 미나의 마음을 홀가분하게 했다.

그래 뭐 어떤가?

취한 김에 19금 토크 한 번 날려보는 것도. 다시 마주칠 때 뻘쭘이야 하겠지만, 그런 주제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기민한 도훈의 감각이 미나의 변화를 눈치챘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향해 좀 더 우회적인 질문으로 노선을 틀어 본다.

"누나 혹시 파올로 코엘료라고 알아요?"

"어, 들어 봤는데?"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

"맞다. 연금술사! 그 작가 맞지?"

"아시는구나."

"뜬금없이 그 소설가는 왜?"

정답을 맞힌 미나가 의기양양 물었다.

"그 사람 작품 중에 11분이라는 소설도 있어요."

"11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남녀의 평균 관계 시간."

"헉! 정말?"

"네. 코엘료에 대표작인 연금술사만 본 사람들은 그가 동화 같은 이야기만 쓰는 작간 줄 알더라고요. 하지만 11분을 보면 성인소설도 기가 막히게 잘 쓰죠."

"진짜로 몰랐어. 너 책 많이 읽나 보구나?"

"그냥 심심할 때? 아무튼 지금 그 얘길 하려는 게 아니고, 11분 정도론 여자들이 느끼기 힘든 시간이거든요."

"···그래?"

도훈은 자연스럽게 다시 19금 주제로 돌아왔다.

"성 관련 책에 보면 흥분 곡선이라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남녀가 각각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시기를 그래프로 표현한 건데, 남자는 정말 한순간에 팍 치솟았다가 훅 떨어져요."

도훈은 허공에 손가락을 휘둘러 그래프의 기울기를 표현하는 세심함 보였다. 적절한 제스쳐와 흥미로운 주제에 미나는 자기도 모르게 도훈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근데 여자는 또 달라요. 이렇게 낮은 경사 서서히 오르다가."

도훈은 이번엔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의 그래프를 그렸다.

"어느 순간 고점에 오르고 나면 쭉!"

머리 위로 치솟은 도훈의 손가락이 계속 평행선을 달렸다.

"오랫동안 지속되죠."

"아···."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남자는 절정에 빨리 도달했다가 훅 떨어지지만, 여자들은 오르긴 힘들어도 오르가즘에 한 번 도달하면 오래 간다는 뜻이에요. 실제로 11분이란 소설에서도 그런 설명이 나오고요."

"우아, 너 진짜로 아는 거 많네?"

미나는 진심으로 도훈에게 감탄했다.

자기도 알만한 유명 외국 작가의 작품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희한하게도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 버렸지만, 그의 박식함에 놀라 따질 겨를이 없었다.

"아무튼,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실제로도 여자가 끝까지 느끼는 경우는 드물거든요. 11분으론 어림없죠."

미나는 도훈의 말에 동의했다.

‘어휴, 난 11분이라도 감지덕진 걸. 다들 5분도 못 버티니.’

미나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훈이 계속 말했다.

"적어도 20분 이상은 해줘야 하지 않나···."

"헐! 그게 돼?"

"안될 건 또 뭐에요?"

"아, 아니 그냥 좀···."

"보통 20분 정돈 끄떡없지 않나?"

"정말?"

"누나가 만났던 사람들이 우연히 다 조루가 아닌 이상에야."

‘흑, 진짜로 다 조루였을까? 분명 다른 여자 사귈 땐 훨씬 길게 했다 했는데···.’

미나의 속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도훈이 덧붙였다.

"물론 여자에 따라 다를 수도 있긴 하죠."

"뭐가?"

"그게···. 좀 강한 여자들도 있거든요."

"강하다니?"

"그니까 남자들이 못 버틸 정도로 꽉 조여버리는?"

"윽. 너무 야해, 너!"

미나의 얼굴이 새빨게 졌다.

하지만 흥미가 동했는지 다시 새초롬하게 물었다.

"그게 사람마다 다른 거였어?"

도훈은 조용히 미나의 귓바퀴를 응시했다. 잠시 후 그녀의 귓바퀴 옆으로 95%라는 수치가 떠올랐다.

‘아무렴. 특히 95% 질수축도는 거의 잦이 분쇄기 수준이거든.’

"그렇죠. 누나도 운동생리학 배웠으니 잘 아시겠지만, 여자 거기도 근육으로 이루어졌잖아요."

"그, 그렇지."

"훈련을 통해 개발할 수도 있다지만 아무래도 타고난 사람들은 못 이기죠."

"으응···."

‘바로 너처럼. 송미나.’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도훈의 시선에 미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왜 저렇게 뚫어져라 쳐다본담? 사람 민망하게 서리···.’

"누나."

"어머나!"

잔뜩 긴장해 있던 미나는 도훈의 부름에 화들짝 놀랐다.

"뭘 그렇게 놀래요? 편의점 다 왔다구요."

"아, 그, 그래."

정신없이 얘기하는 사이 어느덧 편의점에 도착한 두 사람은 컨디션을 잔뜩 사 다시 술집으로 향했다. 올 때와 달라진 점은 미나가 훨씬 적극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이었다.

"근데 너 뭐 따로 공부했니?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뭘요?"

"아니 음. 그니까 그런 지식 말이야."

"제가 보기보다 책을 좋아하거든요, 믿기 어렵겠지만."

‘이정우 시절 많이 읽어 놓은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군.’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물리적 한계를 극복할 순 없다. 책은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취미고, 따라서 보통은 나이에 비례한 독서력을 갖게 된다.

이도훈의 나이는 고작 스물셋.

그러나 그의 몸속엔 마흔두살 먹은 잡학사전이 들어가 있었다. 경험의 총량에서 보통의 20대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는 이도훈의 유일한 약점인 낮은 지능을 커버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을 뽐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확실히 선생님 될 사람이라 다르구나."

‘꼭 그렇진 않아. 사범대생이라고 모두 책을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도훈은 굳이 그 말까지 덧붙이진 않았다.

"근데 누나 아직 제 질문 대답 안 했는데···."

"모야 진짜. 너 집요한 구석이 있네?"

"제가 좀 근성가이에요. 뭘 하든 끈질겨서."

도훈은 넌지시 자신의 정력을 피력했다.

"흥, 끈질겨서 좋겠다."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봐요. 느낀 적 있었어요?"

"몰라, 진짜. 없어! 됐니?"

"진짜요?"

"그래! 아, 증말 부끄럽게. 내가 별 얘길 다 하네."

미나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이미 야한 얘기를 잔뜩 했기 때문인지, 그녀도 점점 자신을 내려놓았다.

"남자친구들이 다 조루였나 보지."

"그럴 리가요? 조루는 병이에요, 병. 누나 아저씨들만 만난 거 아니잖아요."

"아저씨라니? 무슨 소리야? 다 20대였거든?"

"근데 조루일 수가 있어요? 완전 한창 땐데?"

"그걸 왜 나한테 묻니? 걔들한테 물어 보든지."

"어쩌면, 음."

도훈이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한 마음에 미나가 침을 꼴깍 삼켰다.

"제 추측인데 남자들이 누날 못 버티는 걸지도."

"정말?"

"아무리 운이 없어도 토끼만 만날 리가 있나요. 외부에서 원인을 못 찾으면 내부에 있는 거죠."

"그럼 내가 문제라는 거야?"

"문제는 아니고."

도훈이 미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임자를 못 만난 거죠."

"음···."

"여자 중에서도 쎈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남자 중에서도 유독 강한 사람도 있어요."

"그래? 누구?"

"바로 나 같은 사람?"

도훈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미나는 갑자기 후끈 달아오르는 열기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까부터 유난히 크다느니, 오래 간다느니, 임자라느니 자꾸 섹드립을 날리는 의도가 너무나 뻔했다.

‘뭐지? 설마 얘가 나 유혹하는 건가?’

솔직히 도훈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훈훈한 외모, 탄탄한 몸매.

게다가 얘기를 계속해 보니 언변도 유려하다.

어떤 여자라도 호감이 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관계가 급진전 될 것이라곤 예상 못 했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알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해지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술자리에도 불렀던 거고.

하지만 돌아가는 사태를 보니 이미 서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오픈하고 말았다.

‘하아. 어쩌다 여기까지 와버린 거지? 난 그저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땍! 못하는 소리가 없네! 누나 놀리면 못 써."

"놀리다뇨? 나 농담하는 거 아닌데?"

"농담이든 아니든! 그런 얘길 나한테 왜 하는데?"

‘···사람 궁금하게 시리.’

"그냥 안타까워서요."

"얼씨구. 운동이나 열심히 나오세요, 회원님."

"넵!"

도훈은 이쯤에서 한발 물러섰다.

너무 들이댔다간 튕겨 나갈지도 모른다.

일단 시동을 걸어뒀으니 슬슬 예열이 시작될 것이다.

지금부턴 무르익기를 기다리면 된다.

***

"뭔데 송 샘? 어디 갔다 오는데?"

"둘이 나갔다가 한참 만에 오네? 왠지 수상해."

"죄송해요. 시간도 늦었는데 편의점이 멀어 제가 같이 가자고 했어요. 요새 밤길 무섭잖아요."

"편의점은 왜?"

"짜자잔, 요거 한 잔씩 드시라고."

미나가 봉지에서 컨디션을 꺼냈다. 사람 수에 딱 맞춰 사왔는데, 인원이 인원이다 보니 상당한 지출이 예상되었다.

"아이고, 뭘 이런 것까지 챙겨?"

"회원님들 숙취는 제가 챙겨드려야죠. 내일 또 일 나가셔야 되잖아요."

"역시 송 샘이구만."

"내가 이래서 PT를 못 끊는다니까?"

"아깐 송 샘 의상 때문에 못 끊는다며?"

"아니, 이 사람이 그 얘길 여기서 왜 해?"

"정말이세요? 아이고 민망하니 이제부터 땀복 입고 다녀야 겠네."

"안 돼, 그러지 마!"

"나이 먹고 주책이네, 저 양반도."

술자리는 그 뒤로 1시간을 더 이어졌다.

새벽이 넘어가자 내일 출근하는 사람들이 자꾸 시각을 확인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모임을 주최한 회원이 말했다.

"그럼 이쯤에서 해산합시다. 내일 일도 있고 하니."

"송 쌤이 사다준 컨디션 덕에 거뜬 하겠는 걸?"

"계산은 일단 제 카드로 하고 밴드에 N분해서 계좌 쏠게요."

"네."

"맞다, 학생도 있었지? 누구더라?"

총무의 말에 나와 또 다른 남성 회원 하나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우리 학생들은 특별히 감면해 주는 거로. 어때요?"

"그래. 학생이 돈이 어딨어. 그리 합시다."

"우앗,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확실히 연령대가 높다 보니 돈 계산이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가게를 나온 사람들이 대리기사를 불러 하나둘 사라지자 마지막엔 택시 탈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미나샘 먼저 들어 가세요."

"아니에요. 전 집이 가까워서 괜찮아요. 회원님 먼저 가세요."

양보를 거듭한 끝에 모든 회원들이 떠나고 마지막엔 미나와 나만 남았다.

"도훈이도 얼른 들어가."

"그럴려구요."

미나의 표정에 어딘지 섭섭한 기색이 읽혔다.

이대로 보내긴 아쉬운 건 나만은 아니었나 보다.

"맞다. 누나. 저 부탁 있는데."

"뭐?"

"제가 락커에 중요한 물건을 두고 왔지 뭐에요."

"정말?"

"네. 혹시 지금 헬스장에 들를 수 있나 해서요."

미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자. 어차피 나한테 카드키 있으니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침내 긴 기다림의 끝이 보인다.

***

도보로 헬스장까지 되돌아온 미나가 빽에서 보안카드를 꺼내 출입문을 열었다. 그녀의 뒤를 도훈이 핸드폰 조명을 켠 채 뒤따랐다.

"근데 무슨 책인데 그래?"

"그냥 임용 교재요."

"임용 고사 교재? 벌써 그걸 본다고?"

"일찍부터 준비해야죠. 요새 시험 어렵잖아요."

"대단하다, 정말."

도훈은 락커룸에서 책을 꺼내는 척 등에 멘 가방에서 책을 꺼내 손에 들었다.

"찾았어요."

"응. 그럼, 나가자."

‘나가긴 어딜? 지금부터 여기가 모텔인데.’

"아, 맞다. 누나."

"왜?"

"혹시 저 여기서 씻고 가도 돼요?"

"어? 아까 안 씻었니? 늦었는데 집에 가서 씻지."

"아까 급하게 회식 간다고···. 집에 보일러 고장 났거든요. 따뜻한 물로 씻고 싶어요."

"아이참, 곤란한데···."

미나는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새벽 늦은 시각.

남자와 단둘이 헬스장에 있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샤워를 하고 가겠단다. 그녀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도훈이 통사정을 했다.

"누나. 저 집에서 씻으면 진짜 얼어 죽어요. 원룸 아저씨가 일주일 째 보일러 수리를 안 해줘서 씻을 때마다 감기 걸릴 것 같더라고요."

"휴-. 알았어. 얼른 씻어. 여기서 기다릴게."

"넵!"

도훈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감하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 162. 낭만의 캠퍼스-31-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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