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3화 (103/2,000)

< 105. 즐거운 사라-10- >

사라는 도훈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계속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5분이 10분이 되고 다시 20분이 되었을 때, 사라는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어째서 도훈 씨가 오지 않는 걸까? 설마···.’

문득 골목길에서 만난 취객들이 떠올랐다.

자신과 여동생에게 수작을 걸던 불량스런 사내들.

혹시 그들이 도훈을 쫓아와 해코지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었지만, 그런 식의 불길한 생각이 들자 사라는 밀려오는 불안감을 억제할 수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환상적인 저녁이었다.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불러준 도훈의 모습에, 사라는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낯선 여행지.

음악이 흐르는 째즈바.

몸을 데우는 칵테일 한 잔.

거기다 얼굴도 훈훈하고 매너까지 훌륭한 도훈.

어쩌면 그를 만나기 위해 머나먼 한국까지 이끌려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역만리까지 펼쳐진 운명의 실타래를 붙잡고, 스테파니와 레이첼이라는 큐피트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자신의 반쪽을 찾았다는 느낌.

그랬던 도훈이 담배를 피운다고 나갔다 20분 넘도록 돌아오질 않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어.’

사라는 급히 바텐더에게 술값을 치르고 자리를 일어섰다.

***

밖을 나가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도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한당같은 3인조가 도훈을 으슥한 곳으로 끌고가 집단 린치라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만상상이 들기 시작하자 사라는 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경찰에 실종신고라도 하기 위해 전화기를 꺼냈다.

때마침 문자가 도착했다.

레이첼 : 언니. 방금 연락받았는데 오빠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데요. 언니 번호를 몰라서 저한테 먼저 간다고 대신 전해 달래요. 일단 저희 방으로 올라 오세요. 스테파니가 간식 사 온다니 같이 들어요.

"휴-. 난 또."

안절부절 못하던 사라는 문자를 확인한 후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리며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치, 괜히 걱정 했잖아."

말없이 사라진 도훈이 야속했지만, 분명 긴박한 사정이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어차피 내일 또 볼테니까 뭐.’

사라가 룸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그녀 옆으로 유니폼을 입은 호텔 직원이 인사를 건넸다.

"Good Eveing."

"네, 좋은 저녁이네요."

사라가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내뱉자, 인사를 건넨 직원이 당황하며 물었다.

"어라? 한국말 잘하시네요."

"네. 조금 할 줄 알아요."

"몇 층 가세요? 눌러 드릴게요."

"고마워요. 5층이요."

"잘됐네요. 저도 마침 5층 가는 길인데."

직원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에도 사라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민망했는지 직원이 사라에게 물었다.

"관광은 많이 하셨어요?"

"아뇨. 오늘 막 도착했어요. 내일부터 돌아다니려고요."

"아하, 혹시 자유 여행 중이시면 프론트에서 좋은 관광지를 추천해 드릴 겁니다."

"No thanks. 벌써 좋은 가이드 구했어요."

사라가 도훈의 훈훈한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그렇군요. 그럼, 즐거운 여행 되세요."

"고맙습니다."

‘5032호였지? 스테파니 방이.’

사라가 5032호에 이르러 초인종을 누르려던 순간.

함께 걸어온 직원이 바로 옆방에서 세탁 바구니를 수거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상한 기분에 사라가 슬쩍 고개를 돌려 옆방 번호를 확인했다.

-5033호-

‘어라? 저 방은 내가 머물기로 한 방인데?’

사라가 직원에게 물었다.

"지금 청소하시는 건가요?"

"예?"

"아뇨. 5033호 방요."

"아, 여기 묵고계신 투숙객께서 급하게 세탁서비스를 부탁하셔서 수거하는 중입니다."

"네? 세탁 서비스라뇨?"

사라는 자신이 뭔가를 착각했나 싶은 마음에 다시 한번 룸 넘버를 확인했다.

‘아닌데? 분명 스테파니랑 레이첼이 5032호고 내가 그다음 방인데?’

의구심이 든 사라가 재차 직원에게 물었다.

"지금 이 방에 투숙객이 있다구요?"

"네."

"그럴 리가···."

"뭔가 잘못됐나요?"

당당한 직원의 태도에 사라는 오히려 자신이 오해했다고 생각했다.

"아, 아뇨. 제가 착각했을 수도 있겠네요."

"혹시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내선 번호 0번으로 프론트에 문의하시면 됩니다. 전 조금 급해서 이만···."

직원은 세탁 바구니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사라는 세탁 바구니에 담긴 빨래가 어딘지 익숙해 보였다.

‘저 옷, 도훈 씨가 입고 있던 옷이랑 똑같은데···.’

잔뜩 의구심이 생긴 사라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복도에 우두커니 멈춰섰다. 그리고는 자신이 뭔가를 놓친 것은 없는지 천천히 복기하기 시작했다.

‘체크인 할 때 분명 카드키를 두 개 받았어. 그리고 도훈씨가 저녁을 대접한다 해서 급히 나가느라 캐리어를 동생 방에 몰아 넣었고···. 난 괜히 카드키를 들고 나갔다 분실 할지 몰라 동생방 화장대에 올려 두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술은 마시긴 했지만 과음한 것도 아니었다.

맥주 두잔, 칵테일 한잔에 한두시간 전 기억을 망각할 만큼 주량이 약한지도 않았다.

'뭐야? 대체 내 방에 누가 있는 거지?'

사라는 세탁바구니에 들어있던 옷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하필 도훈이 입고 온 옷과 같은 디자인에 같은 칼라.

'확인 해봐야 겠어.'

사라는 떨리는 심정으로 자신이 묵기로 한 방의 초인종을 눌렀다. 혹시나 자신의 착각이라면, 창피당할 각오까지 마친 그녀였다.

***

띵동-

도훈이 침대에 대자로 널부러져 있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호텔 직원인가? 분명 세탁바구니는 밖에 내놨는데?'

도훈은 바깥 상황을 몰라 잠자코 기다렸다.

띵동-

그러나 잠시 후 초인종이 한 번 더 울렸다.

그제야 도훈이 몸을 일으켰다.

'아, 급드라이는 따불이라더니 요금이 선불인가 보구나.'

"잠시만요."

도훈이 걸치고 있던 수면가운의 끈을 조이고는 지갑을 챙겨 뛰어나갔다. 도훈은 손잡이를 돌리며 젖은 지갑에서 체크카드를 꺼냈다.

"제가 현금이 다 젖어서 그런데 혹시 카드도 받..."

"도, 도훈씨?"

"어어어?"

도훈은 사라와의 예상치 못한 조우에 몹시 당황했다.

'분명 혜은이가 붙잡아 두겠다 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도훈씨가 왜 제 방에 있어요? 그리고 그 차림은 뭐에요?"

도훈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여동생 등 밀어 주다가, 스테파니에게 걸릴까봐 욕조에 뛰어들어 흠뻑 젖었다고 말할까?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핑계였다.

"이, 일단 들어와요."

"네?"

"들어와서 얘기하자구요."

도훈은 사라의 팔목을 잡아 끌고는 룸안으로 끌어 들였다. 사라는 의아해 하면서도 순순히 도훈의 손에 이끌렸다.

사라를 응접실 쇼파에 앉힌 도훈은 자신도 나란히 옆에 앉았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로시가 말을 걸었다.

[주인님은 참으로 운도 좋으시네요.]

'뭐라고? 지금 누구 놀리냐? 이보다 최악의 상황이 어딨다고.'

[달리 생각해 보십시요. 위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라씨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 호텔 방안에 단둘이 있는 셈 아닙니까? 이런 순간을 고대하셨던것 아닙니까?]

'어라? 듣고보니 그렇네?'

도훈은 로시의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위기는 곧 기회.

어쩌면 지금의 상황이 소 뒷걸음질에 생쥐 밟는 꼴일지도 모른다. 속된말로 얻어걸렸달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도훈씨가 왜 제 방에 있어요? 레이첼에겐 급한일이 생겼다고 간다고 했다면서요."

"레이첼 만났어요?"

"아뇨. 문자 받았어요. 방금 막 레이첼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호텔 직원이 세탁물을 수거해 가는 거에요. 분명 제가 예약한 방인데 말이죠. 그래서 혹시나 해서..."

'일이 참 공교롭게 되었구나. 어쨌든 사라는 내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건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소리네.'

도훈은 사라가 정확한 상황 파악이 안되어 있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거짓말을 한다면 그지점부터 시작해야 한다.

"전 도훈씨가 불량배들 한테 잡혀간 줄 알았어요."

"불량배요?"

"왜 아까 골목길에서..."

사라는 아까의 걱정스런 순간이 떠오르자 다시 심장이 떨려왔다. 도훈이 잘못됐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얼마나 조마조마 했던가?

"아."

"도훈씨가 납치된 줄 알고 경찰서에 신고하려고까지 했다구요."

눈물까지 글썽이는 사라의 모습에 도훈이 그녀의 떨리는 손을 마주잡았다.

"미안해, 사라. 말없이 사라져서."

"정말 어떻게 된 거에요? 저한테 말해줄 수 없나요?"

"실은..."

***

대중선동의 대가였던 나치의 선전부장 괴벨스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99개의 거짓과 1개의 진실을 적절히 배합하면 사람들은 처음엔 그것을 부정하더라도 나중에는 그 사실을 믿게 된다."

또 노예 해방으로 유명한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들을 잠시 속일 수도 있고 또 한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나, 모든 사람들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두 사람의 의견을 종합하면 이렇다.

"99개의 거짓과 1개의 진실을 적절히 배합하면, 한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다."

나는 옛선현의 조언을 받들어 지금부터 사라에게 거짓말을 할 참이다.

이는 누군가에게 사기를 치거나 해를 끼치기 위함이 아니다. 모두를 위한 착한 거짓말이다.

나에게도, 혜은에게도, 그리고 사라 자신에게도.

"실은 사라 말이 맞아."

"네?!"

사라는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을 치켜떴다.

나는 비교적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 불량배 놈들. 우릴 계속 뒤쫓았나 봐. 호각소리에 놀라 도망친 사실이 못내 분했던 거지."

"저, 정말이에요?"

"응. 호텔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갑자기 양쪽에서 두놈이 내 팔을 꽉 붙잡는거야."

"어머나!"

"내가 뭐하는 짓이냐고 따지니까 좋게 말할 때 따라오래. 자세히 보니 한놈이 손에 젝 나이프를 들고 있더라고."

"세, 세상에!"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일단 따라갈 수 밖에 없었어. 왜 그런 작자들 있잖아. 내일이 없이 사는 사람들. 걔내들 눈빛이 딱 그래."

실감나는 묘사에 사라의 눈이 시시각각 공포에 휩싸였다. 음, 나에게 이런 재능이.

"그, 그래서요?"

"으슥한 골목으로 나를 끌고가서는 이렇게 묻는 거야. 아까 그 백마들 어딨냐고."

"백마가 뭐에요?"

"White Horse."

"그게 무슨 의민데요?"

"음, 그건. 질 나쁜 사람들이 서양 여자들을 낮춰 부르는 말이야."

"잘은 모르지만 뭔가 안 좋은 뜻 같군요."

"아무튼 그래서 내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땠지. 이미 나와 헤어졌다고. 좋게 대화로 해결하자고."

"그래서요?"

"그런데 거짓말 하지 말라는 거야. 같이 호텔로 들어가는 거 다 봤다며."

"어머어머 세상에!"

"그 말 들으니까 도저히 가만 있어선 안되겠더라고. 이 사람들은 말이 통할 사람들이 아니다. 본때를 보이지 않으면 계속 귀찮게 굴것 같았어."

"위, 위험하게. 경찰을 부르지 그랬어요."

"한국 속담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어."

"그게 무슨 뜻이에요."

"때로는 공권력에 기대기보다 자력구제가 빠르다는 소리야."

"공꿘력? 자력꾸제? 단어가 너무 어려워요."

"어쨌든 난 주먹으로 해결해야 겠다고 생각했어. 사실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오래 배웠거든."

"태권도!"

"그래 태권도. 사실 난 싸움은 제법 하는 편이야."

이 부분이 바로 1개의 진실 쯤 되겠군.

정음이의 국대급 태권도 실력을 70% 흡수했으니.

"무모해요. 상대가 칼도 들고 있었다면서."

"그래서 칼 든 놈부터 먼저 제압했지. 이렇게."

나는 쇼파에서 벌떡 일어나 앞차기를 선보였다. 수면가운이 펄럭이며 굉장한 소음이 일었다. 사실 오버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지만, 1개의 진실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발차기를 보여준 것이었다.

"와..."

과연 사라는 나의 발차기를 보더니 입이 떡 벌어졌다. 서양인들이 동양무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비감까지 더해지면서, 그녀는 정말로 나를 무술의 고수 쯤으로 인식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

"발차기로 칼을 떨어뜨리니까 양 옆에서 어깨를 붙잡고 있던 놈들이 주먹을 내지르는 거야."

"어, 어떡해!"

"하지만 난 호신술도 틈틈히 연마 했거든."

"호신술은 또 뭐에요?"

"응, 상대의 기습으로 부터 나를 지키는 무술이야."

"아..."

"그래서 주먹을 피한 다음 한 놈을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나머지 한 놈을 이렇게 돌려차기로-"

부웅-!

다시 한번 깔끔한 회축.

사라의 동공이 크게 흔들린다.

"아앗, 도, 도훈씨."

"네?"

"그, 그게."

반응이 좀 미묘하다.

사라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외면했다왜 저러지? 뻥을 너무 심하게 쳤나?

"다, 보, 보이잖아요."

"뭐가? 아앗!"

과격한 발차기를 하느라 수면 가운 끈이 헐렁해 지면서 나의 소중이(?)가 그대로 노출되었던 것이었다.

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가운을 여몄다

"미, 미안. 속옷까지 다 젖어가지고."

"아니에요. 일부러 그런것도 아닌데."

근데 왜 사라 넌 두 볼이 새빨게진거니?

[주인님, 노리고 하신거라면 굉장히 자연스러운 어필입니다. 아아, 저는 탄복해 버렸습니다!]

'음, 의도했던 건 아니야.'

[어쨌든 사라씨도 매우 흡족해 하는 표정이군요.]

'뭐 그러면 다행이고.'

"그런데 옷은 어쩌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 105. 즐거운 사라-10-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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