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낭만의 캠퍼스-15- >
"···라면?"
"응. 집에 라면 같은 거 없어?"
"라면이야 있지. 근데 방이 엉망이라···."
업혀 있던 수정이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명백한 거부는 아니었다. 정말로 싫었다면 단호한 거절 의사를 밝혔을 것이다.
‘한번 튕겨 보는 건가?’
[진짜 방이 어지러워서 그럴지도 모르죠.]
하긴 바쁜 수험생이 청소를 자주 할 순 없겠지.
따라서 저건 방을 보여주기 창피하다는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싶다.
"혼자 사는 집이 다 그렇지. 설마 밥상 펼칠 자리도 없는 건 아니지?"
"그 정도는 아니고."
"그럼 됐어. 내가 저녁을 안 먹어서 배고파서 그래."
"알았어. 일단 나 내려줘. 사람들 자꾸 쳐다봐서 창피해."
나는 조심스럽게 수정을 내려주었다. 여전히 얼굴이 붉게 물든 수정이 눈앞에 4층짜리 원룸을 가리켰다.
"우리집 저기 3층이야."
"응."
건물 입구에서 수정이 내 앞을 가로 막으며 말했다.
"근데 나 너무 창피하다. 5분만 있다 들어오면 안 돼? 305호야."
"글쎄 괜찮대도 그러네. 알았어 밑에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라갈게."
"도훈이 너 담배도 폈니?"
"군대서 배웠어."
"내가 아는 도훈이가 아닌거 같아."
"풉-. 담배가 뭐라고."
"아니 꼭 그게 아니라···. 암튼 5분 뒤에 올라와. 알았지?"
"응."
수정이 계단을 후다닥 뛰어 올라갔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등에 닿았던 그녀의 가슴을 떠올렸다. 물컹대는 촉감을 봐선 결코 작은 사이즈가 아니다.
꽉찬 B에서 C정도?
‘흐흐. 직접 확인해 보면 알겠지.’
[근데 진짜로 라면만 먹고 가라면 어찌하시려고요?]
‘너도 순진해 빠졌구나, 로시. 저 멘트도 모르냐?’
[네? 라면 먹고 가는 거요?]
‘그래. 보통은 여자가 남자를 집에 끌어들일 때 쓰는 말이거든.’
[호오.]
‘라면 먹고 후식으로 나도 먹을래? 뭐 이런?’
[또래 집단에서 사용되는 은어 같은 것이로군요.]
‘수정이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내 말 뜻을 알아챘을 거야. 혹시 또 아냐? 방 치우러 간 게 아니라 질 세정제로 밑이라도 닦고 있을지?’
[설마요.]
***
설마는 사실이었다.
오수정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질 세정제를 찾았다. 그리곤 후다닥 바지와 팬티를 벗더니 쪼그려 앉은 체 뒷물을 했다.
그녀의 표정은 무척이나 다급해 보였다.
‘오늘 혹시라도 도훈이랑 하게 되면···.’
실은 그녀에겐 한가지 트라우마가 있었다. 1년 전 사귀던 남친과 대판 싸우고 헤어질 때 들은 말 때문이었다.
-진짜 이말 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너 섹스할 때 보징어 냄새 존나 올라오는 거 아냐? 좀 씻고 다녀!
그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언젠가 질에 염증이 생긴 뒤로 그곳의 악취가 심해졌고, 샤워를 해도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자위를 중단한 것은 그때 입은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다.
의사는 질염의 원인을 외부 유입된 세균 탓이니 혹시나 자위를 하더라도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남친과 의사의 거듭된 폭격으로 맨탈이 무너진 수정은, 그 뒤 남자도 사귀지 않고 자위를 하고 싶어도 꾹 참았다.
임용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남자친구 따윈 당장 없어도 된다 생각했다. 하지만 배란기 때마다 밀려오는 성욕을 억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생리 직전이 되면 길가는 아무나 붙잡고 하고 싶을 만큼 성욕이 치밀었다.
‘어쩌지? 거기서 또 냄새난다고 하면···.’
차라리 도훈을 부르지 말까도 고민했지만, 뒷물을 시작도 전부터 이미 음부는 촉촉한 상태였다. 취기에 성욕이 오르는 데다, 하필 생리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자꾸 도훈이 이상한 말을 해서 그래.’
속살을 직접 봐야 살이 찐 줄 알겠다는 둥, 토끼가 아닌 걸 증명할 길이 없다는 둥 도훈은 자꾸 야한 생각이 들게 했다.
‘정말 이상해. 군대 다녀왔다고 사람이 저렇게까지 달라지다니.’
그녀가 기억하는 도훈은 분명 숫기라곤 없는 남자였다.
말수도 없고 여자 동기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 훈훈한 얼굴에도 그닥 인기는 없었다. 게다가 군대 가기 직전 선배와 사귀게 되면서부터는 거의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그랬던 도훈이 복학하고 돌아오자 전혀 남자로 변해 있었다.
여자에게 말도 잘하고, 눈빛엔 자신감이 넘쳤다.
몸매는 더욱 탄탄해 지고, 어딘지 모르게 섹시한 느낌이 들었다. 한마디로 수컷의 향기를 진하게 풍겼다.
"그래도 라면이라니, 뻔한 수작을···."
수정은 도훈의 속뜻을 대번에 알아챘다.
분명 라면 먹고 한판 하자는 뜻이리라.
그러잖아도 오래 굶주려 자기가 먼저 달려들 판이었는데, 알아서 멍석을 깔아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수정이 뒷물을 끝마치고 티슈로 밑을 닦는데 대뜸 초인종이 울렸다.
"나야."
도훈이었다.
‘이크, 벌써 오 분이 지났나?’
"어! 잠깐 도훈아."
그녀는 황급히 팬티를 다시 입으려다 안에 애액이 묻은 것을 보고는 세탁 바구니에 집어 던졌다. 그리곤 노팬티 상태로 츄리닝 바지를 껴입었다.
"다 됐어."
문을 열자 도훈의 손에 맥주캔 두 개가 들려있었다.
"그건 뭐야?"
"아니 반주로 한 캔씩만 더 하자고. 술 좀 깨지 않았어?"
‘어머, 얘 봐라? 진짜 작정한 건가?’
수정은 도훈의 뻔한 수작이 오히려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 너도 남자라 이거지?’
"들어와."
"집 깔끔한데? 네가 나보다 낫다."
"방금 치웠잖아."
"음, 기왕 치우는 거 빨래도 좀 걷지 그랬어."
도훈이 방 한구석에 펼쳐진 빨래 건조대를 가리켰다.
건조대에는 브래지어와 팬티가 굴비처럼 널려 있었다.
‘으악!’
"보, 보지 마!"
"눈앞에 뻔히 있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수정은 황급히 건조대에 널린 속옷을 챙겨 침대 구석에 집어 던지고는 위에 이불을 덮었다.
도훈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우리가 애도 아닌데 뭘 그런걸로 그래."
"몰라! 너 왜케 뺀질뺀질하게 변했니? 군대 가기 전엔 디게 순진한 것 같더니만."
"그땐 네가 날 잘 몰랐겠지."
"참나."
"물부터 끓일까?"
도훈이 싱크대 서랍을 뒤적이자 수정이 말렸다.
"그래도 모처럼 손님인데 시킬 수야 없지. 저기 책상에 잠깐 앉아있어. 내가 할 게."
"그러면야 고맙지."
수정이 라면물을 올리는 동안 도훈은 수정의 책상에 앉아 책꽂이에 꽂힌 임용 서적을 훑었다.
"이것 좀 봐도 돼?"
"재미도 없는 책은 뭐하러."
"네 말처럼 임용 공부 빨리 시작할까 해서."
"오, 너 철들었다?"
"경쟁률 7:1 넘는다며. 나 머리 별로 안 좋아."
"맞다 맞다! 너 1학년 2학기 때 학고 맞을 뻔했지?"
옛 추억이 떠오르는지 선반을 열어 라면을 꺼내던 수정이 키득키득 웃었다.
"세상에···. 얼마나 놀면 학점이 그렇게 되니? 너 성수 오빠랑 같이 가서 교수님 붙잡고 빌었다면서. 제발 F만 주지 말아 달라고."
"옛날 얘긴 왜 꺼내는데?"
"히히.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아, 그때가 그 언니 사귈 때구나?"
도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표정을 바꿔 다시 물었다.
"···너 친해?"
"누구?"
"송지희."
"지희 선배?"
"응."
"왜? 친하면 불편해? 아직도?"
"그냥 대답해줘."
수정이 끓는 물에 라면 스프를 넣으며 말했다.
"남자들은 이렇게 모른다니까?"
"뭐가?"
"지희 선배 말이야. 남자들 사이엔 체육과 여신이네 뭐네 인기 많았잖아."
"그랬나?"
"얼씨구? 지도 예뻐서 혹했으면서."
"철없던 시절 일이야."
"아무튼 지희 선배 여자 후배들 사이에선 최악이었어. 맨날 흘리고 다니기나 하고."
"흘려? 뭘?"
"있어 그런 거. 여자들은 딱 보면 알거든. 또 여우짓하는 구나, 남자들 등 꼴 빼먹으려고."
"그런 게 없잖아 있긴 했지."
"뭘 없잖아 있지야, 아주 대놓고 호구 짓 당해 놓고선."
"흠."
라면을 마저 넣던 수정이 흥분해 소리쳤다.
"이미 졸업한 선배고 부속고에서 근무하니까 이런 얘기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솔직히 지희 선배는 여자가 봐도 최악이야. 너 군대 가고 나서도 여왕벌처럼 남자 꼬아서 벗겨 먹어서, 여자애들은 다 뒤에서 욕했어. 진짜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며."
"근데 니가 왜 흥분을 해?"
"몰라! 남자들은 그저 얼굴만 예쁘면 환장을 해서는···."
그때 도훈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라면을 국자로 젓느라 정신이 팔린 수정의 뒤로 다가 가 어깨너머로 팔팔 끓는 라면을 보고 말했다.
"난 좀 덜 익은 게 좋은데."
"아, 깜짝이야. 언제 여기 왔데?"
"앉아있으니까 심심해서."
"알았어. 푹 익기 전에 불 끌게."
"근데 너 가까이서 보니 예쁘다?"
"무, 무슨 소리야 갑자기."
"내가 그땐 눈이 삐었지. 너같이 참하고 예쁜 애를 두고 지희 같은 나쁜 년이랑 사귀다니."
"······."
수정은 할 말을 잃고 말없이 국자만 휘저었다.
‘뭐, 뭐야? 얘 왜 이렇게 적극적이지? 아직 라면도 안 먹었는데···.’
"남자들 군대 갔다 오면 어른 된다잖아. 확실히 그런 거 같아."
"뭐가?"
"어릴 땐 니말대로 얼굴만 예쁘면 다 좋았거든."
"근데?"
"근데 이젠 몸매를 더 보게 되더라고."
"하-! 요게 응큼하긴."
"왜? 얼굴 뜯어 먹고살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해. 나도 어렸을 땐 잘생긴 남자 좋아했거든? 근데 이제는 몸 좋은 남자도 멋있더라."
"그럼 몸 좋은데 잘생긴 나는 엄청 끌리겠다?"
"요게 군대 갔다 오더니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가서 상다리나 펴! 다 끓었어."
"예썰!"
도훈은 조그만 나무 소반을 들고 가, 방 한가운데 펼쳤다. 수정이 냄비 받침을 손목 스냅으로 날리자 공중에서 낚아채는 재주까지 선보였다.
"역시 운동 신경 아직 살아 있네."
"모르셨어요? 저 체육교육관데."
"풉- 너 왜케 웃겨졌어, 사람이."
"네가 날 잘 몰라서 그렇다니까?"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너?"
수정은 냄비를 들고 와 받침 위에 올리고는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왔다.
"설거지 귀찮으니까 그냥 냄배 째 먹자."
"응, 상관없어."
두 사람은 한참 라면을 먹다 도훈이 사 온 맥주캔을 뜯었다.
"자, 오랜만에 만난 동기끼리 한 잔."
"아이참, 여기서 더 마시면 취하는데···."
"취하면 어때. 어차피 너네 집 인데?"
"야. 너도 남잔데 널 어떻게 믿냐?"
"왜? 내가 덮치기라도 할까 봐?"
"하긴 토끼가 덮쳐봤자지."
"토끼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증명해 보던가?"
도훈은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대화를 통해 슬슬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애초 라면을 여자 혼자 사는 원룸으로 초대한 것 자체가 이미 반쯤은 몸을 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
"어휴, 진짜 확 보여줄 수도 없고."
"피-! 말로는 나도 하겠다, 뭐."
"술이나 마셔."
캔이 부딪히고 목울대로 꿀렁꿀렁 술이 넘어간다.
어느새 면발은 자취를 감춘 라면 국물만이 유일한 안주.
두 사람은 한동안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맥주캔을 비워갔다.
‘하아. 술 마시니까 또 하고 싶어지네. 그냥 확 도훈이가 덮쳐줬으면···.’
수정은 도훈을 유혹하기 위해 츄리닝 상의를 훌렁 벗었다. 안에는 속이 살짝 내비치는 얇은 반팔 뿐. 반팔이 조금 타이트했는지, 그녀의 가슴이 유독 크게 부각되었다.
"아, 술 마시니까 또 덥네. 보일러를 너무 켜놨나?"
"아직도 보일러 때?"
"3월까진 때야지. 밤새 안아 줄 남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수정이 술 되니까 또 막말 시작한다.’
[참으로 화끈한 여성이군요. 저런 부분도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응. 솔직해서 좋네. 가슴도 빠방하니.’
[역시 주인님은 여자 보는 안목이 탁월하시군요. 어떻게 하고 많은 사람 중에서 오늘 밤 자빠뜨릴 여자를 골라내셨습니까?]
‘내가 요새 촉이 좀 좋아진 것 같아. 정보창의 도움 없어도 호감도나 성욕 같은 게 느껴진달까?’
[동조화 현상이군요.]
‘응? 그게 뭔데?’
[자주 사용하는 스킬이 내면화되는 과정입니다. 가령 11th 가이아-1352 시스템에서 가장 많이 애용되는 ‘가로 배기’ 스킬의 경우 사용횟수가 잦아지면 스킬을 따로 사용하지 않아도 비슷한 검격이 가능하거든요. 아마도 주인님께서 정보창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일정 정도의 동조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 그런 것도 가능해?’
[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스킬 강화도 가능하죠]
‘강화?’
[통상의 레벨업은 쿨타임만 줄여주지만, 강화는 스킬 자체의 성능을 개선합니다.]
‘예를 들면?’
[정보창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목록의 가짓수가 늘어난다거나, 또는 호감도 70을 넘어야 열리는 정보들이 60에서도 보일 수 있게 되죠.]
‘오오! 그러니까 레벨업은 사용횟수에 도움을 주고, 스킬 강화는 성능을 끌어 올린다?’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참고로 스킬 강화는 상당량의 경험치가 누적되거나 각성이라는 계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각성이라니?’
[음, 순간의 깨달음이랄까요? 흔히 선종에서의 의미하는 돈오(頓悟)와 유사한 현상이지요.]
‘굉장하군. 어쨌든 스킬은 많이 사용할수록 좋다는 거네?’
[물론입니다.]
"···갑자기 왜 말이 없어?"
도훈이 한참 로시의 설명을 듣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무료해진 수정이 물었다. 그녀는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취기가 상당히 올랐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응, 아니 네가 한 말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뭐?"
"밤새 안아줄 남자 말이야."
"풉-! 야! 그냥 농담한 거잖아. 니가 다큐로 받아버리면 나만 꼴이 우스워져!
그때 도훈이 라면이 올려진 밥상을 한쪽으로 밀치더니 수정을 덮칠 것처럼 들이댔다.
"너 진짜 농담이었어?"
< 146. 낭만의 캠퍼스-1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