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즐거운 사라-3- >
[주인님.]
‘잔다. 말 걸지 마.’
[안 주무시는 거 다 압니다. 주인님의 신체 리듬은 스마트워치에 접촉하는 순간 저와 공유되고 있습니다.]
‘아씨! 잔다는 데 왜 자꾸 말 걸어?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구만.’
[너무 걱정이 많으신 것 같아서···.]
‘너라면 안 그렇겠냐? 친동생이 여자로 느껴지는데? 하긴 인공지능 따위가 인간의 마음을 알 리가 있나.’
[···조금 섭섭한 말씀이군요.]
로시의 목소리가 상당히 톤다운 되었다.
흠, 내가 너무 심했나.
‘아니 뭐 비하의 의도까진 아니었어.’
[전 비록 안드로이드지만 인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주인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더라도, 저로선 주인님의 멘탈을 케어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알았어. 내가 말이 심했어. 미안.]
[굳이 사과는 안 하셔도 됩니다. 아무튼 주인님이 느끼는 괴리감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체적으론 혈육을 나눈 남매지만, 그 안에 깃든 주인님의 영혼은 전혀 다른 3자의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이런 비유가 통할지 모르겠지만, 주인님은 이혜은 양과 갑작스레 친족으로 맺어진 의붓남매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붓남매?’
[배다른 남매 말이죠. 그러니 당연히 이성적으로 끌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혜은 양이 평범한 외모도 아니고요.]
‘아니 난 그런 걸 떠나, 18살밖에 안 먹은 계집애한테 성욕을 느꼈다는 게 너무 더러워서 그래. 아무리 섹스에 미쳤다고 한들 어린애한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말이 돼? 이건 아청법 위반이라고. 전자 발찌 차는 거란 말야.’
[꼭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님께서 혼동하시는 게 있는데, 청소년 성매매라든지 쌍방 합의가 없는 성관계에 대해서만 처벌의 대상입니다. 아까도 설명해 드렸지만, 만 13세 이상인 남녀가 서로 간 합의로 관계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고요.]
‘그래서 넌 기어코 내가 금단의 열매를 따야지 직성이 풀리겠다는 거야?’
[아닙니다. 시스템적으로 일체의 문제는 없지만, 위업에 도전하는 것은 오롯이 주인님의 선택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동생분에 대해선 너무 고민 마시고 사라 양의 공략에만 집중해 주십시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흠.’
로시의 조언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로시 말이 구구절절 옳다.
내가 혜은이를 보고 음심이 동한 것은, 그녀와 실제로 친족이 아닌 탓이다. 그로 인해 괴로워하거나 도덕적인 죄책감을 느낄 필욘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위업 따윈 안 하면 그만이다. 그거 하나 포기한다고 랭커를 못 다는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숙소 바래다주고 돌아가면 하루밖에 시간이 없는 셈인가···. 하루 사이에 어떻게 사라를 꼬신담?’
한참 눈 감고 고민에 빠져있는데 혜은이 내 팔을 툭툭 치는 바람에 눈을 떴다.
"오빠, 일어나 우리 이제 내려야 해."
어느새 버스는 숙소인 인터콘티넨탈 호텔에 도착해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캐리어를 끌고 호텔 입구에 들어서자, 유니폼을 차려입은 벨보이가 마중 나왔다.
"예약 손님이신가요?"
"네."
"짐은 저에게 맡겨주세요. 체크인하시면 룸으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벨보이는 무척 공손한 태도였다.
‘호텔 외관도 그렇고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큰 호텔이라니···. 대체 얼마짜리지?’
내가 가격을 예상하며 놀래는 데 혜은이 말했다.
"좋은 곳으로 잡았지? 스테파니 집, 되게 부자야. 아빠는 의사고 엄마는 변호사거든. 참고로 숙박비용은 스테파니네 쪽에서 부담했어."
"그렇구나."
혜은은 외국 친구가 체크인을 하기 위해 카운터 쪽으로 향하자, 내 팔에 팔짱을 끼며 나를 멈춰 세웠다.
"오빠, 잠깐만."
"왜?"
"말해줄 게 있어."
"뭔데?"
"사라랑 스테파니는 사실 이복자매야."
"응?"
"그니까 재혼가정이라고. 혹시나 해서 미리 알려주는 거니까 말실수 하지마."
"그렇구나. 근데 미국에선 좀 흔한 일 아니니?"
"흔하긴 하지. 근데 부모님이 나이 들어서 결합한 탓인지 서롤 좀 의식하는 것 같아. 사실 이번 여행 갈 때도 스테파니가 언니랑 가는 거 불편해 했거든. 것 땜에 방도 따로 잡았고."
"알았어. 신경 쓸 게."
갑자기 여동생 혜은이 조금 달리 보인다.
마냥 철부지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섬세한 면이 있군.
"Checked in. Rachel come!"
"레이첼?"
"뭐야? 오빤 내 미국 이름도 몰라?"
"아, 아니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흠, 나한테 좀 관심 없는 거 아냐? 군대 있을 때 연락 많이 못 했다고 복수하는 건가?"
"아, 아니야. 그럼 숙소 들어가서 쉬어. 난 내일 아침 데리러 올게."
"벌써 가?"
"응. 오늘은 시차 적응 힘들까 봐 일정도 안 잡았어."
"힝, 그러는 게 어딨어. 맛난 거 사준다며. 저녁 사줘. 나 배고프단 말야."
"저녁?"
"응. 나 오랜만에 한국 음식 먹고 싶어."
혜은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더니 영어로 말했다. 생각보다 유창한 영어 솜씨에 알아듣기 힘들었으나, 대충 해석하면 내가 한국에 온 기념으로 저녁을 대접한다는 소리 같았다.
‘젠장. 또 돈 깨지게 생겼네. 어제 50만원 안 벌었으면 큰일 날 뻔.’
"도훈씨 캄사합니다."
"Thank you so much!"
"오빠. 우리 짐만 풀고 금방 올 테니까 로비에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그래."
세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사이 나는 호텔 로비의 쇼파에 앉았다.
***
[아쉽게 되었군요.]
‘뭐가?’
[스테파니와 사라 말입니다. 자매인 줄 알았는데, 혈연관계가 아니었다니.]
‘그게 뭐가 아쉬워? 아, 자매 덮밥? 에이, 어차피 스테파니는 고등학생이라 좀 그랬어. 솔직히 내 취향도 아니고.’
도훈은 주근깨 가득한 스테파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니인 사라가 전형적인 백인 미인이라면, 동생인 스테파니는 서양인 치곤 못난 인상이었다. 특히 백인 특유의 거칠고 잔털 많은 피부가 어딘지 모르게 남성적인 느낌을 들게 했다.
‘이번엔 사라만 공략할 거야. 일타쌍피도 좋지만, 과욕은 금물이지.’
[왠지 스스로에 대한 다짐처럼 들리는군요.]
‘닥치시고.’
도훈은 쇼파에 앉아 호텔 주변 음식점을 찾았다.
‘여기가 제일 괜찮겠군.’
음식점을 뒤지는 사이 간편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은 세 사람이 내려왔다.
"오빠, 우리 어디로 가?"
"근처에 고깃집 있더라. 삼겹살 괜찮지?"
"좋지. Hey, Sara. Do you like Bacon?"
"Yes. 삼겹살, 좋아."
"어라? 삼겹살 먹어 봤어요?"
"미쿡에 있는 한쿡 식당에서요."
"잘됐네. 가요. 저녁은 제가 쏠게요."
"쏠게요? What’s mean?"
"I will treat you to dinner."
"Ah! I understand."
도보를 따라 길을 걷는데 확실히 스테파니와 사라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혜은을 사이에 두고 따로 떨어져 걸었던 것이다.
특히 스테파니가 한국어에 서툴렀기 때문에 혜은을 향해 이것저것 묻느라, 자연스럽게 사라 혼자 외톨이가 되었다.
‘그녀와 친해질 기회다.’
도훈은 사라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사라씬 몇 살이세요? how old are you?"
"영어 안 해도 괜찮아. 나 다 알아들어. 나 스물 두 살입니다. 한국 나이는 스물 셋."
"오, 한국 나이도 알아여?"
"나 한국 문화 잘 알아. 도훈씨도 스물 셋이지?"
"네. 혜은이가 말해줬나 보네."
"응. 혜은이 착해. 내 여동생이랑 Best Friend"
"그렇군요. 둘이 같은 학교 다니던가?"
"응. 내 동생은 피아노."
"아하, 사라도 혹시 악기 다뤄?"
"악끼?"
"그러니까 첼로나 피아노 같은."
"No. 난 언어에 관심 많아. 도훈씨 영어 잘해?"
영어라···.
안 쓴 지 오래되긴 했지만 도훈도 나름 유학파 출신이었다.
이정우로 살던 시절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땄으니까.
다만 듣는 것은 곧잘 하는 반면, 발음은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배운 토종 콩글리쉬로 미국에 가니, 누구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한번 고착돼버린 발음은 뛰어난 머리로도 개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라를 먹고나면 영어 실력도 일취월장하겠지. 흐흐.’
도훈은 사라의 몸매를 훔치며 군침을 삼켰다. 서양인 특유의 8등신 비율에, 타고난 블론드 헤어. 아마 밑에도 금발이겠지?
"나 영어 못 해. 사라가 가르쳐줘."
"정말? 좋아. 그럼 도훈씨도 나랑 영어해. 내가 알려줄케."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한참 분위기 좋게 대화가 진행되는데 혜은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게 또 훼방이네?’
도훈은 눈엣가시 같은 여동생의 존재에 부담을 느꼈다. 사라를 공략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여동생이었다.
"응. 사라가 나 영어 알려 준데."
"왜? 굳이? 오빤 나한테 배우면 되지?"
"가족한테 어떻게 배우냐. 선생도 자기 자식은 못 가르친다는 데."
"흥. 평소에 영어라면 질색하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으셨을까?"
‘로시. 도훈이 영어 못하냐?’
[네. 수능도 겨우 등급에 맞췄습니다. 토익은 신발사이즈 정도 구요.]
‘얘도 운동 말곤 영 잼병이구만.’
"나 군대 있을 때 토익 공부 좀 했어."
"진짜? 오빠가?"
"응. 저녁에 연등이라고 해서 공부할 시간을 따로 주거든. 할 일이 없으니까 영어책 좀 봤지."
"와, 오빠 철들었네? 영어라면 질색을 하더니. 것땜에 아빠가 미국 놀러 오라고 해도 안 왔었잖아. 비행기 표를 끊어 준데도 마다할 땐 언제고."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일입니다.]
‘오케이.’
"그땐 좀 철없을 시기잖아. 남자들은 군대 다녀오면 확 바뀐다니까? 나 좀 달라진 거 같지 않아?"
혜은이 눈을 가늘 게 뜬 체 도훈을 살폈다.
몸도 예전보다 커지고, 얼굴도 더 잘생겨지긴 했지만 그것보다 느낌이 많이달랐다. 분명 그녀가 기억하는 도훈은 숫기 없고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도훈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확실히 달라지긴 했어. 오빠가 이렇게 여자들한테 쉽게 말 거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어딘가 변한 거 같아. 내 오빤데도 오빠 같지 않아.’
"흠. 군대 가서 못된 것만 배워 왔구나?"
"못된 거라니."
"됐어. 흥."
"어, 저기다. 삼겹살 집."
네 사람은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맨 마지막으로 따라 들어간 혜은은 도훈의 넓은 등짝을 보며 생각했다.
‘···근데 왜 오빠가 사라를 쳐다보면 질투가 나는 걸까?’
***
솥뚜껑처럼 생긴 불판이 달아오르자 집게를 이용해 길게 잘린 삼겹살을 올렸다. 곧 육즙이 배어 나오며 지글지글 삼겹살이 익기 시작했다.
"왕, 맛있겠다!"
혜은은 고기를 좋아하는지 애처럼 젓가락을 입에 물고 군침을 흘렸다. 저런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군.
"오빠 안 뒤집어?"
"삼겹살은 한 번만 뒤집는 게 좋아. 내가 맛있게 구어 줄테니 조금만 기다려."
솥뚜껑 가장자리로 김치와 콩나물을 깔고 버섯을 올리자, 그럴싸한 비주얼이 완성되었다. 스테파니는 폰을 꺼내 사진을 찍더니 페북에 올리겠다고 했다.
"우! 김치랑 삼겹살 너무 먹고 싶었어."
"엄마가 김치 안해줘?"
"해주긴 하는데 그 맛이 안 나. 양념이 달라서 그런가?"
삼겹살을 반대로 뒤집고 집게와 가위를 이용해 적당히 썰었다. 이건 뭐 요리 축에도 못 들긴 하지만, 그래도 맛있게 굽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제법 맛의 차이가 난다.
"다 익었다. 이제 먹어도 될 거 같아."
"캄사합니다."
"스테파니, 나 따라 해봐."
혜은이 친구에게 쌈싸는 법을 알려주자 스테파니가 어설픈 솜씨로 상추에 고기를 얹고 마늘과 쌈장을 발랐다. 사라 역시 그 모습을 따라 고기를 싸더니 갑자기 나에게 건넸다.
"도훈씨 드세요."
"어? 저요?"
"응. 코기 굽느라, 못 먹잖아."
"괜찮은데···."
슬쩍 혜은의 눈치를 살피는 데 아니나 다를까 혜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젠장, 얼른 저 껌딱지를 때놓아야 거사를 치르든 할 텐데···.
"그럼 손이 부끄러우니까."
마지못한 척 쌈을 받아먹었다.
나는 웃으며 엄지를 척 세웠다.
"굿! 맛있어."
"맛있어?"
"네. 사라가 싸주니까 더 맛있는 것 같네."
"캄사해요."
입안 가득 쌈을 먹고 있는데 불쑥 내 앞으로 커다란 상추쌈이 들이밀어 졌다.
"자, 오빠 내 것도 아~"
"나 지금···."
"뭐야? 사라건 먹고 내건 안 먹어?"
"아, 알았어. 줘."
"손으로 말고, 입으로 아~"
왠지 입으로 받아먹기 민망했지만, 혜은은 전혀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누굴 닮아서 저렇게 황소고집이람?
나는 이미 가득 찬 입안에, 동생이 싸준 쌈까지 욱여넣었다. 순간 헛구역질이 올라올 뻔했지만 겨우 입을 다물었다.
‘윽! 여기다 와사비라도 넣은 거야?’
혜은이 싸준 쌈을 씹는데 입안 전체에 진한 매운맛이 퍼졌다. 어이가 없어 혜은을 쳐다보는데, 반쯤 잘린 청량고추를 들고 내 앞에서 흔들어 보이는 게 아닌가?
"넘 많이 넣었나? 히히."
고추를 들고 얄밉게 웃는 동생을 쳐다보는데, 예뻤다.
‘음. 젠장. 웃는 낯짝에 화를 낼 수도 없고.’
[주인님 동생분에게 유난히 쩔쩔매는 것 같습니다.]
‘그럼 어째? 아까처럼 쥐어패기라도 해? 또 찡찡거릴 거 뻔한데. 그리고 정체 들키지 말고 몸을 사리라는 건 너였잖아.’
[그렇다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라는 소린 아니었죠. 솔직히 생긴 게 똑같은데, 의심해 봐야 얼마나 하겠습니까? 그냥 성격 많이 바뀌었나 보다 하겠죠. 이대로 가다간 여동생분 때문에 죽도 밥도 안될 것 같습니다. 특단의 조치를 취해보죠.]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 98. 즐거운 사라-3-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