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즐거운 사라-15- >
***
"이 문 당장 열어! 부숴버리기 전에!"
나는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이 정도로 피가 끓어 오른 적이 몇 번이었을 까?
편의점에서 김기춘의 야비한 음모를 눈치채던 날?
권투 좀 배웠다는 강찬혁이 주제도 모르고 깝칠 때?
아니다.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지금의 심정은 이정우 전생에서 아내의 불륜을 눈앞에서 목도 했을 당시와 흡사하다.
상대를 칼로 찔러 죽이고 싶을 만큼의 격노.
모가지를 톱으로 썰어버리고 싶은 충동.
나는 다시 한번 펜트하우스의 문짝을 발로 걷어찼다.
더없는 분노를 담아.
쾅-!
"문 열라고 이 개새끼야!"
쾅-!!
쾅-!!!
어찌나 세게 후려쳤던지 나무로 된 문짝에 균열이 갔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화기를 찾았다. 문고리를 부숴버려야겠다 결심한 순간.
스르륵 문이 열렸다.
"누가 야밤에 행팹니까?"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허여멀건 한 젊은 사내.
키는 나보다 좀 더 크지만, 몸은 훨씬 말랐다.
이 따위 기생오라비 같은 새끼가 감히!
나는 다짜고짜 놈의 멱살을 움켜쥐고 밖으로 끄집어냈다.
"혜은이 어딨어?"
"네?"
"혜은이 어딨냐고!"
밖으로 나온 놈을 벽으로 밀어붙인다. 반대쪽 손은 금방이라도 얼굴을 후려갈길 것처럼 주먹을 말아쥔 채다.
만약 놈이 내 동생을 털끝이라도 건드렸다면, 저 곱상한 얼굴을 자기 부모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짓이겨 주리라.
그때.
"당신, 혜은씨랑 무슨 사이죠?"
담담한 목소리가 귀에 또렷하게 날아와 박힌다.
조금의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유난히 커다란 눈동자엔 차가운 분노마저 일렁이고 있다.
그 눈빛을 대면하는 순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놈은 뭔가 다르다고.
"오빠?"
그때 문 쪽으로 혜은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낯선 사내와 격렬하게 대치 중인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오, 오빠! 여기서 뭐 해?"
"···오빠라고?"
멱살을 잡힌 놈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 혜은이 우리 관계를 설명했다.
"제 친오빠예요."
"혜은아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고?"
"다친 데라니? 내가 왜 다치는데?"
혜은은 뜻밖에도 멀끔한 모습이다. 게다가 혜은의 옆으로 스테파니까지 나타나자 고조되었던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직 불순한 접촉이 시도된 흔적은 없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사라와 뒹구는 사이 여동생에게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면, 내 아둔한 골통을 뽑아버리고 싶었을 거다. 여동생이 당하는 줄도 모르고 쾌락에 젖어 있던 나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을 테다.
"저런, 뭔가 오해가 있으셨나 보군요."
사내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화를 내는 편이 마음 편했을 텐데···. 나는 겸연쩍은 얼굴로 움켜진 손아귀를 놓았다.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괜스레 여동생에게 언성을 높아졌다.
"넌 대체 왜 전화를 안 받는데!"
"전화했었어? 미안, 배터리가 떨어져 충전하느라고···."
"What's going on? Why he's screaming?"
(뭐가 어떻게 돼가는 거야? 왜 소릴 지르는 건데?)
뒤 따라 나온 스테파니 역시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난처함, 황당함, 민망함. 수많은 감정의 파편이 네 사람 사이를 소용돌이친다.
그때 띵-! 하는 소리와 함께 펜트하우스 엘리베이터가 열리더니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셋이 우릴 향해 뛰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표현은 정중했으나 표정을 봐선 행패를 부리는 나를 제압하기 위해 호텔 측 보안요원이 출동한 것 같다. 보안요원의 물음에 펜트하우스 사내가 대답했다.
"별일 아닙니다. 사소한 오해가 있던 것 같군요."
그때 보안요원 중 하나가 발로 차여 손상된 문짝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사소한 일이냐고 되묻는 것 같다.
사내가 즉각 변명했다.
"이거요? 문이 좀 빡빡해서 안 열리더라고요. 변상은 제가 해드릴 테니까 이만 돌아들 가세요. 누가 보면 뭔 일이라도 난 줄 알겠네."
누가 봐도 사태를 무마하는 모양새. 보안요원들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문밖으로 나온 우리 네 사람을 쳐다보고 있다.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신 거라면···."
책임자로 보이는 이가 다시 묻자, 펜트하우스의 사내가 좀 더 완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말 못 들으셨어요? 그만 돌아들 가시라니까요."
"아,네··· 알겠습니다."
사내의 차가운 목소리에 덩치 큰 보안요원들이 곧바로 꼬릴 내렸다. 말투는 정중하지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깃들어 있다. 아랫사람에게 명령하는 게 숨 쉬는 것처럼 몸에 밴 사람 같다.
그들은 즉시 타고 온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청년이 나에게 먼저 악수를 청해왔다.
"혜은 씨 오빠라고 하셨나요? 민망하지만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고성민이라고 합니다. 올해로 스물 여섯이구요."
여전히 여유 넘치는 목소리.
굳이 나이까지 밝힌 의도가, 나를 나이로 누르려는 것 같아 기분 나쁘다. 나는 성민이 내민 손을 무시한 채 두 사람에게 버럭 소릴 질렀다.
"너희 둘! 고등학생이 이 시간에 남의 방까지 와서 뭐하는 거야? 얼른 내려가!"
"오빠 그런 게 아니라···."
"이혜은! 내 말 못 알아들어?"
"아, 알았어···."
버럭 역정을 내자 혜은이 스테파니와 성민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조용히 내 뒤로 붙었다. 스테파니 역시 뻘쭘한 표정으로 혜은을 따랐다.
두 사람을 데리고 펜트하우스 엘리베이터를 누르는데 뒤에서 성민이 소리쳤다.
"저기 혜은 씨, 핸드폰은 가져가야지."
혜은 씨?
이 새끼가 어디다 대고 남의 여동생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려? 혜은이 다시 돌아서려고 하자, 내가 말했다.
"너희들은 먼저 엘리베이터 타고 방에 가 있어. 내가 받아 올 테니까."
"오빠."
"가 있으라고!"
"으응···."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사이, 나는 다시 성민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남의 핸드폰은 뭐하러 가지고 있는 건데?"
"배터리가 다 돼서 충전을 해드렸을 뿐입니다. 근데···."
성민이라는 놈은 혜은과 스테파니가 사라지자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너 몇 살 먹었는데 아까부터 반말이니?"
이놈 봐라? 여동생 앞이라 본색을 감추고 있었다 이거지?
놈이 혜은에게 실제로 한 짓은 없다 하더라도 음흉한 마음을 품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의 기계가 거짓말을 할리는 없을 테니까.
"남이사 반말을 하건 말건?"
"···뭐?"
놈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여유가 사라졌다.
***
성민은 멱살을 붙잡힐 때부터 참아왔던 분노가 스멀스멀 치밀어 올랐다. 사실 그가 누군가에게 멱살을 잡힌 것은 평생 거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혜은의 눈치를 보느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이나 빨랑 내놔."
여전한 반말.
‘나이도 한참 어려 보이는 새끼가 싸가지 하고는. 넌 진짜 혜은이 오빠로 태어난 걸 다행으로 알아.’
"···따라와. 안방에 있으니까."
도훈은 성민을 따라 룸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안방에서 혜은의 폰을 가져오는 사이, 도훈은 양탄자가 깔린 응접실에서 기다렸다.
그곳엔 조금 전까지 세 사람이 자리하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맥주 두 캔과 홍차.
적어도 세 사람 중 둘은 술을 마셨다는 소리.
폰을 들고나온 성민을 향해 도훈이 날카롭게 물었다.
"너, 애들한테 술까지 먹였냐?"
"너? 지금 너라고 했어? 이 자식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누굴···"
인내심이 바닥난 성민이 울컥하는 순간, 오히려 도훈이 먼저 폭발했다.
"보자 보자 하니까 뭐 이 씨발아! 눈구녕에 좆 박었어? 사람 앞에 서 있는데 뭘 자꾸 봐?"
"이···이!"
"비 맞은 개새끼마냥 부들부들 떨기는. 강냉이 싹 털어 버리기 전에 아가리 싸 물고 있어. 야밤에 고등학생 불러 술까지 먹여 놓고 쌍욕 듣기는 싫으셔? 그럼 이 딴짓을 하지를 말았어야지."
도훈의 걸쭉한 욕설에 성민의 표정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에게 이 정도까지 안하무인으로 덤벼드는 사람은 난생처음이었다.
성질 같아선 냅다 주먹을 후려갈기고 싶지만, 도훈의 덩치가 만만치 않았다. 운동을 배운 듯 널따란 어깨에 발달 된 근육은 갑옷처럼 단단했다. 육체적으로 그가 감당하긴 벅찬 상대.
‘젠장, 이럴 때 김문수 같은 놈이라도 있었더라면···.’
성민은 할아버지가 데리고 다니는 경호원을 떠올렸다.
맨손으로 사람도 때려죽인다는 실력자.
갑자기 후계자 수업을 거부한 것이 아쉬워졌다. 붙여준다는 경호원도 모두 제 발로 쫓아내고 말았으니.
결국 기싸움에서 밀린 성민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남자로서 자존심은 상했지만, 굳이 저런 놈과 투덕거려봐야 자기만 손해라는 생각이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내가 잠시 흥분한 것 같군.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한데 목을 말라 하길래 맥주를 권했을 뿐이야. 당연히 그땐 고등학생인 줄 몰랐으니까 그런거고. 솔직히 두 사람 다 겉만 봐선 전혀 고등학생 같지 않잖아?"
"하-, 모르셨다?"
"그리고 앞뒤 사정도 잘 모르면서 너무 사람을 몰아세우는군."
"사정이라니?"
"네 여동생이랑 친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이유도 모르고 있잖아. 무작정 화만 내지 말고 내 얘길 좀 들어보라고. 그러니까···."
성민은 차분한 목소리로 스테파니와의 해프닝을 설명했다.
오히려 자신이 관용을 베풀었으며, 스테파니가 단둘이 있는 것을 어색해하길래 친구를 부른 것뿐이라고.
"물론 여동생 가진 오빠 입장에선 화가 나는 게 당연한 일이겟지. 나라도 당장 내 여동생이 늦은 시각까지 생판 처음 보는 남자 호텔 방에서 놀고 있다면 머리채를 잡아서라도 끌고 왔을걸? 그래서 네가 불같이 화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
"하지만 생각해 보라고. 내가 정말 불순한 의도였다면 두 사람을 모두 불러서 놀았겠어? 게다가 둘은 고등학생이잖아. 설마 내가 내 동생보다 어린 애들한테 그런 생각을 품었을까봐."
"흠."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도훈은 자신이 정말 오해한 것은 아닌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께름칙 한 부분이 남아있었다.
‘로시, 저 새끼 말이 사실일까?’
[아마도요? 당장 혜은 양이나 스테파니에게 물어보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거짓말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어다리 어플에서 경고를 보냈잖아. 그건 뭔데?’
[그것 역시 설명은 가능합니다. 아무래도 여동생분 외모가 워낙에 출중판 편이나 보니 사내의 방심을 흔들었을 가능성이···.]
‘그러니까, 뭔가 더러운 수작이 아니라 그냥 수컷의 본능 같은 거란 소리야?’
[건강한 사내라면 매력적인 여성에게 성욕을 품는 것은 당연하죠. 물론 경고창까지 뜰 정도면 확실하게 음심(淫心)이 동했다는 소리지만... 그 정돈 같은 남자로서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아닐까요? 주인님이라면 안 그러셨겠습니까?]
로시의 설명을 들은 도훈은 섣부른 오해로 애먼 사람을 잡으려 한 것은 아닌지 살짝 후회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흔들리는 도훈을 향해 성민이 말했다.
"어쨌든 뭐, 다 지나간 일이잖아. 나도 오해살법한 일을 했으니 욕먹은 건 당연하다고 봐. 그래도 이제 다 푼 것같으니 앞으론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군. 혹시 모르잖아? 우리가 가까운 사이가 될지도?"
성민이 씩 웃었다.
남자가 보아도 매력적인 미소.
도훈도 그 웃음에 거의 넘어갈 뻔했다.
그 웃음 속에 감춰진 차가운 눈빛을 보지 않았으면 말이다.
‘···아냐. 뭔가 이상해! 이 새끼 말하는 거랑 눈빛이 전혀 다르잖아?’
순간 도훈은 멱살을 잡았을 때 놈의 반응을 떠올렸다.
가소로움.
그랬다.
그것은 한없이 상대를 낮추어 보는 오만한 사내의 표정이었다.
그런 오만한 사내가 갑자기 저자세로 나오는 것은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이 새끼 봐라? 지금 연기하고 있잖아?’
도훈은 성민의 감언이설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뻔한 자신을 질타했다.
어찌 됐건 상대는 혜은이 고등학생인 걸 인지한 상태에서도 못된 마음을 품은 사내. 게다가 맥주까지 꺼내놓은 모양새로 봐선, 분명 술을 취하게 해 작업을 걸려던 게 분명했다.
말은 자기 여동생보다 어려서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구선 꾸민 짓은 영 딴판이다. 말과 행동이 다르듯, 사람좋은 미소 속에 눈은 차갑기 그지없다.
도훈이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군요. 소름이 끼칠 정돕니다.]
‘일단 놈을 방심시켜 볼까?’
"사정을 듣고 보니 내가 좀 과한 측면이 있었네.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사과하지. 그리고 망가뜨린 문은 변상해 줄 테니까···."
"괜찮아."
"그래도 제법 비싸 보이는데···."
도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리자 성민은 이때다 싶었는지 자신의 재력을 과시했다. 어쨌든 혜은이를 꼬시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상대니만큼, 자기편으로 만들어 놓아서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친오빠가 신뢰하는 남자만큼 여동생에게 믿음직한 상대는 없을 테니까.
< 110. 즐거운 사라-1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