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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78화 (158/2,000)

< 160. 낭만의 캠퍼스-29- >

***

늦은 시각.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심야 식당에 십여명의 성인 남녀가 도란도란 모여있었다. 물컵 하나 놓을 곳 없이 밑반찬으로 빽빽한 테이블에선 시뻘건 숯불 화로가 열기를 내뿜는다.

석쇠 그릴 위로 노릇노릇 익어가는 갈비를 뒤집으며 도훈이 말했다.

"다 익은 건 왼쪽에 빼놓았어요. 이쪽부터 드세요."

도훈은 다 익은 고기를 한쪽으로 치운 뒤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집게로 들어 알맞은 크기로 잘랐다. 능숙한 가위 질 솜씨에 옆 좌석에 앉은 40대 아주머니가 말했다.

"젊은 총각 야무진 것 좀 봐. 몇 시부라고?"

맞은 편에 앉은 송미나가 대신 대답했다.

"아직 시작은 안 했어요. 내일부터 7시 부로 들어올 거구요."

"그래? 아무튼, 총각 고기 잘 굽는 거 보니까 나중에 마누라한테 사랑받겠네. 호호."

아주머니의 덕담에 도훈이 억지 미소로 화답했다.

"···그러면 좋겠네요."

그러나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외식 때마다 마누라한테 고기 구워주다 보면 누구라도 이렇게 될걸? 그렇다고 딱히 사랑받았던 기억은 없는 것 같지만···.’

전생의 마누라는 요리 솜씨가 형편없었다.

값비싼 소고기를 풍선껌 같은 질긴 식감으로 먹고 싶다거나, 양념 밴 돼지 갈비가 새까만 숯덩이로 변하는 마법을 보고 싶지 않다면 언제나 가위와 집게는 도훈의 차지.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고기를 구워다 준 마누라는 결국 내연남과 바람을 피웠다.

어쩌면 자신을 부려먹기 편한 노예쯤으로 생각했던 걸지도.

"너무 고기만 굽지 말고 좀 드시면서 하세요."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 살짝 짜증이 나던 차, 송미나가 그의 손에 든 집게를 빼앗아갔다.

"이제부터 제가 구울게요."

"안 그래도 괜찮아요."

"줘요. 계속 굽느라 한 점도 제대로 못 드셨으면서."

송미나의 행동엔 어떤 가식도 없었다.

여자라고 주는 고기를 얌채처럼 받아 먹기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송미나는 본래부터 그런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도훈은 그녀의 사려 깊은 행동에 더욱 매력을 느꼈다.

'미나 트레이너는 몸매만 착한게 아니라 마음씨도 착한 사람이군.'

상추쌈을 안주로 빈 소주병 하나 둘 쌓여갔다.

늘어나는 공병 수만큼 어색하던 회원들의 목소리도 데시벨이 올랐다.

웃고 떠들며, 시시콜콜한 잡담이 배경음악처럼 어우러진다.

늦은밤 술자리. 적당히 불콰해진 얼굴들. 회식 자리는 생각이상으로 흥겨웠다.

"총각은 그럼 대학생이야?"

"네. 국성대 다녀요."

"국성대? 공부 잘했나 보다."

도훈이 민망함에 웃기만 했다.

겸손이 아니라 실제 이정우 시절엔 그런 대학이 있는줄도 몰랐다. 하지만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이라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국성대를 괜찮은 학교라고 평했다.

"미나씨는 남자친구 없어?"

이번엔 중년 남성의 질문.

도훈이 유심히 얼굴을 살피니 아까 전 그녀와 짐볼을 주고 받던 PT회원이다.

"네, 지금은요."

"그럼 내가 우리 회사 직원하나 소개시켜 줄까? 성격도 성실하고 집안도 괜찮던데."

나이가 들면 어째 저리 오지랖이 넒어 지는지 모를 일이다. 미혼 남녀가 혼자 지내면 무슨 큰일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항상 다리를 놔주려고 한다.

"말씀은 고맙지만, 아직은 생각 없어요."

미나의 말은 진심이었다.

전 남자친구와의 추억을 비우지 못한 지금, 다른 남자를 만날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는데 지난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큼 민폐는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가 되었다는 해방감은 그녀를 좀 더 과감하게 만들었다. 도훈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한 취한 것이 그 근거였다.

며칠간 헬스장에 도훈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미나는 문득 그의 안부가 궁금해 졌다. 마침 PT에 자리가 나 그 핑계삼아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회식자리까지 끌어들였다.

어째서 인지 모르지만, 도훈과는 왠지 잘 통하는 기분이었다. 그와 대화하는 게 즐거웠고, 그의 행동은 자신의 마음에 쏙 들었다.

'참, 신기한 사람이야. 독심술을 쓰는 것도 아닌데 어쩜 그리 마음에 드는 말만 골라서 하는지.'

그것이 정보창 스킬의 추천 멘트로 인한 것임을 모르는 미나는, 도훈에게 느끼는 호감을 천성적으로 궁합이 잘맞는 사람이겠거니 착각했다.

왜 그런 사람 있잖는가?

처음 봤는데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익숙하고 편한.

그녀에게 도훈은 단순한 고객관리의 차원을 넘어 개인적으로 궁금해 지는 사람이었다.

"참, 도훈씨 이번 주 개강했다면서요? 학교 생활은 할만해요?"

"차츰 적응하는 중이에요."

"복학하니 정신없죠? 저 대학 다닐때 예비역 오빠들 보면, 전역한지 한 학기까진 군인티를 못 벗더라구요."

도훈이 적절하게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요새도 아침 6시만 되면 눈이 자동으로 떠진다니까요?"

"그럼 혹시 군대 다시 끌려가는 꿈도 꿔요? 남자들은 다들 그런다던데?"

"이야, 설마 군필자는 아니죠? 어쩜 그렇게 잘 아세요?"

"히히. 들은게 많잖아요."

미나는 도훈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냈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쫙 붙은 청바지 위에 회색 후드 집업을 루즈하게 받쳐 입었는데, 짧아진 머리와 무척 잘 어울렸다. 특유의 밝은 피부톤 덕에 얼핏 봐선 직장인이 아닌 대학교 2학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헬스장에 있을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인데.'

펑퍼즘한 옷 차림이 풍만한 가슴을 가리자, 본연의 귀여운 얼굴이 더욱 부각되었다.

취기가 오른 두 볼은 볼터치를 한 것 마냥 발그레해져 깜찍함을 더했다.

'성숙한 아가씨라고만 생각했는데 귀여운 면이 있구나.'

도훈은 고개를 돌려 인접한 회원들을 살폈다.

다들 술이 됐는지 각자의 대화에 집중한 상황. 같은 테이블에 있던 아줌마는 걸려온 전활 받고 밖으로 나갔고, 아저씨는 화장실에 틀어 박혀 나올 줄을 몰랐다.

둘 만의 시간을 확보한 도훈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로시. 정보창 쿨타임 얼마 남았지?'

[스킬 재활성화까지 15분 전입니다.]

'좋아. 되는대로 알려주도록.'

[넵.]

"미나샘은 이렇게 잘 드시는데 몸매 관리는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저요?"

"네. 계속 보니 안주빨 엄청 세우시던데?"

"호호. 들켰네요. 제가 실은 술이 약해서 소주 한잔에 고기 석점이 기본이에요."

"근데도 살이 안 쪄요?"

"어떻게 안 쪄요? 저도 안 보이는데는 다 찌죠."

"흠, 전혀 안 그래 보이던데?"

"어머, 도훈씨 그렇게 안 봤는데 몰래 나 훔쳐봤구나?"

미나가 장난스레 농을 건넸다.

"일부러 훔쳐본 건 아니고 복장이 좀···."

"흠, 그건 어쩔수 없다구요."

"왜요? 트레이너는 원래 다 그렇게 입어요?"

"아무래도 여성 회원님들은 절 보고 자극 받으니까요. 제가 과감하게 입은 걸 보여줘야, 자기들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거든요. 왜 여자들 다이어트 할 때 보면 핸드폰에 몸매 좋은 연예인 사진 배경화면 해 놓거나, 냉장고 문에 비키니 사진 붙이는 것 본적 있죠? 그거랑 비슷한 맥락이에요."

"오호.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저도 사실 민망하긴 해요. 남자 회원님들은 또 다른 의미로 자극을 받으시니까···."

'어라? 이건 살짝 19금아닌가?'

도훈은 미나의 말에 내포된 의미를 짐작하고 일부러 모르는 척 되물었다.

"무슨 자극요?"

"음, 지금 알면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죠?"

"네."

다소 민망할 수도 있는 주제였지만, 도훈의 뻔뻔한 반응이 오히려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미나가 푸념하듯 말을 이었다.

"왜 그런거 있잖아요. 노골적으로 특정부위를 쳐다본다든지···."

"가령 예를 들어서?"

"에잇, 도훈씨 진짜 짖궂은 데가 있네요? 꼭 말로 해야 알아 들어요?"

"네."

"뭐예요 자꾸. 아무튼 그 정돈 애교구, 일부러 터치하는 사람까지 있다니까요."

"터치요?"

미나는 슬쩍 주변 테이블의 회원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주로 아저씨들요. 자세 봐달라면서 엉덩이에 손을 대지 않나, 실수하는 척 은근슬쩍 가슴에 팔 부딪히고."

"진짜로요?"

"말도 마요. 회원이라 참고 넘어가지만 솔직히 정도가 심한 사람도 많아요."

"에휴. 그런 고충이 있었군요."

"어쩔 수 없죠. 직업병이랄까나."

"우울해 말고 한 잔해요. 자."

도훈이 외로하며 술 잔을 부딪혀 왔다. 도훈이 보란듯이 한입에 털어넣자, 미나도 단숨에 원샷했다.

"끄으, 쓰다."

인상을 찌푸리는 미나의 모습에 도훈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꿀떡꿀떡 잘도 마시네. 술 못 한다더니···.'

술자리에서 여자들이 일부러 취할 때가 있다.

주로 관심있는 남자 앞에서다.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을 보임으로써, 상대의 반응을 이끌어 내려는 의도.

미나의 의중을 눈치 챈 도훈은 곧바로 빈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혹시 반대 경우는 없어요?"

"반대요?"

"그러니까 남자 트레이너 한테 여자들이 끼를 부린다거나."

"아! 그것도 없진 않죠."

도훈은 아까 전 상일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전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요?"

"네. 주로 아줌마 회원들이 그러는데···."

미나는 언어적 성희롱을 포함, 은근한 스킨십, 대놓고 유혹하기 등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중에서도 대놓고 유혹하기 부분은 무척 자극적인 소재였으므로 다른 회원들이 있는 술자리에선 미나가 말을 아꼈다.

'이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마침 전화 통화를 마친 아줌마가 자리로 돌아오는 상황이었으므로 도훈은 슬쩍 눈치를 주며 미나를 밖으로 이끌었다.

"저 잠시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올게요."

"저도 편의점 들러서 컨디션 한 병 사올래요. 같이 가요."

둘은 가게 밖으로 나와 인접한 골목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회원들의 시야에 벗어나자 마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휴, 술만 마시면 왜케 땡기는지."

아까부터 계속 참아왔는지 담배를 빠는 모양새가 무척 급해 보였다. 도훈은 그녀의 입에 물린 게 담배가 아니라 자신의 대물이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며 물었다.

"아까 그 얘기 자세히 좀 해줘봐요."

"뭐요?"

"바람난 아주머니 얘기요."

"아,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한데···. 나중에 상일샘한테 여쭤봐요. 저도 전해 들은 얘기라서."

"사람 궁금하게 해놓고 이러기에요? 저도 나중에 거기서 알바할 수도 있으니 미리 알아두면 조심하고 좋잖아요."

도훈의 적극적인 태도에 미나가 끝내 입을 열었다.

평소라면 엄두도 못내겠지만, 살짝 오른 취기가 용기를 더했다.

"어디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절대 말하면 안돼요? 저희 헬스장 위신도 걸려있으니까."

"네."

"음, 그러니까 작년에 근무하던 남자 트레이너 이야긴데···."

그녀는 상일에게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했다.

평소 야시시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미시 회원이 한 분 있었는데,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무척 불륨있는 몸매를 자랑했다고 한다. 남편이 사업을 하느라 돈을 잘 벌어 차도 외제차를 끌고 다녔다나?

"요샌 미시라도 몸관리만 잘하면 처녀 못지 않거든요."

"그렇죠. 티비 나오는 몸짱 아줌마만 봐도 뭐."

"아무튼 그 회원이 유독 남자 트레이너 분을 좋아했데요. 되게 노골적이었다던데."

"어떻게 노골적이요?"

"그니까 막 가슴 파인 옷을 입고 와서 일부러 앞에서 허리를 숙인다던가."

"헐."

"아니면 타이즈를 입고왔는데 팬티선이 하나도 안잡혀있는 식이죠."

"그럼 노팬티란 소린가요?"

"그렇죠."

"세상에!"

"아무튼 그런식으로 계속 유혹을 해대니까 트레이너도 마음이 동했나 보더라구요. 옆구리 팍팍 찔러대는데 당해낼 남자가 있겠어요?"

그날은 그 트레이너가 오픈을 하는 날이었다.

5시 반 쯤 문을 열고 기구를 정비하는데 아주머니가 새벽 일찍부터 헬스장을 왔더라는 거다. 평소 회원들 이용시간은 오전 6시부터. 남들보다 30분을 먼저 온 아주머니는 다짜고짜 남자 트레이너의 바지를 벗기더니···.

"그렇게 막 헬스장에서 했다더라고요. 나중엔 샤워실에 들어가서 또 하고."

미나는 자기가 말하고도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혔다.

도훈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꼬리가 길면 밟힌다잖아요. 하도 새벽 일찍부터 헬스장을 쏘다니니까 남편이 수상했던지 어느날엔 미행을 했데요."

"헉."

"그러다 둘이 있는 현장을 덮친거죠."

"하고 있을때요?"

"···네. 벤치 프레스 위에서 막."

술기운에 말하긴 했지만 미나는 자기가 말하고도 장면이 상상되는지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다 이런 얘기까지 하게 되었을까? 여자 입으로 말하기엔 음담패설의 농도가 너무 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쏟아낸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엄청 나네요 진짜."

"음, 아무튼 그 뒤로 그분은 트레이너 관뒀어요. 그 여성 회원분도 이혼하니 마니 한다던데 어떻데 됐는지는 모르겠구요."

"완전 극한 직업이네요. 이일도."

"항상 조심해야 돼요. 아무래도 몸쓰는 직업이다 보니 주변의 유혹도 많고 또 다들 젊어서 혈기왕성하니까."

"미나 샘도 그럼 혈기왕성 해요?"

"···네?"

미나가 커다란 눈을 껌뻑였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도훈의 질문에 당황한 것이다.

"농담이에요 농담. 하하. 왜 그렇게 놀래요?"

"아이참, 무슨 그런 농담을 하고 그래요."

미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도훈을 나무랬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지? 날 한 번 떠보는 건가?'

문득 그의 단단한 몸이 야하게 느껴진다. 헬스장 기구 위에서 그에게 덮쳐지는 상상에 자기도 모르게 몸이 달았다.

< 160. 낭만의 캠퍼스-29-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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