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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0화 (100/2,000)

< 102. 즐거운 사라-7- >

뒤따라 내린 성민이 다급하게 혜은을 불렀다.

"네?"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

"뭐라구요?"

"남자친구 있냐구요."

‘뭐야? 설마 헌팅인건가?’

혜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성민을 위아래로 훑었다. 방으로 돌아가 얼른 전화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사내의 용모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모델같이 늘씬한 몸매였다.

오빠인 도훈과 비슷하지만, 얄팍한 체격 덕에 훨씬 커 보이는 키. 오버핏 흰 셔츠와 복숭아뼈가 드러나게 입은 9부바지, 갈색의 로퍼는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풍겼다.

‘흠, 나름 괜찮은데? 우리 오빠보단 못하지만.’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이 단추 구멍만 아니라면, 전체적으로 준수한 외모였다. 혜은은 팔짱을 낀 체 대답했다.

"초면에 좀 무례하시네요."

"네?"

"저 아세요?"

"아니요. 오늘 처음 봤는데."

"그런데 무슨 남자친구가 있냐느니 없냐느니···."

"제 이상형입니다."

"···네?"

사내의 직설적인 화법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혜은이었다.

헌팅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당돌한 사내는 처음이다.

‘참나,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람?’

"전 아닌데요."

"네?"

"그쪽 분, 제 타입 아니라구요. 그럼 이만."

혜은이 주저 없이 돌아서자, 홀로 남겨진 성민은 한 방 맞은 표정으로 얼이 빠졌다.

‘어떻게 나를 이 정도로 개무시할 수 있는 거지? 시, 신선해.’

성민은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 뜬 눈을 비볐다.

그는 계급제도가 사라진 21세기에 귀족처럼 살아온 남자.

후기 자본주의 시대엔 돈이 곧 권력이다. 채 10살도 되기 전 이미 수천억의 유산을 물려받은 그는, 지금껏 거리낄 것 없는 삶을 살았다.

누구도 자신을 거스르지 못했다.

그게 집안일을 돕는 집사면 하루아침에 집 밖으로 쫓겨나야 했고, 그게 학교 선생이라면 이유를 막론하고 학교를 떠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정당한 공권력은 힘을 쓰지 못했고, 난다긴다하는 무뢰배조차 그 앞에선 꼬릴 내렸다.

그가 가진 막강한 배경. 바로 재계 1위에 빛나는 삼현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촤하하하!"

텅 빈 객실 복도에서 성민이 이마를 짚은 체 허탈하게 웃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한참 웃어 보이던 성민은, 이내 혜은이 문을 열고 들어간 객실 번호를 확인했다.

"···재밌네. 쟤."

성민은 폰을 꺼내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

기분이 이상하다.

껌딱지처럼 붙어있던 동생이 사라진 지 어느덧 30분이 넘었다.

그렇게 떨어내고 싶었는데 막상 아무 말 없이 사라지자 괜스레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라이브 밴드 노래 이후 사라는 나에게 굉장히 적극적인 관심을 표했지만,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걱정되시면 지금이라도 가보시지요.]

‘뭘?’

[초조해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전혀 아닌데?’

[귀신은 속여도 저는 못 속입니다. 주인님의 감정은 저에게 다이렉트로 전달되니까요.]

‘흠···. 아니 좀 찜찜해서 말이야. 그렇게 안 떨어지려던 얘가 엄마한테 전화하러 간 뒤로 30분째 연락 두절인 게.’

[위업 달성은 코빼기도 관심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내심 여동생분을 마음에 두고 계셨나 보군요.]

‘뭐래? 넌 뭐든 다 그쪽으로만 생각해? 혜은인 내 친동생이야.’

[아니요. 엄밀히 말하면 친동생은 아니죠. 이정우와 이혜은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씀입니까?]

‘그건···.’

거참, 할 말 없게 만드네.

[어차피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앉아 있어선, 사라양에게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그래. 그건 맞다. 동생이 전화를 안 받으니 얼굴이라도 확인해 보고 와야겠어.’

결심을 굳힌 나는 술에 취해 앵겨대는 사라를 슬쩍 밀쳐냈다.

"사라. 미안한데 나 잠시 담배 한 대만 태우고 올게."

"Smoking?"

"Yes. I can not stand it. cuz I’m Heavy smoker."

(응,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난 꼴초라서.)

"oh, Yes. I'll be waiting."

(그래요. 기다릴게요.)

담배를 핑계로 지하 째즈 바에서 나온 나는, 급히 혜은의 룸으로 올라갔다.

이 찝찝한 기분이 단지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

호텔 총지배인은 정체를 드러낸 성민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5032호 투숙색의 정보 말씀입니까?"

"그래. 체크인할 때 기록 남아 있을 거 아냐."

"도, 도련님. 아무리 내부 관계자라도 투숙객에 대한 정보는···."

"뭐? 그래서 못하겠다고?"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성민은 거의 할아버지뻘인 호텔 지배인의 정강이를 구둣발로 호되게 후려쳤다. 이른바 쪼인트를 깐 것이었다.

빡-

"으악!"

"어이, 내가 아직도 누군지 몰라?"

"아, 아닙니다. 도련님."

"왜? 내가 밝히기 전까진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었잖아?"

"그, 그건 도련님에 대한 정보가 워낙에 극비로 유지 되는 상황이라···."

"변명은. 당신 여기서 호텔리어로 일한지 얼마나 됐어?"

"사, 삼십 년 좀 넘었습니다."

"그래?"

성민은 호텔 지배인의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목줄을 잡힌 것처럼 질질 끌려가던 그는, 곧 성민의 코앞까지 잡아 당겨졌다.

"삼십년이면 오래도 해 먹었겠네."

"네, 네."

"그럼 내일부로 그만둬."

"아, 아니 그, 그건."

"왜? 아님 짤리게 해드려? 아니지. 그건 좀 별로네. 지배인이 잘못하면 사장이 책임져야지. 너네 사장도 같이 옷 벗겨야겠다.

"네, 네?"

"왜? 내가 못 할 것 같아? 우리 고모가 이깟 호텔 따위로 내 뜻을 거스를 수 있을까 봐서? 고모가 가진 협력업체들, 다 본사 덕에 먹고 사는 거잖아. 확 바꿔버려?"

호텔 지배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들어본 적 있다. 삼현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 고성민.

회장이 애지중지 아끼는 손자이자, 차후 1~2년 내로 대한민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할 재벌가의 오너가 될 사람.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설마 했다.

삼현 그룹의 후계자가 호텔에 나타나다니.

그러나 그는 그룹 최고위 간부만 가지고 있다는 플래티넘 맴버쉽을 내밀었고, 그 카드엔 고성민이란 세 글자가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금장으로 만들어져, 골든 카드라 불리는 그것 말이다.

"···알려드리겠습니다."

지배인은 결국 자존심을 꺾었다.

호텔리어로 30년 넘게 일하며 지켜왔던 자존심이지만, 자신이 벌인 일의 여파로 사장이나 그 위 회장까지 다치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성민이 응접실 의자에 잠시 기다리자, 직원 하나가 투숙객 정보를 들고 왔다. 클리어 파일에 담긴 내용을 훑던 성민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스테파니? 얘는 또 뭐야? 동행인가? 아, 이혜은. 얘구나."

성민은 이혜은이라고 적힌 란의 정보를 천천히 훑었다.

"18살이라···. 그럼 고딩이구나. 출발지가 미국인 걸 보면 유학생일 거고. 이러니 내 드라마를 전혀 모를 수밖에."

성민은 다리를 꼬아 앉은 체 클리어 파일을 유심히 읽었다. 그리곤 뭔가를 결심한 것처럼 테이블 위로 파일을 던졌다.

"뭐, 어쨌든 돈 싫다는 여자는 못 봤으니까."

그는 쭈뼛거리며 서 있는 지배인을 손가락을 까딱여 부르더니, 귓속말로 뭔가를 지시했다.

***

"5032호였지?"

문 앞에 선 도훈은 떨리는 마음으로 벨을 눌렀다.

띵동-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초조해진 그는 문을 두드렸다.

쾅쾅-!

"누구세요?"

그제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은이였다.

‘휴. 안에 있었잖아?’

"어. 아니 나야."

"오빠?"

안에서 문이 열리자 샤워 타올 걸친 혜은이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헉! 뭐, 뭐야."

"왜? 무슨 일이야?"

"아, 아니 난 너가 전화를 안 받길래."

"엄마랑 통화 끝내고 갈랬는데, 스테파니가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잠들어 버렸지 뭐야. 그래서 찝찝하기도 해서 씻고 가려고···."

"그랬구나. 난 혹시···."

"오빠, 나 걱정한 거야?"

"아, 아니 무슨 소리야. 그럼 난 가볼 게. 사라 혼자 바에 기다리고 있어서."

"같이 가. 나 다 씻었어."

"응?"

"일단 들어와. 나, 이렇게 세워 둘 거야?"

커다란 타올은 가슴 라인에 아슬아슬 걸린 체였다. 고무 밴드로 묶은 머리끝이 물기에 젖어 쇄골에 달라 붙은 모습은, 고등학생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젠장, 하필 여동생이라고 하나 있는게 이렇게 예쁘다니···.’

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들이 복도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도훈이 열린 문 사이로 빠르게 들어갔다.

쿵-

문이 닫히며 일어난 바람이 혜은의 샤워 타올을 흔들었다. 순간 흘러내리는 샤워 타올을 혜은이 빠르게 붙잡았다.

"어머! 내려갈 뻔 했네."

혜은은 혀를 낼름 내밀더니 후다닥 샤워실로 들어갔다. 곧 샤워실 안쪽에서 타월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훈은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선 체 깊이 심호흡했다.

‘동생이다. 친동생이다. 동생한테 흑심을 품어선 안 돼.’

혜은이 다시 욕조로 들어가는지 탐방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오빠. 쇼파에 앉아 있어. 스테파닌 침대에서 자고 있으니까 깨우지 말고."

"아, 어."

도훈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룸 안쪽으로 들어갔다. 두 명이 쓰는 방이라 그런지 통유리창 옆으로 트윈 베드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고, 안쪽에선 이불을 뒤집어쓴 스테파니가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었다. 벽면에는 65인치 UHD TV와, 고급스러운 화장대 그리고 반대편에는 사각진 원목 테이블과 가죽 쇼파가 놓여 있었다.

‘5성급 호텔이라더니 내 방보다 3배는 크네.’

도훈은 룸을 둘러보다 쇼파에 앉았다. 과거 이정우로 살 적에 몇 번 가보긴 했지만, 이도훈으로 살며 원룸 생활이 몸에 배어서인지 유난히 커 보이는 트윈룸이였다.

살짝 열린 샤워실 문틈 사이로 가끔 물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도훈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나이 먹고는 내외할 수밖에 없는 게 남매사이다. 그런데 불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홀딱 벗은 혜은이 욕조에 몸을 누이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긴장 시켰다.

도훈이 뻘쭘하게 앉아 있는 데 혜은이 안에서 말했다.

"엄마랑은 잘 통화했어. 엄마가 오빠랑도 통화하고 싶어 했는데, 내가 적당히 핑계 대서 끊었어. 나 잘했지?"

"아, 응."

"사라랑은 무슨 얘기 했어?"

"그냥 뭐, 이것저것. 사라 내후년 쯤 한국 와서 원어민 교사 할 거라던데?"

"맞아. 언니 꿈이래. 한국 와 사는 거. 집도 잘 살면서 굳이 왜 한국까지 오려나 몰라? 미국인들은 참 진취적인가봐."

도훈은 혜은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네가 아는 것보다 사라의 가족 관계가 화목하진 않거든.’

"다 씻었어?"

"거의. 스테파니가 뜨거운 물을 잔뜩 받아 놓고 잠들었지 뭐야. 나중에 씻으면 식을까 봐 어쩔 수 없이 목욕한 거야."

"그랬구나. 난 왜 전화를 안 받나 했지."

"오빠 진짜로 나 걱정했구나?"

"걱정은 무슨. 이런 호텔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려고."

"있었는데?"

"어?"

"아니 웬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남자가 나보고 헌팅 하던데?"

"뭐?"

도훈은 순간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누가 감히 혜은이를!

그러나 그것이 여동생을 아끼는 오빠로서의 마음인지, 아니면 자기 여자를 뺏으려 드는 사내로서의 질투인지는 본인도 헛갈렸다.

"그래서?"

"됐다고 했지. 흐응, 한국 남자들도 내 미모를 알아보나 보지? 후훗."

"조심해.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내가 뭐 남자들 대쉬하면 다 받아주는 여잔 줄 알아? 내가 눈이 얼마나 높은데···."

‘누구 때문에.’

월풀 욕조에 누운 혜은이 생각했다.

어느 순간 남자를 보는 기준이 도훈에게 맞춰져 버렸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남자들을 성에 차지 않았다. 자신도 그런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오빠보다 못한 남자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자유분방한 미국에서도 연애를 안 한 이유였다.

"얼른 가자. 사라 혼자 기다리느라 심심하겠다."

"거의 다 했어. 오빠 나 근데 등 좀 밀어줄 수 있어?"

"뭐?!"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되물었다. 그 바람에 곤히 자고 있던 스테파니가 몸을 뒤척이며 깨어날 뻔했다. 도훈은 여자 둘이 묶은 방에, 그것도 여동생이 샤워하는 동안 들어 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설명 곤란한 상황이었으므로, 급히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니 등을 밀어?"

"왜? 동생 등도 못 밀어줘? 어렸을 땐 같이 목욕도 자주 해놓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혜은양이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함께 목욕한 기억이 있습니다.]

‘미친! 그 때랑 지금이랑 같냐?’

[아니 왜 저한테 화를 내십니까? 전 사실만 전달했을 뿐인데···.]

‘···음. 쏘리.’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오히려 과잉대응하시는 모습이 더 의심스럽습니다.]

‘그런가?’

[네. 동생이잖습니까. 오빠가 동생 등을 못 밀어줄 건 뭡니까? 앞도 아니고.]

로시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설마 이 인공지능 새끼가 업적 달성에 눈이 멀어 나를 유혹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욕조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이구. 걱정마. 욕조에 입욕제 잔뜩 뿌려놔서 보이지도 않거든? 어깨까지만 살짝 밀어줘. 손이 안 닿는단 말이야, 응?"

거듭된 혜은의 간청에 도훈도 슬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뭐 등 정도라면 밀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딴 맘만 안 품으면 되니까.’

도훈은 양말을 벗고 바지를 접어 올린 체 샤워실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그는 강박적으로 되뇌었다.

‘혜은이는 내 동생이다. 하나뿐인 동생이다. 가족이랑은 하는 거 아니야. 정신 바짝 차려, 이도훈.’

< 102. 즐거운 사라-7-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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