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즐거운 사라-9- >
알몸이 된 혜은의 모습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백옥처럼 뽀얀 피부는 물기에 촉촉하게 젖어 있다. 쇄골을 타고 흘러내리던 물방울이 가슴 끝 낭떠러지에 걸쳐 아슬아슬 매달린다.
‘···미치겠군. 이건 완전 고문이야.’
[여기까지 와서 뭘 망설이십니까? 방금 밝혀진 사실처럼 혜은 양은 주인님의 친동생이 아닙니다.]
‘대체 뭐라는 거야? 동생 아니면 막 덮쳐도 된다는 소리야?’
[제 판단으론 혜은 양도 주인님을 좋아하는 게 분명합니다.]
‘당연하지 친오빠니까.’
[글쎄요? 오히려 친오빠가 아니라서 좋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뭐라고?’
[도훈 군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확실히 두 사람의 남매 관계는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데?’
[도훈 군 역시 여동생을 이성으로 느낀 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뭐? 그걸 왜 지금 얘기해?’
[말씀드리려 했지만, 주인님이 근친에 대해 거부감이 워낙에 강하셔서···. 아무튼, 이제 보니 도훈 군이 여동생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었던 이유가 충분히 납득 가는군요. 애초부터 친남매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여동생을, 아니지 혜은일 좋아해 버렸다는 얘기야? 도훈이가?’
[물론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시작되고선 이성적인 끌림을 억제할 수 없었죠. 도훈 군은 그런 문제로 상당한 내적 갈등을 겪었습니다. 여동생을 떠올리며 자위하는 스스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거든요.]
‘이런···.’
[기억을 더듬어 추측을 이어가 보면, 도훈 군의 부모님께서 혜은 양만 데리고 미국으로 유학 간 것도 도훈 군과 혜은양을 떨어뜨려 놓기 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그게 정말이야?’
[물론 현재로선 합리적인 추정일 뿐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남매 이상으로 애정표현을 해대는 두 사람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부모님의 모습 역시 도훈 군의 뇌리에 강렬히 남아있습니다.]
‘가만. 네 말대로라면 도훈이 부모님은 이미 두 사람이 친남매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단 소리잖아?’
[당연합니다. 최소한 한쪽은 알고 있었거나, 어쩌면 둘 다.]
‘둘 다라니?’
[단순히 어머니 쪽의 바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말도 안 돼. 혜은인 아버지에게선 나올 수 없는 유전자야.’
[그것은 섣부른 추정입니다. 가령 아버지가 바람을 펴 아내에게 양해를 구한 뒤 혼외자식을 데려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애초부터 두 사람의 자식이 아닌 입양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셔야 합니다.]
‘아차! 그 생각까진 못 했군.’
전생에 뻐꾸기 아빠가 된 적 있던 나는 출생의 비밀을 여자 쪽의 바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듣고 보니 로시의 상황 판단이 훨씬 객관적이다.
[진실이 무엇이건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서로를 이성으로 인식해왔습니다. 게다가 이젠 친남매가 아니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죠. 더 망설일 게 있습니까?]
내 번민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일까?
혜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오빠한테 고백할 거 있어."
"고, 고백?"
"언젠가부터 오빠가 너무 좋아졌어."
"···혜, 혜은아."
"아무 말 말고 그냥 들어 줘. 지금 아니면 말 못 할 것 같아서 그래."
"······."
"그건 여동생이 가질 수 있는 감정 이상이었어. 눈을 감아도 오빠가 생각나고, 꿈에도 계속 나오고. 하도 이상해서 친구들한테 물어본 적도 있어. 너희들도 오빠랑 사이가 좋냐고. 그러니까 다들 말도 안 된다는 거야. 매일 싸운다고. 남자라는 생각조차 안 든다고. 징그럽다고. 더럽다고.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고."
"······."
"그 말 들으니 내가 너무 이상한 사람 같았어. 어떻게 친오빠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는 걸까? 나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일까? 오빨 유독 못 살게 군것도 그런 감정을 숨기고 싶어서 였어.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 여동생이 오빠를 남자로 느끼면 안 되는 거니까."
"혜은아···."
"근데 이제 확실히 알겠어. 내가 왜 오빠한테 그런 감정을 느꼈던 건지. 왜 매일 밤 오빠가 날 덮쳐주는 꿈을 꿨던 건지. 오빠는가 바로 내 친오빠가 아니었으니까."
"그, 그렇지만···."
"오빠도 솔직히 말해줘. 나만 그런 거 아니지? 오빠도 날···."
똑똑-
혜은이 지금껏 감춰왔던 불경스러운 심경을 고백하는 순간.
샤워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Who's in there?"
(안에 누구 있어?)
사라의 여동생, 스테파니였다.
OH MY GOD!
난 이제 좆됐다. 그것도 완전.
***
"I,I'm in the bath!"
(나, 나 목욕 중이야.)
혜은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대답했다. 그녀 역시 지금의 이 상황이 누구에게도 납득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절친에게 근친 남매로 오해받는다면 정말이지 죽고 싶을 것이다.
"Rachel, I need a toilet!
(레이첼, 나 화장실 급해.)
"No!"
(안돼!)
"What? I'm going to pee, NOW!"
(뭐라고? 나 당장이라도 쌀 것 같단 말이야!)
혜은은 도훈을 보며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지? 스테파니가 보면 분명 오해할 텐데."
"차, 창문으로 뛰면..."
"오빠 여기 5층이야. 그러다 죽어."
도훈은 베쓰룸 벽면에 난 조그만 창을 쳐다보았다. 너무 작아 창틀을 모두 분리해야만 겨우 빠져나갈 사이즈.
게다가 5층이라니.
쪽팔림을 면피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 순 없었다.
"어, 어쩌지?"
혜은은 다급하게 눈을 굴리더니 갑자기 거품 가득한 욕조안을 가리켰다.
"여기 숨어."
"뭐?"
"탕 속에 잠수하라고! 거품 때문에 안 보일 거야."
"아, 아니 그래도 어떻게···."
"얼른! 스테파니 지금 들어온단 말야!"
‘에라, 이판 사판이다!’
도훈은 커다란 욕조 속으로 몸을 날렸다.
풍덩-!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 스테파니가 베쓰룸 안으로 들어왔다.
"sorry! I can not stand it."
(미안. 도저히 못 참겠어.)
스테파니는 한참을 참았는지 제빨리 바지를 내리더니 좌변기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혜은을 향해 말했다.
"응, 내가 깜빡 물 받아놓고 잠들어 버렸네. 다 씻었니? 물 받기 귀찮으니까 버리지 말구 놔둬. 내가 이어서 씻을 게."
스테파니의 말에 혜은이 화들짝 놀라며 욕조 속으로 다시 몸을 집어 넣었다.
"나, 나 아직 멀었어. 문 잠근 줄 알고 열어 주려고 일어섰던 거야."
혜은의 발등으로 도훈의 몸이 느껴졌다.
"그래? 그럼 같이 씻을까?"
혜은과 스테파니는 함께 수영장을 다녔기 때문에 같이 샤워하는 것이 익숙했다.
"아, 아니! 절대 안 돼!"
혜은이 필사적으로 도리질 치자 무안해진 스테파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그래? 알았어."
"용변 다 봤어?"
좌변기에 물을 내린 스테파니가 다시 나가려다, 갑자기 등을 돌렸다.
"왜, 왜? 다시 들어와?"
"아니 아까 먹은 고기가 이에 낀 것 같아. 이빨 좀 닦으려고. 괜찮지?"
‘헉! 하필 쟤는 이 이럴 때.’
스테파니가 칫솔에 치약을 짜는 동안, 혜은은 오빠가 어느새 1분 넘게 물속에 잠수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실제로 탕 속에 숨은 도훈은 이미 한계치까지 도달해 있었다. 10초만 더 있다간 욕조 속에서 익사체로 떠오를 지경이었다.
‘오, 오빠를 살려야 해!’
***
입욕제가 잔뜩 뿌려진 물속은 뜨겁고, 뿌옜다.
욕조 사이즈가 대형이라 몸을 숨기기엔 부족함이 없었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진 미지수였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람. 내가 무슨 불륜남도 아니고.’
[불륜남보다 더 심하죠. 폐륜남이랄까요?]
‘뭐 인마? 혜은인 친동생 아니라 괜찮달 때는 언제고 폐륜남이래?’
[순전히 스테파니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그녀는 두 분의 사정을 모르니까요. 또 작금의 상황이라면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지도 않군요.]
‘그나저나 언제까지 숨어 있어야 하지? 이러다 진짜 질식할 것 같은데.’
[소변이니까 길어야 1분 아닐까요? 괜찮을 겁니다.]
그때 여동생의 발이 탕속으로 들어왔다.
발은 내 어깨에 부딪히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뭐, 뭐야? 얘는 또 왜 탕으로 들어와?’
[바깥 사정을 모르니 답답하시겠군요.]
‘얼래? 완전 누워 버리는 데?’
발을 밀어 넣은 여동생은 이제 탕 속으로 완전히 몸을 집어넣었다. 그 바람에 여동생의 다리가 내 몸을 더듬고 스쳐 지나갔다.
우웃! 뭐야 지금 내 얼굴에 닿은 거 허벅지야?
물속이 조금만 맑았더라도 속살이 다 보일 아찔함에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니 실제로 숨이 점점 조여오고 있었다.
이미 폐 속 공기는 소모한 지 오래. 지금은 피를 타고 흐르는 헤모글로빈에서 산소를 당겨쓰는 상황이다.
‘크헉. 숨이 터질 것 같아. 이대로 익사하고 마는 건가.’
[주, 주인님. 그냥 물 밖으로 나오시지요. 아무리 쪽팔려도 죽는 것보단 낫겠습니다.]
‘안 돼! 혜은일 난처하게 만들 순 없어.’
[주인님!]
그때 혜은이 손을 뻗어 내 몸을 더듬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손은 내 등을 타고 오르더니 내 머리를 붙잡고 멈춰섰다.
그리고. 탕 속으로 그녀가 들어왔다.
흐릿한 탕 속이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혜은이 코앞까지 다가와 내 입에 입을 맞추었던 것이다.
‘허억!’
그러나 놀람도 잠시 그녀의 입에 가득 들어 있는 공기가 입속을 타고 내 입으로 전달되었다.
[오! 놀라운 기지로군요. 물속에서 산소를 공급할 생각을 하다니!]
로시가 탄성을 쏟아냈지만, 나는 여동생과 키스했다는 충격에 정신이 멍해졌다. 혜은은 다시 물 밖으로 나갔다가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혹시라도 산소 공급 중 욕조 물이 스며 들어갈까 바짝 입술을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결국 키스해 버렸다.’
다시 산소를 공급받은 나는 한참 뒤, 혜은이 내 목덜미를 붙잡고 신호를 보내고 나서야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커헉-! 허억-허억-"
"오빠 괜찮아?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 스테파니가 이를 닦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었군. 고맙다 스테파니.
한참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야, 홀딱 벗은 혜은과 같은 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를 어째···. 옷이 다 젖어버렸네."
혜은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은 옷이 문제가 아니라, 여길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가 문제다. 스테파니가 다시 잠들지 않는 이상 나는 화장실에 영원히 갇혀 버릴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도운 것일까? 베쓰룸 밖으로 스테파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첼, 나 잠깐 1층 편의점 가서 간식 좀 사서 올 게. 먹고 싶은 과자 있어?"
"아무거나."
"응. 금방 다녀올 게."
"으, 응."
잠시 후 스테파니가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나가야겠다."
"오빠 근데 옷이···."
"어떻게든 해 볼게. 룸서비스 중에 클리닝 서비스가 있을 거야. 급하게 드라이라도 부탁해 봐야지."
"근데 어디서? 우리 방에선 스테파니 때문에 곤란할 텐데···."
혜은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말했다.
"이렇게 해. 거실에 보면 카드키가 하나 있을 거야. 사라 언니 룸키를 스테파니가 챙겨 놨거든. 일단 그 방으로 피신해서 룸서비스 불러."
"아, 맞다! 사라는 어떡하지?"
나는 그제야 바에 홀로 두고 온 사라를 떠올렸다. 담배 피러 잠깐 다녀오겠다고 해놓고 완전히 잊고 있었다.
"언니한테 내가 전화해서 우리 방에 와 있으라 할 게. 오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나한테 연락하고 갔다고 하고. 언니 번호를 몰라서 연락을 못 했다고. 내가 어떻게든 사라 언니 붙잡아 놓을 테니까 오빤 얼른 옷부터 말려."
"그래. 알았어."
나는 이윽고 탕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젖은 미역처럼 옷에서 줄줄 물이 흘러 내렸지만, 스테파니가 돌아오기 전 얼른 옆방으로 피신해야 했다.
"오빠."
밖으로 나가려는 데 탕 속에 있던 혜은이 물었다.
"아까 못한 대답, 내일 꼭 해줘. 알았지?"
"···내일 봐."
나는 대답을 회피한 체 카드키를 챙겨 복도로 나갔다.
***
사라 방에 무사히 도착한 도훈은 젖은 옷을 벗고 샤워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곤 카운터에 전화해 세탁물을 부탁했다.
"1시간이요?
-네. 사실 급드라이는 어지간해선 안 해드리는데 손님 사정이 난처하다고 하시니···.
‘젠장, 남의 방에 1시간 동안 꼼짝없이 갇혀 있게 생겼군.’
"일단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좀 해주세요."
-네, 바로 직원 보내겠습니다. 세탁물은 바구니에 넣어 밖으로 내놓으시면 됩니다.
도훈은 대충 물기를 짜낸 옷가지를 세탁 바구니에 넣어 문밖으로 내었다. 그리고는 초조한 표정으로 혜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도훈 : 세탁하는 데 한 시간쯤 걸릴 거래. 그 정도 끌어 줄 수 있어?
혜은 : 걱정 마. 어떻게든 시간 끌어 볼 게.
도훈 : 고마워.
혜은 : 뭘,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라."
수면 가운을 걸친 도훈이 침대에 널부러져 중얼거렸다.
과연 혜은과 자신은 무슨 사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 104. 즐거운 사라-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