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73화 (153/2,000)

< 155. 낭만의 캠퍼스-24- >

***

"도훈이 형은 진짜 못 하는 게 없네요."

2학년 과대 정우선이 학식을 먹던 중 말했다. 평소부터 아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그의 칭찬에 입꼬리가 올라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태권도면 태권도, 노래면 노래, 달리기면 달리기. 정말 다재다능하신 것 같아요."

"얼씨구, 밥이나 드셔. 그런다고 커피 안 사주니까."

"커피는 안 그래도 제가 사려고 했어요."

"왜? 아침에 얻어먹어서?"

"뭐 그것도 있고, 지환이 녀석 평소에 깝죽대는 게 솔직히 거슬렸거든요. 형이 완전 죽사발 내줬잖아요."

우선의 솔직한 발언에 놀라 물었다.

"너 지환이랑 친한 거 아니었냐?"

"친하긴요. 그냥 과대니까 어쩔 수 없이 챙기는 거지."

"그래?"

"음, 이건 뒷담화 같아서 좀 그런데···. 2학년들 남자애들 사이에서 지환이 싫어하는 애들 엄청 많아요."

당연히 그럴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의외라는 듯 물었다.

"왜? 얼굴도 잘생기고 성격도 괜찮아 보이더만."

"저도 처음에 좋은 얜 줄 알았죠. 근데 이 자식이 같이 지내 보니까 영 뺀질거리더라고요."

"어떻게?"

"남자랑 있을 때하고 여자애들이랑 있을 때가 확연히 달라요. 여자애들 있을 땐 엄청 매너 좋은 척은 다 하거든요? 돈도 잘 쓰고."

"근데?"

"근데 남자애들하고 놀 땐 허구헌날 돈 없다고 징징대고, 귀찮은 일 있으면 맨날 빼기만 하고···. 어제도 개강 총회 때 제가 수업 없는 애들을 불렀어요. 근데 꼭 그럴 때마다 깨톡 읽씹하면서 모른 척하고. 나중에 한마디 했더니 깜빡했데요."

"허참···."

역시, 내 식견이 옳았다.

지환은 동기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지 못한 놈이었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진짜와 가짜가 쉽게 판별된다는 점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달까? 삶의 연륜이란 옥석을 가리는 안목에서 온다는 것을 실감해 본다.

아무튼 아까운 포인트를 날려가며 달리기를 이긴 것이 어쩌면 2학년 남자애들 사이에서 나에 대한 호감도를 재고하는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연에 대한 복수와 강사 눈에 든 것, 그리고 졸업 때까지 함께 할 후배들에 대한 신망까지. 300포인트가 전혀 아깝지 않은 결과물이다.

한참 지환의 흉을 보던 우선은 조금은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나에게 다시 말했다.

"제가 너무 안좋은 소리만 했네요. 저랑 성격이 안 맞아서 그런 걸 수 있으니 너무 선입견은 품지 마세요. 형한테는 또 잘할 수 있는 거니까.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잖아요."

"···그래. 그냥 한 귀로 흘릴 게."

학식을 마저 먹으며 생각했다.

2학년 과대 우선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녀석이라고.

성수가 놈을 아끼는 데 이유가 있었구나.

그때 우선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에게 말했다.

"형, 근데 저기 뒤에 여자분 아시는 분이에요?"

"누구?"

고개를 돌리는데 때마침 식판을 든 학생들이 내 앞을 지나가며 시야를 가렸다. 한참 뒤에야 뒤를 보는데 아무도 없었다.

"어? 가버렸나?"

"너 누구 말 한 건데?"

"아니 아까부터 형을 쳐다보고 있더라구요. 청자켓 입은 여자."

"청자켓? 우리과 아냐?"

"아니에요. 제 눈이 2.0 이거든요. 우리 애들은 아니었어요."

"그럼 누구지?"

"그냥 우연히 눈이 마주쳤나?"

"그런 가보네."

우선은 식판을 챙기면서 중얼거렸다.

"···3번이나 눈이 마주치다니 신기한 일이네."

식사를 마친 뒤 20분 정도 여유가 남자 우선과 함께 학내 편의점으로 향했다. 우린 1+1으로 묶인 캔커피를 사 벤치에 앉았다.

여전히 밤에는 쌀쌀한 편이지만, 햇볕이 내리쬐는 정오는 완연한 봄이었다. 벤치를 드리운 나무엔 새순이 돋아나고, 교정의 잔디밭에도 싱그러운 기운이 느껴진다.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깔깔대는 여학생들과 전날 밤 게임 이야기로 흥분해 떠드는 남학생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눈 깜짝할 새 졸업반이 되어 사회의 커다란 벽에 절망할 학생들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세상 걱정 없는 태평한 모습이다.

그래, 아무것도 모를 때가 어쩌면 가장 행복한 순간일지도.

"다음 수업 있으세요?"

"어. 교양수업 한 개 남았어."

"뭔데요?"

"이름이 뭐더라? 창의적 사고와 글쓰기?"

"아, 교양필수 과목이구나. 교수님은 누군데요?"

"모르겠어. 꼭 들어야 하는 과목이라서 공강 시간에 맞춰 때려 넣었거든. 근데 교양 필수 과목이 몇 개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모두 4과목인데 실용영어랑 실용컴퓨터, 그리고 형이 듣는 글쓰기랑 화술의 이론일 거예요. 교필은 아무래도 1학년들보단 고학년이 많은 듣는 편이죠."

"왜?"

"어차피 필수로 채워야 하니 나중에 들어서 학점 세탁하는 거죠. 1학년보단 3학년 때 들었을 때 학점 잘 받을 가능성이 크니까."

그렇군. 다만 학점 관리에 아무 생각이 없었던 전 주인은 1학년 때 이미 영어와 컴퓨터를 들어 D학점 이란 참담한 결과만을 남겨 놓았다.

이제와 어쩌겠나.

재수강하긴 시간 아까우니 남은 과목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우선이 또다시 어딘가를 가리켰다.

"어, 저기. 저 여자. 아까 학생식당에서 형 쳐다보던 여자에요."

"어디?"

우선의 손끝을 따라가니 이미 등 돌린 여대생 한 명이 보였다. 청자켓을 입고 등에는 검은색 망원경처럼 생긴 플라스틱 화구통이 매고 있다. 그녀는 뭔가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걸음을 재촉해 사라졌다.

"저거 캔버스 넣는 통 같은데···. 미대생인가? 혹시 아시는 분이세요?"

"뒷모습만 보고 어떻게 알어?"

‘로시, 이도훈이 과거에 아는 미대생이 있었나?

[그럴 리가요. 요샛말로 학과 생활만 열심히 하는 아싸에 가까웠는걸요.]

‘쟤는 뭔데 그럼?’

[그냥 우연히 지나가는 학생이 아닐까요?]

‘흠. 그럴수도 있겠네. 우선이가 좀 예민한 성격인가?’

"그냥 지나가는 사람 아냐?"

"아니에요. 분명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고요."

"그래? 난 전혀 모르겠던데?"

"저도 아까 식당에서 눈 마주치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예요. 혹시··· 형한테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나? 내가 누군 줄 알고?"

"아까 트랙에서 달리기할 때 타과 학생들도 구경 많이 했잖아요. 형이 1등 한 거 보고 반했을 수도 있죠."

풉-

우선이 웃기는 소리를 했다.

달리기 잘하는 남자한테 반하는 여자가 세상에 어딨어?

우사인 볼트 정도로 유명하면 모를까.

내가 피식하자 우선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요? 그럴 수도 있죠."

"아니 무슨 축구나 배구도 아니고 달리기 잘하는 데 반하는 사람이 어딨냐?"

"그런가?"

"수업이나 가야겠다. 다음에 또 보자."

"네, 형. 혹시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성수 선배가 형 복학한 지 얼마 안 돼서 학교 생활 적응하기 힘들 거라고 저보고 챙기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무슨 얘냐? 누가 누굴 챙겨."

"그러게 말이에요. 사실 저도 어이없는데 암튼 부회장님이 형 되게 좋게 보는 것 같더라고요."

"암튼 고맙다. 너도 남은 수업 잘 들어."

"전 오늘 수업 끝나서 동방 가려고요."

"동방? 아, 동아리방? 뭐하는데?"

"저 요새 악기 배우고 있거든요. 통기타."

"오, 멋있는데?"

"형도 관심 있으면 들어오실래요?"

"아냐. 난 악기 쪽은 별로···."

"동아리도 하나쯤 들어두면 좋더라고요. 운동이야 맨날 하던 사람들하고만 하니까···. 저기 본부 쪽 가시면 동아리 홍보하고 있거든요. 시간 되면 한 번 가보세요."

"응, 조만간 가볼 생각이야."

나는 우선과 헤어진 후 다음 수업 장소로 향했다.

***

‘쳇. 이런 실수를!’

지연은 입고 있던 청자켓을 벗어 차 안으로 거칠게 집어 던졌다. 도훈을 감시하던 중 그와 함께 있던 남학생에게 미행을 들킨 것이다.

-뭐야? 왜 주차장으로 이동했지? 다음 수업 장소로 가야 하는 거 아냐?

-자켓 좀 벗으려고요.

-자켓을? 설마 타켓에 노출된 건 아니지?

-타겟은 아니고, 함께 있던 남학생한테요.

-허허. 방심하면 곤란하지. 팀장님께서 무척 영악한 놈이라고 했잖아.

-방심한 거 아니에요. 근데 같이 있던 남자애가 눈썰미가 되게 좋더라구요. 식당에서 우연히 눈이 마주쳤는데 그 뒤부터 절 의식한 거 같아요.

-조심해. 내가 너 대학에 잠입시키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알겠어요.

-수업 시작 5분 전이야. 서두르도록.

-예썰.

한지연은 자켓을 벗고 나서 후회했다.

‘아씨, 내가 왜 안에 시스루를 입었담?’

시스루 블라우스는 안에 속옷을 투명하게 내비췄다. 최근 유행하는 패션이라곤 하지만, 21살로 위장한 대학생이 입기엔 다소 과감한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당장 다른 의상을 구할 수도 없는데···. 어쩔 수 없지. 이미 들켜버린 청자켓에 화구통보단 이게 나을지도.’

지연은 서둘러 강의실로 뛰어갔다.

***

"송이든"

"······."

"송이든 학생 안 왔나? 흠, 첫날부터 결석이네."

"죄송합니다, 교수님! 송이든입니다."

뒤늦게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여학생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처음엔 다들 얼굴이나 보자는 생각이었지만, 잠시 후 강의실 전체가 웅성거릴 만큼 소요가 일었다.

"헐, 대박!"

"야 쟤 옷 좀 봐. 완전 벗고 다니네."

"시스루로 입을 거면 속옷이라도 덜 튀는 걸로 입던가."

늙은 교수 역시 여학생의 과감한 복장에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흠흠, 다음부턴 늦지 말도록."

"넵."

송이든으로 위장한 지연은 쪽팔림을 무릅쓰고 맨 뒷좌석에 착석했다. 자켓을 차에 놓고 온답시고 지각하는 바람에 오히려 더욱 눈에 띄고 말았다. 갈수록 실수 연발.

‘창피해 죽겠네 진짜.’

"어, 거기 제 가방 있는데."

누군가의 지적에 지연이 화들짝 놀라 사과했다.

"앗. 죄송해요. 제가 모르고 깔고 앉아버렸네요."

지연은 등허리 낀 백팩을 꺼내 옆에 있던 남학생에게 건넸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옴마야!"

"거기 미술과 송이든 학생. 늦게 왔음 조용히 해야지."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크크크크."

"완전 관종이네 관종."

주변의 비아냥도 지금 지연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옆에 앉은 남학생이 하필 자신이 감시 중이던 이도훈이었기 때문이었다.

‘제, 제기랄! 애는 또 왜 뒤에 앉은 거야? 완전 망했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 아뇨. 제가 원래 깜짝깜짝 잘 놀라는 편이라. 가방 여기요."

"감사합니다."

도훈은 가방을 받아 발아래 놓으며 생각했다.

‘웃긴 사람이네. 복장도 그렇고···. 그래도 얼굴은 꽤 반반한데?’

"강의실 찾기 힘들죠? 저도 한 바퀴 돌았어요. 214호면 213호 옆에 있을 줄 알았는데 완전 반대편에 있더라고요."

"···네."

지연은 고개를 푹 숙인 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귓가엔 계속 무전이 울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비명소리가 들리던데?

-유도 3단인 네가 누구한테 맞을 일은 없을 테고···.

-지금 대답하기 곤란한 상황인가? 그럼 약속해둔 시그널로 대신하도록.

지연은 초소형 무전기가 장착된 소매를 들어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녀의 블라우스 소매엔 단추 형태의 마이크가 달려 있었는데 너무 크기가 작다 보니 입가에 가까이 가져가야 소리가 전달되었다. 그녀의 시그널을 받은 본부에서 다시 지령이 떨어졌다.

-뭔가 일이 벌어졌나 보군.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사항인가? 아니면 지원팀을 보낼까?

"···알아서 처리할게요."

"네? 저한테 말씀하신 거예요?"

지연의 뜬금없는 혼잣말에 도훈은 자신에게 물은 줄 알고 되물었다.

"아, 아니에요. 교수님이 혹시 강의 교재 말씀 하시던가요?"

"아뇨. 오늘은 교재 없이 프린트물로 대체한대요."

"프린트물은 어딨어요?"

"저기 앞에."

도훈이 교수 옆 책상에 쌓인 프린트물을 가리켰다.

지연은 이미 충분히 쪽팔린 상태였으므로 차마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녀의 곤경을 눈치챈 도훈이 말했다.

"그냥 제거 같이 봐요."

"···감사합니다."

두 사람 사이 좌석에 프린트물을 놓은 도훈은 지연의 옆 모습을 힐끔거렸다.

‘되게 미인인데? 미술과라고 했나? 복장도 예술하는 사람 같고.’

[요즘 여대생들의 패션은 정말 과감하군요.]

‘저것도 몸매가 되니까 입는 거지. 근데 검은색 속옷은 좀 심하긴 하네. 대놓고 봐달라는 것도 아니고.’

[봐달라고 입었으니 봐주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하긴 그럴지도.’

도훈이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 느낌이 들자 지연은 더욱 곤란해졌다. 그것은 복장 때문이라기보다 그녀의 임무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삽질이람! 팀장님이 아시면 경을 칠 텐데···.’

-감시하는 사람의 1원칙. 말해봐.

-타켓에 노출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감시의 생명은 철저한 은밀 기동이다. 주변을 배회하면서도 절대로 들키지 말 것.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투명인간처럼 움직일 것.

-명심하겠습니다.

-잘 해. 회사 들어와서 너한테 맡기는 첫 번째 중책이야. 애들이 다들 나이가 있다 보니 대학생으로 변장시킬 사람이 너밖에 없어.

-맡겨만 주세요. 실력발휘 제대로 해볼 테니까.

-자신감 넘치는 건 좋네. 아, 그리고 혹시 말이지 만약 놈에게 들키면 그땐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지?

-들키다뇨? 제가요?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임기응변 능력을 보는 거니까.

-음, 그땐 미인계라도 써 볼까요?

-미인계? 그것도 나쁘지 않지. 적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라는 스파이 계의 금언도 있으니.

임무 투입 직전 김문수와의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 지연은 갑자기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어차피 이미 얼굴부터 이름까지 다 까발려진 거, 차라리 대놓고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럼 훨씬 자연스럽게 감시할 수 있을지도 몰라.’

지연은 도훈의 시선을 의식하며 일부러 다리를 꼬았다. 짧은 테니스 치마가 나풀거리며 그녀의 뽀얀 허벅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근데 되게 몸 좋으시네요. 혹시 무슨 과세요?"

< 155. 낭만의 캠퍼스-24-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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