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75화 (155/2,000)

< 157. 낭만의 캠퍼스-26- >

"커피 드시죠?"

"네. 좋아해요."

도훈은 캔 커피의 뚜껑을 따 지연에게 건넸다. 의외의 모습에 지연이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의외로 매너가 좋네?’

"통성명도 했는데 편하게 불러도 되지?"

"그러세요."

"이든? 이름 무슨 뜻이야?"

"음, 그건···."

사실 지연 역시 신분만 빌린 상태기 때문에 뜻을 알 리가 만무했다.

"그냥 순우리말이에요. 부모님께서 한글 이름을 짓고 싶으셨나 봐요."

"그렇구나. 이름 예쁘네."

"고마워요."

도훈의 계속되는 칭찬에 지연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훤칠한 키, 훈훈한 얼굴, 매너도 좋은 데다 운동능력 또한 발군이다.

생도 시절 매일 3Km 구보로 체력을 단련했던 그녀지만, 운동 좀 한다는 남자 동기들 사이에서도 100M를 10초대에 주파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력이 많은 남자구나. 따르는 여자들이 많겠어.’

그녀의 임무는 도훈을 감시하는 것. 그러나 도훈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 역시 여자기 때문이었다.

‘하아···. 연하라는 게 좀 걸리지만 이런 남잘 사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어, 잠시만. 옷에 뭐 묻었다."

도훈이 은근슬쩍 지연의 어깨를 터치하며 먼지를 털어냈다. 그 순간 지연은 자기도 모르게 팔에 소름이 돋을 만큼 긴장해버렸다.

"아, 앗."

"이제 땠어."

별것 아닌 행동에 지나치게 의식하는 자신을 보고 지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야? 나 지금 설렌 거야?’

미인계로 도훈의 마음을 뺏기도 전에 자신이 홀라당 넘어갈 판이었다.

‘정신 차려, 한지연! 임무에 집중해야지. 나보다 나이도 어린애한테 지금 뭐하는 거야?’

"저희 쉬는 시간 다 끝나지 않았어요?"

"그렇네. 들어가자."

"···네."

다시 강의실로 돌아온 도훈은 지연과의 잡담을 자제하고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교수의 말을 토씨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끊임없이 필기를 해대는 도훈의 모습에, 지연은 차마 말을 걸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녀는 물끄러미 도훈의 옆 모습을 쳐다보다,

이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까먹기 전에 타겟의 특징을 적어놔야 겠어.’

그녀는 클리어 파일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판서 내용을 적는 척 도훈에 대한 신상을 기록했다.

이도훈, 24세.

*달리기 능력 탁월.

*커피를 즐겨 마심.

*의외로 매너가 좋음.

지연은 3번째 항목을 쓰다가 두 줄로 죽죽 그었다.

‘아냐. 이건 너무 사심 들어간 것 같잖아? 관찰한 내용만 써야지.’

그녀는 다시 밑으로 도훈에 대한 신상을 적어 내려갔다.

*수업에 열정적으로 참여함.

*몸이 근육질임.

그녀는 마지막 항목을 쓰다가 자기도 모르게 옆 좌석에 앉은 도훈을 쳐다보았다. 소매를 걷어붙인 도훈의 팔뚝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 팔에 핏줄 선 것 좀 봐. 어쩜 저렇게 섹시하지?’

그녀의 시선은 이제 팔꿈치를 지나 도훈의 삼두박근에 이르렀다. 옷이 꽉 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두터운 근육에 자기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운동을 얼마나 하면 몸이 저렇게 되지? 우리 경호팀 직원들보다 더 좋은 것 같네.’

그녀가 얼이 빠진 체 도훈을 쳐다보고 있는데, 도훈도 그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아, 아니요."

도훈은 다시 수업에 집중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로시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녀가 주인님께 슬슬 호감을 보이는 군요, 역시 마성의 매력을 가진 남자.]

‘다 추천 맨트 덕분이지. 그나저나 쟤는 누구 지령받고 움직이는 걸까?’

[지령이요?]

‘그럼 내 사생팬이겠냐? 스토커라기엔 스케일이 너무 크잖아. 신분을 위조할 만한 능력자들이 이 일과 연관된 게 틀림없어.’

[혹시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내 주변에서 이런 짓을 벌일 능력자라면 딱 한 놈뿐이지.’

[고성민?]

‘빙고. 놈이 나에게 끄나풀을 붙인 거야.’

[주인님의 모략을 눈치챈 걸까요?]

‘아니. 어차피 증거는 전혀 없어. 음성도 변조했고, 이도훈의 인맥을 파본 들 기자와 연결고리는 찾을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아마도 내 생각엔···.’

도훈은 그날 새벽 경찰서 만난 덩치 큰 남자를 떠올렸다. 삼현 그룹 비서실에 근무한다고 했던가? 맹수를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한 눈빛이 유독 뇌리에 남아 있었다.

‘어쨌든 삼현은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기업. 주인이 멍청하다 해서 수족까지 바보인 건 아니겠지.’

[주인님의 추측이 맞다면 무척 곤란한 상황이로군요. 그쪽에서 감시를 붙인 거라면, 앞으로의 행동에 상당한 지장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긴 한데···.’

도훈은 다이어리에 뭔가를 적고 있는 지연을 힐끔 쳐다보며 씩 웃었다.

‘하필 감시자로 여자를 붙였다는 게 놈들의 패착이랄까?’

[한지연 양을 역으로 이용할 계획이십니까?]

‘놈들이 미인계로 도발해 오니 나 역시 적절하게 응수해야지 않겠어?’

[설마 미남계를?]

‘아니. 색계다.’

[색계요?]

‘여자가 떡정이 들리면 가정도 내팽개치는 법. 한지연을 포섭해 이중 스파이로 만들어야겠어.’

[으으. 역시 무서운 분. 주인님의 심계는 그 끝을 측량할 수 없을 지경이군요.]

‘오버하지 마. 정보창 아니었더라면 절대 몰랐을 사실이니까.’

[주어진 스킬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도 능력이지요.]

심증을 굳힌 도훈은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일부러 들고 있던 팬을 떨어뜨려 지연 쪽으로 굴렸다.

볼펜은 또르르 굴러가더니 지연의 구두 앞에서 멈춰섰다.

"아, 거기 볼펜 좀 주워줄래?"

"네."

지연이 팬을 주우려 고개를 숙이는 순간 도훈이 그녀의 책상 위에 있던 다이어리로 손을 뻗었다. 겉가죽이 제법 닳은 것으로 보아 오랜 시간 가지고 다녔던 물건이 틀림없다.

이 기억을 읽어 들이면 그녀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을 것이다.

‘싸이코메트리 실행.’

[접수되었습니다.]

***

영상은 대학 강의동 같은 곳을 비추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영상 속에 나온 인물들이 모두 똑같은 제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

‘뭐지? 교복은 아닌거 같은데···’

도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영상을 보며 제복의 정체를 궁금해하는데 갑자기 앞에 있던 교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질문은 한지연 생도가 대답해 보도록."

‘생도라고? 설마 한지연이 사관학교 출신이었나?’

20대 초반의 풋풋한 한지연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대충 전쟁사에 관련된 내용 같았다. 지연의 대답을 들은 교관이 흡족한 표정으로 그녀를 칭찬했다.

"모두 박수."

짝짝짝-

"훌륭한 대답이다. 이번 체력 검정에서도 만점 받았던데, 공부는 언제 또 이렇게 열심히 했나? 귀관은 참으로 훌륭한 군인 되겠군."

"감사합니다."

도훈은 짤막하게 지나치는 영상을 보며 지연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

‘세상에! 한지연이 육사 출신이었다니···. 근데 어쩌다 군인이 되지 않고 삼현 그룹으로 입사 한 거지?’

영상은 빠른 화면을 돌린 것처럼 휘리릭- 지나가더니 ‘징계 위원회’라 이름 붙은 소 회의장으로 이동했다. 지연은 한 손에 다이어리를 꼭 쥔 채 앞에 정복 입은 군인들에게 변론하는 중이었다.

"이 수첩엔 당시 소부대전술훈련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동민 생도는 분명 최하위 점수를 받았고···."

"그만! 지금 그걸 따지는 게 아니지 않나?"

"···네?"

"군대는 어떤 조직보다 지휘체계를 중시한다. 귀관이 평가 결과에 대해 불만이 있었더라면, 제일 먼저 지도교수를 찾아가 소명했어야 했다. 그런데 모든 절차를 다 무시하고 바로 국민신문고에 찔러?"

"그건 김동민 생도의 아버지가 현역 장성이라···."

"어쨌든! 귀관 때문에 학교가 발칵 뒤집혔어! 사소한 실수를 바로잡자고, 일을 크게 만든 것은 명백한 귀관의 실책이다. 이에 본 징계 위원회에선 다음의 징계를···."

"징계요? 전 잘못한 것 하나도 없는 데 왜 제가 징계를 받아야 하죠?"

"지금 항명하는 건가?"

"네! 그릇된 것을 바로잡으려 했다는 이유로 징계라니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뭐라?"

정복을 입고 있던 군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조직에 칼을 꽂은 내부고발자라는 비난에도 우수한 성적을 이유로 그녀를 변호하는 교수들이 많았다. 따라서 가벼운 징계 정도로 마무리하려고 했건만, 자존심이 강한 한지연이 징계 위원회 자리에서 결국 폭발해버린 것이다.

"이딴 군대라면 제가 더 싫습니다! 끝까지 징계를 주신다면 제 발로 떠나겠습니다!"

"정녕 일을 크게 만들겠단 말인가?"

다음 장면은 눈시울을 붉히며 영내 기숙사에 짐을 싸고 있는 지연의 모습이었다. 4년 동안 정든 사관학교를 떠나는 그녀는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끝끝내 참아야 했다. 입교할 때 마련했던 다이어리를 마지막으로 이사 박스에 밀어 넣은 지연은 두말없이 학교를 떠났다.

동정하는 시선은 많았지만, 생도 생활 부적응으로 퇴교 조치를 당하는 그녀를 변호하는 동기는 아무도 없었다. 임관까지 채 1년도 안 남은 상황에서 괜히 그녀와 얽히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지연이 입술을 깨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빠, 약속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난 아빠처럼 훌륭한 군인이 될 순 없나 봐요."

영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찰나의 순간 수많은 영상이 머릿속으로 유입되느라 도훈은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다.

‘으. 싸이코 메트리는 언제 해도 머리가 띵하군.’

[그래도 이것으로 놀라운 정보를 알게 되었군요. 한지연 양이 육사 출신이었다니.]

‘정확히는 출신이 아니라 퇴교자. 임관하지 않고 제 발로 나와버렸으니까. 남자였다면 퇴교당하는 곧장 군대로 끌려갔을 거야.’

[그렇다면 한지연 양은 생도 생활을 그만두고 나서 삼현 그룹의 비서실로 입사한 모양이군요.]

[일단은 거기까지가 합리적인 추론이지. 자세한 건 따로 만나서 캐봐야겠지만.]

"오빠 여기요."

지연이 볼펜을 주워 건네자 도훈이 씽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고마워."

의도적인 스킨십에 지연은 자기도 모르게 손끝을 오므렸다. 그 바람에 다시 볼펜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이런."

도훈은 발아래 떨어진 볼펜을 주워들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그때 지연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리를 꼬는 척 치마를 나풀거렸다.

밑으로 내려간 도훈의 시야로 그녀 치마 안쪽이 슬쩍 보였다.

‘어쭈? 아주 이제 대놓고 흘리는 것 보게?’

‘이 정도 서비스는 해줘야 나한테 관심이 생기겠지?’

그러나 지연은 도훈을 유혹하는 목적이 단지 임무를 위해서인지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

"첫 수업부터 리포트라니 좀 심하네요, 교수님도."

"강의 계획서 보니까 매주 리포트 있더라."

"그래도 오빠랑 알게 돼 다행이에요. 저 미술과에선 거의 아싸라서 맨날 수업 혼자 들었거든요."

‘웃기고 있네. 아싸라서가 아니라 도강생이니까 그렇겠지. 한지연.’

"혹시 서로 도움받을 일 있을지 모르니 번호 교환할까요?"

"좋지. 나중에 나 급하면 대출 좀 해줘."

"대출요? 얼마나 필요한데요?"

"아니 난 대리출석 말한 건데."

"호호. 농담이에요. 아무리 아싸라도 대출도 모를까 봐."

"농담 너무 아재 스타일인데? 나한테 나이 속인 거 아니지?"

은근히 나이를 공격하자 지연이 필요 이상으로 발끈했다.

"뭐, 뭐라고요?"

"왜 그렇게 정색을 해? 농담도 못 하겠다."

"흠! 저 오빠한테 속인 거 없어요."

‘입에 침도 안 묻히고 거짓말 잘하네.’

"번호 찍어 줄게 폰 줘봐."

지연의 폰에 번호를 찍고 전화를 걸었다. 부재중 번호가 남자 내가 물었다.

"성이 뭐라고 했지? 이름은 기억나는데 성을 모르겠다."

"한···."

"한?"

"아 아니. 한 번만 들어선 기억하기 어렵겠다고요. 송씨요. 송이든."

"그래. 송이든."

나는 번호를 저장하면서 생각했다.

스파이 치곤 의외로 빈틈이 많은 여자가 아닐까 하는.

"난 수업 다 끝났는데 다음 수업 또 있어?"

"네. 이제부터 전공이에요."

"아, 그럼 다음에 보자."

"네, 다음에 뵈요."

지연이 꾸벅 인사 하고 돌아섰다. 나 역시 반대편으로 돌아서 걸어가는 척하다 다시 훽-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지연은 화들짝 놀라며 아무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 그쪽 미술과 아닌데?"

"아! 맞다 맞다. 내 정신 좀 봐."

그녀가 방향을 바꾸자 다시 말했다.

"아니다. 그쪽이 미술과 방향 맞을 거야."

"네? 아, 그렇네요. 제가 좀 길치라서···. 헤헤. 그럼 이만!"

뻘쭘해진 지연은 도망치듯 후다닥 달려갔다. 나는 그녀의 뒷 모습이 빤히 쳐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음, 왠지 푼수 같기도."

그때 폰으로 문자가 왔다. 누군지 확인하는데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송미나 : 회원님. 요새 방문이 뜸하시네요. 자꾸 운동 빠지시면 근육도 같이 빠집니다아~

[그 헬스녀 아닙니까?]

‘맞아. 먼저 문자를 보내고 별일이네? 고객관리 차원인가?’

[에이, 헬스장 안 다닌다고 낸 돈 돌려주는 것도 아닐 텐데요.]

‘듣고 보니 그렇네?’

[어서 답장해 보십시오.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연락할 땐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심경의 변화라니?’

[그때 마지막으로 봤을 때 남자친구랑 말다툼하지 않았습니까? 홧김에 확 바람이라도 피는 걸지도.]

‘그거 솔깃한데?’

나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이도훈 : 안녕하세요. 개강 때문에 좀 바빴어요. 그렇잖아도 오늘 밤 헬스장 들르려던 참인데···.

잠시 후 바로 답장이 왔다.

-송미나 : 오늘 밤요? 혹시 시간 되시면 운동 끝나고 회원님들과 술자리 있는데 같이 하실래요?

술자리라고?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인데?

< 157. 낭만의 캠퍼스-26-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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