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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71화 (151/2,000)

< 153. 낭만의 캠퍼스-22- >

지루한 전공수업을 들으며 로시에게 물었다.

‘혹시 달리기 속도 늘려주는 아이템도 있어?’

[이지환 때문인가요?]

‘맞아.’

나는 창가에 앉아 햇살을 받는 이지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음, 확실히 남자가 봐도 라인이 좋은 편이군. 코가 오뚝한 게 요즘 애들이 좋아할 미남이랄까?

‘저 건방진 콧대를 제대로 한 번 눌러줘야지.’

[휴-. 그런 일에 쓰기엔 포인트가 아깝지 않습니까? 여자를 공략하는 것도 아니고, 임용합격에 도움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맘에 안 드는 사람 자존심을 뭉개기 위해서라니···.]

‘좀 그런가?

로신의 조언은 지극히 합리적이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연을 추행하려 했지만 그건 이미 종결된 사건이고, 건방진 태도가 마음에 안 든드는 것이라면 선배로서 따끔하게 한마디 쏘아붙이면 될 터.

그럼에도 굳이 달리기로 눌러주고 싶었던 건,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놈을 기선 제압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상대의 자존심을 짓밟을 땐, 가장 자신 있는 종목으로 승부봐야 하는 법.

‘설명이라도 해줘 봐. 뭐가 있는지 궁금하니까.’

[알겠습니다. 달리기 속도를 빠르게 하는 건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두 가지?’

[첫째 본인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이죠.]

‘그럼 둘째는 남의 능력을 끄집어내리는 거야?’

[아뇨, 둘째는 주변 환경을 조작하는 것입니다.]

‘엉? 무슨 소리지?’

[어떤 것부터 설명해 드릴까요?]

‘능력치 올리는 거야 뻔하니 두 번째 설명해봐.’

[네. 환경을 조작하는 것은 시공간의 왜곡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느리게 한다고?’

[정확합니다. 스킬이 극성에 이르면 시간을 완전 정지시키는 것도 가능하죠.]

‘헐! 그건 진짜 엄청난 능력인데? 그런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도 있었어?

[네. 하지만 불행히도 본인의 직업과 궁합이 좋지 못해 크게 두각을 드러내진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수에도 이르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지고 랭커가 못 됐다고? 대체 무슨 직업인데?’

[음, 택배상하차 일을 했거든요.]

‘상하차!’

어처구니가 없군.

시간을 멈추었는데 하필 택배상하차라니···.

[여하튼 시간을 상대적으로 느리게 흐르게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1/10초만 느리게 해도 세계 신기록이 바뀔 만큼 대단한 능력이랄까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무하마드 알리 역시 그러한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 중 하나였습니다.]

‘알리?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네. 사실 주먹을 잘 피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흘렀기 때문이지요]

‘이런 사기꾼을 봤나!’

[사기꾼이라뇨? 그는 참으로 성실한 플레이어였습니다. 신께서 주신 능력에 감사하며 존경받는 삶을 살았으니까요.]

‘가만, 그럼 에어 워크 쓰는 조던도 설마?’

[생존한 플레이어에 대해선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흠, 스포츠 스타들도 믿을 수가 없구만.’

[아무튼 시간을 느리게 하는 능력은 당장 얻기 어려울 테니 아이템을 구매하는 방법을 추천합니다.]

‘아이템이 뭔데?’

[우선 지난번 말씀드렸던 ‘시간아 멈춰라’ 모래 시계가 있습니다. 다만 해당 아이템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정지시켜버리기 때문에 달리기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군요. 아이템의 효과가 풀리고 나면 주인님이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보이겠죠.]

‘그거 말곤 뭐가 있지?’

[음, ‘시간 역행의 회중시계’도 있는데 이건 느리게 만들다 못 해 과거로 돌려버리는 기능까지 있습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고? 그게 가능해?’

[가능, 불가능에 대해선 인간의 지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젭니다.]

‘어쨌든 가능만 하다면 정말 개꿀 아이템이잖아?’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대충 알겠습니다만, 해당 회중시계엔 어마어마한 부작용이 존재합니다.]

‘부작용?’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른다고 하죠. 물리법칙을 심하게 거스르는 물건일수록 플레이어에게 막대한 페널티를 부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해당 아이템은 한 번 시간을 뒤로 돌리고 나면 그 시간의 수백 배에 해당하는 수명이 줄어들지요. 또 극심한 피로감으로 시전 즉시 깊은 잠에 빠집니다. 그 과정에서 기존 기억이 왜곡되거나 엉키게 됩니다. 혹시나 로또 번호 같은 것을 외우고 시간을 돌렸다고 한들, 다시 그 숫자를 기억할 확률은 제로에 수렴합니다. 심한 경우 자신이 과거로 역행한 것조차 잊어버리기도 하거든요.]

‘헐, 대체 그런 아이템은 왜 쓰는 건데?’

[글쎄요? 누구나 한 번쯤은 간절히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때가 잊지 않겠습니까? 수명을 버려서라도요. 어쩌면 주인님도 언젠간 그런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 가격이라도 알려드릴까요?]

‘들으나 마나 엄청 비싸겠지.’

[최근의 낙찰가는 흠 55,000포인트였습니다.]

‘미친! 안 사. 살 일 절대 없어.’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시간 관련 아이템은 가격대가 너무 고가에 잡혀 있군요.]

‘그냥 첫 번째 능력 올려주는 거로 알려줘.’

[네. 신체 능력 강화는 대게 드링크류가 많습니다. 물약이라고 부르는데 근력, 민첩, 체력 등을 일시적으로 끌어 올리는 기능이 있습니다.]

‘호오, 한마디로 도핑 약물 같은 거네?’

[도핑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해당 물약은 현대 기술론 절대 검출되지 않거든요. 다만 소모성 아이템치고는 제법 가격이 나가는 편입니다.]

‘얼만데?’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300포인트 내외랄까요?]

‘헐! 달리기 한번 이기려고 그 정도 포인트를 낭비할 순 없지. 안 해.’

분명 로시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막상 실기 수업 시간에 육상 트랙으로 나오자 불쑥 호승심이 일었다.

지환이 놈이 미리 챙겨왔는지 몸에 쫙 달라붙는 스판 트레이닝 복에 스파이크가 박힌 육상화를 신고 나온 것이다.

"야, 좀 에바 아니냐?"

2학년 동기들이 지환을 놀렸지만, 놈은 멋들어진 고글까지 착용하며 대답했다.

"너희들이 아직 모르는구나. 선배들이 그랬는데 육상 강사님 첫 수업에서 100M 일등 한 사람, 무조건 A+ 준다더라고."

"그거 실화야?"

"아, 씨바 나 스니커즈 신고 왔는데···."

"야! 난 구두야 인마."

"육상실기 든 날 구두를 신었다고? 이거 완전 또라이 아냐?"

다들 트랙 안쪽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 비교적 젊어 보이는 육상 강사가 다가와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다. 이번 학기 너희들의 육상을 담당하게 될 김일경이라 한다."

"안녕하십니까!"

과대 정우선의 선창으로 체육과 2학년 학생들이 뒤따라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목소리는 맘에 드네. 아, 반말 거슬려도 이해해라. 난 너희들 02학번 선배거든."

"아, 선배님이셨구나."

"편하게 하십쇼."

"그래. 멘탈 하난 맘에 드네. 육상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단거리다. 일단 단거리가 되야 멀리뛰기건 세단뛰기건 다 되는 거거든. 오늘은 100M 기록 측정 할테니 다들 몸 풀 도록."

"교수님. 혹시 이거 혹시 실기 평간가요?"

누군가의 질문에 김일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평가냐고? 왜? 자넨 평가가 아니면 대충 뛸 건가?"

"아, 아닙니다."

김일경 매서운 눈으로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잘 들어. 내 수업은 매 순간이 평가다. 빤히 육상 수업 든 둘 알면서도 체육복도 안 입고 구두까지 신고 털레털레 온 놈들은 벌써 태도 점수 감점이야."

"죄송합니다."

"거기 스파이크 신은 학생, 자넨 이름이 뭔가."

"넵. 이지환입니다."

"이지환이. 넌 마음에 든다. 아주 제대로 태도가 된 녀석이구나."

"감사합니다."

"어쨌든 복장 불량에 대해선 본인이 책임지면 된다. 청바지 입고 뛰어서 기록 안 나와도 어쩔 수 없다는 소리다."

나는 김일경 강사의 말에 속으로 뜨끔했다.

설마 개강 첫 수업부터 달리기로 점수를 매길 줄이야.

게다가 지환의 말이 사실이라면, 첫인상을 잘 받은 학생은 실기 A+을 맡아 놓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

‘젠장, 학점까지 걸려 있다고 하니 대충할 수가 없겠는데? 이도훈 최고 기록이 몇이지?’

[마지막 측정은 12초 플랫이었습니다.]

‘와, 역시 빠르긴 빠르구나. 하지만 이지환이 12초 안쪽이라지 않았나?’

[그랬죠. 육상 선수를 했다고 하니까요.]

‘이거 고민되는 데? 아이템을 사, 말아?’

[저에게 물으신 거라면 그다지 추천해 드리고 싶진 않군요. 도훈 군의 체력이면 1등은 못해도 순위권에는 충분히 들 수 있으니까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로시의 조언도 거기까지였다.

쉬는 시간이 되었는지 트랙 주변으로 체육과 학생들이 모여든 것이었다. 인접한 체육관에서 수업이 있었는지 1학년과 3학년 학생들이었다.

"오오! 2학년들 달리기 하나봐."

"재밌겠는데? 우리 구경하고 가자."

"안 돼. 다음 수업 늦는단 말이야."

"뭘 늦어. 100미터야 10초면 후딱 끝날텐데."

"아, 그렇구나."

"누가 제일 빠를까?"

"보나 마나 지환이아냐? 쟤 육상 분과에서도 엄청 빠른걸로 유명한데? 중학교 때까지 시대표 였대잖아."

"그럼 뭐 상대도 안 되겠네."

"도훈 오빠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운동 잘하는 걸로 유명하잖아."

"에이, 그래도 육상 정식으로 배운 사람한텐 안 되지."

어느새 트랙 주변 팬스까지 몰려든 여학생들은 누가 누가 잘하나 응원하는 것처럼 트랙 앞에 선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와 지환의 이름이 언급되자 갑자기 불같은 경쟁심이 일었다.

"도훈 오빠! 파이팅!"

"일등 하세요!"

슬쩍 고개를 돌리니 1학년 팔선녀 중 하나인 나연과 연두가 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단짝이라더니 꼭 붙어 다니는 군.

‘젠장. 1학년들까지 보고 있잖아?’

[그렇게 이기고 싶으십니까?]

‘이제부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야. 포인트가 아깝긴 하지만, 나연이가 보고 있잖아.’

[나연양이 왜요?]

‘생각해봐. 나연이 입장에선 이지환이 얼마나 밉겠어. 그런데 또 으스대는 꼴을 보이라고?’

[아···.]

‘여기서 이지환을 꺾으면 나연의 호감도를 바짝 땡길 수 있을 거야. 게다가 육상실기 학점 받기도 유리해지겠지.’

[그럴 수도 있겠군요. 미처 그 부분까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주인님의 판단력은 남다르십니다.]

그때 김일경 강사가 16명의 학생들을 3조로 나누었다.

"1조는 여학생 둘 먼저, 2조 3조는 남자들을 7명씩 나눈다. 내가 좀 느리다 싶으면 2조로. 실력발휘 해보고 싶다 하면 3조로 이동하도록."

김일경의 말에 2학년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육상과는 거리가 먼 특기를 가진 이들이 2조에 섰고, 제법 날래 보이는 학생들이 이지환이 속한 3조에 자리했다.

나는 당연히 이지환의 바로 옆에서 3조에 섰다.

지환이 고글을 이마에 얹으며 나에게 물었다.

"형, 제 옆에서 뛰시게요?"

"왜?"

"아니 뭐···. 상관은 없는데."

지환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팬스 앞에 몰려든 여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응원하는 후배들도 많은데 괜히 비교 되실까 봐···."

‘이 새끼, 진짜 기고만장해 있구나.’

나는 정색하는 표정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너, 그렇게 자신 있냐?"

"네? 형 저 선수였다니까요."

"그래. 중학교 때나 선수였지. 네가 진짜로 잘했으면 육상 관두고 체육교육과에 왔을까 싶은데?"

나의 도발에 지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놈은 진심으로 열 받은 거 같았다. 다만 내가 나이도 많고 덩치도 훨씬 좋으니 감히 덤비지는 못했다.

"···뭐 그러세요, 그럼. 전 형 이미지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내 이미지는 신경 쓰지 말고, 달리는 데나 집중해."

"그러죠."

지환이 거북한 표정으로 고글을 내려 끼더니 스타팅 블록을 맞추기 시작했다. 나 역시 몸을 풀며 로시에게 말했다.

‘저 새끼 진짜로 밟아 버려야겠다. 로시, 아이템 준비해.’

[알겠습니다. ‘신속의 물약’이 왼쪽 호주머니로 전송되었습니다. 상세 설명은 디스플레이에 띄워 놓았습니다.]

주머니를 매만지자 조그만 약병이 손에 잡혔다. 나는 시간을 보는 척 디스플레이를 확인했다.

[신속의 물약] 드링크제. 300p

-민첩성 10% 향상시킵니다.

*달리기 속도가 증가합니다.

-제한 시간 10분.

‘10% 향상으로 놈을 이길 수 있을까?’

[도훈군의 기본 달리기 속도가 12초 플랫이니 대략 1.2초 정도의 기록 단축이 가능합니다. 불량한 복장 상태를 감안해 11초 전후가 예상되는 군요.]

‘11초 전후? 그럼 10초대도 가능하단 소리야? 난 스타팅 기법조차 모른다고!’

[걱정 마십시오. 그런 것들은 도훈 군의 몸에 각인되어 있으니까요. 주인님은 그저 결승선을 보고 달리시면 됩니다.]

긴장된 마음으로 로시와 대화를 하는데 앞서 출발한 여학생 둘이 결승선에 도착했다. 벌써 2조의 순서.

탕-!

김일경 강사는 미리 준비했는지 화약총으로 스타팅을 알렸고 2조의 학생들이 달려나갔다. 운동을 배운 대학생들이라 그런지 시작부터 폭발적인 스퍼트로 분위기를 달궜다.

"우아! 진짜 빠르다."

"저정도 가지고 뭘. 진짜 하이라이트는 3조의 이지환이라니까? 쟤 한 번 달리는 거 봤는데 완전 인간 탄환이야."

"그렇게 빨라?"

"말도 마. 옆에서 뛰는 애들만 불쌍하지."

2조의 100M 측정이 순식간에 끝나고 드디어 마지막.

우린 대기열에서 미리 측정한 대로 스타팅 블록을 조정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는 그사이 빠르게 주머니에서 신속의 물약을 꺼내 삼켰다. 그 모습을 우연히 본 2학년 과대 정우선이 물었다. 놈도 달리기에 자신 있는지 3조에 속해있었다.

"형 지금 뭐 마신 거예요?"

"속이 좀 안 좋아서 아침에 가스 활명수 좀 사 왔어."

"아···. 컨디션 안 좋으면 그냥 뛰지 마시지."

"괜찮아. 금방 끝날텐데 뭘."

나는 그렇게 말하며 발판 위에서 크라우칭 스타팅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지환을 노려보았다.

‘애송이 녀석. 하늘 위의 하늘이 뭔지 보여주마.’

< 153. 낭만의 캠퍼스-22-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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