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76화 (156/2,000)

< 158. 낭만의 캠퍼스-27- >

-도훈 : 술자리 몇 시쯤인데요?

-미나 : 헬스장 마감하고 가니까 대충 10시? 저희 그룹 PT 회원님들인데 늦게 운동하러 오셨다가 자연스럽게 참여하면 될 것 같아요.

저녁 10시면 아직도 7시간이나 남았다.

나는 일단 알겠다고 한 뒤 문자를 끝냈다.

[미나씨가 상당히 적극적이군요. 주인님은 PT반도 아닌데 굳이 회식 오라는 걸 보면요.]

‘너무 김칫국부터 마셔도 안 될 것 같아. 단순히 고객관리 차원 일 수도 있는 거니까.’

[과연 그럴까요?]

‘내가 개강하면 저녁 타임으로 옮긴다고 했잖아. 그러니 자기 PT반 회식 때 같이 참여시켜 그룹 PT 수강을 유도하는 상술일 수 있다는 거지.’

[그건 너무 나가신 것 같은데···.]

‘아냐. 실제 레슨 뛰는 강사들은 그렇게 친분을 만들기도 해. 사람이 사적으로 친해지고 나면 매몰차게 못 끊는 법이라.’

[설사 그런들 또 어떻습니까? 어차피 미션만 해결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하긴. 모로 가든 구멍만 잘 찾아가면 되지.’

남은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나는 도서관을 찾았다.

지금은 여자와 공부,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할 때.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학내 지도를 살펴보니 종합 도서관인 백도 말고도 단과대별로 조그만 도서관들이 있었다. ‘사도’라고도 불리는 사범대 도서관은 사대 1관과 2관 사이에 있는 3층짜리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임용공부에 한창인 4학년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왠지 좌석을 차지하는 것만으로 죄송할 것 같은 굉장한 열기가 느껴진다.

‘역시 학생은 공부할 때가 가장 멋있어 보인단 말이지.’

다행히 출입구 쪽은 자리가 비어있었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기 때문에 열람실 내에서도 가장 인기가 없는 위치. 나는 칸막이 책상에 자릴 잡고 오늘 공부한 내용의 복습을 시작했다.

코넬식으로 정리된 만든 나의 필기 노트는 한 번만 쓰윽 훍어도 수업 내용이 복기 될 만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오늘 들었던 전공과 교양수업 내용을 꼼꼼하게 1회독하고 나니 대략 3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오오. 오랜만에 제대로 집중하시는군요.]

‘···아니야. 확실히 느려졌어.’

[뭐가 말입니까?]

‘아이큐가 저하되면서 생긴 증상 같은데, 독해속도나 암기력이 전성기의 반 토막이 된 기분이야. 예전 같으면 10분이면 끝냈을 거야.’

[너무 자책 마십시오.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잃는 것이 세상의 순리. 주인님의 높았던 아이큐를 재분배 한 덕에 지금의 키와 대물이 있는 거니까요.]

‘그래. 아이큐가 낮다고 공부 못하는 건 아니지. 똑똑한 놈들보다 두 배, 세 배 열심히 하면 돼.’

인간은 망각의 동물.

에빙하우스란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학습 후 10분부터 망각이 시작되며, 1시간 뒤에는 50%, 하루 뒤에는 70%, 한 달이 지나면 80%를 잊어 버린다고 한다.

망각을 지연시키는 최적의 방법은 바로 복습.

에빙하우스는 학습한 내용을 잊지 않고 장기 기억화 시키기 위해선 10분 후 복습, 1일 후 복습, 1주일 후 복습, 1달 후 복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아이큐가 두 자릿 수까지 추락한 나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반복적인 복습뿐.

오늘의 복습을 마무리한 나는 스마트 폰으로 대학 모바일 홈페이지에 접속해 이번 학기 수강 과목의 강의 계획서를 확인했다.

중간시험을 치르는지 안 치르는지, 내야 할 레포트의 시기는 언젠지, 혹은 수업에 필요한 참고도서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차트를 만들어 빼곡하게 정리했다. 그 작업만 거의 2시간 가까이 소요되었다.

[키햐-. 과연 전국급 수재의 공부법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군요. 주인님께 또 한 번 감탄하고 갑니다.]

‘뭐, 차트 정리법? 이건 기본이지. 공부 잘하는 사람이 정말 머리만 좋아서 잘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중요하건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는 거야. 또 세운 계획을 흐트러짐 없이 실천하려는 의지도 필요하고. 머리만 좋은 애들은 위에 두 가지를 익히지 못해서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거든.’

어려서부터 영재 소릴 듣거나, 심지어 천재로 칭송되는 아이들이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런 영재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춘다.

그토록 영민하던 아이들이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추적된 조사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은 재능을 피어보지도 못하고 평범, 혹은 그 이하까지 전락한다고 한다. 부모님들이 말하곤 하는 ‘우리 애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는 것이다.

사실 초등학교 시절 공부를 잘하는 데는 유전자가 많이 작용한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초등 학업 성적의 50% 가까이가 지능지수로 결정된다. 그러나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면 지능의 관여도는 30, 20% 밑으로 떨어진다.

이때부턴 열심히 하는 학생을, 머리만 좋은 학생들이 따라잡을 수 없게 된다. 어려서부터 머리만 믿고 공부를 게을리한 학생들이 처음으로 열패감에 시달리는 시기기도 하다.

공부란 반복된 학습의 누적.

느리지만 차곡차곡 그 기반을 다져온 학생들에게 머리로만 이길 수 없는 순간이 도래하고 만 것이다.

다행히 나는 머리만 믿는 헛똑똑이가 아니었다. 독서를 많이 한 탓인지 스스로 공부법에 대해 터득했고, 그 뒤부턴 남들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열심히까지 하면 범재들로선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가 벌어진다.

흔히 얘기하는 ‘노력하는 천재’.

그게 바로 나였다.

비록 지금은 둔재 정도로 떨어진 아이큐 덕에 손발이 고생하는 처지지만···. 한참, 그런 생각을 하며 공부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혹시···. 도훈이니?"

슬쩍 고개를 돌리는데 4학년 오수정이 내 뒤에 있었다.

"도훈이 맞구나? 뒷모습 보고 긴가민가했더니, 웬일이래?"

"웬일은. 도서관 공부하러 왔지."

"헐. 진짜로 열심히네, 너?"

수정은 정숙한 열람실의 분위기에 주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밖에서 커피 한잔할래?"

"아니. 오전에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어."

"아···."

"담배는 좀 땅긴다."

"밖으로 나와 그럼."

나는 수정과 함께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막 도서관에 들어오는 길이었는지 책이 잔뜩 뜬 가방을 메고 있었다.

"너 공부하는 거 보니 내가 다 부끄럽네. 난 오전 수업 마치고 집에서 쉬다 오는 길인데···."

"그냥 운동가기 전에 시간이나 때우러 온 거야."

담배에 불을 붙이자 수정이 바람 방향을 확인한 뒤 슬쩍 비켜섰다.

"담배 냄새 별로지?"

"응. 근데 전에 사귀던 남자가 흡연자여서 그런지 별로 신경은 안 써."

"마음이 넓은 편이네. 질색하는 여자들도 많던데."

"어려서 그래. 나이 들면 다 이해할 걸."

수정은 오늘도 여전히 츄리닝 차림이었다. 저건 임고생들의 교복이라도 되는 걸까?

"참, 잘 만났다. 안 그래도 너 한테 줄 것 있었는데."

수정이 백 팩에서 두툼한 수험서를 꺼냈다.

교육학과 교육과정을 다룬 책들.

"이게 전에 말한 그거야?"

"응. 낼 점심때 주려고 챙겨놨는데 지금 가지고 있어서 바로 줄 게."

"고마워. 그러잖아도 수업 복습하고 볼 것 없어서 고민하던 참인데."

책을 옆으로 빠르게 넘기며 훑자 수험서 사이사이에 현광팬으로 밑줄을 그어 놓거나 빼곡하게 정리해둔 메모가 보였다.

"필기 많이 했네?"

"인강 들으면서 강사 설명 적어둔 거야. 다시 보려고 꼼꼼하게 정리해 놨으니까 한 번 읽어봐. 혹시 보다가 모르는 거 있음 나한테 물어보고."

"넌 주로 사도에서 공부해?"

"응. 현역 임고생들은 거의."

"현역 임고생이라니?"

"재수 삼수하는 선배들은 사도가 아니라 백도에서 공부하거든. 후배들 얼굴 보기가 민망한 가 봐. 그래서 암묵적인 룰 처럼되어 있어. 현역들은 사도, 재수 이상은 백도."

"백도는 졸업생도 들어 올 수 있는 거야?"

"응. 요샌 모든 과가 취업 헬 이잖니. 예전엔 졸업하면 학생증 막아버렸는데, 하도 민원이 많아서 졸업생도 학생증 있으면 출입시켜 주나 보더라고."

"그렇구나."

수정은 나를 보더니 기특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도 참 대단하다. 지금부터 사도 드나드는 2학년은 너밖에 없을걸?

"이상하네? 임용이 그렇게 어렵다는데 왜 미리 준비를 안 해?"

"놀고 싶잖아. 남자친구 만나 데이트도 하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영화도 봐야 되고···. 젊어서 즐길 게 얼마나 많니? 그거 다 포기하고 일찍 공부하자니 흘러가는 청춘이 아까운 거지."

"청춘이라···."

하긴 나도 막 환생한 전주인이 대학생이란 걸 깨달았을 땐 공부와 담을 쌓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공부는 전생에 죽어고 했으니 이번 생은 여자나 실컷 따먹으면서 즐기기로.

하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했던가?

캠퍼스 생활을 시작하니 공부를 마냥 손 놓을 순 없었다. 3년 뒤 임용 고사라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원주인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함도 있지만, 공부 못한다고 무시 받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플레이어로서의 사명을 다 한다고 꼭 공부를 포기할 필욘 없지 않은가?

기왕이면 둘 다 멋지게 성공하고 싶다.

"아무튼 고마워. 잊지 않고 챙겨줘서."

"뭘 우리 사이에."

"그래도 맨입으로 받자니 좀 미안하네."

"괜찮아. 다음에 내가 필요할 때 실컷 괴롭혀 줄 테니까. 후후."

수정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기브엔 테이크 하난 확실한 여자군.

나는 그녀의 잘빠진 엉덩이를 툭툭 두들겼다.

"담배 다 폈어. 바쁜 임고생 시간 뺏기 싫으니 이만 올라가자."

"쳇, 대관절 누가 시험 보는 사람인지 모르겠네?"

나는 그 뒤로 한 시간 더 공부를 계속했다. 구석에서 열공 중인 수정에게 작별인사를 할까 했지만, 모처럼 집중하는 그녀를 방해하기 미안해 몰래 빠져나왔다.

"이제 저녁 먹고 운동이나 가볼까?"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헬스장으로 향했다.

***

"타겟, 도서관을 나와 이동 시작. 계속 추적할까요?"

-아냐. 오늘은 거기까지만 하지. 아직 24시간 밀착 감시할 만큼 뭔가 나온 것도 없으니.

"알겠습니다."

교신을 마친 한지연은 교문 쪽으로 향하는 도훈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특별할 게 없는데 말이지.’

비록 첫날이지만 도훈의 일과는 지극히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수업 열심히 듣고, 도서관에 들러 공부하고.

‘음, 공부하는 건 좀 특이하긴 하네.’

2학년이 벌써 도서관에 출입하는 장면은 이례적이긴 했다. 하지만 현재까진 팀장 김문수의 말처럼 뭔가 비밀이 있다거나 이중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좀 더 개인적으로 친해져야 하려나?’

대학 내 일상을 둘러보는 것으론 한계가 있다. 내밀한 모습을 엿보기 위해선 그의 삶 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인문학자들이 원시 부족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현장(field)에 들어가 그곳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어. 나중에 팀장님에게 여쭤 봐야지.’

지연은 본부 차량으로 향하면서 소형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대리님! 오늘 밤 치킨 쏘는 거 잊지 않으셨죠?"

***

집에 가는 길에 도시락을 구매했다. 원룸에서 혼밥을 하자니 심심해 TV와 함께 먹었다. TV는 참으로 좋은 녀석이다. 내가 밥 먹는 동안에도 자긴 한술도 뜨지 않고 연신 떠들어 댄다.

재방 중인 예능 프로를 잠깐 보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8시가 되었다. 슬슬 운동에 가야 할 시간.

나는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옆집의 서윤이는 독서실을 갔는지 방에 불이 꺼져 있었다.

‘공무원 시험이 한 달 남았다고 했나? 당분간 BJ 일을 쉴지도 모르겠군.’

헬스장은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였기 때문에 배도 꺼뜨릴 겸 걷기로 했다. 살짝 땀이 날 정도로 속보로 걸으면 헬스장에서 워밍업 할 필요도 없이 바로 운동을 할 수 있어 좋았다.

밤길을 걸으며 무료함에 깨톡을 확인했다.

도서관에 있을 때 방해될까 봐 알람을 꺼 놓았더니 그사이 여러 사람에게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성수 : 야! 너 100M 10초대 찍었다며? 그것도 군대서 연습했냐? 한국 군대 오지네!

-태영 : 형 100미터 10초 실화에요?

주로 육상 실기 때 달리기에 대한 언급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소문이 쫙 돌았나 보군.

앞으로 달리기할 때마다 약을 빨 수도 없는 노릇인데···.

하긴 뭐 전력으로 기록 측정할 일이 얼마나 있겠냐만.

1학년 새내기들이 모인 단톡방은 더 난리였다.

300+까지 넘어간 글들의 상당수가 나에 관한 이야기였다.

-연두 : 나 도훈 선배 달리는 거 직관함! 대박 우사인 볼트 보는 줄.

-희주 : 헐! 연두 계 탔네! 나도 좀 불러주지.

-나연 : 나도 같이 봄. 근데 도훈 오빠가 볼트보다 훨씬 잘생겼지.

-희주 : 나연이 연필임? 어디서 흑심 드러냄?

-나연 : 넌 갑자기 뭔 소리야. 이방에 오빠 있다고. 뻘소리 자제 좀.

읽기 귀찮아 대충 휙휙 스크롤을 넘기는 데 중간에 또 한 번 내 이름이 언급됐다.

-정음 : 도훈 선배 내일 교양수업 운동복 입고 와야된데요.

"응? 이건 뭔 소리지?"

내가 대답을 안 해서 인지 정음은 따로 개인 톡으로도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정음 : 오빠, 내일 생활체육의 이해 체육복 지참이래요. 혹시 못 봤을까 봐 남겨요.

아하, 정음이랑 같이 듣는 수업이 하나 더 있었지?

생활체육의 이해는 각종 생활 스포츠를 직접 수행해 보는 실기 수업이다. 특히 여름에는 캠핑 겸 레프팅 실습계획도 잡혀있어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대학생들이 많이 신청하는 과목이라고 했다.

나는 정음에게만 따로 답장을 남겼다.

-도훈 : 알려줘서 고마워. 내일 약속 없음 점심이나 같이 먹을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답장이 왔다.

-정음 : 네! 같이 먹어요!

-도훈 : 답장 칼이네. 공부한다고 톡 방금 봄.

-정음 : 공부 진짜 열심히 하시는구나. 지금은 뭐하세요?

-도훈 : 오랜만에 헬스장이나 가려고. 끝나고 회원들끼리 술 한잔한 데.

-정음 : 아, 그렇구나. 술은 좀만 드세요.

-도훈 : 응. 그럼 내일 학떨목 서 12시에 보자.

-정음 : 네!

다른 애들은 몰라도 정음이는 따로 챙겨주고 싶었다.

그렇게 톡을 보내며 걷는 사이 어느새 헬스장에 도착했다.

< 158. 낭만의 캠퍼스-27-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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