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53화 (133/2,000)

< 135. 낭만의 캠퍼스-4- >

디스플레이에 떠오른 위업과 미션은 환생 이후 지금껏 남겨온 발자취이자 앞으로 나아갈 이정표와 같았다.

완료된 미션은 뿌듯함을 선사했고, 아직 진행 중인 것들은 분발을 촉구했으며, 열람해 본 위업들은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돌이켜 보면 수많은 여자를 공략한 것 같지만, 여전히 내 플레이어 레벨은 ‘하수1’에 지나지 않는다.

겨우 초심자를 벗어난 수준.

RPG 게임으로 치면 이제 막 튜토리얼 마치고, 시작 마을 사냥터에서 알짱거리는 셈이다.

‘이래서 언제 하수를 벗어난담? 그래도 중수는 되어야 어깨 좀 펴고 다닐 텐데.’

[한술 밥에 배부를 리 있겠습니까? 일단 하수2부터 차근차근 올라서는 것을 목표로 하시죠.]

‘하수2까지는 얼마 남았지?’

[하수 단계에서는 7개 업적 단위로 승급합니다. 기달성된 위업의 숫자가 모두 3개므로, 앞으로 4개 더 추가하시면 됩니다.]

4개의 위업.

많다고 보면 많고, 적다고 보면 적을 수 있는 숫자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개척하기보다, 기존에 진행 중인 위업들을 적절히 섞으면 한 달 안에 가능할지도.

‘승급하면 스킬 하나 더 받는 거 맞지?’

[물론입니다.]

‘뭔가 대학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스킬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원하시는 스킬이 따로 있으신가요? 말씀해 보시죠. 관련 스킬이 있는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음, 나이 먹고 또 강의 듣기 귀찮으니까 나 대신 수업 들어줄 분신이 있으면 좋겠군.’

[호오, 또요?]

‘아니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모조리 머릿속에 담아둘 수 있는 암기력! 캬, 그런 스킬만 있으면 전액 장학금 받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

[재밌는 발상이군요. 다른 것도 있으십니까?]

‘흠. 뭐니 뭐니 해도 여자들 많이 꼬시는 게 최고지. 상대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독심술도 괜찮고.’

로시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분신술 관련 스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

[하지만 분신이 본체와 똑같은 지성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능력 또한 발휘할 수 없고요.]

‘그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여러 가지가 있겠죠. 알리바이의 확보라든지, 필요시에 머릿수를 채우는 용도 등···. 하지만 그것보단 ‘마법의 문고리’ 아이템을 추천하고 싶군요.]

‘마법의 문고리?’

[네. 7000 포인트짜리 아이템인데, 쉽게 말해 축지법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장비입니다.]

‘축지법이면 그 한 번에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는 그 무공이잖아?’

[그렇죠. 해당 아이템은 문고리를 부착한 어떤 문이든 포탈로 탈바꿈시킵니다. 가령 지금 보이는 전동차 문에 문고리를 댄 뒤, 주인님의 원룸을 상상하시면 자동으로 그곳으로 넘어가는 것이죠.]

‘엥? 저건 슬라이딩 도어잖아. 내 원룸은 여닫이고.’

[문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문을 넘나드는 행위, 즉 안과 바깥을 연결하는 지점을 통과하는 것이 아이템의 발동조건입니다.]

‘아하, 거리 제한은 있고?’

[지구 안에선 어디든 가능합니다.]

‘헐? 그럼 아침에 여기 있다가 뉴욕에서 브런치를 먹고, 오후에 마드리드에서 관광 좀 한 뒤에, 저녁엔 도쿄 시부야 선술집을 갈 수도 있다는 거네?’

[정확합니다.]

‘대박! 해외여행 다니는데 돈도 안 들겠다.’

[하지만 조건부 발동입니다.]

‘무슨 조건?’

[머릿속에 상상한 곳을 실제로 가봐야 한다는 점이죠.]

‘억! 그럼 미국이든 스페인이든 무조건 한 번은 발을 딛어야 한다는 소리야?’

[네. 그리고 가본 곳이라고 해도 100% 확률로 성공하진 않습니다.]

‘그건 또 왜?’

[공간이동은 지구의 물리법칙을 심하게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누군가에 발각될 위험이 있을 때는 스킬 자체가 발동을 중지해 버립니다.]

‘아무도 눈치 못 챌 때만 사용 가능하다, 이거구만.’

[네.]

조건이 까다롭긴 해도 공간을 넘나드는 마법의 문고리는 엄청난 아이템이 아닐 수 없었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그야말로 분신술과 같은 효과를 제공한다는 의미니까.

‘오케이. 일단 마음 속에 찜해 놓도록 하지. 이제 겨우 800포인트 모았는데 7000 포인트는 언감생심이라고.’

[두 번째 말씀하신 완전 기억은 지난번 랜덤 박스에 뜬 포토그라프 메모리의 상위 스킬, ‘과잉기억 증후군’이 있습니다.]

‘증후군? 어째 이름이 병 같다?’

[맞습니다. 실제로도 서번트 증후군의 일종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사이드 이펙트니까요. 해당 스킬은 뇌를 조작해 망각 기능을 차단함으로써 모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만들어 줍니다.]

‘짱이네. 이 스킬은 어떻게 구해?’

[운에 맡겨야죠.]

‘음, 랜덤으로 얻는다는 소리구나.’

[네.]

‘혹시 독심술은 관련된 스킬은 없어?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아이템을 사는 것 말고. 지난번에 이어폰 버전 써보니 영 불편하더라고. 섹스할 때 머리에 헤드셋 차고 있을 수도 없잖아.’

[마인드 리딩 말씀이시군요. 당연히 스킬의 형태로도 존재합니다. 해당 스킬은 위업 달성으로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

[관련 위업을 디스플레이에 띄워 놓겠습니다.]

★달성 가능한 위업 리스트(현재까지 6/108)

48. 당신이 궁금해요. (전맹 급 시각장애를 갖춘 여성의 호감도를 100까지 끌어 올릴 시 달성.)

-당신은 사랑은 마침내 장애를 뛰어넘었습니다.

-밀당의 달인 위업과 연동됩니다.(호감도 100이상 두 명)

-업적 보상 : 마인드 리딩(2Lv, 스킬)-상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용 시 5분간 마인드 리딩이 가능하며, 레벨이 증가할수록 사용 시간이 증가합니다. 쿨타임 1시간 고정.

‘오, 이거 왠지 쉬워 보이는 업적인데?

나는 로시와 대화를 나누며 전동차에 올랐다. 약속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집에 들렀다 바로 학교로 가야 할 정도로 빠듯했다.

[글쎄요. 주인님의 외모가 전혀 통하지 않는 대상을 상대로 과연 공략이 쉽겠습니까?]

‘그래도 막 잘해주면 되는 거 아닌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쉽게 못 여는 측면이 있습니다. 게다가 호감도를 100까지 끌어 올리는 것은 사람에 따라 극히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고요.]

‘생각만큼 쉽진 않다는 소리네?’

[그렇습니다. 지루한 장기전을 예상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일단 알겠어, 그나저나 아침부터 물 뺀다고 너무 늦었다. 약속 맞추려면 서둘러야겠는데.’

지하철에서 내린 뒤 집으로 향했다. 가방에 대충 필기구와 노트를 챙기고는 행거에 걸린 옷을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

진 청바지에 소라색 셔츠, 두툼한 롱 가디건 하나만 걸쳤을 뿐인데도 얼굴에서 빛이 났다.

거울을 보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 같다.

"흠, 그나저나 이발을 좀 해야 겠는데?"

[이발 안 하신 지 한 달이 넘긴 했습니다.]

어느덧 이도훈의 몸에 들어온 지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간 내버려 둔 머리가 덥수룩하게 자라 살짝 지저분해 보인다.

‘저녁에 동네 미용실이라도 들러야겠군.’

***

대학에 도착한 도훈은 입을 쩍 벌렸다.

"사람 겁나게 많네."

개강 첫날.

전교생 2만에 육박하는 종합대학의 캠퍼스는 젊은 남녀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3월이라곤 하지만 제법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서둘러 봄을 재촉하는 것처럼 여학생들의 옷차림은 무척 짧은 편이었다.

‘예쁜 애들도 엄청 많고.’

사범대 새터 행사 때 느끼긴 했지만, 거대한 종합대학의 캠퍼스엔 예쁘고 어린 여자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어쩌면 40대에 환생한 이정우의 처지에서, 단지 20대 초반의 아가씨라는 이유만으로 예뻐 보이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인님 침 닦으십시오.]

‘크흡, 내가 흥분 안 하게 생겼냐? 이렇게 먹을 게 널렸는데?’

[여자는 음식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분별하게 파트너만 늘리는 행위는 결코 업적달성에 도움되지 않습니다. 신께서 부여한 권능을 부디 현명하게 사용하시길.]

로시의 핀잔에 도훈이 말꼬릴 돌렸다.

‘됐고, 학떨목이 어디야? 거기서 보자는데 어딘 줄 당최 알수가 있나.’

[학떨목은 ‘학점이 떨어지는 나무’라고 이름 붙은 사범대 앞 정원 벤치를 말합니다. 사범대 학생들의 주요 휴식공간이죠.]

‘오케이. 그럼 사범대로 가면 되는 거네. 저 앞에 몸매 좋은 학생한테 길 좀 물어봐야겠다.’

도훈의 앞에는 뒤태가 끝내주는 아가씨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고 있었다.

두툼해 보이는 겨울 치마에, 커피색 스타킹, 그리고 빨간색의 하이힐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저기, 말씀 좀 물을게요. 여기서 사범대 가려면 어디로···."

"네? 어라? 도훈 오빠?"

"엉, 너는? 빻···"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빻녀"라고 말할 뻔하다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

그녀는 바로 뛰어난 몸매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빻아버린 얼굴의 소유자, 양희주였다.

바로 보드게임방 젠가녀.

"빻···?"

"아, 아니 빨리도 왔다고. 학교를."

"네. 저 수강신청 실패해서 월요일 1,2교시 들었잖아요. 도훈 오빤 이제 오시는 거예요?"

"어, 난 월요일은 오후 수업이야."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교정을 걸었다.

도훈은 말을 건 사람이 하필 양희주라는 데서 시무룩했지만, 여전히 희주는 얼굴에 검은 봉다리 하나만 씌우면 충분히 꼴릴만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얘도 참 자기 장점을 극대화하는 타입이란 말이지. 얼굴 가리고 섹시백 대회 나가면 당장에라도 입상하겠어.’

"주말은 잘 보내셨어요?"

희주가 물었다.

"엉. 뭐 그럭저럭. 넌? 남자 만났니?"

"왜 그래요, 선배. 사생활 터치하기 있긔 없긔?"

희주가 나름 귀여운 말투를 구사했지만,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질끈 주먹을 쥐고 말았다.

‘그 얼굴로 한 번 만 더 귀척하면 죽빵 날려 버린다.’

"난 알바 마무리했어. 이제 개강이니까."

"히히. 그럼 이번 달 알바비 나왔겠네요? 오빠 저 점심 사주세요."

희주가 갑자기 팔짱을 끼는 바람에 팔꿈치에 물컹 가슴이 닿았다. 백퍼 의도된 동작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이미 한발 뽑은 뒤였기 때문에 도훈은 동요하지 않았다.

‘요 여우같은 계집애가 어디서 남들 다 보는데.’

도훈이 곧바로 팔짱을 풀어내더니 희주를 밀쳐냈다.

"다음 기회에. 나 선약 있어."

"누구? 여자에요? 설마 정음인 아니죠?"

눈에 띄게 정음을 견제하는 희주의 모습에 도훈은 어이가 없었다. 스스로를 정음에 견줄 만큼 경쟁력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 너 부회장님 알지?"

"성수 오빠요?"

"응, 형이 밥같이 먹재서."

"힝. 저도 끼면 안돼요?"

"그걸 왜 나한테 묻냐? 형한테 물어봐야지. 근데 너 밥 먹을 사람 없어?"

"아뇨. 저 동기 여자애들이랑 밥 먹으러 가는 길인데요?"

"뭐? 근데 갑자기 왜 밥을 사달래?"

"그야 밥 먹고 후식으로···"

희주가 실실 쪼개더니 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켰다.

"저나 드시라고."

"얼씨구, 이게 신성한 캠퍼스에 못하는 말이 없네."

"왜요? 오빠랑 저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

"그런 사이건 아니건 대낮부터 하고 싶냐?"

"어때요. 땡기면 할 수도 있는 거지."

"얘 봐라?"

희주는 일부러 허리를 꼿꼿이 펴 가슴을 내밀었다.

봉긋 튀어나온 가슴과, 잘록한 허리, 빵빵한 엉덩이가 완벽한 S라인을 그리며 도훈의 방심을 흔들었다.

"애라니요? 제 몸이 정말 애 같아요? 전혀 아닐 텐데?"

‘와, 아침에 윤혜경이랑 한판 안 했음 홀라당 넘어갔겠네. 몸뚱이 하나는 진짜란 말이지.’

도훈은 머리를 흔들며 삿된 마음을 떨쳐버린 후 희주에게 말했다.

"양희주. 난 학교에선 이런 대화하고 싶지 않아. 무슨 소린 줄 알지?"

"치. 알았어요."

거듭된 거절에 시무룩해진 희주를 향해 도훈이 조용히 말했다.

"말 잘 들으면 오빠가 다음에 우유 주사 듬뿍 놔 줄 께."

도훈의 음탕한 약속에 희주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네! 히히. 근데 오빠, 왜 저랑 계속 같이 가세요?"

"어? 너 사범대 가는 길 아니었어?"

"아니 저 동기애들이랑 밥 먹으러 간다니까요, 상대 뒤로. 사범댄 저쪽이잖아요."

희주가 방금 전 지나쳐온 삼거리의 한쪽을 가리켰다.

도훈은 깜빡했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너랑 얘기하다 지나쳐 버렸다. 그럼 점심 잘 먹어."

"네. 오빠두요. 오늘 저녁에 개강총회 오시죠? 그때 봐요."

"그래."

희주를 보낸 도훈은 다시 방향을 틀었다.

사범대 앞 잔디밭 주변으로 커다란 나무 하나가 보였다.

[저 나무가 학떨목입니다.]

‘그렇군.’

나무 아래 벤치엔 개강을 맞은 대학생들이 오랜만에 본 동기와 선후배들과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렇게 모여 커피만 주야장천 마시다 보면, 학점이 오르려야 오르기도 힘들 것이다.

"야 이도훈! 여기!"

학떨목 아래 벤치에 앉아 있던 성수가 도훈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의 옆에는 먼저 도착한 태영이 앉아 있었다.

"도훈 선배 오셨어요?"

"죄송해요. 좀 늦었습니다."

도훈이 사과하자 성수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인마 이거 또 밤에 물 빼느라 늦잠 잤구만."

"네?"

"태영이한테 다 들었어. 태영이가 좋은 싸이트 알려줬다며. 크크."

도훈이 태영을 째려보자 태영이 겸연쩍게 고갤 숙였다.

"행님 죄송해요. 어쩌다 보니···."

"인마, 죄송할 건 뭐야. 사내새끼들이 그런 건 공유해야지. 아나바다 운동 알지? 아껴보고, 나눠보고, 바꿔보고, 다 보고 잊을만하면 또 보고. 껄껄."

성수가 거침없이 아재개그력을 뽐내자 도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나이도 어린 노무 시끼가 벌써 아재 티를 팍팍.’

"암튼 도훈이형 왔으니까 바로 밥 먹으러 가여. 저 2시부터 수업있거든요. 맞다, 그 교양수업 도훈이 형도 같이 신청하지 않았어요?"

"그랬나?"

"네. 교양학점 남았다고 저랑 정음이랑 같이 신청하셨잖아요. 종교미술의 이해."

‘맞다. 그랬지. 그나저나 정음이 못 본 지도 꽤 됐구나. 그때 할머니 쓰러졌다고 한 것 같은데 연락이나 해 볼걸.’

< 135. 낭만의 캠퍼스-4-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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