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즐거운 사라-24- >
***
시뻘건 모닥불이 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간다.
모닥불 주위로 여섯 명의 남녀가 무엇엔가 홀린 사람처럼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하고 있다. 아직은 쌀랑한 날씨라 다들 한 걸음이라도 더 붙어있으려 다가서다가도, 뜨거운 열기를 못 참고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만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모닥불은 여섯 남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그렇게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앞선 저녁 식사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투 플러스 등급의 한우 등심, 돼지 목살과 항정살은 거짓말 조금 보태면 입안에서 살살 녹을 정도였다. 텃밭에서 직접 기른 싱싱한 채소와 솜씨 좋은 장인이 오래 공들여 묵힌 쌈장, 갓 지은 흰 쌀밥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젊은 남녀의 허기를 달래주었다.
그리고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끝마침 지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옹기종기 둘러 앉아 모닥불에 몸을 녹이는 중이었다.
"아, 커피 땡켜."
혜은이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 언니 오빠들과는 달리 고기와 함께 반주를 즐기지 못했던 그녀로선 입가심이 절실한 모양.
혜은의 청에 성민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커피 마실래? 내가 가서 타올까?"
"예? 아,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혜은은 성민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온종일 기사처럼 운전하랴, 다니는 곳마다 관람료 지불 하랴, 심지어 저녁에는 자신의 별장에 초대해 근사한 바비큐 파티까지 열어 주었다.
첫 만남에 다소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지나고 보니 지갑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일 따름.
결국 아무도 피해본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성민의 도움으로 여행은 더욱 풍족해졌다.
그런데 커피 심부름까지?
그것은 차마 못 할 짓이었다. 아무리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런 마음을 이용해 먹을 정도로 치사한 성격은 못 되었다.
혜은의 거절에도 성민이 다시 물었다.
"모닥불 아래 따뜻한 차한잔 좋잖아. 사양안해도 돼."
"아니 그래두..."
"레이첼, 너 왜 자꾸 성민 오빠만 시키는데? 제가 다녀올게요."
성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스테파니가 대신 나섰다. 그녀가 볼 땐 성민은 하루종일 고생을 도맡았다. 그런 사람에게 식후 커피까지 부탁하는 것은 너무한 처사라고 여겼다.
그러나 성민은 스테파니를 만류했다.
"다들 커피 어딨는 줄도 모르잖아. 별일도 아닌데 나혼자 다녀올 게."
다들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성민을 골탕 먹이는 데 재미가 들린 도훈은 오히려 한술 더 떴다.
"성민아, 기왕 타오는 김에 내 것도 좀."
"오빠!"
해도 너무하다 싶었는지 혜은이 나무랐지만, 성민이 여전히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혹시 또 커피 마시고 싶은 사람?"
"그럼 염치없지만 저도···."
"전 블랙요."
하나둘 주문을 더 해가자 성민이 좌중을 향해 말했다.
"그냥 인원수 맞춰 적당히 타올 게.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성민이 안 채로 들어가자 그의 여동생 은성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하다. 오빠가 저렇게 친절한 캐릭터는 절대 아닌데···. 정말 여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나보네?'
분명 성민은 가이드 하는 일행 중 호감 가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다만 그게 누군지는 밝히지 않았다. 은성은 모닥불에 둘러앉은 여자들 얼굴을 하나씩 곱씹어 보았다. 오빠를 이처럼 순한 양으로 만든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혹시 사라 언니?’
사라는 전형적인 백인 미인으로 금발의 푸른 눈이 매력적이었다. 사려 깊고 상냥한 데다 한국어까지 능숙했다. 어떤 남자라도 호기심이 생길 것 같은 여성이다.
하지만 은성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오빤 사라 언니 같은 취향이 아냐. 다른걸 떠나 사람이 너무 심심하달까?’
은성은 이번엔 옆에서 모닥불에 불쏘시개를 던지고 노는 스테파니에 집중했다. 아직 18살이라 하지만 서양인 특유의 빠른 발육으로 이미 성인과 다름없는 몸매. 게다가 성민과 대화를 주고 받는 모습이 유독 자주 포착되었다.
‘스테파니라···.’
하지만 냉정히 말해 스테파니는 언니 사라에 비해 인물이 너무 처졌다. 자매라곤 하지만 모르고 만났으면 쌩판 남인 줄 알았을 거다.
‘아냐. 오빤 차라리 몸매보다 얼굴을 더 따지는 편이야. 예전에 만났던 여자들도 죄다 예뻤으니까.’
결국 남은 사람은 도훈과 오붓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혜은이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유학생.
‘첼로를 전공했다 그랬나? 얼굴은 확실히 미인인데···.’
혜은은 누가 봐도 예쁜 얼굴이었다.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매가 도발적인 매력을 풍겼고, 늘씬한 가운데도 굴곡진 라인이 도드라졌다.
나이답지 않게 성격 또한 시원시원한 편이었다. 동갑내기인 스테파니가 철없는 천둥벌거숭이 같다면, 그녀는 쿨한 느낌마저 풍겼다. 아마도 지금보다 더 성숙해지면 사내들을 트럭처럼 몰고 다닐 매력덩어리였다.
‘진짜 혜은인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오빤 고등학생을···.’
결론에 다다른 은성은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오빠가 혜은이를 점찍은 것도 불만이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도훈의 친동생이라는 점이 더욱 거슬렸다.
‘무슨 겹사돈 할 것도 아니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네, 네!?"
한참 멍때리고 있던 은성은,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마냥 화들짝 놀랐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구나.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욱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뭐 그런 건가?"
"노, 놀리지 말아 주세요."
"놀리는 거 아닌데? 때린데 또 때리면 피멍든다, 너."
"예?"
"아니 멍때리지 말라고."
"......."
연거푸 아재개그를 날려보지만 반응이 영 신통찮다. 아재개그를 좋아하던게 아니었나? 흠. 민망하군.
나는 뻘쭘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냥 같이 얘기나 하고 놀자고."
"···네."
‘그나저나 성민이 녀석 무슨 생각으로 커피 심부름을 자청한 걸까?’
[그러게 말입니다.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까다로운 인물인건 확실하군요.]
‘무슨 꿍꿍이를 꾸미건 상관없어. 어차피 자는 놈은 말이 없는 법이니까.’
[슬슬 시작하시렵니까?]
‘그래. 아이템 정위치시켜.’
나는 로시에게 ‘숙면할 수 있을 때 숙면하세요, 알약’을 준비시키고 은성에게 계속 말을 이었다.
"은성인 오빠랑 사이가 참 좋은가 봐."
"제가요?"
"응. 아까 고기 먹을 때 이것저것 잘 챙겨주던데?"
"아···. 어렸을 때부터 맨날 둘이서만 놀아서 그래요. 저흰 친구가 많이 없었거든요."
음, 역시 재벌가는 친구도 함부로 못 사귀 모양이군.
하지만 친구가 없어도 좋으니 하루만이라도 재벌집 막내아들로 살아봤으면···.
은성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혜은이 잠시 화장실 간 틈을 타 물었다.
"도훈 오빠도 동생분이랑 사이 좋으시던데요?"
"나?"
"네, 아까 막 땀도 닦아 주고···."
뭐야? 왠지 질투하는 거 같은데?
호오라, 의식하고 있었구나.
"아냐. 보기보단 별루야. 혜은이가 좀 과격한 데가 있어···컥!!!"
갑자기 숨이 턱 막혀온다.
목을 감싸 쥔 단단한 팔목. 주먹 끝은 반대편 팔꿈치에 겹쳐져 내 뒷통수를 앞으로 밀어내고 있다.
완벽한 헤드락 자세.
설마, 고성민 이 자식! 비열하게 뒤에서 암습을!!!
"다시 말해 봐! 내가 과격하다고?"
그러나 헤드락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혜은이였다.
"켁켁-! 이것 좀 놓고!"
"아직 말이 나오는 걸 보이니까 덜 조여졌네?"
혜은은 몸을 밀착시키며 더욱 더 초크를 걸어왔다. 그 바람에 등판에 녀석의 젖가슴이 물컹하고 느껴진다.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찹쌀떡처럼 말캉말캉한.
‘젠장, 이걸 풀어 말아?’
[주인님, 이런 죽음이라면 호상이라고 봐야···.]
‘이놈의 인공지능 자식이 그걸 말이라고!’
[농담입니다. 탭하시십시오. 탭.]
나는 로시의 조언대로 혜은의 팔목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켁-켁- 하, 항.."
"똑바로 말해. 항 뭐?"
"아, 아니. 하앙.."
"하앙? 어디서 앙탈을 부려!"
"항복이라고오!"
그제야 혜은이 결박을 해제했다.
헤드락을 걸린 동안 얼굴에 피가 쏠려 머리가 어질어질 하다. 입가에 침을 흘릴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벌컥 화가 났다.
"야! 이혜은!"
"뭐! 이도훈!"
"요 꼬맹이가 진짜!"
"그러게 나 없는 데서 왜 뒷담화 까?"
"그게 무슨 뒷담화야!"
"나보고 과격하다며!"
"얼씨구, 지금 몸소 증명하고 계시네."
"요게, 확 오빠만 아니면!"
"아니면 뭐!"
실제로 아닌것도 맞잖아?
남매의 다툼이 너무 치열했던 것일까.
사라가 우리 둘 사이를 끼어들며 중재에 나섰다.
"그만 해요. 왜 싸우고들 그래요."
"아니 싸운 게 아니라 오빠가 먼저 시비를···."
"시비? 펙폭에 찔리니까 너가 다짜고짜 헤드락을···."
"이게 죽는시늉해서 살려주니까, 이제 와서! 와!"
"아이참, 왜 그래요 갑자기. 다들 즐겁게 노는데."
"그래. 레이첼, 너답지 않게 너무 흥분했어."
"몰라! 진짜! 오빠 미워!"
혜은은 버럭 성을 내더니 뒤돌아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스테파니가 나를 흘겨 보더니 그 뒤를 졸졸 따랐다. 참마, 가재는 게편이네.
나는 가로줄이 선명하게 남은 목의 자국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혜은이가 왜 저렇게 흥분했지?’
[딱 보면 모르십니까? 질투하는 거잖습니까?]
‘왠 질투?’
[주인님이 노골적으로 은성 양과 노닥거리니 꼴 보기 싫은 거죠.]
‘에이씨 그럼 어떻게 해? 나는 뭐 몸이 두 개냐? 듀얼 잦이야?’
[호오, 그게 듀얼이면···. 역시 놀라운 발상입니다.]
‘쓸데없는 걸로 감탄하지 말란 말이야!’
"목은 좀 괜찮으세요?"
사라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어차피 혜은이에겐 스테파니가 따라붙었으니 그녀는 나를 챙기는 것이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그래도 좀 봐요. 자국이 이렇게 선명한데···."
사라가 내 목을 어루만지며 은근슬쩍 터치를 해왔다. 어째 손길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아님 목이 아니고 다른 델 만지고 싶은 건가?
"어?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갔어?"
쟁반에 커피 6잔을 들고 온 성민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잠깐 바람쐬러요."
은성이 대신 둘러댔다. 내가 민망할까 봐 말을 돌린 것 같다. 성민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주변에 커피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파스텔 색조의 머그잔에선 모락모락 커피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블랙이 누구?"
"저요."
사라가 손을 들자 성민이 연두색 커피잔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커피잔의 색깔이 모두 제각각이다.
‘응? 뭐지? 왜 저렇게 색을 구분해 놓은 거지?’
[종류별로 알아보기 쉬우라고 한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뭔가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라든지?’
의심이 생긴 나는 두 번째로 손을 들었다.
"난 그냥 커피."
성민이 이번엔 파란색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내가 순순히 따라 줄 것 같으냐?
나는 그가 내미는 커피잔을 무시하고 쟁반 위에 다른 커피잔을 잡았다.
"난 물양 많은 건 별로라서···."
갑자기 잔을 바꾸자 성민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 순간 눈치채고야 말았다.
놈이 커피에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걸.
‘이 자식 보게? 로시, 싸이코메트리 가능하지?’
[얼마든지요.]
‘지금 사용한다.’
순간 머릿속으로 하나의 영상이 펼쳐졌다.
***
"돼, 돼지 발정제를 구해달란 말씀입니까, 도련님?"
-그래. 근처에 아는 축사 있을 것 아냐. 거기서 좀 얻어와.
"그걸 어디 쓰시려고···."
-어이 할아범. 언제부터 내 말에 꼬박꼬박 토를 달았어? 구해놓으라면 군말없이 구해놓으면 될 것이지. 별장 관리 계속 하면서 여생 편하게 보내고 싶지 않나보지?
"아, 아닙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꼭 구해놓겠습니다."
-그래. 구하면 선반 서랍에 넣어둬.
두 사람의 통화 영상이 끝나자 화면은 자연스럽게 커피 물을 끓이는 부엌으로 옮겨졌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 머그잔을 늘여놓은 성민은 약병처럼 생긴 조그만 병을 꺼내 머그잔에 따르고 있었다.
놈이 음흉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크크크. 모 정치인의 자서전에서 봤지. 돼지 발정제를 먹이면 여자들이 암퇘지처럼 미쳐 날뛴다는 걸 말이야."
놈은 발정제를 탄 컵에 커피를 타며 계속 말했다.
"이게 다 이도훈 새끼 때문이야.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놈이 다 망쳐버렸다고. 좋게 말로 해도 될것을 꼭 이렇게까지...뭐 어찌 됐건 이번엔 돈으로 굴복시킨 건 아니니까."
그렇게 영상은 끝이 났다.
놈의 추악한 음모를 확인한 도훈은 순간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돼지 발정제?
이 뱃대지에 기름만 낀 재벌 돼지 새끼를 확 갈아서 소시지 만들어 버려?
그러나 무작정 흥분하기엔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도훈은 침착하게 영상속에서 놈이 돼지 발정제를 탄 머그잔을 떠올렸다.
'주황색, 주황색 머그잔이 혜은이 거였지.'
"이게 좋겠군."
"아, 아니 그건 안돼는데."
"왜? 다 같은 커핀데? 혹시 수상한 거라도 탄거야?"
도훈의 날카로운 추궁에 성민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버러지 새끼가 아주 끝까지.'
그러나 괜한 오해를 사는 것은 곤란했으므로 성민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안 채까지 가서 힘들게 타왔더니만."
"하하.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그냥 농담한 걸 가지고. 수고했어."
혜은에게 주려고 한 발정제 첨가 커피를 도훈에게 빼앗긴 성민은 속으로 생각했다.
'젠장. 다행히 한통 더 남아있으니까 다음 기회를 노려야지. 어차피 저 새끼가 먹어봐야 혼자 미쳐 날뀌기 밖에 더하겠어? 괜히 눈 뒤집혀가지고 여자들 찝쩍거리면 명분도 있겠다, 경찰 불러서 깜빵에 쳐 넣어버리면 되니까.'
예전에 도훈이 썼던 방법을 자연스레 떠올리는 성민이었다.
< 119. 즐거운 사라-2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