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낭만의 캠퍼스-6- >
***
"응, 서현이 수업 가니?"
"네. 제가 주3파로 맞춰서 월요일부터 8교시에요."
누가 범생이 아니랄까봐 서현은 개강 첫날부터 쉼 없이 달리고 있구나.
"주3파? 그럼 나머지 이틀은 뭐해? 집에가?"
"아뇨. 도서관에서 예습하고 복습하고···."
서현의 대답에 가장 놀란 사람의 태영이었다.
"헉! 더 놀기 위해 주3파가 아니라, 예습 복습한다고 주3파라고? 님 실화임?"
"놀면 뭐해.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성수 역시 뜨악한 표정이었으나 방금 전 뱉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서현에게 맞장구를 쳤다.
"맞는 말이야.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울학교 등록금이 싼 편도 아니고."
"맞아요. 요새 임용도 헬이잖아요. 전 1학년 때부터 미리 준비 하려구요."
"1학년 때? 그건 좀 빠른데?"
1학년부터 시험 준비라니?
이건 마치 법대 들어간 학생이 신입생 때부터 사시 준비한다던가, 의대 들어간 학생이 본과도 가기 전에 국시를 공부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실은 저희 큰 언니가 임용을 삼수했거든요. 저한테 이르길 일찍 준비하면 준비할수록 합격이 빠르다고 해서."
"아, 언니가 있구나."
"네. 둘째 언니도 교대긴 하지만 올해 임용 보고요. 둘째 언니까지 대학 때 놀지 말고 공부나 하라며···."
"그럼 삼 자매가 셋 다 교사되는 거야?"
"네. 언니들이 항상 공부하고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연애는 졸업하고 실컷 할 수 있지만, 남는 건 성적밖에 없다면서."
음.
의지가 대단한 아이군.
왠지 이 녀석과 친해지면 임용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는 서현에게 말했다.
"파이팅이 넘쳐 보기 좋다. 너랑 같이 수업 들었으면 학점 받기 유리했을 거 같은데."
"저희 과 선배들 이랑도 교양수업 겹치긴 해요. 혹시 도훈 오빠 수업 뭐 들으세요?"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태영이 뭔가 아니꼬운 표정으로 참견했다.
"넌 나한테는 묻지도 않더니, 도훈이 형한테만 묻냐? 동기사랑 나라사랑 몰라?"
"얘가 왜 이래? 그럼 태영이 넌 뭐 듣는데?"
"됐거든.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흥칫뿡이다."
태영은 자기 동기가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누가 현역 아니랄까봐 유치하기 짝이 없군.
저럴수록 더 싫어질 텐데···.
나는 토라진 태영을 챙겨주는 의미에서, 그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대답했다.
"난 다음 수업 태영이랑 같이 들어. ‘종교 미술의 이해’라고."
"정말요?"
"응. 태영이랑 수강신청 같이 했거든. 교양 수업 몇 개 맞췄어."
"신기하네요. 저도 그 수업 신청했는데···."
"너도?"
"네. 제가 미술 쪽에 관심이 많아서요."
오호라.
이렇게 팔선녀 중 하나와 또 인연이 닿는 것인가?
[기왕 이렇게 된 거 17학번 체육과 여학생들로 하렘을 차려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팔선녀와 주지육림, 캬. 생각만 해도 좋군요.]
‘칠선녀에 일빻녀 아니고?’
[빻녀도 나름 매력 있지 않던가요? 그 정도 몸매면 얼굴도 안보고 덮칠 사람도 많을 텐데요.]
‘그렇긴 하지만···. 같은 과에서 그것도 동기들을 모두 덮치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물론 발각될 위험은 있겠죠. 하지만, 위업이 걸려있다면요?]
‘잉? 팔선녀 위업도 있어?’
[정확하게 그 명칭은 아니지만···. 관련 위업을 알려드리죠.]
나는 힐끔 시계를 보는 척 스마트 워치로 눈을 돌렸다. 어차피 대놓고 봐도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달성 가능한 위업 리스트(현재까지 6/108)
28. 의자왕의 후예. (친구나 동기관계로 묶인 여성, 5명 이상 공략 시 달성. 단, 소속이 명확해야 합니다.)
-당신은 진정한 의자왕의 후예입니다.
-업적 보상 : 공략 완료시 2500포인트. 달성 이후로도 1명씩 추가될 시마다 500포인트 추가 지급.(최대 5000포인트).
‘새끼치기의 달인’ 미들 네임 획득.
‘오오. 이런 위업도 있었구나.’
[네. 하지만 주인님 말씀대로 같은 그룹에 속하는 여성들을 공략해야 하는 만큼 발각될 위험이 존재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3명이나 성공했는데 두 명만 더하면 되는 거잖아?’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섯 명에 2500포인트 받고 위업달성하고, 8선녀 모두를 공략하면 최대 4000포인트도 가능하단 뜻인가?’
[조금 구미가 당기십니까?]
‘포인트 벌이는 항상 옳지. 근데 새끼치기의 달인 미들 네임은 뭐야? 지난 번 인륜을 져버린 자 같은 거야?’
[네. 해당 미들네임을 획득하면 한 가지 추가 버프가 발생합니다.]
‘추가 버프라니?’
[만약 어떤 여성의 공략에 성공하다면, 그녀의 친구나 동기들에게 추가로 호감도 +5를 더 받을 수 있는 버프지요.]
‘아아, 그래서 새끼치기. 이름은 좀 마음에 안 들지만 상당한 메리트로군.’
팔선녀 관련 위업을 확인하자 갑자기 눈앞의 서현이 탐스러운 먹잇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1학년 때부터 임용공부에 올인 한 전형적인 범생 스타일. 남자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과연 네가 나의 유혹을 견뎌낼 수 있을까?
"형 지금 몇 시에요?"
내가 시계를 보는 것으로 착각한 태영이 물었다.
"어. 10분 후에 수업 하겠다. 그럼 서현이도 우리랑 같이가자."
"셋이 같은 수업인가 보네. 그럼 수업 잘 들어라."
"부회장님은 뭐하시게요?"
"난 이제 수업 없어서 학교 헬스장가서 운동 좀 하려고."
성수가 뽀빠이처럼 이두박근을 수축시키며 대답했다.
하긴 저 몸매 유지하려면 매일 운동해 줘야겠군.
"네, 그럼 개강총회 때 뵐게요."
"그래. 수업 잘 듣고."
성수를 뒤로하고 우리 셋은 강의 동으로 향했다. 서현을 가운데 두고 나와 태영이 양 옆에 나란히 걷는 모양새. 태영은 아까 서현의 얘기가 생각났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너 근데 공부만 계속하면 실기는 어쩌려고? 우리 과는 공부만 잘해선 학점 받기 힘들 텐데···."
커리큘럼을 보면 체육교육과는 타 사범대 전공에 비해 몸으로 하는 전공필수 과목이 많은 편이다. 육상이나 체조, 그리고 구기 종목 등. 학교 현장에서 주로 쓰이는 실기 과목들은 대부분 1학점짜리 실기로 들어가 있었다.
태영의 물음에 서현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그러게. 사실 그게 가장 고민이야. 나 몸으로 하는 건 진짜 안 되는데···. 고등학교 땐 줄넘기 과외까지 받았다니까?"
"줄넘기 과외?"
"응, 수행평가로 2단 뛰기가 있었는데 아무리 해도 안 느는 거야. 그래서 엄마가 보다 못해서 과외까지 시켜줬어."
"서현이 너 진짜 우리과 적성이 아니구나? 하고 많은 과 중에서 여긴 왜 온 거야?"
"고등학교 때 체육 샘이 너무 멋져 보였거든. 언니들도 다 교직 선택해서 나도 막연히 교사가 돼야지 생각했는데, 괜히 체육과 골랐나봐."
호오, 이거 잘하면 좋은 기회가 될지도.
"그럼 이번에도 과외 받으면 되겠네."
"네? 과외를요? 누구한테요?"
"응. 실기 종목 시험 볼 때마다 내가 트레이닝 시켜줄 게."
"도훈 오빠가요? 우앙. 오빠 짱 친절 하시당. 맨입으론 안 되겠는 걸요?"
아니. 맨 몸으로 와도 돼.
과외비는 몸으로 받을테니까.
"하하. 나도 뭐 나중에 학생들 가르친다고 생각하고 연습하는 거야. 후배한테 설마 뭐 얻어먹으려고 그러겠니."
"그래두요···. 선배 다음에 밥 한끼 사드릴게요."
"밥도 좋지만 서로 윈윈해야지. 나 사실 이번 학기부터 학점 관리해야 하는데 네 도움 좀 받고 싶어."
나는 태영을 의식해 그렇게 둘러댔다.
"앗.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제가 수업은 진짜 열심히 듣거든요. 필기랑 리포트까지 다 보여드릴게요."
"어어, 나도 나도!"
태영은 우리의 거래에 조바심이 나는지 자꾸 숟가락을 얹으려 했다. 어찌 보면 뻔뻔해 보이지만, 달리 보면 참으로 넉살 좋은 녀석이다.
"전 운동도 딸리고 공부도 안 되니 두 사람한테 음료수라도 사다 바쳐야겠네요."
그때 핸드폰에 알림이 왔다.
정음이었다.
정음 : 할머닌 아직 병원에 계신데 많이 호전되셨어요. 학굔 오셨나요? 저 강의실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어요.
"누구에요?"
"어. 정음이."
"육정음요?"
"우리랑 수강신청 같이 했거든."
"아···."
순간 서현의 눈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 체육과 최고 퀸은 모든 이들의 견제를 받는 건가? 나는 모르는 척 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막 강의실 도착했다네."
"정음이 점심은 먹었데요? 어차피 수업도 겹치는데 같이 먹자고 할 걸."
태영은 대놓고 정음을 챙겼다. 이 녀석이 정음에게 관심이 있었던가? 네가 그래봐야 이미 정음이는 내 여자란다.
"예대 B강의동 맞지? 저기네."
종교미술의 이해 수업은 예술대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우리 셋은 강의실에 들어가 정음을 찾았다. 중간 자리에 앉아있는 정음을 발견하자 태영이 반갑게 소리쳤다.
"얍! 육정음!"
"왔어? 오빠 안녕하세요. 어? 서현이도?"
"응. 나도 이 수업 들어."
"잘됐다. 아는 사람 많으니까 좋네."
정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동기인 태영과 서현과만 대화했다. 그러나 이따금 눈길을 돌리며 나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관심을 표했다.
‘안색이 좀 어둡네. 주말 내내 병원에 있어서 그럴까?’
[확실히 피곤해 보이는 군요.]
‘아아. 격하게 위로해 주고 싶다. 어디 빈 강의실 데려가서···.’
[자중하십시오. 캠퍼스는 학문을 닦는 곳입니다.]
‘학문도 닦고 항문도 닦아주면 얼마나 좋냐.’
[열공하겠다는 결심이 채 20분을 가질 않는군요. 역시 주인님이란 남자···.]
‘아차!’
로시의 뜨끔한 지적에 나는 다시 멘탈을 잡았다.
공부할 땐 공부에 집중하자.
첫 수업부터 이러면 안 돼.
계단식으로 구성된 강의실 앞줄에 서현이와 정음이 앉고 나와 태영이 뒤에 나란히 앉았다. 태영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책상에 올렸다.
"그건 뭐야?"
"테블릿이요. 노트 들고 다니기 귀찮아서요."
태영의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예전처럼 대학 노트를 들고 다니는 학생은 얼마 없었다. 노트북을 꺼내 벽에 코드를 연결하거나, 녹음기를 켜는 학생도 보였다.
‘아, 요새 대학생들은 기계를 많이 쓰는 구나.’
[주인님 학창시절과는 많이 다를 수밖에요.]
‘그래도 손 글씨만큼 좋은 건 없지.’
나는 두툼한 스프링 노트를 꺼내 든 뒤 첫 페이지에 과목명을 진하게 썼다. 그리고 옆으로 날짜와 시간을 기록한 뒤 볼펜으로 줄을 그어 구획을 나누었다.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태영이 물었다.
"형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어. 코넬식 노트 만들고 있어."
"코넬이요? 샤넬 같은 건가?"
"그건 아니고. 난 원래 노트 정리를 이렇게 하거든."
코넬식 노트 정리법.
미국 유학시절 완성시킨 나의 필살기 중 하나다.
1960년대 미국의 코넬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필기법을 연구하여 개발했다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만 있을 땐 어렴풋 듣기만 했는데, 유학을 가보니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이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5R로 요약되는 코넬 필기법은 가장 효과적으로 강의를 정리하는 방법이다.
"우아, 행님 막 복학한 예비역 맞아요?"
"그냥 몸에 익어서 자연스럽게 나오네."
태영은 놀라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도 문득 성수의 말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렇게 필기를 열심히 하는데 성적이 안 나온다면 머리가 얼마나 멍청하다는 거지? 하는 표정이다.
‘얼굴만 봐도 생각을 읽겠다 인마.’
[어쩔 수 없습니다. 과거의 원주인의 업보기도 하니까요.]
‘흥. 공부는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란 걸 보여주고 말겠어.’
[화이팅 입니다. 주인님.]
노트 준비를 마치고 앉아있는데, 강의실 앞문이 열리며 교수가 들어왔다.
"오오!"
"와, 예쁘다."
주변의 웅성거림.
주로 남학우의 목소리였다.
옆에 있던 태영도 내 어깨를 두드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혀, 형. 엄청 미인인데요?"
나 역시 앞에 앉은 정음과 서현을 의식해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흰색의 블라우스에 파란색의 치마정장. 단정하게 묶은 머리에 검은 색 뿔테 안경. 굴곡진 몸매와 특유의 지적인 분위기가 모순적으로 어울리는 젊은 여교수가 자신을 소개했다.
"반가워요. 종교미술의 이해를 맡은 손은주라고 해요. 한 학기 동안 우리 잘 해 봅시다. 질문 있는 사람?"
"혹시 결혼은 하셨나요?"
첫 질문부터 호구조사.
질문을 던진 예비역 남학생은 주변의 눈총에도 아랑곳 않고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각오였다.
"왜? 미혼이면 프로포즈라도 하게? 참고로 전 연하 취향은 아닙니다."
"와하하하!"
교수의 센스 있는 답변에 강의실 이곳저곳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손교수는 손으로 뿔 태 중앙을 슬쩍 밀어 올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을 누구보다 좋아합니다. 출석부 보니까 4학년인데 교양학점 다시 받으려고 재수강한 사람도 있던데, 전 성적만큼은 인정사정 안 봐주니까 열심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손 교수는 몇 가지 주의사항들을 추가로 전달했다.
대출 두 번 이상 걸리면 낙제.
리포트 인터넷에서 베끼다 걸리면 낙제.
시험 볼 때 컨닝하면 낙제.
시작부터 으름장을 놓는 교수의 태도에 처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태영이 질리는 표정으로 속삭였다.
"으으. 저 교수님 장난 아니네요. 이 수업 괜히 신청했나 봐요."
"뭘 어때? 확실해서 좋구만."
"얼굴만 예뻤지 완전 B사감 스타일인데요?"
‘흐흐. 그나저나 정말 꼴리는 몸매네. 어린 것들에겐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어.’
나는 속으로 군침을 다셨다.
< 137. 낭만의 캠퍼스-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