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낭만의 캠퍼스-5- >
도훈은 정음을 떠올리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새터 때 그렇게 살갑게 지내놓고선, 막상 그녀가 힘든 일을 겪을 때 모른 척 한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깨톡이나 보내 놓을까?’
식당으로 이동하는 막간을 이용해 도훈이 메시지를 남겼다.
도훈 : 정음아 학교 왔니? 할머니는 좀 어때?
"부회장님 근데 저희 어디 가요? 참고로 저 고기 무진장 좋아하는데···."
새내기답지 않은 태영의 넉살에 성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고기 좋아해? 잘됐네. 오늘 학식 일품 제육볶음 이던데."
"하, 학식요? 설마 그거 학생식당의 준말은 아니겠죠?
"뭐여? 사준다고 해도 불만이여?"
"아, 아뇨. 그건 아니지만···."
태영은 기껏 사준다는 점심이 학식이란 소리에 금세 풀이 죽었다.
백반 2,500원.
일품이라고 해봐야 3,300원이 최대인, 대학생들의 가장 저렴한 식사. 밥을 먹는다기보다, 위장에 음식물을 밀어 넣는다는 표현이 적절한 곳.
"학식 좋죠. 오랜만이네요."
도훈은 태영과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나이 들고보니 맨날 "언제 밥한 끼 하자."라며 공수표를 남발하는 선배보다, 저렴한 학식이라도 사주는 선배가 훨씬 좋은 선배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솔직히 대학교 1학년이든 4학년이든 소득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 그네들의 뻔한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면, 사비를 털어서라도 후배들을 챙기는 성수의 마음이 여간 기특했다. 도훈은 금액보다 그 마음 씀씀이에서 성수의 자상함을 읽었다.
‘성수는 역시 좋은 놈이군.’
학생식당은 무척 붐볐다.
식권을 사고, 식판을 들고 기다리는데 길게 늘어선 장사진이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세 사람은 긴 줄에 서서 잡담을 나누었다.
"태영이 너 첫 수업 들었어?"
"네. 3교시 수업 듣고 나왔는데, 교수님 엄청 젊으시던데요?"
"뭔 수업?"
"성 심리학요."
"엥? 뭔 남사스럽게 그런 걸 듣냐?"
"왜요, 여자들도 엄청 듣던데요? 아무튼 교수님 진짜 동안이었어요. 잘해야 30대 후반?"
잠자코 듣고 있던 도훈이 한마디 했다.
"30대면 교수가 아니라 강사 아냐?"
"무슨 말씀이세요?"
"보통 교양수업은 정교수들보단 밑에 부교수나 전임강사들이 많이 뛰어. 시간 강사도 제법 있고."
"다 교수님 아니예요?"
"편의상 직함이야 다 교수라고 부르긴 하지. 근데 자세히 알고 보면 신분이 제각각이거든."
"아하, 도훈이 행님은 진짜 모르는 게 없네요?"
‘모르는 게 없다기보단 이 정도는 상식인데···. 하긴 갓 스무살 된 새내기니 모를 수도 있겠군.’
"행님, 학점도 잘 받으셨죠? 혹시 전 장학생?"
"풉-. 도훈이가?"
성수가 억지로 웃음을 참는 것처럼 두 볼을 씰룩거렸다.
‘뭐야? 성수 표정 왜 저래?’
[음, 이도훈 군의 학점은 바닥입니다. 본래부터 공부에 관심 없기도 했지만, 군대 가기 직전 하필 연애에 빠지는 바람에···. 결국 체육 관련 교양수업을 교수한테 빌다시피 해 학사 경고 직전에서 그쳤죠. 그 수업을 함께 들었던 사람이 바로 박성수였구요.]
‘학고 수준이면 평점 2점대 초반이란 말이잖아? 대체 성적관리를 어떻게 하면 그렇게 돼?’
[그건 다음에 자세히 설명해 드리려고 했는데···. 대충 요약해 드리면 당시 썸 타던 송지희가 원흉이었습니다.]
‘군대 가기 전 사귀었다가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는 여자애?’
[네. 맞습니다. 송지희는 도훈을 노예처럼 부렸습니다. 뻔히 수업이 있는데도 불러내 심부름을 시키기일 수고, 자기 레포트를 대신 맡기며 정작 도훈군의 과제는 하나도 못하게 만들었죠.]
‘아니. 얜 무슨 호구냐? 이 얼굴에 이 몸매 가지고 여자에게 휘둘리고 다녀?’
[스무 살 밖에 안된 초보가 연애 고수의 밀당에 놀아난 셈이랄까요? 갖은 감언이설과 아양, 엄살을 떨어대며 살살 꼬득이는 솜씨에 전생의 원주인은 현대판 머슴처럼 부림 당했습니다. 게다가 그 끝을 알다시피 토끼 전설로···.]
도훈이 이를 빠드득 소리 나게 물었다.
‘아오, 이 천하의 썅년을 확 그냥···.’
"도훈이가 머리가 나쁜 것 같진 않은데 공부를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라."
"아···."
"그래도 이제 예비역이니 정신 차려야지. 형은 참고로 지난 학기 30% 받았다."
"그게 뭐예요?"
"어, 사범대 통틀어 학년 원탑한테 전장, 그리고 각과 1등들에겐 반액. 마지막으로 상위 10% 안에 들면 30% 장학금을 주거든. 내가 생긴 건 이래 무식해 보여도 공부는 좀 한다. 하하하!"
성수가 우람한 가슴을 내밀며 껄껄 웃었다.
"우아, 선배 다시 보여요."
태영이 존경을 담은 눈빛으로 성수를 바라보자, 그것을 바라본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호승심이 일었다.
공부에 있어서만큼 과거 신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그였다. 그런데 눈앞의 고릴라같이 생긴 성수도 30% 장학금을 받는다고 자랑하는 판국에, 자긴 학사 경고를 겨우 면한 수준이라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이제부터 공부 빡시게 할라구요."
"오. 좋지. 30% 장학금이 얼마 안 돼 보여도 나름 쏠쏠하거든."
"30%요? 그것 가지곤 성에 안 차죠. 기왕 할 거면 전장 노려야죠."
도훈의 진지한 태도에 성수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단순 허세라고 하기엔 몹시 진중한 태도였고, 그가 알던 도훈이 공부에 이런 자신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얘가 군대 갔다 오더니 진짜 철들었나 보네?’
"그래. 좋은 태도다. 물론 최근 임용이 내신 급간 점수가 많이 줄긴 했다지만서도, 학점 관리 잘해놓으면 어쨌든 임용에도 도움이 될 거야."
성수는 도훈의 각오를 칭찬하더니 마지막에 사족을 덧붙였다.
"하지만 쉽진 않을 거야. 우리 과에서 전장 배출한 적이 개교 이래 한 번도 없었거든."
"정말요? 개교이래요?"
"아무래도 사범대 특성상 입시 결과가 좋은 수교나 영교 간혹 국교에서 돌아가면서 탔지. 특히 작년엔 영어교육과 1,2,3학년이 트리플 크라운으로 쓸어 버린 적도 있었고. 자기들끼리 트레블 달성했다고 쫑파티까지 하고 난리도 아니더만."
"하-. 역시 체육교육과는 무리인건가···."
성수의 비관과 태영의 탄식에도 도훈은 여전히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럼 제가 체육과 최초로 전장 도전해 볼게요."
"하핫! 역시 남잔 자신감이지. 태영이 너도 보고 배워."
"넵."
성수와 태영은 도훈이 반쯤 농담으로 던지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도훈은 진심이었다.
[정말로 공부에 매진 하시려는 생각입니까?]
‘못할 건 또 뭐야?’
[하지만 그 머리를 가지곤···.]
‘기억해 로시. 공분 머리로 하는 거 아냐.’
[그럼요?]
‘엉덩이로 하는 거지.’
[네? 인간은 피하지방에도 두뇌가 달려 있습니까?]
‘아니. 근성이 중요하다고.’
[아···.]
‘나도 과거에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지. 정우 쟤는 아이큐 149 천재라더라···. 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면전에 욕을 퍼붓고 싶었어. 내가 공부하는 것 한 번이라도 봤냐고. 공부하다 어금니가 빠질 정도로 치열해 본 적 있냐고.
내가 얼마나 피터지게 공부해서 이 자리에 올랐는데, 천재라는 두 글자로 내 노력을 깎아내리지 말라고.’
[오···. 과연 주인님은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군요.]
‘솔직히 도훈이 평점 듣기 전까진 공부 생각 별로 없었어. 이번 생만큼은 지긋지긋한 공부랑 담쌓고 싶었으니까. 근데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무슨 류현진 시즌 방어율 같은 걸 점수라고 달고 다녀? 난 못생겼다는 소리는 참아도 무식하다는 소린 못 참어.’
자칭 타칭 ‘공신’이라 불리던 이정우는 다른 무엇보다 공부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전생에서도 늘 전국 모의고사 순위표에 몇 등까지 찍었는지 자랑처럼 외우고 다닐 정도. 그런데 환생한 이도훈의 성적이 바닥을 밑바닥 까는 것을 알게 되자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다.
[어쨌든 장차 교사가 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니만큼 저 역시 적극 응원하겠습니다.]
‘그래. 두고 봐. 내 실력을 보여주고 말 테니까.’
[그렇다고 플레이어의 본분을 잊진 말아주시길.]
‘당연하지. 여자도 잘 먹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 되고 말겠어.’
[여자는 음식 아니래도 요···.]
학식은 그런대로 먹을만했다. 시쳇말로 가성비가 갑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도훈이 학내 편의점에서 아이스커피를 쐈다.
"허어, 기왕 사는 거 후식까지 내가 내려고 했더니."
"아니에요. 저 저번 주말에 알바 끝냈잖아요. 월급 받았어요."
"오! 그래서 5만원짜릴 막 들고 다니는 건가?"
아무렇게나 던진 성수의 말에 도훈이 흠칫 놀랐다.
‘그러고 보니 이 돈은 아침에 지하철에서 받은 거구나.’
"아, 예. 은행 넣기가 귀찮아서."
"역시 커피엔 담배지. 태영이 너 담배 피우던가?"
"아뇨. 저 비흡연자요."
"우리 지금 한 대 피우러 갈 건데···."
"괜찮아요. 전 어렸을 때부터 피씨방 자주 댕겨서 담배 냄새 신경 안 써요."
"그래. 역시 넌 싹쑤가 된 놈이구나."
"헤헤. 행님들 따라 당기면서 많이 배워야죠. 잘 챙겨 주십쇼."
세 사람은 커피를 들고 학내 흡연장소로 향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마침 주제가 저녁에 있을 개강총회로 넘어갔다.
"집행부에서 행사 준비를 하는데 일손이 좀 필요할 거 같아. 도훈이 너도 저녁에 시간 좀 내 볼래?"
"개강총회 하는 데도 일손이 필요해요?"
"당연하지. 어차피 끝나고 술 먹는 게 주목적인데 안주가 있어야 할 거 아니냐. 통닭도 몇 마리 시키긴 할 건데 돈 아끼려고 어제 마트가서 장 봐놨어."
‘대학생들은 여전히 저렴하게 노는구나. 강의실 의자 빼고 박스 깔고 소주병 놓고 전붙이고···. 우리 때랑 변한 것도 없네’
"알겠어요. 딱히 바쁜 일 없으면."
"근데 도훈이 너 조교 샘이랑 많이 친 해?"
도훈은 민주의 이야기가 나오자 살짝 긴장했다. 이 메조녀가 이상한 소문을 낸 건 아니겠지?
"···왜요?"
"아니 아침에 개강총회 건으로 조교샘 보고 왔는데 샘이 네 칭찬을 그렇게 하더라니까?"
"아···. 뭐 새터 때 일 많이 도와줘서 그런가 보죠."
"그런가? 아무튼 조교샘이랑 친해서 나쁠 거 없으니 잘해드려. 우리 직속 선배님이기도 하니까."
"네."
"근데 조교샘 몇 살이세요?"
태영의 물음에 성수가 답했다.
"이제 스물 다섯인가? 사범대 조교 중에선 젤 어린 축이라고 알고 있어."
"슴 다섯. 어쩐지, 첨 봤을 때 4학년 선배 줄 알았어요."
"흐흐. 민주 샘이 이쁘긴 이쁘지?"
"네. 저희 동기 톡방에서 인기 투표했는데 3등인가 했을 걸요?"
"1학년 동기방? 나도 거기 들어 있는데 그런 거 못 봤는데?"
"아, 1학년 남자 동기들만 있는 방요."
"그럼 1,2등은 누구야?"
"당연히 1등은 정음이고, 2등이 좀 의외였는데···."
"설마 마유미?"
"아뇨. 회장님은 순위 없구요."
"엇. 유미가 키가 커서 그렇지 빠지는 얼굴은 아닌데?"
"그 키가 가장 문제죠. 좀 부담스럽게 크잖아요? 180 넘는 거 아니에요?"
"에이 그 정도까진 아니고."
"아무튼 너무 커도 솔직히 여자 같이 안 보이니까. 현실감이 없달까?"
"그래서 2등이 누군데?"
도훈도 관심을 드러냈다.
1학년 전체가 모인 방엔 우연히 초대되어 들어가 있지만, 남자 동기들만 모인 방은 금시초문. 현역들은 누구를 학과 최고 미인으로 꼽았을까? 참고로 1등과 3등은 이미 꼽아봤다.
"서현이요."
"서현이?"
"서현이가 누군데?"
"왜 이번에 수석 입학한···."
"아! 그 안경 쓴 애? 하긴 얼굴 귀엽긴 하더라. 좀 조용해서 그렇지."
"맞아요. 확실히 체육과에 어울리는 비주얼은 아니죠. 완전 범생 스타일. 소문에 실기는 거의 과락만 면하고, 수능으로 발랐다는 얘기가 돌더라고요. 실제로도 공부 엄청 잘했데요."
"그래? 그럼 올해 우리 과에서 전장 두 명 나올 수도 있겠다?"
성수가 농을 던졌지만, 도훈은 그다지 웃고 싶지 않았다.
다만 서현이란 학생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골똘히 생각할 뿐이었다.
‘1학년 인기투표 2위 오를 정도의 와꾸가 전혀 기억에 없네? 이름은 기억 나긴 하는데’
그가 아는 1학년 여자 후배라곤 육정음과 쓰리썸을 펼쳤던 이효민, 그리고 수강신청 날 보드게임 방에서 한판 벌인 양희주가 전부였다. 나머지 다섯명은 이름조차 가물가물했다. 다만 서현이란 애가 좀 괜찮았던 것은 기억났다.
"엇, 쟤도 양반은 못 되는구나. 서현아!"
태영이 길가를 지나가는 여학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긴 생머리에 청바지 흰색 맨투맨티를 입은 안경 여학생이 힐끔 고개를 돌린다.
"···정태영?"
"너 어디가냐?"
"나 지금 수업 들으러. 엇, 안녕하세요, 선배."
서현이 뒤늦게 성수와 도훈을 발견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도훈은 그제야 서현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아, 얘가 서현이구나. 얼굴 보니 알겠네. 흠, 나름 귀염상인데? 피부도 좋고.’
서현은 유달리 피부 결이 좋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피부는 백인이라고 착각할 만큼 하얗게 빛이 났다. 게다가 알이 동그랗고 커다란 안경은 그녀의 나이를 더욱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도훈 오빠도 오랜만이에요."
서현은 세 사람 중 유독 도훈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새터 이후 도훈은 1학년 여학생들 사이에서 워너비 남친 1위에 올라있는 상태. 그러한 타이틀이 호감도를 전반적으로 재고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 같았다.
[이열~, 기억에도 없던 후배마저 주인님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군요. 역시 체육과 얼굴마담!]
‘얼굴마담은 무슨. 그래도 얼굴 다시 보니 기억나네. 새터 때 세 여자에 신경 쓰느라 말도 별로 못 나누긴 했지만.’
도훈은 서현의 귀여운 얼굴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항간에 체육과 17학번 여학생들을 팔선녀라 부른다던데, 전반적으로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
‘물론 빻녀는 빼고···.’
< 136. 낭만의 캠퍼스-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