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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9화 (109/2,000)

< 111. 즐거운 사라-16- >

"에이, 저런 문짝 하나 얼마나 한다고. 사실 내가 이 방에 6개월째 장기투숙 중이거든. 지금껏 낸 돈이 있는데 어느 정도는 사정 봐주지 않을까?"

"6, 6개월이라고?"

도훈의 반문에 성민이 속으로 비웃었다.

‘놀라울 따름이겠지. 서민들 평생 한 번 와볼까 말까 한 5성급 호텔 스위트룸을 전세 들어 사는 내가 얼마나 대단해 보이겠어? 하여간 천민들이란···. 돈 앞에 벌벌 떠는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성민이 우쭐대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아무튼 오해도 어느 정도 푼 것 같으니 다시 통성명이나 하는 건 어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름은 알아야지."

"난 이도훈. 스물 셋이다."

"셋이구나. 나이도 얼추 비슷하네. 미국 있을 땐 두세 살 차이는 그냥 친구 먹었거든. 화해도 할 겸 술이나 한잔하다 갈래, 친구?"

"···그러지."

도훈이 소파에 걸터앉았다.

도훈은 성민의 본심을 캐려는 속셈으로, 성민은 도훈과 친분을 쌓아 혜은을 공략하려는 목적이란 각각 꿍꿍이를 품고 있었다.

성민은 와인 선반으로 가 가지고 있는 최고급 와인을 꺼내왔다.

"로얄 드마리아(Royal DeMaria). 이게 좋겠네."

그는 오프너를 이용해 코르크 마개를 따며 말했다.

"좀 더 좋은 것도 있었는데 하필 지난주 손님이 오는 바람에 다 마셔버렸지 뭐야. 하지만 뭐 이것도 나름 괜찮아. 3만 달러짜리 치곤 맛이 나쁘진 않더라고."

성민이 지나가는 말로 가격을 언급했다. 값비싼 와인을 아무렇게나 마시는 모습으로 상대방의 기를 꺾으려는 의도였다.

예상대로 도훈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3만? 3만 달러면 대체 얼마야?’

[현재 환율로 정확히 3,357만원 입니다.]

‘미, 미친! 이 새끼 대체 뭔데? 무슨 한병에 중형차 한 대짜리 술을 마셔?’

[모르긴 몰라도 이 객실 또한 무척 비싸 보입니다. 이곳에 일주일만 묵어도 주인님 일 년 생활비가 너끈히 나올 것 같은데요?]

‘설마 진짜로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도 되는 건가?’

[···혹시 쪼셨습니까?]

‘쫄 긴! 돈이 뭔 대수라고. ···살짝 놀란 것뿐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사 성민이라는 사람이 진짜 재벌이라고 한들, 주인님께서 기가 죽을 필욘 전혀 없습니다. 플레이어의 권능은 인간의 돈 따위론 그 값을 환산하기도 불가능하니까요.]

‘안 쫄았다니까?’

[넵.]

성민이 디캔더에 와인을 흘리며 도훈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 대학생?"

"그래."

"여동생은 미국에서 학교 다닌다고 하던데?"

"유학 중이야."

"아하. 한국에는 잠깐 놀러 왔나 보구나."

"뭐, 그런 셈이지."

여전히 말이 짧은 도훈이 거슬렸지만, 성민은 내심 여유를 되찾았다.

상대는 피지컬 좋은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했다. 얼굴도 그럭저럭 잘생기긴 했지만, 고급스러운 자신의 외모와 견주면 누가 더 뛰어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외적인 면이 백중세라고 칠 때 나머지는 모든 면에서 자신의 압승이다.

‘쯧. 알고 보니까 별 좆도 아닌 새끼잖아? 혜은이 친오빠만 아니었으면 그냥 조져버리는 건데···. 하여간 버러지 같은 천민새끼들···. 눈코입 달렸다고 지들도 똑같은 사람인 줄 알지.’

성민이 플라스크 병처럼 생긴 디캔더를 한 번 흔들더니 다시 와인 잔으로 옮겨 도훈에게 건넸다. 그리곤 자신의 잔도 채웠다.

"자, 한 잔 하자고. 성인끼리."

"그래. 성인끼리."

일부러 성인임을 강조하는 성민의 말투는, 조금 전 미성년자를 운운하던 도훈을 은근 디스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새끼군. 로시 혹시 놈의 본심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애석하게도 아이템이 없는 현재로썬 보유하신 스킬뿐입니다.]

‘싸이코메트린 아까 빠에서 사라에게 쓰는 바람에 쿨 타임이 제법 남았을 텐데···.’

[정보창 스킬은 현재 사용 가능합니다.]

‘정보창? 사내새끼 정보 봐서 뭐하게? 후장이라도 따?’

[그래도 호감도가 나오지 않습니까.]

‘맞다 그랬지?’

[만약 성민 군이 보여주는 모습이 진정 가식이라면 호감도가 낮게 나오겠지요.]

‘좋아. 어차피 오늘은 더 스킬 쓸 일 없을 것 같으니.’

도훈은 예전에도 한번 남자에게 스킬 쓴 기억이 있었다.

상대는 바로 김기춘.

그때와 마찬가지로 도훈은 성민의 정보창을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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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고성민

나이 : 24

호감도 : 8/100

성취향 : ???

변태성 : ???

여성편력 : ???

공략팁

*정보를 확인하기엔 아직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호감도를 상승시키기 위해 다음 행동을 추천합니다.

-추천행동 : 혜은을 꼬시는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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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8? 지금 내가 잘 못 본 거 아니지?’

[아닙니다. 확실히 8이군요. 이건···.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랄까요? 주인님을 거의 인간 취급도 안 하는 것 같은데요?]

‘게다가 뭐? 혜은이를 꼬시는데 동참?’

[한마디로 주인님을 이용해 여동생 공략을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는 뜻이죠.]

‘이 개새끼가 진짜!’

나는 당장이라도 와인병을 거꾸로 쥐고 놈의 뒤통수를 후려 갈기고 싶었다. 삼천 만원짜리 병이니 좀 단단하려나?

[주인님. 진정하십시오. 여기서 폭력을 행사했다간 주인님만 손햅니다.]

‘그래도 이건 도저히 못 참아. 혹시 뭐 그런 아이템 없어? 사람 하나 골로 보내도 아무도 모를만한?’

[신께선, 주어진 능력을 범죄에 사용하는 것을 용서치 않을 겁니다.]

‘범죄라니? 그럼 대체 저 새낀 뭔데? 돈 많으면 고등학생 막 꼬셔도 되는 거야? 술먹여서 자빠뜨려도 돼?’

[지금 너무 흥분하셨군요. 역시 다른 남자가 혜은 양을 차지하는 꼴은 못 견디시나 봅니다.]

‘···뭐라고?’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근친이라 안된다, 고등학생이라 안 된다 주저하시던 사람이 바로 주인님이 아니셨던가요? 그런데 지금은 여자친구라도 뺏긴 사람처럼 길길이 날뛰시지 않습니까?]

로시의 예리한 지적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 아니 그건. 혜은인 내 여동생이니까.’

[여동생요? 여동생한테는 오히려 저 성민이라는 사람이 과분한 존재가 아닐까요? 얼굴도 잘생겼지, 젠틀하지. 게다가 돈도 어마어마하게 많군요. 전형적인 여성들의 이상형 아닙니까?]

‘야!!! 너 지금 누굴 편 드는 거야!’

[저야 영원히 주인님 편이죠.]

‘근데 왜 저딴 새끼를 칭찬해?’

[제 말뜻은 그러니까, 제발 좀 솔직해지시란 말입니다. 지금의 감정은 여동생 가진 오빠로서의 분노가 아닙니다! 연인을 빼앗길 뻔한 사내의 질투에 가깝죠!]

‘···음.’

정곡을 찔렸다.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다.

로시 말이 맞았다.

나는 혜은이를 여동생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저 스스로를 기만하고, 절대로 근친은 안 된다며 강박적으로 되뇌었을 뿐이다.

실제 남매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아니 저기 책을 좀 보고 있었어."

나는 말을 돌리며 책상위에 쌓여있는 책을 응시했다. 최고급 마호가니 원목으로 만든 책상 위에는 무척 가벼워 보이는 노트북 옆으로 대여섯권의 책이 가로로 쌓여있었다.

성민은 피식 웃더니 맨 위의 책을 한 권 집어 들고 왔다.

"내 책이야."

"혹시 작가?"

"응. 뭐 자랑은 아니지만, 나름 잘 나가."

제목을 보니 어딘지 익숙했다.

[천년의 황태자]

"이건···."

"맞아. 작년에 HBS에서 히트 친 로맨스 판타지. 내 작품이야."

거드름 떠는 모습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군.

20대 여성들이나 좋아할 법한 소설을 보고 내가 엄지라고 치켜세워주길 바랬냐? 하지만 지금은 그를 방심시켜야 하므로 나는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와! 작가였구나. 매우 유명한."

"유명까진 아니고. 사실 필명으로 쓰고 있어서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도 몰라."

표지 밑의 저자엔 [기파랑]이름이 적혀 있었다.

신라의 화랑 이름이던가?

"사인본이라도 하나 줄까?"

"음, 뭐 그래."

성민은 고급 만년필을 찾아오더니 속지에 멋들어지게 기파랑이란 필명을 휘갈겼다.

"어디 가서 말하면 곤란해. 난 되도록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거든."

"왜?"

"그냥. 편견이 좀 있을 것 같아서."

"편견이라니?"

"내가 좀···. 아니다."

성민이 교묘히 말끝을 흐렸다. 대놓고 물어봐 달라는 표정이다. 놈의 속 보이는 장단에 맞춰주자니 속이 다 니글거리는군.

"왜? 밝혀선 안되는 이름이야?"

"뭐. 네 여동생한테도 슬쩍 말해버려서 어차피 너도 알게 될 테니까. 나 삼현 그룹 사람이야."

"삼현? 반도체랑 자동차로 유명한 그 삼현 말이야?"

"응."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다. 돈 씀씀이가 보통이 아니다 싶었는데, 진짜로 재벌가 사람이었다니. 놈이 계속 말을 이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가문이 후계 문제로 시끌시끌 해. 지금 회장,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모두 삼남매를 뒀는데, 우리 아버지가 유일한 남자였거든. 근데 일찍 돌아가시면서 자식이라곤 나랑 내 여동생뿐이야. 여동생은 미술을 전공하기도 했고, 또 집안 원칙상 남자만 후계를 승계하도록 되어있어."

"지금 그 말은···."

"맞아. 내가 삼현 그룹의 공식 후계자야. 현재까지는."

"와···."

이건 연기가 아니다.

진짜로 상상 이상의 거물이었잖아?

[생각했던 이상이군요.]

‘그러게. 뭐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지?’

[주인님께 비밀을 밝힌 이유는 무슨 의돌까요?]

‘뻔하지. 자기가 재벌가 후계자임을 알려서 나를 찌그러지게 만들려는 속셈이지. 그래야 혜은이를 작업하기 유리할 테니까.’

[그래서 정말 찌그러지실 생각입니까?]

‘웃기지 마. 재벌 손자가 아니라 재벌 할애비라도 혜은이는 못 줘. 절대 안 줘.’

[멋지십니다. 내 여자는 내가 지킨다. 뭐, 이런 거군요.]

‘그나저나 놈의 속셈은 대충 간파했으니 휘둘리지 않으면 되는데 대체 저놈을 무슨 수로 한 방 먹인다?’

[주인님이 가진 최고의 무기는 대물이 아닐까요?]

‘뭐?!’

[이 기회에 ‘숨겨왔던 나의···’ 업적에 도전하시는 겁니다. 상대도 마침 미소년 느낌인데.]

‘으엑! 후장은 절대 안 해!.’

[하지만 저자는 주인님의 여동생을 노렸던 잡니다. 응징이 필요합니다.]

‘그게 꼭 좆 몽둥일 필욘 없잖아!’

[안타깝군요. 업적 보상으로 주어지는 ‘면역의 제왕’은 정말 최고의 보상인데 말이죠. 한번만 더 생각해 보십시요. 심지어 재벌가의 사람이 아닙니까? 잘만 된다면 앞으로 돈 때문에 고민할 일도 없을 텐데요.]

‘그래도 이건 아닌데···.’

한참 로시와 머릴 맞대고 궁리를 하는데 갑자기 성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벌써 자정이 넘었는데, 대체 누구지?

성민은 화면에 뜬 번호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활 받았다.

"···어. 은성이니? 귀국했어?"

나는 와인을 마시는 척하며 놈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이 시간에 도착해? 아···덴마크에 직항이 없어서?"

‘덴마크? 국제적으로 노네, 이놈들은.’

"집으로 바로 갈 거야? 어? 왜?"

성민은 내가 엿듣는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창가 쪽으로 이동했다. 그의 동선을 따라 통유리창으로 된 창가로 시선을 돌리자, 서울의 화려한 야경이 발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쳇. 돈 많으니 저런 야경도 매일 보는구만.’

[부러우십니까?]

‘아니라면 거짓말이지. 남자라면 이 정도 재력을 갖추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봐.’

[주인님도 하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돈 찍어 내는 아이템이라도 사들여?’

[아뇨. 지금이라도 성민을 자빠뜨리면···.]

‘안 한다고!’

그때 통화를 마친 성민이 나를 향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게 됐네. 갑자기 누굴 좀 데려와야 할 것 같아."

나는 의도적으로 스마트워치를 쳐다보았다.

"이 시간에?"

"응. 아니 여동생이 덴마크에서 귀국했는데, 왜 아까 미술 한다는···. 굳이 날 만나고 가겠다는군. 보시다시피 난 집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어서 말이야."

"아···."

"어쨌든 뭐 또 보자고. 아까 스테파니랑 얘기해서 내가 한국 관광 도와주기로 했거든. 멀리는 못 나가겠어. 지금 씻고 나가야 해서 말야."

‘관광? 스테파니 이년은 지 혼자서 뭔 약속을 한 거야?’

하지만 불쑥 아이디어가 떠오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룸 밖으로 나왔다.

‘로시. 드디어 방법을 찾은 것 같아.’

[네? 후장을 뚫을 방법이요?]

‘아니. 전에 기춘이에게 써먹은 방법말이야.’

[기춘이라면···.]

‘맞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여동생에겐 여동생이지.’

나는 펜트하우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마치 악당처럼 느껴졌다.

< 111. 즐거운 사라-16-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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