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69화 (149/2,000)

< 151. 낭만의 캠퍼스-20- >

나연은 펑퍼즘한 야구잠바를 걸친 채 골목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조그마한 체구에 일부러 한 치수 큰 옷을 입은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보호 본능을 불러 일으킨다.

‘음? 연두랑 같이 있다지 않았나? 왜 혼자 있지?’

왠지 우울해 보이는 표정의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너 여기서 뭐 하니?"

"누구···? 아, 도훈 선배. 방금 오신 거예요?"

"아니, 아까 도착했지. 정음이 집에 간대서 택시 타는 곳까지 바래다주고 오는 길이야. 안 들어가고 뭐 해?"

"···그냥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나연이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귀여운 리듬체조 요정이 왜 저렇게 기운이 빠져 있을까?

나는 대뜸 나연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의외의 행동에 놀란 듯 나연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중년의 뻔뻔함을 발휘해 오지랖을 펼쳤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아, 아니에요. 별일은···."

"아닌 게 아닌거 같은데?"

"······."

나연은 침묵했다.

이제 막 대학 입학해 기대에 부푼 아가씨에게, 개강 첫날부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조개처럼 다문 입은 쉽사리 열릴 기색이 없었다.

더 보채봐야 그녀만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 화제를 돌렸다. 겨우 안면만 익힌 사이에 말 못 할 고민을 털어놓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참, 너 근데 전국체전에서 메달 땄더라? 깨톡에서 사진 봤어."

"아, 보셨구나. 네."

우선 그녀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운동 종목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누구든 자신의 전문분야를 이야기할 때는 신이 나는 법이니까.

"대단하다. 새터에서 자기소개할 땐 그런 말 없었잖아?"

"좀 민망해서요."

"뭐가?"

"그게 찬혁이가···."

나연이 지금은 자퇴한 찬혁의 이름을 거론했다.

"찬혁이?"

"네. 찬혁이가 자기 소개할 때 복싱대회에서 챔피언 땄다고 자랑했잖아요. 근데 애들 반응이 영 별로더라고요."

"아···."

"어차피 친해지면 다 알게 될 거 그냥 말 안 했어요."

"오, 나연이가 의외로 속이 깊네."

조금은 진심이었다.

고등학생 나이로 전국체전 메달리스트가 되면 치기 어린 마음에 조금이나마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인지상정일 터. 아무리 찬혁을 반면교사 삼았다고 해도 끝끝내 밝히지 않은 점은 대견한 면이 있었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사범대 오는 것 땜에 부모님 속 많이 썩였거든요."

"우리 과 말이야?"

"네."

"맞다. 너 체육고 나왔다고 했지? 운동 그럼 안 하는 거야?"

전국체전 3위권이면 상당한 입상 성적.

하지만 체육교육과로 진학한 이상 장차 진로는 ‘교사’에 국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 그것 때문에 엄청 고민했어요. 국가대표 선발전 포인트 따기엔 실력이 모자란 것 같고, 그렇다고 리듬체조 가지고 먹고 살 직업도 마땅치 않고···."

"아···."

"현대무용 쪽도 잠깐 고민했는데, 다행히 사범대 특례 입학이 있더라고요. 입상자 위주로 선발하는."

"아, 그래서 체육 교사 하려고 한 거야?"

"네, 체고 은사님께서 그러셨거든요. 나연이 넌 후배들 대하는 거 보니까 가르치는 일이 훨씬 적성에 맞겠다고. 자기처럼 그냥 사범대 나와서 체육교에서 교사나 하래요."

"그랬구나. 어쨌든 축하할 일이네. 원하는 걸 이뤘으니."

"흠, 부모님은 오히려 반대했어요."

"체육교사가 되는 걸 반대해?"

"네."

나연이 구구절절 자신의 사연을 읊었다.

다섯 살 때 발레를 시작으로 각종 무용대회를 섭렵한 그녀는, 체고에 진학해 리듬체조로 두각을 드러냈다. 그녀의 부모님은 대학에 가서도 체조를 계속하길 바라셨다고 한다.

"나중엔 러시아 유학 얘기까지 나왔어요. 한국은 한계가 있다며···. 어떻게든 뒷바라지해 줄 테니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그럼 부모님은 계속 운동하길 원했는데, 넌 그냥 교사 되기로 한 거야?"

"그렇죠. 솔직히 제 한계는 제가 더 잘 알니까요."

전국체전 3위.

일반인이 보기엔 대단한 성적이지만, 본인 입장에선 재능의 차이를 절감하는 성적표였을 것이다.

똑같이 노력하고, 똑같이 훈련했지만 누구는 1등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누군가는 쓸쓸히 무대 뒤로 퇴장해야 한다.

운동의 세계는 1등만 기억할 뿐 나머지는 금방 잊혀질 테니까.

나연은 자신의 한계를 일찌감치 예감했을 것이다.

그리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최적의 타협을 본 셈이다.

선수가 아닌 지도자의 길로.

보통은 철없는 자식이 무리한 유학을 보내 달라 때 쓰고 부모가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혀 회유하기 마련이건만, 어째 나연의 집안은 그것이 반대로 되어 있었다.

"그럼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다시 본래의 화제로 돌아왔다.

리듬체조 이야기로 어느 정도 레포가 형성되었는지, 나연은 아까보단 훨씬 마음의 문을 연 것 같았다.

"음, 그건 아니구요···."

"그럼?"

"말하기 좀 민망해서요."

"그래? 그럼 안 물어볼게."

대화는 줄다리기 게임이다.

너무 당기면 쓰러지고, 너무 밀어도 튕겨 나간다.

슬쩍 물러서는 기미를 보이자 오히려 나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남자 문제라서···."

오잉?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다.

진로라든가, 부모님과의 갈등 뭐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데 남자 문제라니?

하긴 스무 살 여자애라면 그럴 법도 하다. 다만, 앞선 진지한 이야기에 비해 전혀 뜬금포로 터지는 주제였기 때문에 조금은 당황했던 게 사실이었다.

"흠, 남자 문제라···. 도움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남성의 시각에서 내가 상담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겠네요. 선배 어디 가서 말하시면 절대 안 돼요?"

나연이 신신당부를 했다.

"나 입 무거워. 그건 걱정 붙들어 매."

"진짜 연두한테 밖에 말 안 했어요."

"맞다. 연두는 어디 갔어?"

"제가 커피 마시고 싶다고 해서 커피 사러 갔어요."

"그렇구나. 근데 무슨 일인데?"

"흠, 선배한테 말하려니까 좀 창피하네요."

나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새터 때 후배를 꼬시던 사람이 도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2, 3학년 중 굳이 새터까지 따라온 사내놈들의 일부는, 순진한 새내기를 꼬셔 어떻게든 엮어 보고자 했다.

"혹시 2학년에 이지환 선배라고 아세요?"

"이지환? 현역인가?"

"아마도요?"

"그럼 모르지. 나도 2학년이긴 한데 내 동기들은 지금 다 4학년들이거든. 나 군대 있을 때 입학했으면 얼굴 본 적도 없을 거야."

"그럴 거 같았어요."

"아무튼, 걔는 왜?"

"실은 야간 스키 때 저희 조 조교셨거든요."

도훈은 새터 때 기억을 떠올렸다.

야간 스키 당시 실력 있는 선배들이 새내기들을 나뉘어 가르쳤다. 아마도 지환이라는 2학년 남자애는 나연이 속한 조에 배정되었던 모양이다.

"그때 친해진 뒤로 계속 연락했었어요."

"썸인가?"

도훈의 물음에 나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썸까진 아니고 그냥 깨톡 주고받고, 밤에 통화 하는 정도?"

"썸 맞네. 근데 왜?"

"음···. 그저께 만났거든요."

‘그저께면 토요일이군. 주말에 데이트까지 할 정도면 상당히 진도가 나간 건데···.’

도훈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말을 하던 나연의 표정이 다시 우울해졌다.

"오빠가 막···. 음, 영화 보러 가자는 거에요."

"영화? 영화 정도야 볼 수 있지."

"네. 저도 딱히 할 거 없어서 같이 보러 가자 했거든요?"

"근데?"

"근데 개봉한 작품들은 볼 거 없다면서 DVD방에 가자는 거에요."

도훈은 DVD방 얘기가 나오는 순간 뭔가 촉이 왔다.

‘어쭈? 요 놈봐라?’

나연은 살짝 머뭇거리더니 이내 결심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

"전 아무것도 모르고 진짜 재밌는 영화 보자는 줄 알고 따라갔죠. 근데 지환 오빠가 갑자기···."

"혹시 거기서 안 좋은 일 있었던 거야?"

"아, 아니에요. 처음에는 손을 잡으려고 하길래 제가 부끄러워서 계속 뺐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오빠 손이 막 위로···."

‘가슴을 만지려고 했나보군.’

"그래서?"

"그래서 제가 지금 뭐하시는 거냐고 막 따졌거든요. 이러려고 저 DVD방 데리고 왔냐고."

"흠···."

"그러니까 갑자기 오빠가 표정이 싹 변하더니, 저한테 오히려 성질을 내는 거예요. ‘발랑 까긴게 순진한 척은.’ 막 그러면서···."

"완전 개새끼네?"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본인 역시 문어 다리를 펼치며 이 여자 저 여자 따먹고 다니는 주제에 남 말 할 처지는 못 됐지만, 적어도 그는 강제로 여자를 추행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상도(?)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대강의 사정을 전해 들은 도훈은 흥분해 소리쳤다.

"이지환 그 새끼 지금 어딨어? 노래방 왔어?"

"아, 아니요. 개강총회 때 얼굴만 비치고는 가버리더라고요. 휴-! 이럴까 봐 오빠한테 말 안 하려고 했던 거에요. 아무 일 없었는데 괜히 일 크게 만들기 싫어서요."

"그래도 이건 아니지. 성추행이잖아?"

"아, 아니에요. 막 가슴 만지려고 하길레 제가 피했어요. 그리고 거기까지 따라간 저도 책임이 있으니까···."

"책임은 무슨 책임? 영화 보러 갔음 영화를 봐야지."

"저도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연락할 땐 되게 젠틀하고 상냥했거든요."

"나연이 네가 충격이 컸겠네."

"네···. 그리고 오늘 또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뭐가 또 있어?"

"지환 오빠가 미술교육과에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요."

"허-! 그럼 여자 친구도 있는데 너랑 썸타고···."

"···네."

나연이 하루 종일 우울해하던 이유가 밝혀졌다.

학기가 개강하기도 전에 믿었던 남자 선배에게 농락당한 것이 못내 분하고 서러웠던 것이다.

그녀의 사정을 들은 도훈이 나연을 위로했다.

"부모님 반대도 무릅쓰고 기쁜 마음으로 대학 왔을 텐데 하필 그런 일을 겪게 돼서 네가 많이 속상했겠네."

"···선배."

"살다 보면 더러운 꼴 보기 마련이야. 이번 일은 액땜했다고 쳐. 세상에 남자가 걔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근데 진짜 썸 아니라니까요. 그냥 저한테 잘해줘서 친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이에요."

나연은 이미 기억을 조작하는 중이었다. 지환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불쾌하다는 듯이.

"그래. 아무튼, 좋은 남자 많으니까 잘 둘러봐."

"어디요? 좋은 남자가 어디 있는데요?"

"음,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지도?"

"아···."

도훈이 슬쩍 흘리기를 하는데 마침 커피를 사러 다녀 온 연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야이, 기집애야! 별다방 여기서 너무 멀어 가지고 20분이나 걸어갔다 왔잖아! 입이 어찌나 고급인지 그냥 아무거나 처먹···. 어!? 서, 선배!"

양손에 테잌아웃 커피잔을 들고 씩씩거리던 연두는 나연과 함께 있는 도훈을 보고 커피를 쏟을 뻔했다. 평소 여자들끼리 있을 때 말하던 것처럼 막말을 퍼부었는데 하필 도훈에게 딱 들킨 것이었다.

"연두 왔구나."

"죄, 죄송해요. 같이 있는 줄 몰랐어요."

"아냐. 연두 성격 시원시원해서 좋네."

도훈의 은근한 놀림에 연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까 분과 모임 때만 해도 새초롬하니 싹싹한 이미지였는데, 그게 다 내숭이었다니···.

연두가 쭈뼛거리며 도훈에게 커피를 건넸다.

"이, 이거 선배 드세요."

"아니야. 둘이 마시려고 사 온 거잖아. 난 괜찮아."

"그래도···."

"연두가 의리가 있네. 친구 위로해 주려고 이 시간에 먼 데까지 다녀오고."

도훈의 칭찬에 연두가 기분이 좋은지 씽긋 웃었다.

"헤헷. 제가 좀 의리파죠. 엇, 근데 선배가 어떻게 그걸···."

"내가 다 말했어."

"흐익! 진짜?"

"응."

"걱정하지 마. 어디 가서 소문내거나 그러진 않으니까."

"그러니까요. 괜히 알려졌다가 나연이 앞길 망치면 어떡해요."

"야, 무슨 그런 소릴 해! 진짜 아무 사이 아니였다니까?"

"어쭈? 아깐 막 울고불고 지랄을··· 아차차."

연두는 생각보다 입이 걸걸했다. 특히 일단 내뱉고 나중에 뒷수습하는 푼수 같은 모습에서 허당 끼가 느껴졌다. 도훈은 그런 털털한 성격마저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음, 나연이나 연두 둘 다 매력이 넘치는구나. 나연이는 이번 연애상담으로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것 같고, 연두는 한 달에 한 번 모인다는 분과 모임으로 친해지면 공략이 어렵지는 않겠어.’

이것으로 체육과 17학번 여후배들 여덞 명의 정보를 모두 파악한 도훈은, 앞으로의 하렘 왕국 건설이 무척 흥미진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서로의 견제와 감시를 피해 하나씩 벗겨 먹는 맛이 무척이나 쏠쏠할 것 같다.

"커피 후딱 마시고 들어가자. 다른 애들이랑도 같이 어울려야지."

"네!"

***

노래방 술자리는 새벽 1시까지 계속되었다.

도훈은 매력 발산도 할 겸 ‘오늘은 내가 가수다’ 아이템을 이용해 멋진 발라드도 한 곡 뽑았다. 가수 뺨치는 도훈의 노래 실력은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찌르르 한 감동을 선사했다. 그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던 여후배들은 도훈에 대한 칭찬을 그칠 줄 몰랐다.

"와, 도훈 선배 노래 엄청 잘하신다."

"진짜 엄친아네 엄친아. 노래도 잘하지, 운동도 잘하지, 얼굴도 잘생겼지."

"어머, 너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니."

"왜? 여자 친구도 없는데?"

"진짜 도훈 오빠랑 사귀는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야."

도훈은 과다한 칭찬에 부끄러운 척하면서도 여후배들의 관심을 속으로 즐겼다.

‘흐흐. 역시 노래 잘하는 남자를 싫어하는 여잔 없구나. 다음에는 좀 최신곡에도 한 번 도전해 볼까?’

대충 분위기가 정리되는 기미를 보고는 성수가 말했다.

"자, 그럼 내일 수업도 있고 하니, 오늘은 아쉽지만 여기서 마무리 하자. 집 가는 방향 같은 사람들끼리 택시 타고 해산할 수 있도록."

"네!"

성수는 후배들을 무리 지어 귀가시키고는 도훈을 따로 불렀다.

"너 아직 거기 살지? 너희 동네 지나 우리 집 가니까 나랑 같이 가자."

"그래요, 형."

< 151. 낭만의 캠퍼스-20-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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