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즐거운 사라-34- >
***
성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피곤해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어느덧 새벽 3시가 넘어 버렸다. 힘들게 별장까지 유인한 보람이 아무것도 없게 된 것이다.
가뜩이나 열 받는 상황에 느닷없이 경찰까지 들이 닥치니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벽에 남의 집 쳐들어와서 뭣들 하는 행패야? 너희들 이거 불법침입으로 싹 다 고소할 줄 알아!"
"불법침입이라뇨? 말 똑바로 하십시오. 저흰 성폭행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겁니다."
"성폭행? 하-. 어떤 미친놈이···."
잠만 실컷 자고 있던 성민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뭘 해보기나 했으면 모를까.
그때 2층 계단에서 사라와 스테파니 자매가 졸린 눈을 비비며 내려왔다.
"What's going on?"
(무슨 일이에요?)
공교로운 타이밍에 여자들까지 등장하자 김순경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금발 외국인? 설마 외국 창녀들인가?’
1층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성폭행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연히 발견한 엠플, 그리고 두 사람의 외국인을 맞닥뜨리는 순간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추어졌다.
‘그렇구나! 이 놈들이 외국 여자들을 별장에 불러 섹스파티를 벌였던 게군! 지나가던 주민이 그 소릴 성폭행으로 오인신고 한 거고?’
"아무 일도 아니야. 두 사람은 올라가 있어."
도훈의 대답에 사라가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때 성민이 순경을 향해 말했다.
"아무튼 성폭행 같은 일따윈 없으니까 이만 돌아들 가시지?"
"···가시지?"
거듭되는 반말이 끝내 김순경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경찰을 홍어 좆으로 보고 있네?’
"뭐야? 그렇게 째려보면 어쩔 건데? 신고를 받고 출동했건 말건, 아무 일 없는 줄 확인했으면···."
"아직 아무 일 없다곤 안 했는데? 이 순경. 그 엠플 확인해봐."
‘에, 엠플이라고?’
젊은 순경이 후레쉬를 들어 약병을 비추었다. 그 순간 성민의 얼굴이 당혹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아니 저걸 어떻게 찾았지?’
성민은 순경이 든 약병을 뺏으려 들었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이리 내! 너희들이 그걸 왜 들고 있어?"
"너희? 하-. 이거 듣자 듣자 하니까 무슨 경찰을 호구로 보나. 이 순경. 이 자식들 약 빨았는지 확인하게 마약감식반 협조 요청해."
"마, 마약이라고?"
"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보시지?"
"그, 그건···."
성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약병에 영어 내용을 읽던 젊은 순경이 말했다.
"선배님, 이거 동물용 약제 같은 데요? 사람에게 사용 금지라고 적혀 있어요."
"동물?"
"아, 이게··· 그러니까. 돼지 암컷 배란 촉진? 이거 돼지 발정젭니다."
"돼지 발정제라고? 니들 이거 어디서 났어?"
김 순경의 표정이 대번에 바뀌었다. 이제껏 민간인에게 쩔쩔매던 모습에서 순식간에 피의자를 상대하는 것처럼 180도 돌변한 것이다.
"모, 모르는 일이다."
성민은 일단 부인했다.
그러자 김 순경이 추궁의 강도를 높였다.
"당신이 여기 별장 주인이라며? 근데 이곳에서 나온 물건의 출처를 모른다고? 이거 어디다 쓰려고 한 거야?"
"모른다니까 그래? 도훈이 혹시 니 거냐?"
성민은 불쑥 도훈에게 화살을 돌렸다.
"뭔 소리야? 내가 저런걸 어디서 구해?"
"흠, 둘 다 아니니까 어쩌면 이곳 관리인이 구해다 놓은 걸 수도 있겠네."
"관리인?"
"그래. 난 1년에 2~3번 이곳에 방문하거든. 평시엔 항상 별장 관리인이 머물고 있지. 아마도 그 사람 물건이 아닐까?"
성민은 그럴싸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젯밤 이곳에 도착한 것은 입증할 수 있다. 이제 별장 관리인하고만 말만 맞추면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울 수도 있을 것이다.
"관리인 정씨 할아범이면 나도 잘 알지. 여기 순찰할 때마다 가끔 보니까. 근데 설마 60이 넘은 노인네가 이걸 몰래 숨겨놨다고 주장하는 거야? 그것도 돼지 발정제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하, 이거봐라. 말로 해선 안 되겠네. 이 순경, 여기 있는 여자들 바로 신원조회 실시하고 약물에 취한 사람 있는지 확인해."
"뭐라고? 지금 어디서 공권력 남용이야!"
"남용 같은 소리하고 있네! 집안에서 가축용 발정제가 발견되었고, 성폭행 신고까지 들어온 마당에 그냥 넘어가라고?"
젊은 순경은 곧바로 무전기를 들고 서에 협조 요청을 구했다.
치직-
"예, 여기 성폭행 신고 접수된 별장인데요, 지원 요청 부탁합니다. ···아뇨, 확인된 바는 아직 없는데 대신 약물 오남용이 의심됩니다."
사태가 확대되는 기색이 보이자 당황한 성민이 중년의 경찰을 따로 불렀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어라? 갑자기 존댓말이네?"
"아니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이 사람들은 내 초대받고 별장에 놀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무슨 약물검사니 뭐니 하시면···."
"그건 조사 끝나고 말씀하시고."
경찰이 귀찮다는 듯 돌아서자 성민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얼마면 돼요?"
"···뭐?"
"아니. 원하는 게 얼마냐고요. 내가 알아서 맞춰 드릴 테니까···."
"이 새끼가 진짜!"
경찰이 성민의 팔을 뿌리치더니 버럭 소리쳤다.
"너 이 새끼 지금 경찰 매수하는 거야?"
"···예, 예?"
"이 새끼 진짜 안될 놈이네. 어이, 이 순경."
"넵."
"이 자식 금품매수 및 공무집행방해로 현장 체포하니까 당장 연행해!"
"알겠습니다!"
젊은 경찰이 성민의 팔짱을 호되게 붙들었다. 위아래 없는 안하무인 적인 태도에 그러잖아도 고깝게 보던 중에 잘걸렸다는 표정이었다.
어처구니없이 끌려나가게 된 성민이 몸부림을 치며 저항했다.
"뭐, 뭐야! 당신들 내가 누군 줄 알고!"
"니가 대통령 아들이라도 난 눈 하나 깜빡 안 하니까 서에 가서 말씀하시죠."
"너희들 이러면 분명히 후회할 줄 알어!"
도훈은 연행되어 가는 성민을 보며 난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성실히 조사에 응하면 될 것을, 화를 자초하는 성민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멍청한 놈. 언제까지 니 갑질이 통할 줄 알았나 보지? 돈보다 무서운 게 사람 자존심이야 인마, 기억해.’
"그쪽은 나머지 분들 깨워서 수사에 협조해 주시죠."
"네, 알겠습니다."
도훈은 군소리 없이 자고있는 여자들을 깨웠다.
당연한 얘기지만 신원확인 결과 모두 정상, 감식반에 의한 약물 부분도 정상으로 나왔다.
***
경찰차로 연행 되어가는 성민을 뒤쫓는 무리가 있었다.
바로 도훈의 제보를 받고 서울에서 내려온 기자들이었다.
"야, 이거 진짜 특종이다! 저기 경찰차 끌려가는 남자 고성민 맞지?"
"맞는 것 같습니다. 인물 데이터 베이스에 잇는 사진이랑 일치합니다."
"일단 차에 타는 거 한 장 박고, 두 팀으로 나눠서 한 팀은 서에 따라붙고 나머지 한 팀은 현장 취재해."
"네."
***
조사결과가 아무 이상 없이 나오자 경찰들이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늦은 시각에 협조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성민이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공무집행방해로 연행됐으니 별다른 추가 혐의점이 없을 경우 훈방조치 될 겁니다. 뭐, 잘해야 벌금형일 거구요. 근데 여기 가족분이 계시다던데···."
"저예요."
은성이 한 발 걸어 나왔다.
"혹시 모르니 보호자 자격으로 서까지 가주셔야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아···."
은성은 여전히 오빠가 경찰서에 연행 되어간 사실이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본 도훈이 나섰다.
"피곤할 테니 다들 쉬고 있어. 내가 은성이랑 같이 다녀 올게."
"오빠도 피곤할텐데···."
"성민이가 안 좋은 일을 당했는데 마냥 손 놓고 있을 순 없잖아."
"그럼 저희 차로 같이 가시겠습니까?"
도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나중에 다시 돌아와야 하니까 제 차로 갈게요."
"알겠습니다."
도훈은 성민의 옷에서 차 키를 챙겨 들고 은성과 함께 차에 올랐다. 보조석에 앉은 은성은 오빠가 걱정되는지 손톱을 물어뜯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오빤 괜찮겠죠?"
"너무 걱정하지 마. 성폭행도 오인 신고로 밝혀졌잖아."
은성은 몹시 당황한 상태였기 때문에 운전면허증이 없다는 도훈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데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대체 어떤 사람이 그런 신고를 했을까요?"
"어쩌면···."
도훈이 경찰차를 뒤따르며 말했다.
"우리 소리를 들은 게 아닐까?"
"우리요?"
"응 너랑 나랑 사라랑."
"앗!"
경황 중에도 은성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상황이 그렇잖아. 무슨 소리가 났다면··· 그때뿐인데."
"혹시 저희들 때문에 오빠가···."
"아니야. 오인신고를 받고 출동했다고 해도 실제론 아무 일 없었으니까 좋게 넘어갈 수도 있었을 거야. 근데 하필 약병이 발견되는 바람에···."
도훈은 의도적으로 돼지 발정제를 언급했다. 나중에 깨어나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은성이 강하게 부인했다.
"저희 오빤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분명 오해가 있었을 거예요."
"물론 그렇겠지. 성민이 말로는 별장 관리인이 숨겨놓은 거라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 같아."
그러나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은성이가 오빠를 너무 좋게만 생각하는군.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못된 놈인데 말이야.’
"틀림없어요. 오빤 누명을 쓴 걸 거예요."
"맞아.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성민인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
‘물론 내가 부른 기자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만.’
***
성민은 경찰서 도착 후 황당한 일을 겪었다.
갑자기 카메라를 메고 온 사람이 말을 걸어온 것이다.
"삼현 그룹의 고 회장님 손자분 고성민씨 되시죠?"
"누구야 당신?"
"아, 저는 주간대한에 임시환 기자라고 합니다."
"기자라고?"
성민을 연행하던 경찰은 기자라는 소리에 그들을 물러 세웠다.
"수사에 방해됩니다. 나중에 얘기하시죠."
"잠시 몇 가지만 여쭈면 됩니다. 혹시 불법 약물 소지로 현장 체포되신 맞습니까?"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불법 약물이라니!"
"질문에 일일이 대답할 필요 없습니다. 뭐야? 경찰서에 누가 기자를 불렀어? 이 사람을 쫓아내."
경찰이 성민을 가로막았지만, 임기자라는 사람은 집요하게 질문을 계속했다.
"별장에서 문란한 성행위를 벌였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뭡니까 지금? 수사 방해된다는 소리 안 들려요?"
"고성민 씨, 대답 좀 해주시죠."
다른 경찰들이 몰려와 임기자를 밖으로 끌어낼 때까지 그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껏 별장을 그런 용도로 사용해 오신 건가요? 고성민씨 한마디라도 말씀 좀···."
임기자가 쫓겨난 뒤 고성민이 경찰에게 물었다.
"전화 한통만 써도 되겠습니까?"
"흠. 어디 가지 마시고 여기서 통화하세요. 현장에서 조사결과 나오는 데로 다시 얘기하죠."
성민은 떨리는 손으로 겨우 번호를 찾았다.
‘씨발. 이게 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경찰 신고는 뭐고, 기자까지 따라붙다니?’
그는 도무지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 짜맞춘 각본에 완벽히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어. 문수씨 늦은 시간에 미안. 내가 지금 곤란한 상황에 처했거든. 당장 양평으로 와줄 수 있을까? 어, 변호사도 하나 데려오고."
성민은 끝내 그룹 비서실 산하의 김문수에게 전화를 돌려야 했다.
***
수사가 끝날 때까지 접견 불가능이라는 말에 도훈은 은성과 함께 대기실에서 머물렀다. 은성은 여전히 초조한 표정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긴장할 때 그녀의 버릇인 것 같았다.
도훈은 자판기에서 따뜻한 캔커피를 뽑아와 은성에게 건넸다.
"춥지? 이거라도 마시고 있어."
"고마워요."
은성은 손안에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에 도훈의 정을 느꼈다. 자기 일이 아닌데도 발 벗고 나서 그녀를 돕는 모습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죄송해요. 저희가 즐거운 여행을 다 망쳐버렸네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분명 잘 해결될 거야."
은성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도훈에게 물었다.
"근데 사라 언니랑은···. 어떻게 된 거예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그게."
도훈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실은 둘이서 호텔 빠에서 술을 좀 마셨었어."
"술요?"
"응. 근데 분위기를 타다 보니까 어쩌다···."
"아···."
은성의 표정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스쳐 갔다.
어쩌면 도훈을 타고난 호색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의도치 않게 그렇게 돼버려서 미안."
"아니에요. 우리가 무슨 사이도 아닌 걸요."
"난 솔직히···."
도훈이 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너랑만 하고 싶었어."
"···네?"
"사라랑 같이 말고 은성이 너랑 단둘이서만···."
"아···."
"그땐 갑자기 사라가 껴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어. 사라는 내 동생이랑 잘 아는 사이잖아. 만약 거기서 내가 사라를 쫓아냈으면 분명 내 입장이 난처해졌을 거야."
"이해해요."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은성은 수긍하는 눈치였다. 이미 도훈에게 온전히 마음을 빼앗겼기에 그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을 것이다.
도훈은 커피 캔을 쥔 은성의 손을 맞잡았다.
"은성아. 난 니가 훨씬 좋았어."
"네, 네?"
"사라 보다 니가 더."
"아앗, 여기서 그런 말을···."
은성이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도훈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었다.
"은성이 너도 좋았니?"
끄덕.
은성은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도훈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술에 취해 뻗은 취객과 하품을 하는 경찰들만 보였다.
‘어차피 성민이 풀려 날려면 늦을 것 같은데 여기서 한번 해버려?’
도훈이 은성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단둘이서만 한 번 더 할래?"
< 129. 즐거운 사라-3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