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낭만의 캠퍼스-21- >
두 사람은 노래방을 나와 잠시 담배를 태우며 택시를 기다렸다.
"야, 근데 너 노래 엄청 잘하더라? 언제 그렇게 연습했냐?"
"그게 군···."
"또 군대? 허리 다쳐서 의병제대 한 게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나도 만기 전역했으면 너처럼 책도 많이 읽고, 노래도 늘어서 왔을 텐데···."
도훈이 희미하게 웃었다.
"형도 잘 노시던데요. 뭘."
"너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부끄럽다. 아까 들었지? 후배들이 너보고 엄친아란다. 엄마 친구 아들."
"에이, 그냥 하는 소리죠."
"아냐. 내가 봐도 도훈이 넌 잘났어. 그리고 뭐랄까···. 전역한 뒤론 사람이 확 달라진 것 같아."
"그래 보여요?"
"응. 지금이 훨씬 좋아 보여. 예전보다."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뭔 감사씩이나. 어, 택시 왔다. 타자."
도훈이 택시에 오르는데 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강민주 : 주인님, 노래방 끝나셨다면서요? 저 기다리고 있는데···.
‘아니, 얘는 어쩜 잠도 없나?’
-도훈 : 생각보다 늦게 끝났어요, 조교 샘. 피곤해서 집에 가서 자야 할 것 같아요. 내일 뵈요.
-강민주 : 힝, 하루 종일 주인님만 기다렸는데···.
-도훈 : 성수 형이랑 같이 택시 타가지고, 차 돌리기도 뭐해요. 그리고 오늘은 진짜로 피곤.
-강민주 : ···알겠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누구냐? 썸녀?"
도훈이 택시에 오른 뒤 계속 폰을 만지작거리자 성수가 궁금해 물었다.
"아뇨. 후배들이요. 잘 들어가라고."
"이야, 벌써부터 이미지 관리?"
"관리는요. 챙겨주는 거지."
"아까 노래방에서 보니까 새내기들 너 노래 부르는데 완전 뻑간 것 같더라."
"진짜요?"
"그래. 난 무슨 아이돌 공연 보는 줄 알았어."
"그건 좀 오버같은데."
"진짜야 인마. 아무튼 니가 알아서 처신 잘하겠지만, 괜히 학과 내에서 치정 싸움만 안 나게 해라. 과씨씨 깨지면 엄청 피곤한 거 알지?"
"당연하죠. 전례가 있는데. 그리고 아직 누구 사귀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지금은 혼자가 편해서."
도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솔로가 작업하긴 수월커든.’
도훈이 먼저 내릴 차례가 되자 지갑을 찾았다.
"형, 여기까진 제가 낼게요."
"어허. 넣어둬."
"네? 아니 그래도 혼자 다 내실 필욘···."
"이 자식이 형 우습게 만드네? 해봐야 얼마나 나온다고···."
그러나 할증이 적용된 택시비는 상당한 비용이었다. 도훈이 재차 택시비를 주려 했지만, 성수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 돈으로 나중에 후배들 맛난 거나 사줘라. 원래 후배 사랑은 내리 사랑인겨."
완강한 성수의 태도에 도훈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았다.
"고마워요 형,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도훈이 내린 뒤 보조석에 앉은 성수는 슬쩍 미터기의 숫자를 확인하고는 기사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사님, 만원 되면 적당한 데 세워주세요. 거기서부터 걸어갈게요."
한참 남은 거리를 떠올리자 성수는 갑자기 후회가 들었다.
‘···그냥 받을 걸 그랬나.’
그러나 그는 동생 앞에서만큼은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은 상남자였다.
***
원룸에 도착한 도훈은 서윤이 집에 불이 켜진 걸 확인했다.
‘주말에 고향에 갔다더니 집에 돌아왔나 보구나. 지금은 방송 중이려나?’
평소 같으면 잠시 들러 인사라도 하겠지만, 피곤한 도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괜히 얼굴 비췄다 붙잡히기라도 하면 끝장이야. 오늘 한 번 더 물을 뺏다간 진짜 쓰러져 버릴 걸.’
정력을 보존(?)키로 마음먹은 도훈은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혹시 소리라도 들릴까 문을 여닫는 동작마저 굉장히 신중했다.
‘젠장, 집에 오는 것도 여자 눈치를 봐야 하다니.’
잠 잘 채비를 마친 도훈은 길었던 하루를 로시와 함께 정리했다.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뿌듯한 날이었던 것 같아.’
[대단했죠. 하루 만에 1,400포인트를 경신하셨으니까요. 종전 기록은 ‘모녀덮밥’ 위업 보상으로 받은 1000포인트였습니다.]
‘근데 슬슬 체력 안배도 생각 해야 할 거 같아. 아까 코피 터진 것 봤지? 하루에 3번은 확실히 무리야.’
[하루 3번을 못할 건 없지만 매일 3번은 당연히 힘들죠. 운동을 꾸준히 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운동? 아! 맞다! 헬스장 또 빼먹었네.’
도훈은 개강총회 때문에 헬스장을 깜빡한 사실을 떠올렸다.
최근 자꾸 일이 생기면서 운동을 가는 시간이 줄고 있었다.
‘내일은 저녁은 까먹지 말고 들러야겠어. 이러다 지금 몸매도 유지 못 것 같아.’
지금 몸매는 전 주인이 남겨주고 간 유산이다.
그러나 계속 관리를 등한시하다간 식스팩도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헬스장 미션도 아직 남아있죠.]
‘송미나?’
[네.]
‘그건 아직 여유있지 않아? 3개월인가 되었던 것 같은데?’
[물론 여유는 있습니다. 하지만 캠퍼스로 무대가 옮겨지면서 미션 출현빈도가 높아지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하긴, 어제만 해도 지하철에서 한번, 강의 듣다가도 발동 됐으니까. 그건 왜?’
[미션의 보관 슬롯은 모두 3개밖에 안되기 때문이죠. 만약 어제 지하철 치녀 미션을 바로 해결 못 했다면 미션 슬롯이 가득 차 새로운 미션을 발동하지 않았을 겁니다.]
‘듣고 보니 그렇네? 기간이 여유가 있다고 계속 묵혔다간 다른 기회를 날릴 수도 있다는 뜻이군.’
[제대로 이해하셨습니다.]
‘좋아. 그럼 빠른 시일 내로 송미나를 공략해 보지. 휴, 대체 자빠뜨릴 여자가 몇명이야? 송미나도 그렇고, 손은주 교수에, 팔선녀까지···.’
[전 여친에 대한 복수도 남아있죠.]
‘그래. 날 토끼로 소문낸 그년. 그년은 꼭 손봐줘야지.’
[차근차근 하십시오. 우선순위를 정해 하나둘 해결해 나가다 보면 어느덧 레벨도 오르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지. 내 새로운 대학 생활은 이제 막 시작했으니까.’
도훈은 부푼 각오를 다지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를 노리는 감시의 손길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
오랜만에 잠을 푹 잤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더이상 생소하지 않다.
예전엔 남의 몸뚱이에 깃들어 있다는 어색함이 느껴졌다면 이제는 진짜 이도훈이 된 것 같다.
나르시즘에 빠져 몸매를 감상해 본다.
태평양처럼 넓은 어깨.
알토란처럼 박혀있는 복근.
군살 없이 매끈하게 빠진 치골.
그리고 언제봐도 뿌듯함이 느껴지는 대물.
훌륭하군.
그러다 옥에 티를 발견한다.
"쓰읍. 역시 머리가 좀 지저분한데?"
나는 드라이로 말린 머리를 정돈하면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정우로 살 당시엔 헤어스타일이랄 것도 없었다. 흔히 귀두 컷이라 불리는 깔끔한 스타일을 고수했다.
단골 미용실에 들러 항상 찾는 헤어디자이너에게 지난 번 만큼 다시 깎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20대.
멋을 부려도 괜찮을 나이다.
‘그 미용실이 강남에 있었던가?’
다니던 미용실만 계속 다니던 버릇으로 자연스레 전생의 단골집을 찾았다. 그러나 차도 없는 마당에 멀리 가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나중에 애들한테 괜찮은 데 물어보지 뭐.’
등교준비를 마치고 학교로 향했다.
아침부터 전공필수 과목이었다. 체육과 2학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 강의실에 아는 애들이 없어서 뻘쭘해 하는데, 2학년 과대 정우선이 아는 체를 했다.
"도훈이 형 오셨네요."
"어. 우선이구나."
"강의 시작하려면 10분 정도 남았는데 커피나 한 잔 하실레요?"
"그러자. 내가 살게."
나는 강의동 1층의 자판기에서 캔커피 두 개를 뽑아 우선과 나눠 마셨다. 현 2학년과는 졸업할 때까지 계속 얽혀야 하기 때문에, 궁금한 점을 물었다.
"2학년은 구성이 어떻게 돼?"
"구성요?"
"그러니까 뭐 남녀 비율 같은?"
"형. 저희 학번 잘 모르시는구나. 저희 학번 일컫는 명칭이 사범대 공대에요."
"공대?"
"원래 사범대가 다른 전공에 비해 여자들 비율이 높잖아요. 국어 교육과 같은데는 거의 7:3 정도로 여자가 많고."
사범대의 남녀 비율에 대해선 딱히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남자가 어느 정도 있는 과가 수교랑 과교, 그리고 우리과 거든요. 근데 저희 학번 완전히 폭탄 맞았잖아요."
우선의 설명을 들으니 체육교육과에서 남초가 가장 심한 학번이 현 2학년이었다.
"그럼 여자가 둘 뿐이라고? 진짜?"
"네. 처음엔 그래도 4명이었는데 1명 자퇴하고, 나머지 한 명은 전과해 버렸죠. 그래서 지금의 공대 비율이 됐어요."
"지금 1학년은 여자가 절반이던데···."
"사실 그게 특이한 거예요."
"흐음."
무려 7:1의 비율.
가히 공대라 부를 만도 하군.
그러고 보니 아까 강의실에 잠깐 가방을 두고 나왔을 때도 여자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참, 형 내 분과에 걔 있지 않아요? 자영이?"
전혀 모른다. 개강총회 때 얼굴을 봤던 것 같기도 한데 전혀 안중에도 없을 만큼 미미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른다고 했다간 예쁜 애들만 편애하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으니 아는 체를 했다.
"응, 자영이."
"걔랑 현미라고 또 있는데···. 아무튼 그 둘이 전부예요."
"그렇구나."
"그래도 남자가 다른 학년보다 많아서 좋은 점도 많아요. 단합도 잘되고."
우선은 여전히 우직한 느낌이었다.
군대도 안 가본 녀석이 가장 FM이랄까.
"전공 교수님은 어때? 수업 빡세진 않아?"
"저도 선배들한테 듣기만 했는데 그럭저럭 들을 만은 하데요. 참, 형 전장 노린다는 소문이 있던데···."
‘성수가 또 동네방네 소문 다 냈구나.’
"그거 와전된 거야. 열심히 하겠다는 뜻이었는데 너무 과장됐어."
"그래요? 아무튼 전공수업에서 성적 받긴 수월하실 거예요.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우리 학번 남자애들은 맨날 술 퍼먹고 피씨방 가는 놈들이라 학점관리 전혀 신경 안 쓰거든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상대평가라는 것은 어차피 남보다만 잘하면 끝.
미필 남자가 많은 현재의 구성은 우선의 말대로 학점을 받는데는 최적의 조건이라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여자야 어디서든 만날 수 있으니 이것도 나쁘진 않겠군.’
우선은 커피를 들이키면서 뭔가 생각났는지 한 마디 덧붙였다.
"참, 걔는 좀 열심히 해요."
"누구? 자영이?"
"아뇨. 이지환요. 걔가 그래도 1학년 평점 4점 넘었어요."
이지환?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아, 나연이랑 썸씽이 있었다는 그 놈!
"지금 전과한 애가 학년 1등 하는 바람에 아쉽게 30% 장학금 밖에 못 받았지만, 그래도 사범대 남자가 평점 4점대 받긴 쉽지 않죠."
"그렇구나."
학년 1등이 타과로 전과했으면 지금은 이지환이 실질적인 에이스란 소리. 전장을 받으려면 이놈부터 꺾어야겠군.
"어, 저기 마침 오네요. 소개해 드릴게요."
우선이 1층 현관으로 들어오는 남학생을 가리켰다.
댄디 컷으로 자른 깔끔한 헤어. 꽃무늬가 프린트된 남방은 다소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첫인상은 전형적인 바람둥이 타입.
‘음. 나랑 비슷한 과 같은 느낌인데?’
[상당한 미남이군요. 나연 양이 홀라랑 넘어간 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얍삽한 이미지야. 기생오라비 같달까? 여자들이 저런 남자를 좋아한다고?’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니까요. 주인님처럼 묵직한 타입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날티 나는 느낌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겠죠.]
‘크크. 묵직한 건 확실히 나지.’
[어쨌든 어린 여자일수록 얼굴을 더 많이 보니까요.]
"야, 이지환. 인사해라. 도훈이 형이야, 새터 때 봤지?"
지환은 쓱 나를 훑어보더니-어디서 건방지게- 고개를 까딱였다.
"도훈이 형 안녕하세요. 이지환입니다."
아마도 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자기와 같은 과가 아닐까 하는.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조금은 속없어 보일지도.
"와, 미남이네. 새터 때는 왜 못 봤지?"
"별말씀을. 새터 때 계속 스키장에 죽치고 있었거든요. 제가 운동을 워낙에 좋아해서, 하하!"
운동은 무슨. 여자랑 둘이 운동하는 걸 좋아하겠지.
"형도 보드 좀 타시던 데요?"
"오랜만이라 그냥 몸만 풀어 본 거야. 군대에서 2년 썩다 보니 몸이 영 말을 안 듣더라고."
"아하. 어쩐지 좀 어색해 보이더라···."
어색하다고?
이 새끼 말하는 본새가 영 싸가지가 없구나.
반반한 얼굴로 여자 좀 후리고 다니니까 뵈는 게 없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새끼. 공부도 운동도, 여성편력까지 모든 면에서 한 번 밟아줘야 정신을 차릴 놈이로군.
"너도 커피 한잔 사줄까?"
"고마운데, 전 캔커피는 안 마셔요."
"그럼?"
"제가 좀 입이 까다로워서 에스프레소만 마셔서요."
"야! 그래도 형이 사준다는 데 무슨."
"아냐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지환은 무척 개념 없는 후배였다.
성수가 보면 왠지 죽빵을 날려 버릴 것 같다.
나연이는 뭐가 좋다고 저런 놈에게···.
하긴, 여자들한테는 전혀 다른 모습이겠지.
남자랑 있을 때 왕재수같이 굴다가도 여자 앞에선 젠틀맨으로 포장하는 게 저런 양아치 같은 놈의 이중성이니까.
아직 시간이 남아 우린 강의실로 들어가지 않고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환이 넌 무슨 분과야?"
"전 육상요."
"육상?"
"네. 중학교 때까지 시 대표 선수였어요."
"어쩐지 몸이 탄탄해 보이더라."
나의 칭찬에 지환이 우쭐해 하며 말했다.
"하하. 지금 뛰어도 12초 안은 거뜬하죠. 다음 시간에 육상수업 있던데 한 번 보여드릴게요."
"아, 맞네. 오늘 전공 실기 1학점짜리 하나 들었구나."
나는 갑자기 놈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어졌다.
< 152. 낭만의 캠퍼스-2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