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즐거운 사라-22- >
***
브런치로 가볍게 끼니를 때우며 도훈이 성민의 제안을 전달했다. 스테파니는 성민이 합류한다는 말에 벌써 귀가 입가에 걸릴 만큼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녁은 별장에서 바비큐 파티로 해결하고, 노천 온천도 즐길 수 있다는데?"
"노천 온천요?"
"응, 별장 안에 일본식 온천탕이 있다는군."
"우아. 저 그런 데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사라 역시 솔깃한 눈치였다.
그녀는 따로 일본 홋카이도 여행을 염두에 둔 적도 있을 정도로 노천 온천에 관심이 많았다. 금발의 미국 아가씨는 유난히 동양의 문화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 같았다.
"흠, 난 왠지 그 사람 별론데···."
유일하게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혜은이였다. 그녀는 오빠와의 합방이 불발된 것이 못 내 아쉬웠는지, 오늘의 별장행을 꺼리는 눈치였다.
도훈이 동생의 의중을 짐작하고는 계속 말했다.
"별장이 무척 큰 편 이래나 봐. 자기 말로는 1인 1실로 잘 수 있을 정도라니까, 오늘 밤은 편하게 쉴 수 있을 거야."
"1인 1실?"
혜은이 눈을 반짝였다.
‘새벽엔 사라 언니 눈치 보느라 오빠한테 가지도 못했는데 1인 1실이라면···.’
다섯 명이 모두 흩어져 잔다면 야밤에 움직이기 훨씬 수월해진다. 호텔을 이용할 경우 각방을 잡을 명분이 없지만, 성민의 별장이라면 따로 비용도 들지 않는다.
‘잘하면 오늘 밤엔···.’
엉큼한 생각을 마친 혜은이 마지 못한 척 동의를 표했다.
"뭐, 이미 결정된 일이니 인제 와서 무를 수도 없지. 알겠어."
"잘 생각했어. 게다가 성민이는 차도 있잖아."
"차?"
"복잡한 지하철 타고 다닐 필요 없이 차 한 대 렌트했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지."
"정말 좋네요! 여행지 가서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도 큰 즐거움 중 하나인데, 저흰 시작부터 든든한 조력자를 얻은 셈이네요."
도훈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든든한 조력자라? 틀린 말은 아니군. 기사에다 물주기도 하니까. 하지만 조력자의 다른 말은 바로 호구지.’
***
짐을 챙겨 로비로 내려가니 성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릴 보더니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셔츠 포켓이 끼우고 반갑게 인사했다.
"다시 보니 반갑군요. 스테파니, 혜은양···. 이 쪽 분은?"
"제 언니예요. 이름은 사라."
"사라, Welcome to Korea!"
"처음 뵙겠습니다. 발음 좋으시네요. 저 한국말 잘하니까 한국어로 하셔도 돼요."
"그렇군요. 세분 다 무척 미인이시네요. 모시게 돼 영광입니다."
"어머, 무슨 그런 말씀을···."
성민은 무척 예의 바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놈의 본색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대번에 호감을 살법한 몸가짐이었다.
‘내가 만나러 갔을 때는 안면몰수하고 시가나 쳐 피우던 새끼가 여자들 만나니까 호들갑은.’
놈의 의중은 뻔하다. 혜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겠지. 하지만 네놈에게 여동생을 주느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고 말겠다.
"이제 가시죠. 발렛 요원이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을 겁니다."
"근데 5명 다 탈 수 있나요? 저흰 짐도 좀 많은 편인데···."
사라의 물음에 성민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주로 타는 차는 2인승이라 다른 차를 가져왔어요."
"다른 차요? 차가 두 대에요?"
"아뇨, 한 다섯 대 정도? 용도에 따라 바꿔 타는 편이거든요."
성민이 은연중에 재력을 과시하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벌써 차가 다섯 대라니···.
무슨 힙합 가수가 머니 스웩 하는 것도 아니고. 참나.
호텔 밖에 대기 된 차량은 구두 브랜드 이름과 똑같은 외제 SUV였다. 기함처럼 단단한 외관이 남성다운 매력을 잔뜩 뽐내고 있었다. 저런 차를 서브로 쓰다니. 평소에 안 탈거면 나나 주지, 쩝.
"자, 타세요."
성민이 보조석 문을 열며 혜은을 에스코트했다. 무척 자연스러운 동작이라 엉겁결에 혜은도 차에 오를 뻔했다. 하지만 놈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나는 잽싸게 스테파니를 등 떠밀었다.
"자자, 문도 열어주시는데 얼른얼른 타자고."
앞으로 넘어질 뻔한 스테파니는 겨우 성민의 부축을 받아 균형을 잡았다.
"고마워요."
"네, 네."
결국, 보조석에는 스테파니가 오르고 나머진 뒷좌석에 탔다.
‘크크. 절대 호락호락 안 될걸?’
똥 씹은 표정의 성민이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
"첫 번째 코스가 경복궁이라고 했던가요?"
"네."
"그럼,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모두 벨트 매세요."
성민은 운전하는 내내 경복궁의 역사적 의의와 주요 관람 포인트를 설명했다. 분명 1시간 전 행선지를 알았을 테니 사전조사라기보다 본래부터 아는 게 많은 것 같았다.
"···특히 경복궁의 대표 건물인 근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이 중건 공사를 통해 재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와, 성민 씨 굉장히 똑똑하시다. 무슨 문화해설사 같으세요."
한국 역사를 좋아하는 사라가 성민의 박식함을 칭찬하자 놈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역사에 좀 관심이 많거든요. 그리고 이 정돈 한국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일 겁니다. 그렇지, 도훈아?"
성민이 은근슬쩍 나를 끌어들였다. 지적인 우위를 드러내 모욕을 주고 싶었나 본데, 놈의 실수는 내가 평범한 체대생 이도훈이 아닌 이정우의 화신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점이다.
"물론이지. 참고로 근정전은 국보 223호로 지정된 현존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기도 해. 근정전이란 이름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었던 정도전이 서경(書痙)의 구절을 인용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뜻에서 붙여졌고. 건물 외양은 2단의 석축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2층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속사포처럼 읊어대는 나의 해박한 설명에 성민이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멍청한 놈. 감히 내 앞에서 역사를 논해?
비록 지금은 아이큐가 평균 이하까지 떨어졌지만, 기존에 각인된 기억의 양은 네놈과 비교할 수도 없을 거다. 이정우가 가진 생전 기억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담겨 있으니까. 전국급 수재를 뭘로 보는 거야?
"와! 우리 오빠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저도 깜짝 놀랐어요. 도훈씨 혹시 체육이 아니라 역사 전공 아니세요?"
나는 피식 웃어 보였다.
"아뇨. 이 정돈 한국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죠, 그렇지 성민아?"
"으, 응."
"이제 다 온 것 같으니 내려가서 더 설명해 드릴게요."
"그래요. 도훈씨랑 같이 오길 정말 잘한 거 같아요!"
룸미러로 슬쩍 쳐다본 성민의 얼굴엔 낭패감이 서려 있었다. 아마도 지적인 모습으로 매력을 발산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돼버렸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정도로 실망하긴 멀었어.
경복궁에 도착하면 네놈이 예상도 못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는 핸드폰을 이용해 몰래 문자를 보냈다.
***
"오빠?"
경회루 근처를 관람하던 성민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어? 으, 은성이?"
"오빠? 오늘 관광 온다는 데가 여기였어?"
도훈에게 접선 장소를 연락받은 은성은 우연인 것처럼 일행 앞에 섰다.
"누구···?"
"아는 분이세요?"
모두의 물음에 성민이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도, 동생이야. 내 친동생."
"아, 반가워요! 여동생분이셨구나."
"안녕하세요."
겨우 정신을 차린 성민이 은성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네가 여기 왜 있어? 오늘 친구 만난다지 않았어?"
"응. 날씨 좋다고 여기서 보자 든대?"
‘이렇게 공교로울 데가!’
"그럼 네 친구는?"
"말도 마. 갑자기 집에 일 생겼다고 펑크 내버렸지 뭐야? 입장료 아까워서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어. 근데 나 저분들 소개 안 해 줄 거야?"
"아, 아니 저 사람들을 굳이 네가···."
"왜? 내가 창피해서 그래?"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때 도훈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는 은성과 서로 모르는 척하기로 미리 약조했기 때문에 천연덕스럽게 연기했다.
"정말 우연이네. 성민이 여동생도 다 보고. 반가워요. 전 성민이 친구 이도훈이라고 해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도훈이 반가움에 손을 내밀자 은성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성민은 눈에서 불꽃이 튈 것처럼 이글거렸다.
‘저 버러지 새끼가 감히 내 동생 손을!’
그러나 모두가 지켜보는 앞이라 화를 낼 순 없었다.
"안녕하세요. 전 고은성이에요. 일행분들 소개 좀 해주세요."
도훈은 은성을 데리고 가 나머지 멤버들을 차례로 소개했다. 성민은 갑작스런 동생과의 조우가 몹시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할 도훈이 아니었다.
"그럼 집에 가서 보자, 은성아."
인사가 대충 끝나자 성민은 한시라도 빨리 동생을 보내려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자 은성이 아쉬운 듯 말했다.
"왜? 기왕 만났는데 같이 구경하면 되지."
"그래요. 사정 들어보니까 혼자 오셨다는데 같이 다녀요."
도훈이 거들고 나서자 성민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자꾸 촉새처럼 이리저리 껴드는 모양새가 영 못마땅했다.
‘저 새끼가 아까부터 자꾸!’
성민의 속 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훈은 한술 더 떴다.
"혹시 동생분 오늘 딱히 할 일 있으세요?"
"왜요?"
"성민이가 양평 별장에서 저녁 먹고 하룻밤 묶어가라는데 동생분도 같이 가면 재밌을 것 같아서요."
"정말요?"
도훈에게 문자를 받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은성은 시치미 뚝 떼며 금시초문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녀는 오히려 오빠를 질책하듯 따졌다.
"뭐야, 오빠? 왜 나한테는 말 안 했어? 나 양평 별장 좋아하는 거 알면서."
"아, 아니 그게 갑자기 오늘 아침 결정돼서···."
"별일 없으면 같이 가요 그럼. 은성 씨만 오면 여기 다 가족 모임 되겠다."
"어머, 정말 그렇네요? 신기하다."
사라와 스테파니는 자매. 그리고 나와 성민은 남매.
세 가족 한 지붕이라는 조합이 신기한지 다들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오빠. 그렇게 하자. 나 어차피 집에 들어가기도 싫었는데."
"그, 그래도 할아버지 걱정하실 텐데."
"무슨 소리야? 나 한국 온다는 말도 안 했는데. 그리고 오빠가 언제부터···."
은성이 불편한 가족관계를 언급할까 두려워진 성민이 은성의 말을 막았다.
"그, 그래. 같이 가. 그럼."
"히히. 그럼 약속한 거다?"
모두 은성의 합류를 반기는 가운데 성민 혼자만 딱딱히 굳어있었다. 도훈은 그의 소태 씹은 표정을 보며 속으로 통쾌해했다.
‘크크크. 벌써부터 뭘 그런 표정이야. 오늘 밤은 더 볼만할 텐데···.’
경복궁 관광을 마치고 한강 유람선을 타는 동안 일행은 금세 친해졌다. 나이대도 비슷한 데다 다들 성격이 밝은 편이라 오늘 처음 본 사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였다. 여행지 가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실감 되었다.
도훈은 같이 다니는 내내 사사건건 성민을 견제하며 여동생을 향한 수작을 훼방했다. 게다가 눈치 없는 스테파니가 놈에게 껌딱지처럼 달라붙었기 때문에 성민은 도저히 뭔가를 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크크. 스테파니도 이럴 땐 쓸모가 많네. 본래 단체 미팅도 폭탄처리가 제일 어려운 법이거든.’
잠시 여유가 생긴 도훈은 유람선 난간에서 혼자 바람을 쐬고 있는 은성에게 다가갔다.
"연기 좋던데?"
"히히. 감쪽같았죠?"
"응. 소질이 제법 있어 보여."
"···실은 엄마가 예전에 배우셨어요."
"정말?"
엄마를 떠올리자 센치해진 은성이 강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말해도 잘 모르실 거예요. 데뷔작 하나만 찍고 바로 은퇴하셨거든요. 아빠랑 결혼한다고."
"아···."
도훈은 그녀의 사연이 떠올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묵주반지를 통해 본 그녀의 인생은 비극 그 자체였다. 재벌가에서 태어난다고 마냥 행복한 것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도훈은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
‘로시. 지금 은성이 정보창 띄워.’
[준비했습니다.]
-----------------------------
성명 : 고은성 (비처녀)
나이 : 22
호감도 : 70/100
개방성 : C
성감대 : 등 뒤, 가슴 전체, 사타구니 주변.
성욕지수 : 보통
공략팁
*위 대상을 공략하시면 ‘너넨 거기 금테 둘렀냐?’를 달성하실 수 있습니다.
-그녀는 당신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입니다. 조금만 분발하시면 그녀를 침대로 눕힐 수 있습니다.
-그녀는 터프한 남성에게 끌리는 타입입니다. 자신이 기댈 수 있는 강한 남성성을 보여주시면 호감도를 쉽게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은 탓에 쉽게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세요.
-추천멘트 : "부모님이 널 보면 정말로 자랑스러워 하실 거야."
------------------------------
‘싸이코메트리로 그녀의 과거를 미리 알아두길 다행이군.’
[그렇죠. 두 스킬을 잘만 이용하면, 처음 보는 여성이라도 쉽게 공략하실 수 있습니다.]
‘근데 얘 되게 순진해 보이더니 비처녀네?’
[평균적인 여성이 22살 넘도록 처녀를 유지하는 경우는 드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문란한 성생활을 즐겼을 것 같진 않아 보이는군요.]
‘그렇긴 해. 개방도도 C에다 성욕도 보통이니까.’
[이런 여성도 공략해 내야 진정한 프로가 아닐까요? 주인님의 건투를 빕니다.]
"성민이한텐 대충 들었어. 가족 얘긴."
"오빠한테요? 안 그래 보이던데 저희 오빠랑 되게 친하신가 봐요."
"뭐 매스컴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도 하고."
삼현그룹의 가족사는 굳이 묵주반지가 아니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국내 제일의 재벌가 후계자가 젊은 나이에 사망한 사건으로 한때 나라가 떠들썩한 적도 있었다. 다만 거기에 숨겨진 비화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젠 다 지난 일이에요. 너무 어렸을 때라 부모님 얼굴 잘 기억도 안 나는 걸요."
이건 거짓말이다. 영상 속의 그녀는 부모님과의 가족사진을 상상해 그릴만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도 타인에게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겠지.
"은성이 너 보니까 어머니도 굉장한 미인이셨을 것 같아."
"···네?"
"딸은 엄마를 닮는다잖아. 하늘에 계신 부모님도 무척 자랑스러우실 거야. 은성이 네가 이렇게 훌륭히 자라주어서."
"도훈 오빠···."
"그러니 기운 내. 나는 은성이 웃을 때가 제일 예쁘더라."
"······."
은성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구었다. 두 손을 꼼지락대며 입술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호오, 호감도가 올라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요?]
‘짜샤, 내가 누군지 잊었어? 장차 레젼설을 찍을 플레이어란 말씀이야.’
< 117. 즐거운 사라-22-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