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즐거운 사라-8- >
성민은 세상에 돈으로 안되는 일은 없다고 믿는 부류였다. 실제로 그는 지금껏 많은 여자들을 돈으로 농락하곤 했다.
"내가 쟤 오늘 자빠뜨려 볼까?"
어느 사교모임에 참석했던 날, 성민이 친구 영섭에게 말했다.
"누구? 저기 예쁜이? 아무리 성민이 너라도 어림 없을 걸? 참고로 쟤 남자 친구 영화배우야. 그 누구냐, 최근 한류스타로 한참 뜨고있는."
성민과 같은 재벌 3세인 영섭은, 능력 출중한 동생에게 밀려 그룹 후계자 구도에서 완전히 배제된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폐위된 황태자를 자처하며 유유자적 인생을 즐겼다.
둘은 성민이 뉴욕에서 잠시 모델 일을 할 때 알게 된 사이로, 친구가 없다시피한 성민으로서는 유일하게 마음을 트고 지내는 상대이기도 했다.
"연예인 따위가 뭐라고?"
"뭐, 너도 어디가서 꿀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얼굴은 못 당하지. 걔들은 쌍판 하나로 먹고 사는 애들인데."
"그래봐야 서민이지."
"서민? 그래도 한류스타면 어깨에 힘 줄 정도는 돼. 특히 중국이나 일본 쪽에서 대박내면 100억도 우습게 버는게 요즘 딴따라거든."
"100억? 그거 우리집 개 이름인데?"
"나참, 니 앞에선 뭔 말을 못하겠네. 그럼 어디 한 번 해봐. 니가 쟤 꼬시면 내가 앞으로 너 1년간 형님으로 모신다."
"너 그 말 꼭 지켜."
성민은 손가락을 까딱해 지나가는 웨이터를 불러 귓속말을 했다. 잠시 후 여자에게 다가간 웨이터는 성민의 말을 전달했다. 여자는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성민 쪽을 쳐다보았다. 성민이 상큼한 미소로 화답했다.
"뭐라고 한거야?"
성민이 대답했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좀있다 2층 발코니에서 보쟀어."
"보잔다고 볼까? 여기 사람들, 네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물론 맨입은 아니지. 영화배우 남자친구한테 CF의뢰하고 싶다고 미끼를 던졌거든."
"크크. 약아 빠졌군. 아무튼 난 실패할 거라고 봐. 참고로 쟤한테 대쉬하다 물 먹은 애들만 한트럭 넘을걸?"
"설마 그 트럭에 너도 탑승했냐?"
"쳇, 아니라곤 말 못하겠네. 어떻게 알았어?"
"평소보다 유난히 열 올리는 모습이 뭔가 사연이 있는 사이 같잖아."
영섭이 변명했다.
"야, 솔직히 저 얼굴에 저 몸매면 사내놈들 이라면 눈뒤집힐 수밖에 없지? 어차피 이런 사교모임, 다 큰 암컷 숫컷 자연스럽게 짝짓기 하라고 만든 자린구만."
"짝짓기라니. 저속하군... 여기가 무슨 동물의 왕국이야?"
영섭은 비아냥거리는 성민의 태도에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여기가 진장 동물의 왕국이면 네놈이 가장 최상위 포식자겠지.
"아이고 격 떨어뜨려 죄송합니다. 재계 10위권에도 못 드는 데다, 심지어 동생놈한테도 밀려난 제가, 감히 재계 1위의 황태자님께 추태를 부렸습니다요."
"주제 파악은 빨라서 좋군."
"뭐 인마? 하여간 이런 시건방진 놈 같으니. 꽁트를 왜 다큐로 받어? 사람 민망하게."
"그게 내 매력이야. 가식없이 솔직한 거."
"얼어죽을 매력같은 소리. 나나 되니까 니 옆에 붙어 있는 거야."
"맞아. 그래서 친구라곤 너 하나 뿐이잖아."
"알긴 아냐? 그니까 잘해."
"그나저나 가진 정보 좀 줘봐. 아무리 내기지만 맨땅의 헤딩은 너무하잖아."
"나도 기본적인 것 밖엔 몰라. 이름은 김아영. 부모님 둘 다 외교관으로 나름 명문가 출신이라고 할 수 있지. 하긴 뭐 그러니까 이런 모임에 참석했겠지만."
"외교관 나부랭이가 명문가라고?"
"돈밖에 없는 우리들보단 더 자부심 있지 않을까?"
"넌 몰라도 난 아닌데? 저번에 낸 책 또 베스트셀러 올랐다. 난 집안 도움없어도 잘 나가거든?"
"참나. 너랑은 말을 말아야지. 근데 어떻게 꼬실 건데? 쟤 어지간해선 안 넘어간다. 어찌나 콧대가 높던지, 원."
영섭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던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재벌 3세라는 배경에도 눈 하나 깜빡안하던 도도녀.
그가 기억하는 아영은 무척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다.
부러질 지언정 무릎 꿇지 않는 대쪽같은 느낌.
그러나 성민은 여전히 여유 만만이었다.
그가 나무라듯 말했다.
"어지간하니까 문제야. 넌."
"뭐라고?"
"내가 말했지. 협상 할 땐 상대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라고."
성민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
두 사람은 정원이 내려 보이는 발코니에서 만났다.
와인잔을 들고 야경을 감상하던 성민 뒤로, 아영이 다가왔다.
"절 찾으셨다고 하던데... 창용씨 CF문제로."
"아, 오셨군요. 한참 기다렸습니다."
"괜한 오해받기 싫어서요. 양해해 주셨음 해요."
"남자 친구분 때문에요?"
"네. 아무래도 창용씨가 이름이 알려진 연예인이다 보니, 저도 몸 사리게 되네요. 구설수에 오르기도 싫고."
"이해합니다."
"고마워요. 전 김아영이라고 해요. 성함이?"
"고작가로 불러주세요."
"고...작가요?"
먼저 이름을 밝혔음에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성민의 태도에 아영은 기분이 불쾌해졌다. 인적 드문곳으로 사람을 불러낸 것도 탐탁찮은 마당에 본명까지 숨기다니.
남자친구 CF만 아니었더라도 그녀는 콧방귀를 끼며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무리하게 빌딩을 구입하면서 자금사정이 어려워진 남자친구가 하도 앓는 소릴 했기 때문에, 혹시라고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응한 것이었다.
"작가가 무슨 CF를..."
"그거야 당연히 거짓말이죠."
아영은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이목을 피해 외진곳까지 따라 나왔더니, 이게 무슨 어처구니 없는 경우란 말인가?
"지금 저랑 장난해요?"
아영이 버럭 소리치는데도 성민은 발코니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여유넘치게 말했다.
"장난 아닌데? 너 마음에 들어서 꼬실려고."
"네?"
"까놓고 말하자 그냥. 하룻밤에 얼마면 되니?"
"미, 미친 새끼가!"
평소 쓰지도 않던 욕이 절로 튀어나온다.
"얼씨구? 교양있는 분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입이 걸걸하시네."
성민의 빈정거림에 모욕감으로 부들부들 거리던 아영이 끝내 뺨을 후려 갈겼다. 아니 갈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가는 손목은 금세 성민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워워, 성질머리하곤. 벌써부터 발톱을 세우면 쓰나. 그런건 침대위에서 하라고."
"이거 놔! 미친새끼야!"
"힘으로 너한테 당할 것 같진 않은데? 내가 보기보다 근육질이거든."
"소리 지를 거야! 쓰레기 같은 새끼!"
성민은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실갱이는 이쯤하고 협상을 시작하지. 얼마를 원해? 한 장이면 되나?"
"어디서 근본도 없는 새끼가..."
"1억이면 어때?"
"...뭐?"
아영은 놀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녀도 졸부 자식들이 돈으로 여잘 산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하룻밤 화대로 1억원이나 제시한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아영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본 성민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하긴 1억은 너무 소소하지? 그럼 5억은 어때?"
"5, 5억?"
"그래. 하룻밤 자는 대가로 5억? 솔깃한가?"
"개소리 작작해. 내가 무슨 창녀로 보여?"
그러나 당장이라도 소릴 지를것 같던 아영의 목소리가 작아진 것을, 성민은 놓치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돈의 위력에 짓눌린 상태였다.
"흐음, 제법 몸값이 높군. 5억도 부족하단 말이지? 그럼 10억은?"
처음보다 10배가 튕겨진 금액에 아영은 정신이 아찔해져 왔다. 외교관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녹봉을 받고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 10억원이란 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영화배우인 남자친구가 최근 잘나간다지만, 화려해 보이는 모습에 비해 실속은 없었다.
그런데 하룻밤 자는 댓가로 10억이라니.
흔들리지 않는 다면 사람이 아니다.
아영이 숨죽이며 입을 다물자 성민이 씨익 웃었다.
"나 농담 하는 거 아냐. 아무래도 현찰이 편하지? 지금 당장이라도 5만원 권으로 줄게. 세어보고 부족하다 싶음 거절해도 좋아."
"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나? 니 말대로 가진건 돈 밖에 없는 졸부자식. 그리고 마음에 드는 여자는 어떻게든 내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그날 밤 아영에겐 남자친구에게 평생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겼다.
***
샤워실은 내부는 수증기가 한가득이었다.
열린 문 틈에 발을 들이미는데 시야가 뿌옇게 변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되었다. 아아, 이곳은 천국인건가?
"왔어?"
혜은의 목소리가 욕조안에서 묘하게 울려온다.
그녀는 두명이 들어가도 충분히 큰 월풀욕조에 몸을 누이고 있다. 같이 뛰어들고 싶군.
"거품때문에 하나도 안보이지?"
"으, 응."
저것이 맥주거품이라면 죄다 마셔버릴 텐데.
"흐음, 오빠 뭔가 아쉬워하는 표정인데?"
"뭐래? 아니거든?"
"세면대 위에 이태리타올 있을거야."
"때수건이 있다고?"
"응, 세면도구 세트에 섞여 있더라고. 누가 한국 아니랄까봐."
당연한 소리지만, 이태리 타올은 이태리에선 쓰지 않는다. 목욕하면서 때를 미는 민족은 손에 꼽을 정도.
아마도 이 호텔은 혹시 모를 고객의 요구사항에 대비, 때수건까지 포함시켜 놓은것 같다.
나는 때수건을 손에 끼우고 혜은이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등을 돌리더니 상체를 물위로 끌어올려 욕조 끝에 걸터 앉았다.
허억!
아무리 뒷모습이라도 이건.
"헤헤. 앞에 수건 둘렀지롱."
젠장.
그녀는 커다란 샤워타월을 앞을 가린 상태였다. 설마 욕조 안에서 미리 작업을 해놨을 줄이야.
"자, 잘했어. 등만 밀거니까."
"그럼 앞도 밀려 그랬어?"
"뭐, 뭐야. 내가 니 앞을 왜 밀어?"
"흥. 어렸을 땐 잘만 씻겨주더니."
"내가? 너를?"
"기억 안나? 오빠가 엄마 바쁠땐 나 항상 씻겨줬잖아.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사실입니다.]
"그, 그땐 니가..."
"왜? 그땐 지금처럼 여성스럽지 않아서?"
"너 진짜 이럴래?"
"키키. 난 오빠 놀릴 때가 제일 재밌더라?"
찰싹!
"아야! 왜 때려,"
"때리는거 아냐. 때미는 거야."
"살살 좀 해."
더이상 말을 섞었다간 혜은의 농간에 놀아날것 같은 기분에 묵묵히 때를 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무살도 안된 혜은의 피부가 비단결처럼 매끄럽다는게 문제였다.
특히 입욕제가 묻어서 그런지 보들보들한 감촉이 그대로 손끝에 전해졌다. 진짜 미치겠구만.
"아, 좋다. 오빠가 등도 밀어주고."
혜은은 전형적인 콜라병 몸매.
잘록한 허리에 큼지막한 힢, 그리고 겨드랑이 옆으로 삐져나올 만큼 풍만한 가슴... 헉? 근데 보, 보이잖아?
"흡!"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왜? 나 때 많이 나와?"
"아, 아니..."
가슴 옆라인이 훤히 보인다.
고개만 살짝 돌리면 꼬, 꼭지도...
'아, 안돼! 이정우 정신차려. 지금도 참기 힘든데 뭔일 벌이려고 작정했어?'
나는 노도처럼 밀려오는 욕망을 차단하기 위해 천장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저 살덩이일 뿐.
그때 욕조물을 발길질로 차던 혜은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빠. 오빠 혈액형이 뭐였지?"
"내 혈액형?"
"응."
[O형 입니다.]
"O형이지."
"그지? 나도 O형이니까."
"당연하지. O형은 열성이잖아. O형 사이에선 당연히 O형이 태어나는 수밖에. 아빠도 O형, 엄마도 O형이잖아."
"...맞아."
혜은의 목소리가 어딘가 이상했다.
당연한 사실을 왜 물어 보는 것일까?
"...근데 나만 왜 Rh+일까?"
"응?"
"아빠 엄마는 둘 다 Rh-잖아. 왜 난 Rh+지?"
'그게 사실이야, 로시?'
[네. 부모님 두 분 다 희귀 혈액형인 Rh- 형입니다. 당연히 도훈군도 Rh- 형이구요.]
'가만, Rh-는 열성 유전 아냐?'
[네, O형 혈액형이랑 똑같죠.]
'그, 그 말은!'
"...뭔가 이상하지?"
"자, 잠깐. 너 뭔가 잘못안 거 아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나온다.
지금 혜은이가 하려는 말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확실해. 병원에서 정확하게 검사했어. 우리 가족중에 나만 Rh+래. 나도 이상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거든? 근데 절대 그렇게 나올 수가 없다네."
"......"
"언젠가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왜 난 부모님 두분중 아무도 닮은 사람이 없을까? 하다못해 먼 친척이라도 나랑 닮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 왜 나만..."
"너 이거 엄마한테 말했어?"
"아니. 아직."
충격이다.
혜은이의 말은, 도훈의 어머니가 바람을 폈다는 의미다.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의 씨를 받았다는 소리다.
초등학교에서 실시하는 단순 ABO식으로는 O형인 것 밖에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아버지는 몰랐고, 어머니는 안도했겠지.
실수는 했지만,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진 않았다 여겼을 지 모른다. 과거의 잘못이 완벽히 은폐되었다고.
하지만 전혀 엉뚱한 곳에서 바람의 흔적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녀는 결코 우리 집안에서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제 알고 있다.
"오빠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
"......"
"무슨 말이라도 해봐. 나 가족중에선 오빠한테 처음 말하는 거야."
"혜은아..."
[놀라운 사실이군요. 전생의 도훈조차도 전혀 몰랐던 일입니다.]
'이게 무슨 막장같은 전개야?'
[도훈의 여동생이 실제론 이부남매라니...]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
혜은이 스르륵 몸을 돌렸다. 젖은 타올 사이로 희미하게 안이 비추었지만, 그런것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몰래 출생의 비밀을 숨겨왔을 여동생은, 머나먼 타국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혜은을 꼭 안아주었다.
"아무 생각하지마. 너가 내 동생이란 사실은 변치 않으니까."
"오빠..."
"혈액형 따위가 뭐가 중요해? 그딴 거 하나도 필요없어."
"오빠, 나 너무 무서웠어. 주워온 아이일까봐 겁나서 미칠것 같았어. 아빠랑 엄마가 나 미국에다 버리고 도망가 버릴거 같아서...한국 온 것도 오빠한테 이거 말하려고 온거야. 오빠, 나 버리지 마."
"내가 널 왜 버려. 혜은이 넌 내 하나뿐인 여동생이야.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알겠어?"
"엉엉 오빠."
혜은이 울먹이며 와락 나에게 안겼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와 내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유일한 가림막이 스르륵 흘러 내렸다.
< 103. 즐거운 사라-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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