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즐거운 사라-4- >
로시가 알려준 특단의 조치는 바로 담배였다.
‘잉? 뜬금없이 담배라니?’
[이도훈 군의 아버지 이찬명 소설가는 지독한 애연가입니다. 글 쓰는 업이 대개 그러하듯 작품 집필 시엔 서재가 틀어박혀 줄 담배를 피곤했죠.]
‘서재? 그럼 집에서 담배를 피웠단 소린가?’
[물론 두 분이 무척 어린 시절의 일입니다. 그 당시엔 지금처럼 흡연 에티켓이 대중화되지 않던 시기였으니까요.]
‘하긴 울 아버지도 집에서 곧잘 피웠더랬지. 근데 담배로 뭘 어째?’
[좀 더 들어보십시오.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나는 담배 냄새를 지독하게 싫어하던 혜은 양은, 나이가 들어서도 담배 피우는 사람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는 결벽증이 생겼습니다. 이 때문에 아버지인 이찬명 소설가도 집필실을 외부에 두고 집안에 돌아와서는 일절 담배를 손에 대지 않고 있는 실정이구요. 조금이라도 냄새가 나면 딸이 아주 질색을 하니까요.]
‘아하! 그러니까 담배를 피워서 혜은이를 알아서 떨어져 나가게 만들자는 소리야?’
[바로 맞췄습니다.]
‘근데 이 방법은 좀 위험하지 않을까? 원래 이도훈은 비흡연자잖아.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담배를 태운다고 하면 괜한 의심을 살지도 모르는데?’
[누군들 날 때부터 흡연자였답니까? 군대 가서 못된 것 배웠다고 하시면 되죠.]
‘크크. 너도 이제 막 나가는구나.’
[도훈군의 부모님도 아들이 군대 가서 담배 배워온 것에 대해 그리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특히 본래부터 골초였던 아버지는 어느 정도 이해해줄 수 있는 부분이구요. 그런 것으로 의심을 사진 않습니다.]
‘하긴. 오늘의 관건은 저 훼방꾼 여동생을 떨어내는 것이니···.’
결심을 마친 나는 고기를 먹다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나 잠깐 화장실에 좀 다녀올 게."
"응."
화장실로 가는 척 가게 밖으로 나간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가게 밖 공터에는 흡연을 위한 벤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후-. 역시 이 맛이지."
***
"후-. 역시 이 맛이지."
도훈은 담배를 꼬나물고 찰나 간의 여유를 만끽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여동생 덕에, 백마 공략이 원활하지 않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그였다. 담배 연기를 흩어 보내며, 그는 사라를 어떻게 꼬실 수 있을지 전략을 세웠다.
‘가만있자. 사라가 여동생 스테파니와 호텔룸을 따로 잡았다고 했겠다? 그렇다면 분명 혜은이는 스테파니와 같은 방을 쓸 거고, 오늘 밤 사라는 홀로 낯선 이국땅에서 잠을 잔다는 소린데···.’
생각 이상으로 오빠에게 집착증세를 보이는 여동생 덕에 사라와 둘만의 기회를 마련하기란 쉽지 않은 일.
‘어쩌면 오늘 밤이 그녀를 유혹할 절호의 기회일지도···. 로시, 정보창 스킬 갱신까지 얼마나 남았지?’
[아까 리무진 버스를 타고 오면서 사용하셨으니 오늘 자정이 넘어서 가능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혜은이한테 쓰지 않고 아껴둘 걸 그랬어.’
[정보창 스킬 없어도 주인님의 능력은 무궁무진합니다. 이미 그런 경험도 한 번 있지 않습니까? 그녀의 호감을 얻어 보십시오.]
‘그래야겠어. 우선 사라가 K-pop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걸로 점수 좀 딴 다음 둘만의 자릴 만들고나면···.’
"오빠?"
한참 도훈이 돌아오지 않자 잠시 가게 밖으로 나와 본 혜은은 의외의 장면에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생전 담배는 입에도 안 대던 그가, 벤치에 앉아 유유히 담배 피우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도훈은 담배를 등 뒤로 숨기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이참, ···들켜 버렸네."
"오, 오빠 담배 펴?"
"응. 군대서 못된 짓 좀 배워 왔어. 네 말마따나."
흥분한 얼굴로 도훈에게 다가오던 혜은이 훅-하고 퍼지는 담배 냄새에 질겁하는 표정으로 물러섰다. 마치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결계가 처진 것처럼, 일정 거리 이상 다가서지 못하는 혜은을 보며 도훈이 쾌재를 불렀다.
‘크크. 마치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뱀파이어 꼴이로군. 기고만장하던 네게도 약점이 있구나.’
"어,어떻게 오빠가!"
혜은은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충격과 공포, 경악과 놀라움으로 물든 그녀의 눈빛을 보는 순간, 도훈은 이 방법이 그녀에게 제대로 먹혔음을 실감했다.
"엄마한텐 비밀이야. 알았지?"
"비, 비밀은 무슨! 다 일러바칠 거야."
도훈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어?"
"솔직히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아버지 때문이라고. 어려서부터 담배 냄새가 진이 박히다 보니, 결국 담배에 중독돼 버린 거지."
"그, 그런 말이 어딨어? 오빠도 분명 아빠 몸에서 담배 냄새난다고 싫어했잖아!"
"뭐, 그건 어렸을 때고."
"지, 진짜! 오빠 오랜만에 봐놓고 하나뿐인 동생이 그렇게 싫어하는 행동을···."
"미안. 참아볼까 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말야. 그래도 너 만나고 몇 시간 째 참다가 이제 겨우 한 대 피우는 거야."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변명? 아닌데?"
"···뭐?"
도훈은 담뱃재를 거칠게 바닥에 짓이기더니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종일관 여동생에게 휘둘리던 도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생전 처음보는 낯선 사내가 그녀 앞에 있었다.
"내가 왜 너한테 기호식품까지 일일이 간섭받아야 하는 건데?"
"오, 오빠···."
"그렇지 않아? 누가 보면 내가 네 동생인 줄 알겠다야."
"어,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솔직히 그렇잖아. 사라랑 스테파니도 같이 있는데 왜 그렇게 나한테 막 해? 두 사람이 날 어떻게 보겠어? 너가 내 동생이면 내 체면도 생각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아, 아니 난···."
"이혜은. 네가 부모님 밑에서 등따숩고 편하게 악기 배우는 동안, 난 좁은 원룸에 자취하면서 생활비까지 내가 다 벌면서 살았어. 그거 말처럼 쉬운 일 아냐. 아무리 딸자식이랑 아들이 다르다 해도 내 입장에선 좀 억울하지 않겠냐? 그런데 이제 담배 피우는 것조차 너한테 간섭받아야 한다니···. 너 나 오빠로 생각하기는 하는 거니?"
"······."
"이제 어리광 받아줄 나인 지났잖아. 아까 물었지? 뭘 해야 어른이냐고? 이런 거야. 대접받고 싶으면 상대를 존중부터 해. 그게 어른이야."
"오, 오빠···."
도훈은 망연자실해 하는 혜은을 지나쳐 휙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혜은은 제 자리에 못 박힌 듯 한동안 석상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
‘휴- 잘한 건지 모르겠네. 괜히 오버한 건 아니겠지?’
[좀 과하긴 했지만, 따끔한 지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빠로서 철부지 동생한테 할 수 있는 정도로요.]
‘그래도 괜히 미안하네. 집에서 오냐오냐 큰 것 같은데···.’
[그나저나 조금 전엔 정말 이도훈의 환생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생각을 하셨습니까?]
‘무슨?’
[‘내 입장에선 억울하지 않겠냐?’ 이 대사 말입니다.]
‘야! 소름 돋으니까 따라 하지 말랬지.’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 흉내만 내지 말라는 건 줄 알았습니다.]
‘그냥 도훈이 입장에서 감정이입을 해 봤어. 생각해 보면 얘 인생도 불쌍하잖아. 여동생 유학 때문에 기러기 아빠도 아니고, 기러기 아들이 되어서 혼자 골방에서 쓸쓸히 죽어간 운명이. 그런 사정도 모르면서 여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게 오빠만 보면 달달 볶으니 원···.’
[어쨌든 이것으로 혜은 양의 기가 한풀 꺾인 것은 분명합니다.]
‘쩝. 괜한 짓으로 남매간 의를 상하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는데···.’
[왜 그러십니까? 다시 생각해 보니 호감도 하락이 아쉬우십니까?]
‘뭐래, 이 미친놈이? 됐거든?’
[말씀드렸다시피 주인님에게 있어 이혜은 양은 다른 여성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존재입니다. 편견을 갖지 마십시오.]
‘그래도 피붙이는 피붙이야. 이도훈의 영혼이 나를 위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자기 동생을 건드리는 나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냐? 자기 몸까지 뺏은 마당에 가족들에게까지 군침을 흘리는 나를? 아무리 인생의 목표가 여자들 많이 따먹는 거라곤 하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야. 넌 대체 날 얼마나 쓰레기로 만들 셈이냐?’
[···흠. 주인님의 의지가 확고하시니 저도 더 이상 권유 않겠습니다.]
"레이첼 못 만났어? 도훈씨 찾으러 갔는데."
자리로 돌아가 앉자, 사라가 나에게 물었다.
"밖에 있을 거야."
"혼자서?"
"응. 바람이라도 쐬나 보지."
"바람을 쐐?"
"She wants to be alone, Maybe."
"Ah! ok. 그리고 코기 정말 맛있어. 삼켭살."
"맛있어?"
"응. 나도 도훈씨에게 대접하고 싶어."
옳다구나.
난 기회가 왔음을 느꼈다.
"사라 혹시 술 좋아해?"
"술? 좋지."
"그럼 나 술 한잔만 사줘. 아, 애들은 고등학생이라 못 마시겠구나."
"코등학생?"
"High school student. 한국에선 고등학생은 술 마시면 안 되거든."
"Ah···."
사라는 옆에 앉은 스테파니의 눈치를 살피더니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럼 둘이 마실까?"
"You and me? only?"
"Yes."
호오.
역시 서양 여자들은 화통하단 말이야.
그때 혜은이 무거운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Where have you been, Rachel?"
(어디 갔다 왔어?)
스테파니의 물음에도 혜은은 조용히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항상 활기차 있던 그녀의 침울한 모습을 보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고기를 모두 해치우고 후식으로 냉면을 먹는 동안에도 혜은은 별다른 말 없이 내 눈치만 살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내버려 둔 체 스테파니와 사라에게 이런저런 농담을 건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어설픈 발음이지만, 문법이나 표현만큼은 명확했기 때문에 충분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식사를 끝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데 뒤처져 있던 혜은이 쭈뼛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저기, 오빠."
"응?"
"···미안."
"뭐가? 뜬금없이."
"그냥, 다. 그동안 내가 오빠한테 막대한 거. 다 미안해."
고개를 떨구며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는 동생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사라와 스테파니는 우리가 멈춰 선 것도 모른 체 서울의 야경을 감상하며 앞서가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것 같아. 오빤 혼자 한국에서 고생하는데, 난 부모님 곁에서 편히 있으면서···."
"꼭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냐."
"정말 미안해 오빠. 앞으로 내가 오빠한테 잘할 게. 나 너무 미워하지 마."
"혜은아···."
혜은은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와락 내 품에 안겼다.
"오빠아앙, 어엉. 난 오빠가 나 싫어하는 거 싫단 말이야. 엉엉."
뭉클-
혜은의 가슴이 닿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 어라. 이게 아닌데.’
[어째 호감도가 더 상승한 느낌입니다만.]
‘이게 뭐야? 얘 담배 냄새라면 질색한다며? 어떻게 나한테 안길 수 있는 건데?’
[오빠에 대한 사랑이 담배의 혐오를 넘어섰기 때문이겠죠. 보기 좋은 남매애로군요.]
‘제, 젠장.’
"요즘 것들은 하여간~"
지나가던 할아버지 한 분이 길거리에서 진한(?) 포옹을 나누고 있는 우리 남매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찼다.
"아, 아니 이건 그런 게 아니라."
"엉엉. 오빠 나 버리지 마. 난 오빠가 좋단 말이야앙!"
오해 가득한 혜은의 대사에 다른 행인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어쨌든 남자가 잘못했네. 거 적당히 좀 하쇼."
"맞아. 아무리 그래도 여잘 울리면 못 쓰지."
아니, 내가 왜 갑자기 죄인 취급받는 분위긴데?
미녀의 눈물은 만인의 동정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
나는 우선 감정이 복받친 혜은부터 달랬다.
"혜, 혜은아 길거리에서 이러면 사람들이 오해한다고."
"그럼 나 미워하지 않는다고 해줘. 엉엉."
"안 미워해. 내가 왜 하나뿐인 동생을 미워하겠어? 그러니까 이제 좀 떨어져서···."
"나 진짜 안 미워할 거지?"
"응. 그렇다니까.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
혜은은 한참을 울먹인 뒤에야 포옹을 풀었다. 어느새 그녀는 눈물 자국 하나 없이 말끔한 얼굴이었다.
"히-. 오빠 화 풀었다."
"야! 뭐야? 너 연기였어?"
"연기라니! 내가 얼마나 서러웠는데."
왠지 당한 기분이지만, 혜은이 웃는 모습을 보니 훨씬 기분이 좋았다. 역시 혈육이란 건가?
"어? 근데 사라랑 스테파닌 어디 갔지?"
"몰라. 먼저 숙소로 갔나 보지."
혜은은 불쑥 팔짱을 껴왔다. 은근 큰 가슴이 팔뚝에 닿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할 수 없었다.
‘얘는 왜 이렇게 스킨쉽을 해 대는 거야? 이것도 아메리칸 스타일인가?’
"오빠. 우리 근데 별로 안 닮은 거 같지 않아?"
"응?"
팔짱을 끼고 숙소로 복귀하는 길에 혜은이 말했다.
"아니 생긴 거 말이야. 난 가끔 그런 생각 들던데. 오빠는 아빠랑 엄마 반씩 닮았잖아. 근데 왜 난 두 분을 하나도 안 닮았지?"
"에이 무슨 소리야."
난 수중에 가지고 다니던 지갑을 꺼냈다. 안 지갑 속에 든 가족사진을 보기 위함이었다.
"봐. 이렇게···."
사실 도훈의 가족사진을 다시 본 것은 환생한 이후 처음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아무리 보아도 혜은은 부모님을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뽕 튀어나온 앞이마도 그렇고, 브이라인이 있는 하관도 그렇고, 쌍꺼풀 진한 커다란 눈이나 앙증맞은 콧대 역시 부모님 두 분 중 누구 하나같지 않았다.
도훈의 큰 키와 체형이 아버지를 닮고 얼굴형이 어머니를 빼다 박은 것에 비추어 볼 때 혜은은 훈훈한 가족들 중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이상하지? 나 혹시 주워온 자식이려나?"
나는 막장드라마 같은 작금의 상황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 99. 즐거운 사라-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