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즐거운 사라-6- >
인터콘티넨탈 호텔은 서울 시내에 있는 5성급 호텔이다. 최고급 호텔인 만큼 하루 숙박비가 어지간한 사람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엄청났다.
헌데 이곳에 다섯 달째 장기투숙 중인 사내가 있었다.
나이는 겨우 2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기껏해야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청년은, 하루 중 대부분을 룸에 틀어박혀 있거나, 룸서비스를 불러 식사를 때우는 게 전부였다.
이따금 청년이 외출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주차장에 처박아둔 최고급 외제 스포츠카를 몰고 새벽 내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동이 틀 무렵에서야 나타났다.
언제나 처음 보는 여자를 끼고.
그런 기이한 행각 때문인지 호텔 직원들 사이엔 청년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돈 쓰는 폼이 재벌 3세가 확실하다.
아니다. 알려지지 않은 천재 작가다. 룸서비스를 들어갈 때마다 항상 노트북으로 뭔가를 쓰고 있다.
그렇지 않다. 수려한 외모에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봐선 분명 외국 유명한 모델이 틀림없다. 등등.
무엇이 진실이었을까?
소문은 무성했지만 무엇하나 밝혀진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혹은 전부 다 거짓처럼 보이기도 했다.
확실한 건 장기투숙하는 VIP 고객은 호텔 입장에선 무척이나 고마운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청년의 정체가 무엇이건 개의치 않고 성심성의껏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리고 지금 그 청년이 웬일로 호텔 로비 커피숍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련님. 인제 그만 본가로 돌아오시지요. 회장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십니다."
청년의 맞은편의 앉은 사내는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였다.
발달 된 승모근 때문인지 입고 나온 정장이 터질 것처럼 팽팽했다. 날카로운 눈매와 남성미 넘치는 구릿빛 피부는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런 근육질의 사내가 자기보다 대여섯은 어려 보이는 청년에게 깍듯하게 존대하는 모습은 두 사람의 지위를 대번에 실감케 했다.
"안 간다고 했잖아. 나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데?"
"도련님 소재 파악은 진작 끝난 상태였습니다. 다만 도련님 스스로 본가로 돌아오시리라 믿고 지금껏 기다린 것입니다."
"참나. 이거 호텔 보안이 엉망이고만? 여기 사장 우리 고모 쪽 계열사 직원 맞지?"
"그렇습니다."
"고모한테 말해 확 짤라버릴까?"
"아닙니다. 호텔 쪽에선 어떤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정보팀에서 도련님의 차량을 추적해···."
"어이, 김문수 씨."
도련님이라 불린 청년이 거침없이 하대했다.
마치 자신의 노비를 다루는 듯한 말투.
문수라 불리는 사내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가,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대답했다.
"네, 도련님."
"듣기론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이라지?"
"맞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맨손으로 사람도 때려잡기도 하고?"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문수의 관자놀이 쪽 혈관이 불룩 튀어나왔다.
그가 극도로 열이 받았다는 증거.
그러나 청년은 그런 반응조차 재밌는지 유유히 커피잔을 홀짝거렸다.
"문수씨 개야?"
"···네?"
"개냐고. 시키면 아무 일이나 다 해주는 개."
"······."
"생긴 것 보니까 불독 쯤 되려나? 아님 세퍼트? 언제부터 우리 집안 뒤치다꺼리나 하고 살았어? 문수씨 그런 사람 아니잖아? 자존심도 없어?"
문수는 속으로 이를 부득 갈았다.
생각 같아선 당장 이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의 척추를 뒤로 접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에겐 능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배경을 아는 이상 묵묵히 참는 도리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전 단지 회장님의 명을 따라···"
"아아~ 그러니까 할아버지 애완견이란 소리구나? 할아버지 개면 내 개기도 하겠다? 우리 꼰대 뒈지고 나면 내가 유일한 상속자가 될 테니까? 그치?"
"···도련님."
"짖어봐."
"······."
"짖어보라고! 내 앞에서 꼬리 흔들고 짖어보라고 개새끼야!"
청년의 막말에 문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랄 맞은 성격은 분명 지 할애비를 빼다 박았다.
막무가내에 안하무인.
위아래도 없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누구의 간섭도 불허하는 독불장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이 완벽하게 어울리는 청년.
느닷없이 언성을 높이던 청년은 갑자기 표정을 싹 바꾸더니 다시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못 하겠지?"
"······."
"거봐. 문수 씨도 힘들잖아. 그게 자존심이란 거야. 사람이 동물하고 다른 게 뭐야? 바로 자존심이 있다는 거잖아."
"······."
"나도 그래. 난 할아버지의 후계자 수업 들어줄 생각 추호도 없어. 알다시피 나도 나름 작가로 잘 나가고 있다고. 전직 모델 출신의 스타작가. 그것도 겨우 스물넷 밖에 안된. 이 정도면 나름 성공한 인생 아냐? 이거 다 순전히 내 능력으로 이룬 거잖아."
"······."
"근데 왜 나보고 하기 싫은 경영을 맡으래? 아, 할아버지 기업 쓰러지면 우리나라 부도날지도 몰라서? 알게 뭐야? 난 나중에 유산 상속받고 그 돈으로 하고 싶은 일 하면 돼. 재벌집 막내 손주로 태어났다고 꼭 경영자의 길을 걸을 필욘 없잖아? 어? 우리나라도 이제 똑똑한 CEO 앉혀서 전문 경영 맡겨야 하지 않아? 왜 자꾸 내가 싫다는 데 뭘 시키려 드냐고. 내가 그렇게 자존심 없는 사람처럼 보여? 문수씨 보기에도 그래?"
"···아닙니다."
"알아들었으면 그만 가봐. 나 요새 영화 시나리오 쓰느라 정신없거든. 이런 일로 사람 한 번만 더 불러냈다간, 확 그냥 할아버지 경호원이고 뭐가 대가리를 오함마로 깨버릴 테니까."
빠득-
문수는 이빨이 부러질 것처럼 이를 부득 갈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표현의 전부였다.
문수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90도로 폴더 인사를 했다.
"언제든 생각 바뀌시거든 연락 주십시오. 회장님 건강이 최근 들어 더욱···."
"듣기 싫어. 울 아버지 해외 파견 보내 죽게 한 그 인간 따위. 그냥 뒈지라고 전해. 얼른 유산이나 물려받게."
"이만 가보겠습니다."
문수가 물러나자 청년은 남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이미 식어버린 커피는 밍밍하기 짝이 없었다.
청년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셔츠에 꽂아 둔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이놈의 호텔도 조만간 바꿔야겠어. 룸서비스가 괜찮아서 좋았는데 말이야. 쩝···.’
"웨이터, 빌지."
"방금 나간 손님분께서 결재하고 가셨습니다."
"뭐? 참나, 월급쟁이 주제에 시키지도 않은 짓을."
청년은 콧방귀를 끼더니 다시 룸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오늘 작업해야 할 양이 한가득이었다.
띵동-
엘리베이터에 타 층수 버튼을 누르는데 누군가 갑자기 뛰어오는 게 보였다.
"잠시만요! 같이 타요."
청년은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여자애 하나가 헉헉거리며 뛰어들어왔다.
"감사합니다."
"!?"
긴 생머리, 인형처럼 예쁜 외모.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새하얀 피부.
혜은을 처음 본 재벌 집 막내 손주는, 생전 처음으로 첫눈에 반했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
도훈은 사라의 손목에 매인 가죽 팔찌에 슬쩍 손을 가져갔다.
"이건 뭐에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악세사리."
사라가 눈에 띄게 놀라며 손목을 뒤로 감추었다.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 도훈의 머릿속에선 하나의 영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
사라의 어머니는 병약한 체질이었다. 덕분에 사라의 기억 속의 어머니는, 늘 초췌한 모습으로 병실에 앉아있었다.
변호사인 아버지는 언제나 바빴다.
두 모녀를 항상 외롭게 내버려 두었다.
사라의 어머니는 어느 날부터 극도로 몸이 허약해졌다. 죽음을 앞둔 그녀는 마지막으로 기운을 내 가죽 팔찌를 만들어 사라에게 채워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는 몇 달 뒤 재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는 어머니의 주치의던 여자 의사.
환자 보호자와 의사로서 만났던 그들은 어느새 눈이 맞아 버린 것이었다.
사라는 결혼을 반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15세. 혼자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은 전무 했다.
새 어머니는 사라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사라가 커갈수록 죽은 어머니를 닮아갔기 때문이었다.
사라를 볼 때마다 남편의 전부인의 모습이 겹쳐졌다.
특히 자신이 가진 외모 콤플렉스를 의사라는 직업으로 승화시켰던 그녀였기에 자신의 딸인 스테파니와 비교되는 사라가 뛰어난 외모가 못내 꼴불견이었다.
사라는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그녀는 도저히 자신이 같은 집에서 살 수 없는 운명임을 직감했다.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엔 그러한 연유가 있었다.
"사라야. 너에게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미안하구나."
"아냐. 엄마. 얼른 건강해져서 나랑 같이 공원에서 산책도 하고, 까페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엄마? 엄마!!! 여기 누구 없어요? 의사 선생님!!!"
영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사라의 불행한 운명을 알게 된 도훈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갑자기 눈가가 촉촉해진 도훈의 모습에 사라가 영문을 모르고 물었다.
"도훈씨? 왜 그래?"
"아, 아냐. 눈에 뭐가 들어가서."
‘참으로 딱한 여자였구나. 사라도.’
왠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낡은 가죽 팔찌.
거기엔 사라의 기구한 인생이 담겨 있었다.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다. 하지만 무턱대고 위로하기엔 너무 뜬금없을 텐데’
그녀의 딱한 사연을 알게 된 도훈은 어떻게든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그때 바(Bar) 구석진 곳에 스테이지로 한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왔다. 신청곡을 받고 연주해주는 라이브밴드였다.
"오늘의 신청곡 받습니다."
그 순간 아이디어가 떠오른 도훈이 사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라. 한국 음악 좋아한댔지?"
"응. 밴드에 신청하려고?"
"아니. 직접 불러주고 싶어서."
"정말? 와! 멋있어."
도훈은 바지춤을 뒤적이며 항시 소지하고 다니는 ‘오늘은 나도 가수다’ 목캔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밴드가 있는 무대로 직접 올라가, 곡을 직접 불러도 되는지 물었다.
여자친구를 위한 이벤트라고 하자, 밴드 사람들은 흔쾌히 마이크를 내주었다. 갑작스레 무대로 오른 도훈을 보고 바에 앉아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향했다.
"저 사람 뭐야?"
"밴드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와, 남자 잘생겼다."
도훈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이 노래를 사라에게 바칩니다."
"와! 짝짝짝!"
"이벤트인가?"
"화이팅!"
바에 도란도란 앉은 손님들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도훈을 바라보았다.
밴드의 반주가 시작되고 도훈이 첫 소절을 때었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 순간 컵을 닦고 있던 바텐더도, 테이블을 치우던 직원들도 벼락을 맞은 것처럼 일제히 멈춰섰다. 한 소절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아 버린 것이었다.
도훈의 노래가 진행될수록 바에 있던 손님들은 벅찬 감동에 휩싸였다. 가사의 내용도 그렇지만, 도훈의 노래는 그 선율만으로도 힐링이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한국어로 된 가사였지만, 사라는 이미 가사의 내용을 숙지하고 있었기에 노래를 들으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한없이 자애롭고 인자했던 어머니. 마치 그녀가 자신에게 들려주는 듯한 착각 속에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이윽고 도훈이 노래를 마치자 한동안 긴 정적이 이어졌다.
숨 막히는 감격 앞에 관객들이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짝-짝-
짝짝짝짝-
짝짝짝짝짝!!!!!!!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먼저 박수를 치자, 바에 있는 모든 소님과 직원들이 모두 기립 박수를 보냈다.
"우아! 최고다!"
"가수네 가수 완전!"
"나 소름 돋았어. 이걸 라이브로 듣다니!"
연주한 밴드의 리드 보컬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 하다가 겨우 도훈에게 말했다.
"호, 혹시 전문적으로 노래하시는 분인가요?"
"아뇨. 그냥 대학생인데요."
"아니 어떻게 이런 재능을···. 혹시 가수 하실 생각 있으면 제가 인맥을 통해 알아봐 드릴 테니."
"괜찮아요. 반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이런 노래를 바로 옆에서 듣게 될 줄이야. 나중에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데 꼭 나가보세요. 분명 크게 되실 거예요."
도훈은 속으로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에게 다가갔다. 울먹이고 있던 사라가 도훈을 향해 말했다.
"도훈씨. 정말 고마워."
"아니야. 왠지 이 노래 듣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도훈씨 덕분에 많은 위로가 됐어. 나 한국에 따라오길 정말 잘한 거 같아."
"그렇다면 다행이네. 근데 혜은이 아직도 안 왔어?"
"아, 그렇네? 올라가서 자나?"
도훈은 룸으로 올라간 혜은이 생각보다 늦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와 단둘이 있어 좋긴 한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도훈은 마저 술잔을 비우면서도 께름칙한 기분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
"전 고성민이라고 합니다."
"네?"
"삼현그룹 고경표 회장의 손자 말입니다."
"아···. 네."
‘뭐야? 내 말이 뻥처럼 들리나? 하긴 매스컴에 계속 노출을 꺼렸으니···.’
"혹시 최근에 방영 중인 바람과 별사탕이라는 미니시리즈 아세요? 연일 시청률 갱신을 하고 있는···사실 그게 제 작품."
"저 그런 거 모르는데요?"
"아, 아님 동양인 최초로 뉴욕 타미힐피거 쇼에 대뷔했던···"
띵-
"저 죄송한데 좀 비켜주실래요? 저 내려야 하는데···."
혜은은 귀찮은 듯이 성민을 밀치더니 열린 문 사이로 빠져나갔다.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하는 표정이었다.
혜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민이 다급히 그녀를 따라 내렸다.
‘세상에! 날 저런식으로 대한 여자는 처음이야!’
"저, 저기요!"
< 101. 즐거운 사라-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