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즐거운 사라-1- >
***
한참 낑낑대며 마스킹 테잎을 모두 제거한 도훈은,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누웠다. 그러나 처음 시도해본 성인 방송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서인지 쉽사리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고작 1시간 남짓한 사이 50만원을 벌다니. 정말 최고구나.’
최저시급을 겨우 넘는 편의점 알바 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익률이다.
시간 대비로 한정하면 생전의 이정우로도 그만큼 벌 자신은 없었다.
‘잘나가는 BJ들이 달에 억 단위까지 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군. 가만 내가 이 말을 태영이한테 들었던가?’
갑자기 태영을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진 도훈에게 로시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정태영 군 때문에 찜찜하신 모양이군요.]
‘맞아. 그 카톡 말이야. 괜히 한 번 떠보는 느낌이랄까? 예감이 좋지 않아.’
[너무 걱정 마십시오. 영상에 나온 인물과 주인님은 목소리부터 판이합니다. 가면을 써 얼굴 또한 알아볼 수 없고요. 설사 의심을 샀다고 한들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알아. 우기면 끝이지. 다만 태영이 놈이 눈치가 보통이 아니라는 게 문제야. 내가 우려하는 건 이번 방송 건에 국한되는 게 아니거든.’
[그럼요?]
‘왠지 대학 생활 두고두고 피곤한 일이 생길 거 같단 말이지.’
[흐음···.]
도훈은 자신을 ‘회귀자’냐 물었던 태영의 엉뚱한 상상력이 마음에 걸렸다. 남다른 착상을 하는 태영이라면, 어쩌면 학과 생활동안 자신의 능력을 간파당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모종의 불안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옛말에 가장 강력한 적은 친구로 두라는 말이 있죠.]
‘친구?’
[원래 등잔 밑이 가장 어두운 법이라지 않습니까? 그의 의심을 살 것이 두렵다면, 그와 끈끈한 사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요컨대 놈이 나를 감시하게 두지 말고, 그 반대가 되라는 말인가?’
[정확합니다. 공연한 회피는 의심만 키울 뿐이니까요.]
‘호오···. 적을 가까이 두라. 괜찮은 생각 같군.’
[그보다 내일 일정은 짜셨습니까?]
‘어. 숙소는 그쪽에서 예약한다고 했으니, 나는 따라다니면서 관광지랑 맛집 정도만 알려주면 돼.’
[그것을 물은 게 아닙니다. 제 말은 새로 도전할 위업에 대한 대비를 하셨냐는 말입니다.]
‘아참, 그렇지?’
[주말이다 보니 기존에 관계를 맺었던 여성들에게서 연락이 올지도 모릅니다. 문어다리 어플을 통해 동선을 확인하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도훈은 로시의 말을 듣고 곧바로 문어다리 어플을 실행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알림창이 떴다.
<업데이트 안내
사용하고 있는 버전이 최신이 아닙니다.
지금 업데이트 하시겠습니까?
나중에 or 지금 업데이트
‘어라? 이건 뭐야?’
[새로운 버전이 출시된 것 같습니다.]
‘이거 또 포인트 드는 거야? 목소리 변조 사탕 사느라 300포인트밖에 안 남았는데···.’
[아닙니다. 마켓에서 판매되는 어플의 업데이트는 모두 무료로 제공됩니다.]
‘아하.’
공짜라는 말에 도훈은 ‘지금 업데이트’를 클릭했다.
그러자 막대 바가 생성되며 퍼센티지가 차오르더니 새 버전의 어플이 실행되었다.
‘크게 달라진 부분은 모르겠는데?’
[외형보단 기능적인 부분에서 변경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인맥관리 메뉴를 클릭해 보십시오.]
로시의 말대로 인맥관리를 클릭하자 한 번이라도 정보창 스킬로 확인한 여자들의 이름이 주르륵 나열되었다. 신기한 것은 이제 별도로 대상을 지정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행선지가 표시된다는 사실이었다.
<토요일
전수연 - 동대문 (남자친구와 데이트)
박하린 - 충주
허영자 - 편의점
나예림 - 집
송미나 - 헬스장
육정음 - 한국 병원 (할머니 병간호)
마유미 - 춘천 (배구부 전지훈련)
이효민 - 부산 (가족 여행)
양희주 - 집
하서윤 - 광주 (고향 방문)
<일요일
···
★ 대상간 충돌이 우려되지 않습니다.
TIP- 관리하는 인맥이 너무 많을 경우, 차단 설정을 통해 효율적인 동선을 추구하실 수 있습니다.
‘오! 모든 사람의 동선이 한 번에 뜨게 바뀌었네?’
[그렇군요. 그런데 사방으로 다리가 뻗어 있어서 정리가 좀 필요해 보입니다.]
‘그래야겠어. 일단 남자친구 사귄 수연이부터 삭제하고···.’
도훈은 수연을 우선 삭제하고 당분간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나예림과 이효민도 지웠다. 오히려 조교 강민주는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아쉬웠다.
‘음, 민주도 요주의 인물이긴 한데···.’
[관리를 위해선 차후에라도 정보창 스킬로 한 번은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뭐 어쨌든 주말 동안 저기 나온 위치만 피하면 누군가와 부딪힐 우려는 없다는 소리네.’
[다행이군요.]
‘흐흐. 드디어 내일 외래종마를 타보는 것인가?’
[화이팅입니다, 주인님. 최선을 다해 공략해 주시길.]
‘아참, 서윤이 위업은 어떻게 됐어?’
[지스팟 위업은 안타깝게도 토탈 366ml에 그쳤습니다.]
‘젠장, 포카리를 500ml나 마시게 했는데 부족했던 것인가. 노력이.’
[그래도 괄목할만한 성장입니다.]
‘그래. 어차피 서윤인 바로 옆집 사니까, 언제든 다시 시도하면 되겠지.’
도훈은 내일 일정을 마지막으로 되새김하며 천천히 잠을 청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주인님]
***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일찍 일어나면 오전 중 헬스장이나 들러볼까 했는데, 인천공항까지 마중 나가려니 시간이 애매했다.
‘이런. 송미나 공략이 너무 지지부진 한데. 이러다 3달 훌쩍 지나가 버리는 건 아니겠지?’
[주인님, 인내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모든 여성을 하룻밤 만에 넘길 수 있다는 것은 과욕입니다. 원나잇을 좋아하지 않는 여성도 많으니까요.]
‘알지, 아는데 얼른 그 쫄깃한 구멍을 맛보고 싶어서 말이야.’
나는 공항철도를 타고 이동하며 무료한 시간을 로시와 대화했다.
‘근데 백마 타고 흑마 타고 위업이 혹시 동시공략이야? 그러니까 한 번에 두 명을 같은 자리에서···.’
[아닙니다. 위업의 명칭이 대체로 공략할 대상과 내용을 간략하게 알려주긴 하지만 전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일전에 성공하신 ‘모녀 덮밥’처럼 순차 공략미션입니다. 흑백의 순서 또한 무관하고요.]
‘그렇군. 혹시 동시에 여러 명을 공략하는 위업도 있나?’
[그런 종류는 ‘같이 할래?’가 대표적입니다. 또한 ‘자매 덮밥’ 위업 역시 같은 케이스죠.]
‘자매 덮밥이라고?’
[네. 이름만 덮밥인 모녀 덮밥 위업과 달리, 자매 덮밥이랴 말로 진정한 의미의 덮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혈연으로 이어진 자매를 같은 공간에서···.]
‘오옷! 그런 위업이 있었어?’
[디스플레이에 띄워드릴까요?]
‘어. 당장.’
★달성 가능 위업 리스트 (현재까지 5/108)
94. 자매 덮밥. (혈연으로 이어진 자매를 한 공간에서 동시공략 시 달성, 같이 할래? 위업 포인트 누적.)
-당신은 참으로 공평한 사내입니다.
-업적 보상 : 아이템 증정
「마법의 팬티」 - 착용하는 동안 정액 생산량을 왕성하게 증가시킵니다. 임신확률 최대 3배까지 증가.
‘억. 뭐야? 보상이 뭐 저래?’
[마법의 팬티 말입니까?]
‘그래. 결혼도 안 한 총각이 여잘 임신시키는 게 어떻게 보상이 되는 건데?’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상대를 임신시켜야 달성 가능한 업적 역시 존재하니까요.]
‘혹시 기회가 되면 레벨업 보상 때문에 시도해 볼 순 있겠지만, 팬티는 받더라도 어디다 처박아 둬야 할 것 같군.’
[참, 혹시라도 결혼 후 위 위업을 진행하신다면 다음의 위업과도 연동됩니다.]
‘뭔데?’
★달성 가능 위업 리스트 (현재까지 5/108)
77. 형부 이러시면 언니가···. (혼인관계에 있는 상대의 여자 자매를 공략 시 달성, 조건에 따라 <94. 자매 덮밥>위업과 동시 달성 가능)
-당신은 정말 구제불능이군요.
-업적 보상 :
미들 네임 획득
<인륜을 저버린 자
아이템 획득
「듀얼 캐스팅 반지」 - 보유한 스킬 중 하나의 쿨타임을 초기화하실 수 있습니다.
‘뭐야, 이 쓰레기 같은 위업은? 미들 네임은 또 뭐고?’
[미들 네임은 칭호 옆에 붙는 명예로운 훈장 같은 것입니다. 지금 주인님께서 위 미들 네임을 획득하시면 <하수 the 인륜의 저버린 자>로 표기가 됩니다.]
‘훈장이라니? 인륜을 저버린 자가 퍽이나 명예롭겠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플레이어라는 의미를 담을 수는 있겠죠.]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처제를 따?’
[허영자과 박하린을 둘 다 공략하신 것은 명예로운 행동이었습니까?]
‘······.’
[물론 해당 행위는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순 없을 겁니다. 외부에 알려진다면 대외활동에 막대한 타격을 줄 수도 있구요. 다만, 저는 저런 위업이 있다는 것을 소개해 드린 것뿐입니다.]
‘음. 알겠다. 하지만 아직은 결혼할 생각 없으니 임신 관련 위업이나, 유부남 위업은 알려줄 필욘 없다고.’
[명심하겠습니다.]
‘근데 다른 건 둘째치고 저 아이템 하나는 정말 마음에 드는 군.’
[듀얼 캐스팅 반지는 아이템 티어로 치면 최상위 등급입니다.]
‘티어라고? 아이템에도 등급이 있어?’
[당연한지요. 모든 아이템이 같은 등급인 것은 아닙니다. 마켓의 아이템 가격이 천차만별인 것은, 아이템마다 티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 그건 어떻게 알 수 있어?’
[감식안 스킬을 확보하시면 아이템의 상세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만, 대게는 가격이 높을수록 티어가 높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흐음 그렇군. 참, 오늘 도전할 위업에 대해 알려줘.’
[네, 지금 띄워놨습니다.]
★달성 가능 위업 리스트 (현재까지 5/108)
79. 백마 타고 흑마 타고 (인종 분류상 백인종과 흑인종에 해당되는 여성과 모두 관계할 경우 달성)
-당신은 이제 국제적으로 놉니다.
-업적 보상 : 랭귀지 마스터(2Lv, 스킬)-관계를 통해 상대의 언어능력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습득률은 스킬 레벨에 따라 달라집니다. 1Lv 기준 50%, 레벨 상향 시마다 5% 증가.
‘엇? 이번 위업 보상도 스킬이네?’
[네. 랭귀지 마스터는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스킬입니다. 가령 일본 여성과 관계하면 일본어를, 프랑스 여성과 관계하면 프랑스어를 마스터하실 수 있습니다.]
‘오오! 이건 좀 흥미로운데? 근데 50% 습득률로 마스터라기엔 좀 약하지 않나?’
[물론 마스터는 만랩, 그러니까 스킬레벨이 10Lv에 도달한 상태에서 가능합니다만···. 해당 언어의 50% 능력으로도 일상적인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오호. 이번에 미국에서 온댔지? 잘 됐군. 안 그래도 영어가 짧아서 고민이었는데 양키 말 좀 제대로 배워봐야지.’
인천공항까지는 무척 먼 거리였지만, 로시와 위업과 아이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줄 모르고 도착해 있었다.
공항 직원에게 길을 물어, 입국장 출구를 찾아 줄을 서 기다리는데 갑자기 로시가 말을 걸어왔다.
[저깁니다. 빨간색 캐리어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여성. 이도훈 군의 여동생 이혜은 양입니다.]
‘어디?’
[양옆에 금발 여성과 함께 있는 분 말입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안 보이는데···. 아, 찾았다!’
"혜은아 여기야."
나는 긴장된 표정을 싹 감추고 생전 처음 보는 여동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혜은은 선글라스를 콧잔등 밑으로 내려 나를 확인하고는 무척 반가운 표정으로 달려왔다.
"오빠아!!!"
손에 든 캐리어를 놔두고 헐레벌떡 뛰어온 혜은은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오빠아앙! 보고 싶었어!"
물컹-!
가슴팍에 부딪힌 촉감이 예사롭지 않았다. 선진국의 우수한 유제품을 많이 섭취했구나. 아니지, 내가 친동생에게 무슨 생각을.
"어어, 그, 그래. 사람들 많은데 이것 좀 풀고"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두 팔을 벌린 체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 사이 혜은과 함께 입국장을 걸어 나오던 금발의 여성이 나를 향해 인사했다.
"안뇽하세여."
어라? 한국말 잘하잖아?
***
"뭐야. 설마 오빠 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거야? 그런 거야?"
혜은은 선글라스 다리를 접더니 셔츠 가운데 꽂아 넣었다. 그 바람에 헐렁한 셔츠가 늘어지며 끈 나시만 걸친 그녀의 가슴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도훈은 방금 전까지 반갑다고 포옹하던 그녀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달려들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뭐, 뭐야? 얘 성격 원래 이렇게 들쭉날쭉 인가?’
[부지불식간이라 미처 설명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완전 제멋대로다며 도훈 군의 아버지께서 평하신 적이 있습니다.]
‘젠장. 무슨 이런 민폐 캐릭이···.’
그러나 훈계를 하려 들던 도훈은 선글라스를 벗은 여동생의 미모에 놀라 할 말을 잃었다.
‘헉. 사진보다 배는 더 이쁘네. 이 집안 유전자는 도훈이 아니라 혜은이한테 몰빵 됐었구나!’
"뭔데? 왜 그렇게 빤히 보는데?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 아냐."
"참, 내 정신 좀 봐. 여기 내 친구들 소개할게. 왼쪽에 있는 안경 쓴 애는 스테파니."
스테파니는 백인 피부 특유의 죽은 깨 가득한 소녀였다. 발육상태는 우수했지만 얼굴이 다소 옛 되어 보였다.
"Hello, Mr. Lee. nice to meet you."
"하, 하이."
"그리고 이쪽은 스테파니 언니 사라. 사라는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있으니까 한국말로 해도 돼."
도훈은 멀리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던 사라를 가까이 마주하게 되었다. 골드 블론드에 유난히 하얀 피부를 가진 사라는 전형적인 백인 미인으로, 치아가 드러나게 웃는 게 매력적이었다.
"애기 마니 들어쏘요. 도훈씨. 만나서 방캅습니다."
도훈은 악수를 건내는 사라를 향해 활짝 웃었다.
‘나도 반가워, 백마씨.’
< 96. 즐거운 사라-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