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낭만의 캠퍼스-23- >
***
나연은 단짝인 연두와 함께 강의실로 이동하던 중 우연히 2학년 육상 수업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트랙 위에선 자신을 농락하려했던 이지환이 몸을 풀고 있다.
파렴치한 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연두가 말했다.
"그냥 가자. 네가 지켜보면 아직도 관심 있다고 생각할 걸?"
"관심같은 소리! 확 여친한테 다 불어 버릴까 보다."
나연이 분을 못 참고 씩씩 거리는데 놈의 본색을 모르는 타과 여학생들은 지환의 탄탄한 몸매를 향해 수군거렸다.
"햐~, 뉘 집 자식인지 참 잘 빠졌다!"
"너 모르니? 체육교육과 이지환이잖아. 몸매도 몸매지만, 얼굴도 잘생겼어."
"아하, 체교 2학년 에이스라는? 들어 본 적 있어. 근데 옆에 키 큰 사람은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러게? 어깨 넓은 것 좀 봐. 몸은 쟤가 더 낫네."
"너희들 소문 느리구나. 이번 새터에서 체육과 X맨으로 뛰었다는 복학생이잖아. 이름이 뭐랬지? 도··· 그래, 이도훈."
"어쩜 너는 모르는 소문이 없니? 완전 마당발이네. 그나저나 체육과엔 훈남 엄청 많구나. 우리 과는 남자라고 있는 것들이 하나같이 안경 여드름 멸치 뿐 인지···."
"근데 도훈이라는 저 사람도 제법 날렵하게 생기지 않았니? 왠지 달리기 잘할 거 같아."
"그래도 이지환에겐 어림없지. 나 실제로 쟤 달리는 본적 있거든? 진짜 무슨 바람이 쌩하고 불더라니까?"
구경꾼들의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나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칫.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지. 뭘 벌써부터 누가 이기냐 마냐람?’
나연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도훈을 응원했다.
"도훈 오빠! 파이팅!"
그러자 도훈이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나연은 그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방금 오빠 우리보고 웃은 거지?"
"아니. 나보고 웃은 거 같은데?"
"뭐래? 너 도끼병 있니?"
"쉿-. 곧 시작한다."
트랙에 있던 체육과 학생들이 하나 둘 출발선으로 이동했다. 스타팅 블록의 발판을 조절하고 발을 올리자 강사로 보이는 남자가 머리 위로 화약총을 치켜 들었다.
"준비."
구령에 맞춰 7명의 대학생들이 일제히 몸을 기울인다. 살짝만 건드려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출발 자세에, 몰려든 구경꾼들도 슬슬 긴장이 되는지 마른 침을 삼켰다.
100미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리는 경기.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모두 집중한 가운데 "탕-!"하는 총격음이 울려 퍼졌다.
두다다다다다다다-!!!
스타팅의 박력은 그야말로 압도적!
경주마들의 질주처럼 일제히 튀어나가는 체육과 2학년 남학생들을 보며 구경꾼들이 입을 쩍 벌렸다.
"우아! 대박! 봤어? 진짜 빠르다 애들!"
"몸으로 먹고 사는 애들인데 오죽 하겠니?"
"이게 뭐라고 떨리지?"
출발한지 불과 3초 만에 선두 그룹이 결정되었다.
4번 레인에 이지환, 그리고 3번 레인에 있던 이도훈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평행선을 그렸고, 바로 뒤로 2학년 과대 정우선이 바짝 따라 붙고 있었다.
"우앗! 저 사람 뭐지? 육상복 입은 애랑 거의 비슷한데?"
"심지어 운동화 신고 뛰어 있어!"
"선출인 이지환이랑 주력이 맞먹는다고?"
눈 깜짝할 새 50M 라인이 돌파되었고, 선두의 둘과 나머지의 격차는 현격하게 벌어졌다.
사람들은 이제 누가 1등할 것인지에 촉각을 곤두 세웠다.
"진짜 빠르다! 저것들 사람맞니?"
"이지환 허벅지 봐! 완전 말 근육이네!"
"저 복학생도 전혀 안 꿀리는 데?"
도훈이 보여주는 예상 밖의 선전에 스타팅 라인에 서있던 강사 김일경도 선글라스를 벗고 눈을 치켜떴다.
"뭐야? 이번 학번에 선출이 두 명 이었나?"
지금도 가끔 도민체전에 출전하곤 하는 김일경은 타고난 육상인이었다. 그는 이도훈과 이지환이 보여주는 포퍼먼스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기록, 기록원이 정확히 재야할 텐데!’
저 정도 차이라면 육안으로는 측정이 불가능 할 지도 모른다. 그는 전자 계측 장비가 없는 것에 통탄하며 학생들을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감이 확실하다면, 두 사람은 분명 11초 안쪽으로 들어올 것이다. 제발 기록원이 초시계를 제때 눌러주기를 바랄 뿐.
한편 앞만 보고 치고 나가던 이지환은 자신의 바로 옆에 도훈이 있는 것을 느끼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 말도 안 돼. 지금 나랑 맞먹게 달리고 있는 거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이미 중학교 때 시대표로 전국대회를 출전했던 몸.
당시 컨디션 난조로 아쉽게 결선 4등으로 그치긴 했지만, 이제껏 살면서 달리기 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선출도 아닌 평범한 일반인에게 주 종목인 단거리를 박빙으로 겨루고 있는 것이다.
‘씨, 씨발! 여기서 지면 내가 성을 간다! 이지환이 아니라 개지환으로!’
지환은 30M를 남기고 팔을 더욱 크게 휘둘렀다.
남은 체력을 모조리 쥐어 짜는 막판 스퍼트!
두 팔의 추진력이 온 몸에 전달되며 가속이 붙은 몸이 더욱 빠르게 치고 나갔다. 옆에서 걸리적거리던 도훈이 뒤로 밀리는 느낌을 받자 이지환은 그제야 안도했다.
‘흥! 아무렴 그딴 근육 돼지 몸으로 감히 나를 이기려고? 순발력으로 어찌어찌 따라 붙었겠지만, 육상은 보는 것보다 기술이 필요한 종목이···. 헉!’
지환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도훈의 속도가 아까보다 더 빨라진 것이었다.
그 역시 막판 스퍼트를 하는 듯 보폭을 넓히며 피치를 올리자, 점점 둘의 격차가 줄어들더니 마지막 10M를 앞두고선 그의 등을 바라보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돼!’
분명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스타팅 반응 역시 금년 들어 최고라고 느낄 만큼 쾌조의 출발이었다. 비공인이긴 하지만 자신의 신기록을 세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런데도 도무지 도훈을 잡을 수 없었다. 스파이크가 닳아지도록 발을 굴려봤지만 그는 점점 멀어져갔다.
"1등!"
결승선에 서 있던 남학생이 도훈이 통과하는 순간 초시계를 끊었다. 뒤이어 도착한 지훈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초시계의 기록을 보고 소리쳤다.
"10.92초!!!"
나머지 학생들이 차례로 도착한 뒤 출발선부터 헐레벌떡 뛰어온 김일경이 기록원을 호출했다.
"야! 몇 초 나왔어? 헉헉!"
"교수님! 10초대에요! 10.92!"
"10초대라고? 1등한 학생 나와 봐."
김일경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어느새 호흡을 가다듬은 도훈이 그 앞에 섰다.
"찾으셨습니까?"
"자넨 이름이 뭔가?"
"이도훈입니다."
"이도훈? 아, 그 복학생이라던."
김일경은 출석부에 기재된 목록을 떠올렸다. 군대를 다녀와 이번 학기에 2학년에 소속되었다는 그 학생이다.
"도훈이 자네 육상 배웠나?"
"아뇨. 체대 입시 준비할 때 스타팅 정도만?"
"정말이야? 아니, 이런 인재를 아무도 몰라봤단 말이야? 너 제대로 기록 재면 얼마 나와? 스파이크 신고."
"스파이크 신발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제가 빠른 편인가요?"
"10.9초면 프로 축구 선수 사이에서도 손에 꼽히는 준족이야. 넌 정식으로 배우지도 않았다며? 올해 몇 살이지?"
"스물 넷요."
도훈의 나이를 들은 김일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아쉽구만! 3살만 어렸어도 제대로 한 번 키워 보는 건데···."
현재 한국 신기록은 김국영 선수가 가지고 있는 10.13초.
위로 오를수록 0.1를 줄이는데 몇 달씩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도훈의 나이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애초에 그의 재능을 어린시절 발견 못한 체육 지도자들이 야속할 뿐이었다.
"아무튼 다들 수고 많았다. 그리고 이도훈. 네 이름을 꼭 기억해 두마. 자, 다들 10분간 휴식했다가 집합하도록."
"넵!"
"꺄악! 도훈 오빠 짱!"
"멋있어요!"
"혹시 1등분 저희 축구 동아리 들 생각은 없으십니까? 곧바로 주전 뛰게 해드릴게요."
어느새 결승선 근처로 몰려든 구경꾼들이 도훈을 보며 환호했다. 이름도 잘 모르는 2학년 후배들 역시 도훈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와, 형님 진짜 빠르시네요. 제가 살면서 직접 본 사람 중 제일 빠른 거 같아요."
"긴 바지에 운동화 신고 뛰어도 그 정돈 데, 제대로 복장 갖췄음 기록 세우는 거 아닙니까?"
"아니야. 오늘은 운이 좋았어. 또 옆에서 빨리 달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더 의욕이 생기더라고."
도훈이 들으라는 듯 이지환을 꼬집었다. 열패감으로 고개를 숙인 이지환의 얼굴을 보는 것이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꼴좋다. 달리기 좀 배웠다고 기고만장 하더니만, 초보에게 잡힌 기분이 어때?’
[역시 짓궂으시네요, 주인님.]
‘저런 놈은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지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사람을 무시해?’
[어쨌든 포인트를 쓴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학점이든 연애사업이든.]
‘저기 봐, 나연이 뿅간 거. 내가 복수해 줬다고 엄청 기뻐하고 있잖아. 확실히 점수 땄다니까?’
도훈은 결승선까지 쫓아와 손을 크게 흔드는 나연을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나연은 도훈의 미소에 흥분해 연두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봤지? 봤지? 오빠가 나보고 또 웃는 거."
"흥, 착각도 가지가지 한다. 그냥 오빠가 사람이 좋은 거지."
"너 질투하니 지금?"
"지, 질투는 무슨!"
연두는 빈정이 상했는지 훽 하고 돌아섰다.
"야, 어디가!"
"어딜 가긴 기집애야! 우리 늦었어. 얼른 와."
"맞다! 수업!"
두 사람이 황급히 뛰어가는 데 그들 뒤에 서있던 여학생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도훈을 지켜보고 있었다.
***
그녀의 이름은 한지연.
지금은 미대생으로 위장한 삼현그룹 경호팀 소속의 정보원이었다.
‘흐음. 운동능력이 발군인데?’
타켓은 이도훈. 캠퍼스 내에서 도훈의 일거수일투족을 밀착감시 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지연은 등에 매고 있던 화구통을 고쳐 매는 척, 소매에 장착된 무전기에 대고 속삭였다.
-타켓 위치 운동장으로 확인, 현재 육상실기 수업을 끝내고 휴식 중.
그러자 귀 속에 삽입한 초소형 스피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특이사항은?
‘특이사항? 100미터를 10초대로 주파한 것도 특이사항이 되려나?’
지연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현재까진 없습니다.
-알겠다. 점심시간 이후 5,6교시 교양수업에 예정대로 투입하도록. 강사 출석부에 네 이름 기재해서 올려놨으니까.
-라져 뎃.
본부트럭과 교신을 끝낸 지연이 소매를 내리는 데,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 툭툭 어깨를 건드렸다.
"저기요."
지연이 화들짝 놀라 뒤 돌아섰다. 설마 교신이 들킨 것일까?
"누, 누구세요?"
"놀라셨음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너무 예쁘셔서요. 혹시 번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지연에게 말을 건 학생은 멀끔하게 생긴 남학생이었다.
아마도 지연을 보고 한 눈에 반해 헌팅을 시도한 모양이었다.
‘까, 깜짝 놀랐잖아! 하여간 예쁜 건 알아가지고.’
지연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저 남자친구 있어요."
"아···. 죄, 죄송합니다."
지연에게 번호를 따려한 남학생은 창피했는지 후다닥 도망쳤다. 지연은 그 모습에 쯧쯧 혀를 찼다.
‘남자가 저렇게 끈기가 없어서야. 골키퍼 있다고 포기하면 축구는 왜 하니?’
22로 위장한 지연의 실제 나이는 25.
우수한 성적으로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던 그녀는, 교내 부조리에 반발하며 학교를 자퇴했다. 생도 평가 당시 육군 장성의 자녀에게 남모르게 가산점을 준 교관에게 덤빈 것이 화근이었다.
남자 생도였다면 생도를 포기하는 순간 군역을 다시 치러야 했지만, 여자인 그녀는 입학 때부터 받은 품위유지비와 군장학금을 토해내는 선으로 그쳤다.
작고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망연자실한 그때, 삼현 그룹의 비서실에서 그녀를 찾았다.
-육사생도 4학년 중퇴자, 한지연양 맞습니까?
-누구시죠?
-삼현그룹 비서실입니다. 저희 경호팀장님이 한 번 만나 뵙고 싶다는 데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프랑스 외인부대 경험이 있는 김문수는 군인 출신을 선호했다. 임무 특성상 여자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갓 임관된 여장교나 사관학교 생도들을 물색하던 그에게, 뛰어난 능력에 강직한 성품을 가진 한지연의 최적의 적임자였다.
결국 다시 대학을 가야할 처지가 되었던 지연과, 어리고 능력 있는 여자 경호원을 선발하려던 김문수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며 그녀는 경호팀 중에서도 가장 어린 나이에 발탁되게 된다.
1년의 인턴십과 2년이란 혹독한 수습과정을 거쳐 마침내 본격적으로 자신에게 떨어진 첫 번째 임무.
지연은 이도훈의 밀착감시를 완벽히 성공해 내겠다는 열망에 휩싸였다.
‘저런 풋내기 남자애 따위. 나에겐 식은 죽 먹기지.’
지연은 다시 화구통을 걸치고 도훈을 따라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청자켓에 하얀 테니스 치마를 입은 그녀는, 누가 봐도 완벽한 미대생의 얼굴이었다.
< 154. 낭만의 캠퍼스-23-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