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낭만의 캠퍼스-25- >
‘엉?’
도훈은 미술과 여대생의 맨트에 적잖이 놀랐다.
"피부가 좋으세요." 라든 지 "헤어 스타일이 멋있네요" 등의 의례적인 덕담이 아닌, "몸이 되게 좋으세요."라니?
‘뭐야? 미친 여잔가?’
그러고 보니 의상도 너무 파격적이다.
정상적인 대학생이라면 대낮부터 시스루를 입진 않을 터. 야밤에 클럽에나 어울리는 옷을 입고 활보하는 여대생이라···.
도훈은 부쩍 의심이 들었다.
‘요새 여대생들 스폰 같은 거 많이 한다던데 설마 그런 부류인가?’
들어본 적 있다.
돈 많은 늙다리 애인을 스폰으로 둔 여대생이, 부족한 욕정을 채우기 위해 건장한 남학생을 섹파로 꼬신다는 소문.
도훈이 만약 여자가 궁한 상태였다면 지연에게 흥미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자라면 차고 넘쳐, 주워 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굳이 위업이나 미션과 관련 없는 상대에게 정력을 낭비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더욱이 스폰녀와 어울린다는 지저분한 추문이라도 얽히게 된다면 대학 생활이 피곤해질 것을 염려했다.
‘이상한 여자일지 모르니 조심해야겠군.’
"과는 왜 물으세요?"
"···네?"
도훈의 쌀쌀맞은 태도에 당황한 쪽은 지연이었다.
평소 남자들이 보내는 호의에 익숙했던 그녀로선 예상 밖의 반응. 뻘쭘해진 그녀가 겨우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저부터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만난 게 인연이라 친해지고 싶은 생각에 마음만 급했네요. 전 미술과 2학년 송이든이라고 해요. 나이는 올해 스물 한살이고요."
"아, 예."
지연은 도훈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뭐, 뭐야, 이 새끼? 아, 예? 아예? 지금 힙합 추임새 넣니?’
도훈의 냉담한 반응에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지연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한지연, 임무에 집중하자. 이 정도로 멘탈이 흔들려선 첩보원 자격이 없지.’
"그쪽 분 성함도 좀···."
"저기, 자꾸 말 걸지 말아줄래요? 교수님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데."
"아···. 죄송합니다."
‘아오! 이 좆만한 자식 진짜!’
자신을 하찮은 날파리 대하듯 하는 도훈의 태도가 지연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육사 기수를 통틀어 꽃 중의 꽃이라 불리던 그녀. 재학 중 자신에게 대쉬 하던 사관생도를 일렬종대 줄 세우면 연병장 두 바퀴도 거뜬했다.
3무 정책을 표방하는 사관학교 내에서 여생도에게 들이대는 것은 퇴학을 각오할 정도로 무모한 행동.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겐 락커룸엔 하루가 멀다하고 러브레터가 쏟아졌다.
항상 남자들에게 떠받들어지던 그녀로선, 지금의 상황에 굴욕을 넘어 모멸감을 느끼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네까짓 게 내 자존심을 건드려? 안 되겠어. 진짜 미인계가 뭔지 확실히 보여주지.’
지연은 꼬고 있던 다리를 바꾸는 척 치마를 더욱 위로 끌어 올렸다. 허벅지가 다 내보일 정도로 도발적인 움직임에 도훈의 시선이 자연스레 쏠렸다.
‘흥, 그것 봐. 너도 어쩔 수 없는 사내잖아?’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도훈의 의심을 더욱 확신으로 몰고 갈 뿐이었다.
‘···역시 미친년이 틀림없어.’
불쾌감을 참다못한 도훈이 지연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네?"
"자꾸 꿈틀거리지 말아줄래요? 교수님 말에 집중이 잘 안 되는데···."
‘꾸, 꿈틀? 나 지금 벌레취급 당한 거니?’
살다 살다 이렇게 지독한 언사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이성이 싸그리 휘발되는 기분에 의자 팔걸이를 부술 것처럼 움켜쥐었다.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가만 뭔가 이상한데? 어떻게 이런 매끈한 다리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거지? 설마 이 자식···.’
분노로 인해 지연의 사고회로는 자기방어 논리가 작동했다. 즉, 도훈의 성벽이 정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맞아, 그것밖에 설명이 안 되잖아? 이제껏 나에게 이토록 관심 없는 남자는 없었어. 그렇다면 이 자식은 여자가 아닌 남자에게 관심이 있다는 거지.’
제멋대로 도훈을 게이로 몰아간 지연은 이제야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말끔하게 생겼더니. 꼭 이런 애들이 게이가 많더라.’
지연은 도훈이 게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얼굴도 잘생기고 몸도 좋은 녀석이 왜 하필 남자를 좋아해서는···.’
지연은 연민 어린 시선으로 도훈을 쳐다보다 문득 그의 노트에 적힌 학번과 이름을 확인했다.
[체육교육과 이도훈]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지만 그녀는 우연히 본 것처럼 말을 걸었다.
"아, 체육 교육과셨구나."
"···네?"
"아니 노트에 적혀 있길래."
"왜 남의 공책을 함부로 봐요?"
"미안해요. 궁금해서···."
***
"미안해요. 궁금해서···."
나는 공책을 옆으로 치우며 생각했다.
‘왜 저렇게 집요하지? 스폰녀가 아니라 혹시 꽃뱀인가?’
[답답하시네요. 정보창으로 확인해 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깝게 왜 스킬을 얘한테 써?’
[주인님이 이제 배가 부르셨군요.]
‘배가 부른 게 아니라 하는 짓이 수상하잖아. 복장도 그렇고. 분명 뭔가 있다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확인해 봐야죠. 뭔가 있는지 아닌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정보창의 최대 단점은 긴 쿨 타임. 아무렇게나 남용했다간 정작 미션이나 위업에서 못 쓰게 되는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거듭된 로시의 권유에 나도 슬슬 궁금증이 들기 시작했다. 대체 왜 저렇게 적극적인 걸까?
‘정보창 띄워봐.’
[네. 디스플레이를 확인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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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한지연
나이 : 26
호감도 : 61/100
개방성 : C
성감대 : 클리토리스, 겨드랑이, 입술
성욕지수 : 중간
공략팁
*정보를 확인하기엔 아직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호감도를 상승시키기 위해 다음 멘트를 추천합니다.
-추천멘트 : "정말 동안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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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러다 정보창 스킬이 오작동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로시를 다그쳤다.
‘너 대체 스킬을 누구한테 쓴 거야?’
[아닙니다. 분명 눈앞의 여성분에게 썼습니다. 설사 오류가 있다고 한들 반경 3M 내에 여성분은 이 여자뿐인걸요.]
로시의 말을 확인키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애매한 타이밍에 도착하는 바람에 맨 뒷좌석에 앉았고, 부근에는 나와 시스루녀 뿐이었다.
‘이 여자 이름이 정말로 한지연이라고? 송이든이라지 않았나?’
[이상하군요. 설사 개명을 했더라도 개명 후 이름이 뜨게 되어 있습니다만.]
‘게다가 스물 여섯? 자기 입으로는 스물 하나라 했잖아.’
[네, 저도 분명히 들었습니다.]
이름부터 나이까지 모두 거짓인 그녀.
나는 갑자기 한지연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아까 우선이가 나 지켜보던 미술과 학생 하나 있다고 했지?’
[네.]
‘혹시 얘가···.’
벤치에 앉아있을 때 나도 뒷모습을 보았다.
그땐 청자켓에 화구통을 메고 있었는데···.
맞다! 치마! 그 애도 저런 흰색의 치마를 입고 있었지?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정체를 감춘 이 여자가 무엇 때문에 나에게 접근한 것일까?
수업 중만 아니면 붙잡아 다그치고 싶었지만, 애써 표정을 숨겼다. 뭔진 모르지만 불순한 목적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니 뭐 미안할 것까진···."
나는 까칠한 태도를 버리고 시스루녀에게 상냥하게 대하기로 했다.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선 일단 그녀의 의중에 맞춰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전 이도훈이에요. 사실 예전에 이상한 사람을 만나가지고···."
"이상한 사람이요?"
"도를 아십니까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 있잖아요. 학과랑 이름을 알려달래서 알려줬더니 맨날 과방 앞에 죽치고 기다리더라고요. 몇 달을 귀찮게 굴든지···. 그래서 좀 경계했어요."
"어머,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였어요?"
"좀 그렇잖아요. 너무 예쁘시니까."
뻔한 아부에 지연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생각보다 단순한 성격 같기도.
"감사해요."
"근데 정말 스물 한살 맞아요?"
"혹시 더 들어 보이나요?"
"아뇨, 전 신입생인 줄 알았거든요. 그것도 빠른으로 입학한."
"호호. 어리게 봐주시니 고마워요."
"진짜로 동안이세요."
"아이참, 부끄러워요."
‘어리긴 개뿔. 화장 지우면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 하겠고만. 이 여자 양심도 없네. 어떻게 다섯 살을 내리냐?’
하지만 속마음과 달리 호감도를 끌어 올린 나는 꾸준한 관심을 보였다.
"미술과면 그림 잘 그리시겠다."
"아니에요. 그냥 뭐 조금?"
"서양화에요, 동양화에요?"
"음, 그게···."
딱 걸렸어.
바로 대답 못 하는 걸 보니 전공도 속였군.
아니, 그전에 우리 대학 학생이긴 한 건가? 일단 나이가 너무 많잖아? 근데 어떻게 또 출석부에 이름을 올렸을까? 송이든은 대체 누구야?
여러모로 의문이 남는 여자였다.
굳이 신분을 위장해 나를 감시한다.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서양화에요."
"그럼 유화 잘 그리시겠네요."
"네, 유화도 뭐···. 근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지연은 그림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전공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려는 태도가 엿보이다.
"스물 넷이요."
"아, 군대 갔다 오셨나 보네요."
"네. 이번 학기에 복학했어요."
지연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노교수의 수업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다행히 오늘 수업은 오리엔테이션처럼 앞으로의 강의 계획이나 과제 등을 소개하는 시간. 배부된 프린트물에도 내용이 적혀 있으니 나중에 확인하면 될 터였다.
"그럼 10분간 휴식하고 계속하겠습니다."
노교수의 휴식 선언에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대학생들이 하나둘 기지개를 켜거나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그녀를 떠볼 겸 물었다.
"잠깐 밖에서 바람이나 쐴까요?"
"네. 저 잠시 화장실만 갔다가요."
***
지연은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자마자 무전을 날렸다.
"지금 교신 가능해요."
-어떻게 되고 있어? 곤란한 일은 잘 해결됐어?
"그럼요. 저 못 믿으세요?"
-당연히 못 믿지. 팀장님이 신신당부하더라. 지연이가 의외로 푼수 같은 데가 있으니 나보고 잘 케어하라며.
"뭐라고요!"
-쉿- 목소리가 커. 그렇게 말하지 말래도 그러네. 넌 너무 의욕이 넘쳐 탈이야.
"그러게 왜 가만있는 사람을 도발해요?"
-매사 조심하자는 거지. 타켓 동향 보고 해봐. 수업 들을 때 특이사항 없었어?
지연은 한껏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좀 스파이 쪽에 재능이 있나 봐요."
-뜬금없이 뭔 소리야?
지연은 강의실에 늦는 바람에 우연히 도훈의 옆자리에 앉게 된 것과 불가피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그와 친분을 맺은 사연을 설명했다.
-흠···. 이건 팀장님께 바로 보고해야 할 사안 같은데?
"보고 하세요. 저번에 팀장님도 그러셨거든요. 적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라면서."
-작전도 변경해야겠군. 인제 와서 물릴 수도 없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놈과 친해져서 정보를 확실히 캐봐. 할 수 있겠어?
"식은 죽 먹기죠. 저한테 완전히 빠진 것 같더라고요."
-어린애랑 노니까 좋냐?
"왜 이래요? 저 아직 어리거든요?"
-스물한 살로 위장했다고 실제 나이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니지, 한지연 씨.
"어이고, 대리님 온종일 차에 갇혀 있으니까 되게 심심하신가 보다."
-야! 내가 직함 부르지 말랬지. 여기 회사 아니다.
"흥. 아무튼 제가 알아서 구슬려 볼 테니까 오늘 밤 치킨이나 쏘세요."
-또 또 헛물부터 켠다. 임무나 집중해. 팀장님 말론 분명 뭔가 있다고 했어.
"있긴 뭐가 있어요. 얘기해보니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학생이더만. 이번 건, 팀장님 헛다리 짚으신 거 아니에요?"
-김문수 팀장님은 몇 년간을 사선에서 살아온 사람이야. 그분의 촉을 의심하지 말도록.
"흠. 한국 온 지도 한참 됐으니 그 촉 다 죽은 것 같은데···."
-이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나 이거 녹음 떠서 다 전송한다?
"앗, 죄송해요. 농담이었어요."
-장난치지 말고 어서 가 봐. 타켓 너무 방치해 두지 말고.
"네. 근데 같이 있을 땐 교신 어려울 것 같아요. 마이크 성능 좀 개선 하면 안 되요?"
-단추형은 그게 한계야. 아님 다음 번에 핀 마이크 설치하던지.
"어휴. 그건 옷 빨 안 받아서 싫어요."
-나 원 참. 너 이럴 때 보면 생도 생활은 어떻게 견뎠나 싶다. 군복은 잘만 입었을 거면서.
"옛날얘기 그만하시죠. 누가 특공여단 출신 아니랄까 봐."
-넌 내 밑으로 왔으면 반 죽었어.
"예? 예? 잘 안 들리는데···."
-야! 한지연!
"무전기 안 터지네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일방적으로 교신을 끊은 지연은 칸막이에서 나와 거울을 보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게이로 오해했던 도훈이 자신에게 부쩍 흥미를 보이자 확실히 그를 유혹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흐음~ 내가 봐도 예쁘네. 애들은 갖출 수 없는 성숙미가 있달까?’
대학에 잠입한 그녀는 은근 20대 초반의 여대생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나이가 어리다 보니 피부도 탱탱하고 풋풋함에 기가 죽었다. 하지만 화장술이나 패션 등 종합적인 모든 면을 고려할 때 자신이 꿀릴 게 없다고 여겼다.
‘도훈이도 나보고 동안이랬잖아. 흥흥.’
도훈이 그 말을 해줬을 땐 진심으로 기뻤다. 너무 기분이 좋아 그에게 호감을 느낄 뻔 했다.
‘가까이서 보니 의외로 잘생겼단 말이지? 몸도 좋고.’
지연은 도훈의 훈훈한 얼굴을 떠올리다 새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뭔 생각이람? 녀석은 감시대상일 뿐이야. 임무를 망각하지 말자 한지연.’
재단장을 마친 지연이 화장실을 나가자 도훈이 밖에서 음료를 뽑아 기다리고 있었다.
< 156. 낭만의 캠퍼스-2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