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즐거운 사라-5- >
"무슨 소리야? 주워온 자식이라니?"
"하지만 엄마가 그러던걸? 나보고 주워온 자식이라고."
"어, 엄마가?"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혜은에게 정말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단 말인가?
‘로시. 이게 무슨 소리야? 혜은이가 주워온 자식이라니?’
[금시초문입니다. 그런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남매는 어린 시절부터 쭉 함께 자랐습니다.]
‘그 기억이 몇 살부턴데?’
[네?]
‘어린 시절이라고 해봐야 갓난아기 시절은 아닐 거 아냐?’
[물론 그렇죠. 4~5살 때 기억이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그럼 그 전에 입양이 되었거나 할 수도 있다는 소린가?’
[말도 안 됩니다. 이도훈과 이혜은 양은 지금껏 아무 위화감 없이 지냈습니다. 그런 낌새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도훈 군에게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럼 대체 얘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혜은아. 그런 장난 하는 거 아냐."
내가 정색하자, 혜은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진짜 엄마가 저번에 그랬다니까? 내가 한 번은 ‘엄마, 난 왜 아빠엄마 둘 다 하나도 안 닮았어?’ 하고 물으니까 엄마가 ‘혜은이 넌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단다.’ 하고 그랬단 말이야."
"흠···."
내가 잔뜩 심각한 표정을 짓는데 갑자기 혜은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요 두 다리 밑에서. 히히!"
그러면서 자신의 허벅지를 두들기는 혜은.
안도감과 함께 진한 아쉬움이 밀려온다.
"야! 넌 무슨 그런 장난을 쳐?"
"어머? 오빠 진짜로 믿은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모야? 내가 정말 주워 왔기라도 바란 것 같네?"
"아니야."
"에이, 아닌 게 아닌데? 눈빛 수상한데? 오빤 정말 나랑 이복남매였음 좋겠어? 사라랑 스테파니처럼?"
혜은의 추궁이 이어졌지만, 나는 겨우 정신을 추슬렀다.
"꼬맹이가 진짜 못하는 말이 없네. 방금 오빠 말 잘 듣겠다더니 그새 장난치는 것 좀 봐. 확 그냥!"
"힝, 혜은이 때릴꼬야?"
잔뜩 움츠러든 체 겁먹은 흉내를 내는 동생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버렸다. 나는 손바닥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으이구! 요 녀석."
"데헷."
혜은은 주인에게 사랑받는 강아지처럼 나를 올려다보았다. 특유의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가 지어진다.
진짜 친동생이라는 게 억울할 만큼 사기적인 애교로군.
"엇! 저기 사라랑 스테파니 아냐? 근데 지금 누구랑 얘기하는 거지?"
두 자매는 으슥한 골몰길에서 처음 보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나는 혜은에게 양해를 구하고 빠르게 달려나갔다.
"혜은아. 여기서 꼼짝말고 있어."
***
한편, 호텔로 복귀하던 사라와 스테파니는 곤욕스러운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야경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나머지 도훈 남매를 놓친 두 사람에게 불량스러워 보이는 사내들이 추근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호오, 예쁜이들 한국 놀러 왔니?"
"한국 왔으면 한국 고추 맛도 보고 가야지."
"야. 영어로 말해. 한국말로 말하면 알아듣겠냐?"
"니가 해 인마, 그럼. 난 가방끈 짧아서 못하니까."
"헤이, 프리티 걸. 듀 유 러브 미?"
탁-탁-
그러면서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음란한 손짓에 나머지 두 사내가 배를 잡고 웃었다. 초저녁인 시간임에도 사내들의 입에선 진한 술 냄새가 퍼져 나왔다.
"우하하. 이 새끼, 그게 영어냐? 수화지."
"병신 그딴 건 나도 하겠다."
취객 사내들의 행동에 위협을 느낀 사라가 여동생 스테파니 앞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다, 당신들 누구야. 우리 보내줘."
"어랍쇼? 한국말 잘하잖아?"
"야. 좆 됐다. 원어민 교사 같은 건가 봐. 씨발 튈까?"
"좆 되긴 뭘 좆 돼?"
세 사내 중 가장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소리쳤다.
"씨바, 코쟁이 새끼들은 한국에 원어민 강사 한답시고 놀러 와서 한국여자들 실컷 따먹고 다니잖아? 우린 뭐 그러면 안 되냐? 똥개도 자기 나와바리선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야."
그 순간, 사내의 등 뒤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개똥 같은 소리 하네."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에 험악한 사내가 과도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어떤 새끼가 감히···."
"도, 도훈씨!"
사라가 도훈을 보더니 동생의 손을 붙잡고 쪼르르 달려갔다. 도훈이 두 사람을 안심시키는데, 다시 사내가 말했다.
"뭐냐 너? 얘들 기둥서방이야?"
"이햐. 능력도 좋아. 백마를 둘이나 끼고 다니네?"
"백마 탄 왕자님인가 보지."
"우하하하! 그 백마 나도 좀 타면 안 되냐?"
도훈은 여전히 껄렁거리는 사내들의 모습에 주먹을 굳게 말아 쥐었다.
3 vs 1.
부담스러운 숫자긴 하지만, 정음의 태권도 능력을 흡수한 그에게 못해 볼 상대는 아니다.
"니들 다 떠들었냐?"
"오오, 이 새끼. 깡다구 보소? 여자들 앞이라 허세 부리지 말고···."
삐익-삐익-!
그때 골목 입구에서 다급한 호각소리가 들렸다.
"윽, 씨바! 짭새다."
"튀어!"
사내들은 갑작스런 호각소리에 놀라 등 돌려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골목 안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에 순식간에 세 사람이 모습을 감추었다.
도훈은 뒤쫓을까 하다 두려움에 질린 사라 자매의 모습에 추격의 의지를 꺾었다. 잠시 후 호각을 분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넌?"
호각을 분 사람은 바로 혜은이었다. 그녀는 혹시나 해 들고 다니던 호신용 호각을 이용해 불량배들을 물리친 것이었다.
"히힛. 나 잘했지?"
스테파니가 혜은을 보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낯선 여행지에서 마주친 불량배들로 인해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모양.
도훈은 허무하게 정리된 사태에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쩝. 굳이 안 쫓아도 상관없었는데.’
"도훈씨. 고마워요. 너무 무서웠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걸어가다 길을 잃었어."
"이런···. 그래도 별일 없어 다행이야."
사라가 아직까지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었기에 도훈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내가 옆에 있으니 이제 안심해."
"고마워. 도훈 씨."
스테파니를 위로하고 있던 혜은은 사라와 손을 맞잡은 도훈의 모습을 흘겨보다 이내 못 본 척 시선을 외면했다.
‘치. 굳이 손까지 잡아 줄 필욘 없잖아. 오빠도.’
네 사람은 함께 호텔로 무사히 복귀했다. 무서운 일을 겪었기 때문에 더는 밖을 돌아다니기 꺼려지는 상황이었다.
‘쳇. 오늘은 별수 없겠군.’
"그럼 난 가볼 게. 푹 쉬어."
"오빠 지금 가려고?"
"응. 뭐 시간도 애매하고."
"방에서 좀만 더 놀다 가지."
"그래요. 도훈 씨. 나랑 술 마시기로 했잖아."
"술?"
단둘이 술을 마신다는 소리에 혜은이 두 눈을 부릅떴다.
‘뭐야? 둘이 어느새 그런 사이까지 된 거야?’
"아냐. 오늘 안 좋은 일도 있었는데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기는 좀 그럴 것 같아."
"여기도 있어. 술."
"술?"
"응. 지하에 Bar 있어."
아하! 호텔 빠가 있었지?
"둘이서 마시게?"
"아까 술 한잔하기로 했거든. 너희들은 술 못 마시잖아."
"나도 맥주 정돈 마실 줄 알아."
"여긴 한국이야. 미성년자에겐 술 안 판다고."
"그, 그래도. 둘이서만 치사하게."
"그럼 레이첼은 논 알콜 마셔."
"논 알콜? 그럼 되겠다. 나도 같이 가 오빠."
혜은이 스테파니에게도 물었으나, 그녀는 아까 전 일 때문인지 숙소에 먼저 들어가 쉬겠다고 했다. 결국 혜은의 고집 덕에 우리 셋은 호텔 비즈니스 빠로 함께 입장해야 했다.
‘젠장. 이게 아닌데.’
도훈은 꼬여가는 상황에 점점 골머리가 아파 왔다.
***
왼쪽에는 혜은이, 오른쪽으론 사라가 앉았다.
기다란 바에 나란히 앉은 우리 세 사람은 각자의 음료를 시킨 뒤 잔을 부딪쳤다.
"Cheers!"
"치어스!"
"건배!"
"건배가 모야?"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 뒤 사라에게 건배의 의미를 설명했다.
"건배는 한자야. 중국말."
"응. 알아. 한국어의 70% 이상은 중국어원이잖아."
"오, 역시 한국어 전공자답구나. 아무튼 건배는 한자로 마를 건, 잔 배자를 쓰는데 잔이 마를 때 까지 마신다는 뜻이야."
"우아. 도훈씨 똑똑해."
"오빠, 어떻게 그런 것도 알아?"
혜은이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나는 예의 전가의 보도를 꺼내들었다.
"군대서 책 좀 봤어."
"이햐. 한국 군대 정말 좋구나. 영어도 공부하고, 책도 읽게 해주고. 나도 군대나 갈까?"
"아서라. 요즘 애들은 군대를 TV로 배워서 그런지 너무 쉽게 생각한단 말이야."
"요즘 애들이라니! 오빠 노땅 같아."
"도훈씨 노땅이야?"
헛. 나도 모르게 나이 든 티를 내버렸군.
"하하. 무슨 소리야. 군필자 입장에서 한 말이었어."
"군대 얘기 좀 해줘. 우리 전역하고는 처음 보는 거잖아."
혜은이 논알콜 칵테일을 홀짝거리며 물었다.
왠지 나와 사라가 단 둘이 대화 못 하게 훼방을 놓는 기분이다.
‘흠, 떨어져 나갈 생각을 안하네.’
"군대 얘기 재미없어."
"그래도 해줘."
"나도 듣코 시포요."
사라까지 흥미를 보이자 어쩔 수 없이 IMF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 군대 시절의 추억을 기억을 끄집어내야 했다.
"그럼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 해 줄까?"
"와, 재밌겠다."
"해줘. 해줘."
···이럴 수가.
보통 여자들이 질색하는 군대+축구 얘기까지 꺼내 들었음에도 그녀들의 흥미는 그칠 줄 몰랐다. 난 결국 진지 공사부터, 유격훈련, 혹한기 행군까지 모든 레파토리가 끝날 때까지 군대 이야기를 계속해야 했다.
"···뭐, 그렇게 전역했어. 그리고는 너도 알다시피 편의점 알바 3개월하고 내일 모래 복학 예정이고."
"오빠 정말 고생했겠다."
"도훈씨 멋져요."
"아냐. 한국 남자들은 다 겪는 건데."
"그럼 알바하면서 여자친구 안 사겼어?"
"···어?"
기습적인 혜은의 질문에 허를 찔렸다.
느닷없이 여자친구 얘기를 꺼내다니.
"어? 이 반응 뭐지? 사겼구나? 당황하는 거 보니."
"아, 아냐. 뜬금없이 물어보니까 그렇지."
"도훈씨. 여자 친쿠 있어?"
"없어요. No. Im Solo."
"No kidding. 도훈 씨 잘생겼잖아."
"정말?"
"응. 도훈씨 인기 많아 보여."
"고마워. 근데 진짜 없어."
내가 거듭 부인하자 사라와 혜은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사라는 그렇다 치고 혜은이 넌 뭔데?
"앗, 엄마 전화다."
그때 혜은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힐끔 화면을 보니 영상통화모드였다.
"으읏! 빠에 온 걸 알면 나 혼날 거야. 어쩌지?"
"받지마."
"엄마 성격 몰라? 계속 전화할 거란 말야. 아, 비행기 내려서 전화한다는 걸 깜빡했어."
"그럼 어째?"
"나 금방 룸에 가서 전화 받고 올게."
"응. 그래."
혜은은 후다닥 자릴 일어나더니 룸으로 올라갔다.
오호라.
드디어 사라와 둘만의 시간이군.
***
사라는 술이 약한지 맥주 500에 두 볼이 불그스름해졌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가 홍조를 띄우는 모습에 도훈의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역시 인중 여포요, 마중 백마라더니.’
[왠지 방금 지어내신 것 같습니다만···.]
‘시끄럽고. 얼른 둘만 있을 때 꼬셔야 하는데···.’
"Do you want another one?"
"Yes."
"바텐더. 여기 같은 걸로 한 잔 더."
"네."
잠시 후 바텐더가 잔에 술을 따르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연인 사이신가요?"
"네?"
"아, 아닌데."
"아, 죄송합니다. 두 분이 너무 잘 어울리셔서요. 여성분께서 영화배우 엠마 스톤 닮으셨네요."
"What?! Don’t be kidding me!"
"아, 듣고 보니 그렇네요."
도훈이 넉살 좋게 받아치자 사라의 얼굴에 더욱 당혹감이 서렸다. 동양인의 관점에선 서양인의 얼굴이 다 비슷비슷 보인다는 점도 있지만, 확실히 사라의 얼굴은 서양인 중에서도 눈에 띄게 예쁜 편이었다.
바텐더가 술을 따르고 돌아서자 사라는 빨개진 두 볼을 감싸 쥐며 부끄러워했다.
"도훈씨까지 왜 그래. 창피하게."
"아냐. 사라 정말 예뻐. You are so beautiful."
도훈의 노골적인 칭찬에 사라는 몸 둘 바를 몰랐다.
‘확실히 여자에게 예쁘다는 칭찬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먹히는 멘트군.’
사라는 민망해진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질문을 바꿨다.
"레이첼이 그러는데 도훈씨 선생님 된다던데? 맞아?"
"응. 지금 다니는 대학 전공이 체육 교육학이야. Physical Education. 나중에 시험 합격해서 체육 선생님 되려고."
"나도 선생님 할 건데."
"한국어 선생님?"
"응. 그래서 졸업하면 한국으로 가. 한국에서 원어민 강사 하면서 한국말 더 배워."
"정말이야?"
"응. 그래서 이번에 레이첼 같이 따라 왔어. 한번은 가보고 싶어서."
‘오, 좋은 정본데? 잘하면 사라와의 만남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잘 됐다. 그럼 나랑 계속 연락해. 나중에 선생님 돼서 만나게."
"나도 그러고 싶어. 나 도훈씨 좋아."
"응?"
"도훈 씨 마음에 들어. 잘생겼어. 매너 좋아. 여자를 지켜줘. 멋진 남자야 도훈씨는."
‘뭐야? 애 취했나?’
갑작스런 사라의 고백에 도훈은 살짝 당황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라의 말은 다시 그를 실망시킬 수 밖에 없었다.
"도훈씨랑 친구하고 싶어. 나 한국 오면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
‘아, 뭐야. 그러니까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남자 사람 친구로서 좋다는 건가? 얘는 무슨 말을 이렇게 오해하게 한담?’
도훈은 슬슬 조바심을 느꼈다. 훼방꾼 여동생은 금방이라도 다시 돌아올 것 같은데, 정보창을 쓸 수 없으니 당장 호감도를 끌어 올릴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문득 도훈은 사라의 팔목에 채워진 오래된 가죽 팔찌를 바라보았다. 왠지 사연이 담겨 있을 것 같은 낡은 팔찌.
‘그래. 어쩌면 저것으로···.’
< 100. 즐거운 사라-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