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49화 (129/2,000)

< 131. 즐거운 사라-36- >

***

경찰서 뒤편 주차장으로 나간 김문수와 임 기자는 서로 담배를 피우며 협상에 돌입했다.

"기사 접읍시다."

"저희가 왜 그래야 하죠?"

정말로 이유를 묻는 게 아니었다.

그에 상응해 무엇을 줄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우린 가십으로 먹고사는 주간집니다. 이번 건은 엄청난 특종이죠. 발행 부수가 몇 배로 뛸 거고,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 회자 될 겁니다. 후속 보도로 삼현 그룹의 후계구도까지 다루게 되면 상반기 주간지 1위는 떼놓은 당상일 거구요. 그런데 무작정 기사를 접으라고요?"

넌지시 속셈을 드러낸 임 기자의 모습에 문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팬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하지만 주먹보다도 강한지도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무슨 말인 줄은 다 알아들었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얘기해 보세요."

"삼현 그룹의 연간 광고 유치, 어떻습니까?"

"에이, 그거 가지곤 부족하죠."

주간 대한의 모회사 대한 일보는 언론 재벌이라 불릴 만큼 막강한 자금력을 자랑한다. 대그룹 하나의 광고 정도로 휘둘리는 회사가 아니다.

"참고로 이 건은 윗선에서 직접 내려온 오덥니다."

"윗선?"

"처음부터 제가 취재한 게 아니란 소리죠. 저도 새벽에 편집장님 명령받고 내려왔으니까요. 뭐, 저만 입막음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란 거죠."

수틀리면 돈다발로 입을 틀어막으려던 문수는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기획의 설계자는 대체 어디까지 끈이 닿아 있는 것일까? 상대가 어둠 속에서 암수를 뿌려대는 데도, 도무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다. 누군지도 모르는 적과 싸워야 하는 것이 그를 피곤하게 했다.

"잠시 통화 좀 합시다."

"네, 그러시죠."

주도권을 잡은 임 기자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문수는 저 밉살스러운 면상에 펀치를 한 방 갈겨 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아야 했다.

"변호사님, 옆에 도련님 있죠? 잠깐만 바꿔 주세요."

문수는 한참 뒤에 통화를 마쳤다.

"좋아요.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요?"

"어차피 그쪽이 원하는 건 특종이죠?"

"그렇죠."

"이 건에 버금가는 특종을 준다면 이번 기사 접겠습니까?"

임 기자는 잠시 생각했다.

‘대충 상황 돌아가는 거 보니 고성민은 무혐의로 풀려날 거란 말이지. 돼지 발정제가 자극적인 소재긴 한데, 애초에 펙트가 약하니 단발성 이슈로 그칠 거고. 차라리 년간 광고 유치에 다른 특종을 받아 낼 수 있다면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일단 들어 보고 판단하죠. 물론, 오프 더 레코드는 보장합니다."

"혹시 기파랑이라고 아시나려 모르겠군."

"기파랑? 아! 그 익명 작가?"

문수가 제시한 특종이란 고성민의 필명 기파랑의 정체였다.

돼지 발정제라는 지저분한 스캔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성민은, 기파랑의 필명을 공개하는 것으로 이번 기사를 덮기로 했다.

베일에 싸인 천재 작가가 대기업 회장의 손자라는 사실은 당연히 엄청난 폭발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오, 이 정도면 꽤 괜찮은데? 괜히 삼현 그룹이랑 척질 필요도 없고 말이지. 특종도 내고 광고까지 받는 게 더 이득이겠어.’

"이거 실화맞죠?"

"실화?"

"그러니까 펙트냐구요."

"사실이요."

"좋아요. 그쪽에서 그렇게까지 나온다니 우리도 좀 더 생각을···."

임 기자가 혓바닥을 굴려대는 기미를 보이자 문수가 끝내 버럭 했다.

"임시환 씨!"

"네, 네?"

두 눈을 부라리는 문수의 눈매는 호랑이처럼 매서웠다. 기세에 눌린 임 기자는 자기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당신이 책임자라며? 그런 것도 바로 결정 못 해?"

"아, 아니 그러니까 제가 안 하겠다는 소리가 아니고···."

"아무튼 나로선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는 것만 명심하쇼. 여기서 확답 못 받으면 우리도 더 는 협상 없다는 것도."

그것은 최후통첩이였다. 뭔가 더 얻어내려고 머릴 굴렸다간, 삼현 그룹과의 전쟁을 각오하라는 소리.

그것은 임 기자가 가진 권한을 넘어서는 범위다.

만에 하나 협상이 어그러진다면 독박을 쓰게 되는 것은 이제 자신. 임 기자는 그런 리스크를 감당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기사는 그걸로 대체 하도록 하겠습니다. 단, 인터뷰는 약속해 주시죠. 저희 언론사에서 기파랑의 정체를 최초 공개하는 형식으로."

"그리 합시다."

협상을 끝낸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다.

불편한 관계지만,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였다.

***

임 기자가 대동한 스텝을 데리고 철수하는 사이 문수는 주차장 한 켠에서 걸어 나오는 두 사람과 마주쳤다.

"···아가씨? 은성 아가씨 맞죠?"

"어머!"

은성은 갑작스레 등장한 문수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의 경호원인 그는, 자주 집안을 들락거렸기 때문에 유학 가기 전까지 늘 보던 사람이었다.

"아가씨가 어떻게 여기 계세요?"

"어제부로 한국 왔어요."

"귀국 비행긴 사흘 뒤 아니었던가요? 부모님 기일 맞춰서 비서실에서 예약해 드렸을 텐데?"

"마, 맞아요. 그냥 일찍 오고 싶어서 제가 바꿨어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흠, 아닙니다. 죄송할 것까진."

문수는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모종의 일행과 함께라는 소린 들었지만, 그 맴버에 은성까지 포함되어 있을 줄이야.

"한데 옆에 분은 누구···?"

문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훈의 위아래를 훑었다.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 하나가 은성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아, 오빠 친구분이세요. 저희랑 같이 별장에 놀러 온···."

"안녕하세요. 이도훈입니다."

도훈이 꾸벅 인사했다. 문수는 그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께름칙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성민의 친구라고? 놈에게 저런 친구가 있었던가?’

"처음 뵙겠습니다. 그룹 비서실에 김문수라고 합니다."

도훈은 문수의 다부진 체격에 모처럼 긴장했다. 호랑이 눈매에 곰 같은 덩치, 표범처럼 날렵한 허리가 굉장히 인상적인 사내였다.

‘경호원이라도 되나? 위압감이 장난 아닌데?’

"오빤 어떻게 되고 있어요?"

"변호사님이 전담하고 계시니 잘 해결될 겁니다. 많이 놀라셨겠네요."

"아니에요. 모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별장에 놀러 왔는데 이런 일이 벌어져서···."

"내일 아침이면 회장님 귀에도 이 소식이 들어갈 겁니다. 아가씨께서 함께 가주시면 도련님의 억울함을 푸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아···."

문수의 발언에 은성이 아쉬운 표정으로 도훈을 쳐다보았다. 문수는 은성의 애틋한 시선에 대번에 두 사람의 관계를 대번에 유추해 냈다.

‘뭐야? 저 둘이 애인 사이인가?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주차장에서 같이 나온 것도 수상한데? 허어! 아가씨한테 남자가 붙은 것도 몰랐다니···’

그는 자신의 정보망에 심각한 구멍이 난 것을 느꼈다. 아마 그 균열을 낸 사람은 눈앞의 도훈이라는 젊은 이일 것이다.

‘···왠지 이놈에 대해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군.’

문수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마침 그의 폰으로 전화가 울렸다.

"죄송합니다, 잠시 변호사님 전화 좀 받겠습니다."

문수는 통화를 마치더니 은성에게 말했다.

"도련님 훈방 조치하기로 결정됐답니다."

"다행이네요."

"다만 사안이 복잡한 만큼 두 분 다 아침에 회장님을 찾아 봬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별장에 돌아가시는 데로 바로 짐 싸서 움직이시죠."

"지금 바로요?"

"피곤하시겠지만 서울 돌아가면 아침일 겁니다."

"아··· 오빠, 죄송해서 어쩌죠?"

은성이 도훈을 향해 사과했다.

"아냐. 우린 괜찮아. 그래도 잘 해결되었다니 다행이다."

도훈은 놈에게 한 방 먹인 것으로 만족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시각에 그룹 비서실 직원까지 달려온 걸 보면 기자들과 쇼부 치느라 상당한 출혈을 감수했을 것이다.

‘흥, 그러게 왜 내 동생을 건드려? 이 정도로 그친 걸 다행으로 알라고.’

도훈은 문수가 자신을 의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사태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굳은 표정으로 별장으로 돌아온 성민은 여동생과 곧바로 서울로 떠나야 했다. 다른 사람들과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도망치듯 떠나는 놈의 모습에, 도훈은 통쾌한 웃음을 지었다.

다사다난했던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밝자 남은 일행도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수원으로 간 댔나? 끝까지 함께 못해서 유감이야."

"힝. 오빠 오늘 학교 빠지면 안 돼?"

"첫날부터 어떻게 결석을 해? 게다가 오늘은 개강총회까지 있어서 필참이야."

사라와 스테파니 자매 역시 도훈과 헤어지는 게 무척 아쉬운 눈치였다.

"도훈 씨, 이틀간 함께해서 즐거웠어요."

"저두요."

‘당연히 즐거웠겠지. 육봉 마사지를 그렇게 해줬는데···. 아무튼 좋은 백마였어, 둘 다.’

도훈은 두 사람과 가볍게 포옹을 나눈 뒤 혜은을 따로 불렀다.

"내가 한 말 꼭 기억하고 있어. 알았지?"

"응. 오빠."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하고."

"알았어."

아침부턴 지하철이 운행되었기에 도훈은 서둘러 지하철에 올랐다. 다행히 월요일은 오후부터 수업이라 여유가 있었다. 빈 좌석에 앉은 도훈은 잠시 핸드폰을 만지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이루어진 5연 섹의 여파였다.

***

덜커덩-덜커덩-

지상 철교를 지나는 진동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양평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텅 비어있던 지하철은 어느덧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주인님, 침 좀 닦으십시오.]

‘침?’

어찌나 피곤했던지 입가에 침을 흘린 모양이다. 소매로 침을 훔치는데 앞에 서 있던 여고생들의 키득키득하는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에이 씨 쪽팔리게. 침 흘리고 자면 좀 깨워주지.’

[체력 소모가 극심해 재우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주인님 이라도 다섯번은 무리인 모양이군요.]

‘잠을 별로 못 자서 그래. 그나저나 여기 어디쯤이지? 한강 철교 지나는 거 보니 대충 10 정거장 남은 건가?’

[지금 집으로 가시는 겁니까?]

‘어. 옷 좀 갈아입으려고. 3일째 같은 옷만 입고 다녀서 찝찝해. 교재도 좀 챙겨야 하고.’

[갑작스레 열공모드로군요.]

‘학생이 공부해야지 그럼. 그나저나 성민이 새끼 이번에 혼 쭐 좀 낫겠지?’

[주인님 계략이 제대로 통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제 혜은 양은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정신없을 겁니다.]

‘아무튼 성민이 그 놈 덕에 여자는 실컷 먹고 왔네. 좋은 여행이었어.’

[다소 아쉬운 것은 ‘자매 덮밥’과 ‘금단의 열매’ 위업 달성에 실패하신 부분이랄까요?]

‘그거야 어쩔 수 없지. 사라 자매는 피하나 안 섞인 남이었고, 혜은이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도 ‘백마 타고, 흑마 타고.’ 위업의 절반을 달성한 것, 그리고 ‘너넨 거기 금테 둘렀냐?’ 위업까지 추가하셨으니 절반의 성과는 있는 셈이군요.]

‘참, 금테 위업으로 얻은 기적의 복리 계산기 그거 쓰려면 포인트부터 벌어야되는데.’

[하는 수 없지요. 새로운 미션이 뜰 때까지 기다리시는 수밖에···.]

말이 씨가 되었던 것일까?

갑자기 로시가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미, 미션이 발동되었습니다!]

‘진짜? 농담하지 말고.’

[저도 놀랬습니다. 하지만 미션을 제가 임의로 부여하는 게 아니라 상황이 조성되었을 때만 가능합니다.]

‘뭐야? 그럼 진짜 미션? 여기 지하철에서?’

[네. 이번 미션은 ‘지하철 치녀를 찾아라!’ 미션입니다. 미션에 성공하면 800포인트가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헐! 800포인트라고?’

[단, 이번 미션은 제한 조건이 걸려 있습니다.]

‘그놈의 제한 조건! 뭔데 또?’

[이 열량에 치녀가 숨어있지만, 누군지 알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녀가 하차하기 전까지 미션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뭐? 대상이 누군지도 몰라? 그럼 애먼 사람 공략했다간 치한으로 몰릴 거 아냐? 무슨 미션이 이래?’

[그래서 보상이 높은 것이겠죠. 미션 수락까지는 2:51초 남았습니다.]

‘자, 잠깐. 이건 범죄잖아?’

[치녀를 정확히 찾을 수 있다면 범죄가 아닙니다. 그녀는 낯선 남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아 놔 젠장. 무슨 미션이 이렇게 극단적이야?

물론 미션은 안 받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포인트 한 푼이 아쉬운 나로선, 주어지는 미션을 모두 수행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주인님, 시간이 계속 가고 있습니다.]

‘자, 잠깐만. 대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치녀를 어떻게 찾아?’

[그것이 주인님이 할 일 아닙니까?]

‘제기랄 진짜! 일단 못 먹어도 고다!’

[미션이 수락되었습니다. 디스플레이 창을 터치하시면 미션의 상세 내용이 표시됩니다.]

-지하철 치녀를 찾아라!-

*지하철에 숨어있는 치녀를 공략하는 미션입니다.

*성공 보상으로 800포인트가 주어집니다.

*제한 조건으로 미션 수행 장소가 ‘현재 열차 칸’으로 고정됩니다.

*숨어있던 치녀가 하차하면 자동으로 미션이 소거됩니다.

*남은 시간 : 치녀 하차 전.

우옷! 시간이 없다.

이번 건은 정말로 초단기 미션이다.

나는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서기 무섭게 앞에 서 있던 여고생 중 한 명이 냉큼 자릴 차지했다.

‘저 고등학생들은 아니겠지? 너무 어려보니까.’

나는 인파를 헤치며 열량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금 쓸 수 있는 스킬은 두 가지.

바로 정보창과 싸이코 메트리. 이 두 가지 스킬만으로 치녀를 찾아내야 한다.

상대를 떠볼 기회는 단 두 번뿐.

과연 이번 미션에 성공할 수 있을까?

< 131. 즐거운 사라-36-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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