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6화 (106/2,000)

< 108. 즐거운 사라-13- >

문밖에 서성이던 성민은 벽면에 기댄 체 휘파람을 불었다. 이는 그가 기분 좋을 때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

단순한 포즈지만, 우월한 기럭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스는 전직 모델의 위엄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일상을 담았는데 화보가 되었다는 모 배우의 오만한 인터뷰가 절로 떠오르는 모습이다.

‘후후. 계획대로 되어가는군.’

그는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본인은 철저히 부정하고 있지만, 그러한 성격만큼은 맨손으로 굴지의 기업을 일궈낸 할아버지를 쏙 닮았다.

손자의 집요한 성격을 일찍이 알아챈 회장은, 그에게 후계자 자리를 맡기고자 했다. 혹자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아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성민에게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이라 했지만, 실상은 노회장의 뛰어난 직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이라 불리던 고회장 조차도 손자를 설득할 순 없었다.

할아버지의 무리한 사업확장이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믿고 있는 성민은, 어려서부터 집안과 엇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할아버지의 후계 권유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인생을 개척하기로 한 것.

고회장은 손자의 반항을, 젊은 날의 치기 어린 방황쯤으로 여겼다. 그래서 모델 일을 시작할 적만 해도 언제까지 계속할지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연예인 출신인 어머니의 우수한 유전자 덕에 손쉽게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된 성민은, 이후 고회장조차 예상하지 못한 행보를 보이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하더니 베스트셀러 작가로 전업한 것이었다.

그의 책은 처녀작부터 엄청난 대박을 터뜨렸고, 근 3년간 7개의 작품이 모두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면서 상상할 수 없는 수입을 벌어들이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 본인의 배경을 철저히 숨기고, 필명으로만 활동하며 이뤄낸 성과라는 것이었다.

손자가 승승장구할수록 고회장은 애간장이 타들어 갔다.

돈도 안 되는 모델 일을 할 적만 해도, 외국서 배 곪고 고생하다 보면 으레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재벌가의 손자로 태어나 자연스레 커진 씀씀이를 감당치 못할 것이라 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소설 출간으로 자수성가한 손자를 볼 때마다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 좋은 머리를 하등 쓸데없는 소설 나부랭이 따위나 집필하며 허송세월하다니···. 물론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더욱 통쾌해지는 성민이었다.

밖에서 혜은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성민은 지갑에서 살짝 튀어나온 수표 다발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재작년 외교관의 딸인 김아영을 자빠뜨릴 때, 그 과정을 지켜본 영섭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돈 지랄이네.

-뭐라고?

-네가 말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거, 결국엔 금력으로 굴복시키는 거잖아.

-시샘마시지? 내기에 졌으면 곱게 인정해.

-글쎄? 그게 네가 가진 능력이라면 난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데? 아, 물론 내기는 졌으니 형이라고 불러는 드릴게. 고성민 형님.

-이 새끼가 진짜.

-그 10억, 네가 번 돈이라고 위세 떠는 거라면 더 웃기지. 네가 어떻게 지금처럼 돈을 펑펑 쓸 수 있을까? 너도 속으론 알고 있거든. 어차피 시간 지나면 너네 할아버지 재산 전부 물려받을 거라는 거. 뒷배가 든든하니 번 돈 다 써도 아쉬울 게 없다는 거지.

-너 말 다했냐?

-아니, 한마디만 더 할게. 여자의 마음을 빼앗는다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돈 주고 자빠뜨리는 걸 누가 못해? 나한테도 그 돈 줘봐. 나도 그런 건 하겠다.

-······.

-상대가 진심으로 널 좋아하게 만들어. 그럼 인정하지. 그게 누가 됐건 말이야. 하지만 장담하건대, 인간 고성민을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본다. 만약 내가 틀렸다면 진짜 평생 너한테 형님 소리 해줄게.

***

지금으로부터 30분 전.

호텔 지배인 실.

지난번 영섭의 독설이 떠올랐던 것일까?

지갑에 든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오라 지시하던 성민은 갑자기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냐. 그만둬. 이번엔 돈을 쓰지 않겠어."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냥 가봐."

성민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 내가 돈 아니면 여자 마음을 빼앗지 못할 거라고 했겠다? 영섭이, 넌 이제부터 평생 나한테 형님 소리 붙여야 할 거다.’

그는 이번만큼은 금력을 사용하지 않고 혜은을 꼬시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의 고고한 자존심을 한바탕 긁어댄 영섭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가만있자. 일단은 성가신 룸메이트부터 처리를 해야겠는데···.’

혜은의 룸 앞에서 죽을 치고 잇던 성민은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온 스테파니의 모습에 코너 뒤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너도 양반은 못 되는구나.’

스테파니가 떠난 것을 본 성민은 다시 혜은의 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수작을 부리다 한 번 까인 적이 있었으므로, 두 번 거절당했다간 괜히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것 같았다. 그걸 떠나 전략적으로 유효한 수단이 아니었다.

‘무작정 들이댄다고 통할 상대가 아니야. 차라리 그녀의 친구부터 공략해야 겠어.’

성민은 후다닥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츄리닝 차림의 스테파니가 엘리베이터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스테파니의 자연스레 뒤를 따르며 예전에 한 번 써먹었던 수법을 떠올렸다.

‘옳지. 그걸로 미끼를 흘려야겠군.’

성민은 스테파니를 따라 1층에 편의점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리곤 그녀의 눈에 띄도록 몰래 지갑을 흘렸다.

‘낚여라.’

과연 예상대로 스테파니가 성민의 지갑을 집어 들었다. 스테파니는 무의식적으로 지갑을 열어 보더니 안에 든 5만원권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견물생심.

지갑을 잃어버리고 되찾을 수 있는 확률은 채 10%가 안 된다고 한다. 그나마 안에 든 현금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을 확률은 5% 미만.

스테파니가 특별히 양심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성민의 지갑을 챙겨 건물 밖으로 나갔다. 성민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뒤따랐다.

그녀가 지갑에서 현금을 빼돌리고 풀숲으로 지갑을 내던지는 순간, 불쑥 성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Excuse me?"

(저기요?)

"I,Is that what you told me?"

(저,저한테 하신 말씀인가요?)

"Yes."

뉴욕에서 모델 일을 했던 성민은 유창한 영어발음으로 스테파니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방금 버리신 지갑, 제 거 같은데요?"

범행 사실을 들킨 스테파니는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그 장면을 들킬 줄이야.

"아, 아닌데요."

성민은 말없이 풀숲에 던져진 자신의 지갑을 집어 들었다.

"방금 여기서 현금 빼고 던지셨잖아요?"

"자, 잘못 보셨어요. 진짜 저 아니에요."

성민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콧방귀를 꼈다.

"하-. 나 참. 외국인이라고 좋게 넘어가려고 했더니···."

성민은 지갑을 펼쳐 안에 든 현금을 헤아렸다. 흰색의 수표는 고스란히 있고, 5만원 권 현금만 몽땅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 주머니에 5만원 스무 장 가지고 있지 않아요? 딱 그만큼이 비는데?"

"저, 전 모르는 일이에요."

스테파니가 시치미를 땠다.

"제가 뒤져 볼까요?"

"어, 어디 함부로 여자 몸을 뒤져요?"

이미 시작된 거짓말은 끝없이 이어졌다. 결국 성민은 지나가는 호텔 직원을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저기요. 여기 CCTV 설치되어 있죠?"

"네 손님, 하지만 보안실은 허락받은 관계자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 만약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그러신다면 경찰서에 신고접수를 통해···."

친절히 설명하는 직원에게 성민이 귓속말을 했다.

"나도 아니까 설명 그만하고 지배인 권한으로 좀 보면 안될까?"

"네? 지, 지배인님요?"

"하, 말귀 참 못 알아듣네. 지배인한테 당장 연락해."

"시, 실례지만 누구신지."

"당신한테 일일이 설명할 필욘 없고."

호텔 직원과의 대화는 한국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스테파니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 자리를 모면하고 싶었으나, 성민이 감시의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잠시 후 지배인과 연결된 직원이 성민에게 전화를 바꿔 주었다.

"어, 난데. 보안실 좀 들어갈게. ···아니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전화를 다시 직원에게 던진 성민이 말했다.

"됐지? 안내해."

전화를 바꾼 직원은 지배인에게 된통 혼이 나고서 성민을 호텔 보안실로 안내했다. 그렇게 CCTV를 통해 범행증거를 확보한 성민이 다시 스테파니를 몰아세웠다.

"이래도 아니라고 계속 발뺌할 셈이야?"

결국 스테파니가 울음을 터뜨렸다.

"죄송해요. 제가 실수로 그만···."

옆에서 함께 CCTV를 지켜본 직원들이 성민에게 말했다.

"경찰 불러드릴까요?"

"아냐. 됐어. 아직 학생 같은데 괜히 상황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 돈도 찾았겠다 훈계나 하고 보내지 뭐."

"네."

성민은 울먹이는 스테파니를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경찰에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있던 스테파니는 순순히 성민의 뒤를 따랐다.

성민의 방은 5성급 호텔인 인터콘티넨탈 호텔에도 2개밖에 없는 최고급 프리미엄 스위트 룸이었다. 방 하나의 크기만 40평이 넘었고, 창가로 설치된 대리석 욕조는 공중목욕탕 욕조를 방불케 하는 크기였다.

"여기 앉아."

"···네."

성민은 최고급 양탄자가 깔린 응접실에 스테파니를 앉혔다. 스위트 룸의 위용에 주눅이 든 스테파니는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한 눈알을 굴려댔다.

"너무 겁먹지 마."

"···네."

하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스테파니였다. 성민은 벽면에 걸린 와인 선반으로 가 와인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술이라도 한 잔 할래?"

"저 술 못 마시는데···."

"아, 미성년자였던가?"

"···네."

"그럼 뭐 음료수라도?"

"괘, 괜찮아요."

성민은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맞은편 쇼파에 앉았다.

"이름이 스테파니라고?"

"네."

"한국엔 혼자 온 거야?"

"아, 아뇨 친구랑···."

"허허. 너무 쫄아있네. 내가 경찰서에 신고라도 할까 봐서?"

"······."

"걱정하지 마. 나 그렇게 인정없는 사람 아니니까. 어차피 돈도 찾았고. 뭐, 아직 어리니까 그런 실수 할 수도 있지."

"죄, 죄송해요. 지갑은···."

"신경 쓰지 말래도. 난 그냥 친해지자고 부른 거야."

"···네?"

"아니 뭐 딱 보니까 친구랑 같이 한국에 관광 온 것 같은데, 이런 일로 기분 망칠 필욘 없잖아."

"아···."

"내가 예전 돈 없던 시절에 뉴욕에서 굉장히 고생 많이 했거든. 그때 미국 친구들이 나한테 호의를 베풀었지. 지금 그 보답을 한다고 생각하지 뭐."

"뉴욕에도 계셨어요?"

"응. 지금 하곤 다른 일 할 때. 그땐 말이지···."

성민은 스테파니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연기했다. 그를 잘 아는 친구 영섭이 보았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매너 좋은 젠틀맨의 모습이었다.

"호호! 오빠 정말 재밌는 분이군요."

"참, 스테파니. 나 때문에 너무 시간 오래 끈건 같네. 그냥 몇 마디 얘기만 나누려고 했는데. 이제 방으로 가봐야 하지?"

"···네?"

스테파니는 힐끔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편의점을 다녀온다고 한지 어느새 30분 가까이 흘러 있었다. 그 사이 혜은이 남긴 부재중 통화는 무려 4번.

그러나 잘생긴 성민에게 매료돼버린 스테파니는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외모가 출중한 혜은이나 사라와 달리, 그녀는 늘 남자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타입.

이런 미남자와 또 언제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생각하니 그와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가긴 해야 하는데···."

"하는데?"

"어차피 방에 가도 오늘 밤엔 할 것도 없고···."

"그치만 친구랑 같이 왔다지 않았어? 친구 혼자 심심할 텐데?"

"아! 혹시 레이첼을 여기로 초대해도 되나요?"

"친구 이름이 레이첼이야?"

"네. 아, 그런데 그건 미국 이름이고 원래 한국 사람이에요. 혜은이라고."

"혜은?"

"네. 레이첼도 이 방에 오면 좋아할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방은 저도 처음이거든요."

"그래? 뭐 상관없어 난. 어차피 오늘 작업 다 끝냈으니까. 근데 레이첼이 무섭다고 안 온다면 어쩌지?"

"네?"

"아니, 레이첼은 아직 나에 대해 잘 모르잖아. 무턱대고 낯선 남자 방으로 오기가 좀 그렇지 않겠어?"

"아···."

성민은 난처해 하는 스테파니를 꼬득이기 시작했다.

"아니면 이러는 건 어때?"

"네?"

"니 친구에게 장난 좀 쳐볼까?"

"어떻게요?"

"그러니까 말이지, 이건 몰래카메라 같은 건데···."

평소 장난기가 많은 스테파니는 성민의 제안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특히 친구의 우정을 시험해 볼 수 있다는 성민의 얘기가 솔깃했다.

"레이첼이 진짜 네 베프라면 여기로 와주지 않겠어?"

"무조건 올 거예요. 레이첼은 진짜 제 친구니까요."

"정말? 그렇게 자신 있어?"

"당연하죠! 우리가 얼마나 친한데요."

"좋아. 그럼 아까 말처럼 연기해서 레이첼이 진짜로 널 위해 이 방에 와주면, 내가 너희들 가이드 해줄게."

"가, 가이드요?"

"응."

스테파니는 혜은의 오빠인 도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내일 서울 구경은 도훈이 해준다고 했는데···.

망설이는 그녀 앞에 성민이 쐐기를 박았다.

"재밌을 거야. 나 차도 괜찮거든."

성민이 페라리 각인이 되어있는 키홀더를 손가락에 끼워 돌렸다. 차에 대해 잘 모르는 스테파니도, 그 문양이 고급 스포츠카 브랜드라는 것쯤은 알았다.

‘이 오빠랑 다니는 게 훨씬 재밌겠는데? 돈도 많아 보이고, 차도 있고, 또 나한테 잘해주니까.’

도훈은 이복언니 사라와 여동생만 챙길 뿐 자신에겐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못내 서운했던 스테파니는 성민의 제안을 덜컥 받아들였다.

"좋아요!"

"그래? 그럼 일단 네 핸드폰 좀 나한테 줘봐. 내가 금방 다녀올게."

< 108. 즐거운 사라-13- > 끝

ⓒ 성난불기둥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