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낭만의 캠퍼스-28- >
헬스장 입구에 들어서자 남자 트레이너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왜 이렇게 안나오셨어요?"
"아, 개강 준비하느라 좀 바빴어요."
"운동 꾸준히 나오세요. 삼 일만 쉬어도 근육 쭉쭉 빠집니다."
"네. 이제부터 꼬박꼬박 나오려고요."
락커룸에서 실내화를 꺼내 갈아신고 미나를 찾았다. 그녀는 헬스장에 내 별도로 분리된 트레이닝 룸에서 그룹 를 하는 중이었다.
누운 상태로 커다란 짐볼을 주고받는 운동은 2인 1조로 진행되고 있었다. 미나와 짝을 이룬 중년의 남성은 노골적일 정도로 미나의 탱크탑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노려보면 젖가슴이 튀어나오기라도 하는 걸까?
‘아재요, 자제 좀.’
하긴 이건 아저씨 탓만 할 순 없을 것이다.
배가 훤히 보이는 주황색 탱크탑에, 하체의 굴곡이 여과 없이 드러낸 검은 타이즈를 입은 미나는 누가 뭐래도 최강의 씬스틸러. 저런 복장으로 돌아다니면 달관한 스님이라도 눈이 뒤집혀 쌍수를 들고 말겠지.
이른바, 부처 헨썹!
통유리 너머로 훔쳐보는데 미나가 나를 발견했는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회원님 오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본 그녀는 헤어스타일이 확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긴 생머리를 이마가 훤히 드러나게 머리끈으로 묶고 있었는데, 지금은 귀밑 3Cm까지 짧게 깎은 숏컷. 밝은 갈색으로 염색까지 해 얼굴이 훨씬 화사해 보인다.
"머리 자르셨네요?"
"네. 시원해 보이죠?"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밑에서 짐볼을 받던 중년의 남성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미나씨, 나 짐볼 안 줄 거야?"
"아, 넵. 다시 10회 실시합니다."
숫제 나 들으라 하는 소리같다. 눈총을 받은 나는 미나가 곤란하지 않도록 다른 기구를 찾아 나섰다.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군요.]
‘그래 보이지?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걸까?’
속설이긴 하지만 머리를 확 자른 게 왠지 그녀의 애정선전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게 했다.
‘나중에 정보창으로 확인해 보면 되겠지. 일단 나도 운동 좀 하고.’
이정우로 살 적엔 잘 몰랐다.
여자들이 근육질의 몸을 생각 이상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남자가 여자의 얼굴이나 몸매를 밝히는 것처럼, 여자들도 남자의 몸을 은근 따진다. 특히 요즘처럼 외모지상주의를 노골적으로 숭배하는 시대엔 남자도 꾸준히 외모를 관리해줘야 한다.
나는 한동안 방치했던 근육 세포를 일깨우기 위해 벤치프레스 위에 누웠다.
만든 건 내가 아니지만, 유지보수는 내 몫이다.
"흐읍!"
바벨을 가슴 위로 빠르게 들었다가 천천히 내려놓길 수차례. 슬슬 대흉근에 부하가 걸리며 뻐근함과 함께 짜릿한 감각이 밀려왔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분명 몸은 힘든데 이 묵직한 감각이 나쁘지 않은 걸 보면.’
[그건 원주인의 몸에 남겨진 머슬 메모리 때문일 겁니다.]
‘머슬 메모리라니?’
[원래 운동을 매일 하는 사람들은 하루만 쉬어도 찌뿌둥함을 느끼거든요. 쉽게 말해 근육을 사용해 근육을 풀어주는 것이죠. 전주인은 하루가 멀다하고 운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몸을 만들 수 있었고요.]
‘이런 쇠질이 뭐가 재밌다고.’
[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죠. 주인님도 거울 볼 때마다 만족스럽지 않습니까? 여자들이 흐뭇하게 보면 기분도 좋고요.]
‘뭐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군.’
바벨을 12번을 들어 올리고 2분 쉬는 식으로 3세트를 반복했다. 세트를 거듭할 때마다 원판을 10Kg 씩 늘렸기 때문에 마지막 세트는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끄으! 다 했다."
텅-!
바벨을 머리 위 지지대에 거칠게 내려놓는 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어어, 그러다 다칩니다. 마지막까지 힘 빼지 마시고."
근처를 지나가던 남자 트레이너였다.
"아, 넵."
저번에 분명 들은 것 같긴 한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확실히 나의 기억력이란 무척 성 차별적인 것 같다.
"어우야, 중량을 얼마나 친 거야?"
"많이 쉬어서 힘이 넘치나 봐요."
"갑자기 무리하면 다쳐요. 천천히 페이스 올려야지. 근데 대학생이랬던가? 어디?"
"네. 국성대 체육교육과요. 말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체육교육과라고? 어쩐지, 폼이 좋더라니."
"그냥 알음알음하는 거예요."
남자 트레이너는 딱히 일이 없었는지 나에게 붙어 계속 말을 걸었다.
"몸 보니까 운동 많이 했네. 혹시 다른 알바 하는 거 없음 여기서 트레이너 해 볼 생각 없어? 체육교육과면 가르치는 것도 잘할 것은데."
"트레이너 되려면 자격증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생활체육지도사 2급 정돈 있으면 좋은데, 꼭 없어도 상관은 없어. 오전 타임에 일하는 애도 사체과 다니는 학생인데 그냥 알바 삼아서 하고 있거든."
"그래요?"
남자 트레이너는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갑자기 능글맞은 표정으로 속삭였다.
"도훈 씬 얼굴도 반반해서 트레이너 하면 아줌마들한테 인기 짱 많을 거야."
"아줌마요?"
"흐흐. 여기 다니는 아줌마들이 젊은 총각이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 나중에 경력 쌓여서 PT하게 되면 아줌마들이 줄을 설 걸?"
"하하. 아직 누굴 가르칠 정도는 아니라서요. 저부터 배워야죠."
"참, 저번에 PT 생각 있다지 않았나?"
"네. 미나 샘한테 말 해놨어요."
"미나한테? 미나 PT는 자리가 잘 안 날 텐데···. 저 봐. 트레이닝 룸에 아저씨들 바글바글하지? 저기 몇 명은 운동은 하지도 않고 미나랑 노닥거리는데 정신 팔려있더라니까?"
"미나샘이 워낙 인기가 좋잖아요."
"하긴 뭐 어쩌겠어. 자기 돈 내고 여자 엉덩이만 쳐다보겠다는데···."
남자 트레이너는 미나가 인기가 많은 것에 질투를 느끼는 것 같았다. 하긴 같은 트레이너라도 PT 수강생에 따라 수입차가 벌어질 것이다. 헬스장 관리가 본업이라면, PT는 개인 사업자나 마찬가지니까.
"오늘도 일 끝나고 회원들하고 회식한다더라고."
나는 미나에게 이미 들은 이야기지만, 금시초문이라는 것처럼 물었다.
"회식이요?"
"어. PT반은 친목 도모 겸 가끔 모이는 편이야. 미나도 뭐 회원관리 차원에서 가기 싫어도 얼굴은 비쳐야지."
"그것도 나름 일인 거네요? 퇴근 후 잔업 같은?"
"그렇지. 그래도 나름 재밌어. 남녀가 같이 술 마시고 놀다보니 썸씽도 많고."
"그래요?"
"나도 지난주 우리 PT회원들이랑 술자리 한 번 가졌는데···."
남자 트레이너는 무료했던지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다.
주로 헬스장 여성 회원과 남성 트레이너의 미묘한 관계라던지, 헬스장을 작업장으로 착각하는 일부 남성 회원들의 눈꼴사나운 행태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신성한 헬스장에서도 남녀상열지사는 끊임없이 벌어진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참 웃고 떠드는 중에 그룹 PT를 마친 미나가 우리에게 왔다. 가슴 위로 땀방울이 맺힌 그녀는 무척 섹시해 보였다.
"드뎌 끝났다."
"벌써?"
"이번 타임 아홉시까지잖아요. 근데 둘이서 무슨 얘길 그렇게 재밌게 해요?"
미나는 트레이닝 룸에 있으면서도 계속 우릴 주시했던 모양이다. 남자 트레이너가 실실 쪼개며 대답했다.
"알려고 하지 마. 남자들끼리 하는 얘기니까."
"상일 오빠 또 쓸데없는 얘기 했구나?"
아, 맞다. 남자 트레이너 이름이 상일이랬지?
"그냥 운동 이야기 좀 했어요. 제가 궁금하게 많아서."
내가 상일을 변호하자 미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훈 씨, 오빠한테 배우면 클나요. 이 오빤 무조건 벌크업부터 시킨다니까요."
"벌크업이 어때서?"
"대회 나갈 것도 아닌데 무작정 몸만 키우면 어떡해요? 난 딱 지금 도훈 씨 같은 몸이 예쁜데."
"에이, 그거야 여자들 생각이고. 남자는 모름지기 힘이지. 안그래 도훈아?"
아니, 전혀. 나도 근육 돼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상일이 민망할 것이므로 나는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그냥 뭐가 됐건 열심히 하려고요."
"그래. 참, 미나 얼른 퇴근 준비해. 오늘 회식 있다며? 내가 마무리할게."
"그래도 괜찮겠어요?"
"샤워하고 준비하려면 시간 좀 걸릴 거 아냐."
미나는 상일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나를 향해 물었다.
"도훈 씨 PT반 한다고 했었죠?"
"자리 났어요?"
"어제 마침 한자리 비었거든요. 저녁 7시 부. 소그룹 3명요."
"그럼 그거 신청할게요. 내일부터 하면 되나요?"
"네. 혹시 오늘 운동 끝나고는 시간 되세요? 저희 PT반 수강회원님들 회식 있는데 가서 친해지면 좋을 것 같은데···."
"아, 7시 회원분들도 와요?"
"네. 아까 끝나고 갔는데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미나는 상일이 모르게 살짝 윙크했다. 그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나는 적당히 짝짜꿍을 맞춰주었다.
"잘됐네요. 어차피 같이 운동할 사람들이니 미리 친해지면 좋죠."
대화를 듣고 있던 상일이 미나를 보고 한마디 했다.
"벌써부터 회원관리 들어가시네, 미나 선생님."
"오빠도 저처럼 관리 좀 하세요."
"그래야 할까 봐."
"말씀중 죄송한데 저기 런닝 머신이 이상한 것 같은데 잠깐 봐주시겠어요?"
상일은 갑작스러운 기계 고장에 호출되어 자리를 떴다. 그가 사라지자 미나가 말했다.
"미안해요. 상일 오빠가 알면 괜히 오해할까 봐서."
오해? 아, 먼저 문자로 말한 거?
"아니에요."
"고마워요. 이해해줘서. 샤워하기 전에 바람 좀 쐴까요?"
"바람요?"
뭐야? 나랑 바람이라도 피자는 건가?
내가 이해를 못하고 있는데 미나가 다시 말했다.
"왜 우리 비밀 공유하는 거 있잖아요."
"아!"
담배 말하는 거였구나.
나는 헬스장 건물에서 나와 근처 골목에 들어섰다. 미나는 탱크탑 위로 얇은 바람막이를 걸치고 따라나왔다.
담배에 능숙하게 불을 붙이며 미나가 말했다.
"꼭 마지막 수업 끝나면 땡기더라구요."
"알죠. 그 기분. 원래 퇴근 전에 한 대 피우는 게 제일 맛있잖아요."
내가 담배를 입에 무는데 미나가 들고 있던 라이터로 불을 붙이며 물었다.
"퇴근 전? 마치 직장인처럼 말 하시네?"
아차. 말실수를.
"아니 보통은 그렇다구요."
미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곧 황홀한 표정이 되었다.
"아, 좀 살 것 같다.."
"다른 회원님들은 모르죠?"
"네. 도훈 씨만 알아요. 아니 도훈씨 한테만 들켰죠."
"그렇구나. 근데 머린 왜 그렇게 잘랐어요?"
"왜요? 별로 안 어울려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확 잘라 가지고. 많이 아까웠을 것 같은데···."
나는 유도 질문을 통해 넌지시 미나의 표정을 살폈다. 예상대로 그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실은 남자친구랑 헤어졌거든요."
"저런···. 제가 괜한 얘길 꺼냈나 보네요."
"괜찮아요. 뭐 그럴 수도 있죠. 근데 도훈 씨 헬스장 왜케 자주 빼먹어요. 여자 친구랑 너무 데이트만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그녀의 질문에서 두 가지의 목적을 감지했다.
하나는 화제의 전환, 나머지 하나는 나에 대한 호구조사.
분명히 개강 준비 때문에 못 왔다고 문자로 답을 했는데도 굳이 여자 친구 운운하며 나의 신상을 한 번 떠보고 있다.
막 실연당한 여자들이 홧김에 아무 남자나 만나곤 한다는 데 딱 그런 격일까?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저 여자친구 없는데요?"
"없었어요? 난 당연히 있는 줄 알았는데?"
"왜요?"
"음, 있게 생겼잖아요. 호호."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흠, 저건 너무 노골적인데요?]
‘그러게. 헤어진 충격이 생각보다 컸나 보네’
[어쨌든 잘된 일 아닙니까? 얼마 전 실연당한 여자가 굳이 주인님을 대동해 술자리를 함께하고 싶어 한다. 이런건 100프롭니다.]
지지부진하던 송미나 공략에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가만, 미션 완수하려면 헬스장에서 떡 쳐야 되는 거 아니야?’
[아, 그렇군요. 어떻게든 그녀를 헬스장으로 이끌어 보십시오. 그게 주인님에게 남겨진 과제입니다.]
‘거참 제한 조건 한 번 지랄 맞기는.’
[후후. 너무 쉬워도 재미가 떨어지는 법이니까요.]
얼마 전 실연을 당한 여자.
적당한 호감이 있는 사이.
자연스러운 술자리.
여심을 흔들기엔 최적의 조건이다.
다만 첫 섹스를 헬스장에서 완성해야 한다는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일단 확인할 것이 있다.
"근데 헬스장 마감할 땐 문을 잠그고 퇴근하는 거예요?"
"네. 트레이너들한테 카드키가 있어요. 관장님은 낮에만 얼굴 비치시거든요."
"그럼 오픈이랑 마감을 트레이너들이 다 하는 거네요?"
"그렇죠. 그건 왜요?"
"아니 아까 상일이 형님이 헬스장에서 알바 해볼 생각 없냐고 묻길래 시스템이 어떻게 되나 해서요. 전 대학 다니고 있어서 아침에 오픈하는 건 무리거든요. 마감은 가능할 것 같지만."
"오, 진짜로 생각 있어요? 내가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도훈 씨는 트레이너 하면 잘할 것 같다고."
"뭐 일단 PT부터 받아 보구요. 만약에 학기 중에 안되면 여름 방학 때라도."
"그래요. 좋은 쪽으로 생각해봐요. 나중에 어차피 교사하겠지만 경험 삼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네."
"그럼 전 올라가서 씻고 올게요. 10시에 1층에서 봐요."
"근데 제가 껴도 괜찮은 자릴까요?"
"상관없어요. 어차피 서로 다 아는 사이도 아니데요. 자기 그룹끼리만 알지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아요."
"아하. 그럼 뭐."
< 159. 낭만의 캠퍼스-28-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