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옆방에 BJ-16- >
"손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노래가 잠시 중단된 틈에 종업원이 음료수 캔을 가져왔다.
"어? 저희 주문 안 했는데요?"
"저쪽 여자 분께서 아까 주문하시고 가셨어요."
종업원이 정음을 가리켰다.
"정음이 네가 시켰어?"
"응. 목마를까봐서."
"이런 건 또 언제 주문했데? 센스 터지네."
"정말 고마워."
"잘 마실 게."
다들 정음을 칭찬하는 통에 희주가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여우같은 지지배 보소? 남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몰래 음료수까지 시키셨어?’
남의 호의를 곧이곧대로 받아 들이지 못하고, 매사 삐뚜름하게 보는 희주로선 정음이 더욱 얄밉게 여겨졌다. 정음이 돋보일수록 자신이 점점 초라해 지는 기분이었다.
잠시 노래가 중단되고 음료수를 마시는데 태영이 정음을 향해 말했다.
"역시 얼굴 예쁜 얘들이 마음씨도 곱다더니···."
낯 뜨거운 칭찬에 정음이 민망해 했다.
"야.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러나 태영은 정음의 만류에도 막무가내였다.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예쁜 얘들은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많이 받아서 모난 구석이 없다고. 오히려 못 생긴 얘들이 자꾸 핍박 받으니까 심사가 뒤틀려서 더 악독하게 군다니까? 안 그러냐 기남아?"
난데없이 바통이 넘어가자 기남이 여전히 졸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두 동기의 대화에 희주는 더욱 약이 올랐다.
세상에 얼굴이랑 마음씨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럼 예쁜 여자들은 죄도 안 짓고 사나?
정음의 여우 짓도 눈치 못 채고, 마냥 좋다고 헤벌쭉 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미련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괜스레 반박했다간 자기만 못난 사람이 될 것 같아 잠자코 있어야 했다. 여기서 화를 내는 순간 저 말을 입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형도 그렇게 생각하죠?"
태영이 이번엔 도훈에게 물었다.
일순 모두의 시선이 도훈에게 쏠렸다.
"나는···."
***
"나는···."
신중하게 대답을 고민했다.
여기서 정음을 띄워주고자 한다면 그렇다고 동조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당장 듣기 좋은 아첨보다 양식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더 점수를 딸 것 같았다.
"그냥 케바케 아닐까?"
"네? 케밥이라구요?"
기남이 엉뚱한 소릴 지껄였다. 저 녀석은 가만 보면 어딘가 나사가 하나 쯤 빠져있는 것 같다.
"아니 케이스 바이 케이스. 그러니까 사람마다 다르다는 소리지."
"아항."
"예쁘고 착한 사람에겐 저 말이 설득력 있을 수도 있지만, 안 그런 사례도 얼마든지 있지 않겠어? 얼굴값 한다고 건방진 애들이 얼마나 많아? 또 얼굴은 평범해도 착하고 개념 있는 애들도 얼마든지 있고. 그래서 일반화시키기엔 너무 섣부르지 않나 싶다는 거지."
"오, 도훈이형은 생각이 깊으시군요."
"역시 형은 인품도 훌륭하다니까."
나의 대답에 다들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음도 존경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훌륭한 개념인 코스프레였구나.
[어째 마음에도 없는 소리 같습니다만?]
물론 모두가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뭐 인마? 왜 시비야?’
[못 생긴 여자들은 거들떠도 안 보시던 사람은, 바로 주인님 아니었습니까?]
‘그건 다른 문제지.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 몰라?’
[정말 업적에 도전하실 의향은 없으신 겁니까?]
‘누구? 희주? 너 왜 자꾸 나랑 희주를 엮으려 드냐? 난 마음에도 없는데.’
[하지만 그녀만 공략하시면 ‘후배위하는 선배’ 위업을 완료할 수 있습니다. 업적 달성의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의욕을 보이지 않는 주인님이 안타까워 그렇지요.]
로시의 계속되는 요구에 점점 설득당하는 기분이다.
하긴 최근 들어 예쁜 여자들이랑만 관계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이 높아졌다. 과거 이정우 시절이었다면 스무살 풋풋한 아가씨라면 얼굴도 안보고 좋다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어렸을 땐 잘 몰랐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어린 여자’는 보는 자체만으로 흡족한 기분이었다.
처지지 않고 탄력 있는 피부, 군살 없는 몸매(아마 나잇살이 안 붙어서 그럴 테지), 생기 가득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얼굴같은 건 따질 겨를이 없었다. 어린 게 최고의 미모랄까?
그런데 이도훈으로 환생하고, 주변에 예쁜 여자들이 넘치다 보니 단순히 어리다는 사실 만으로 성에 안차게 되어 버렸다.
‘음, 그러고 보니 나도 배가 불렀구나.’
[맞습니다. 배가 잔뜩 부르셨죠. 얼마나 배가 부르셨음 미션이나 위업에는 하등 도움 안 되는 BJ나 도와주고, 이미 공략을 성공한 정음 양에게 잘 보이려 애쓰시겠습니까? 이래가지고 랭커는커녕 하수나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로시의 통렬한 지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나 깨나 위업 달성할 생각밖에 없는 놈 같으니.
분명 내가 랭커가 되면 인센티브를 받는 게 확실하다.
나는 구차하게 변명했다.
‘서윤이 건은 어쨌든 지스팟 위업을 달성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럼 육정음 양은요?]
‘음 그건···. 그래. 의무방어전 위업에 도전해 볼 수 있겠지.’
나는 한 여자와 200회 이상의 관계를 달성해야 이룰 수 있는 업적을 떠올렸다.
[디펜딩 챔피언 말씀 이신가요?]
‘그래. 그거.’
[왠지 둘러대는 것 같지만 믿어 드리죠. 아무튼 주인님은 좀 더 분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심을 잊지 마십시오.]
잔뜩 날 선 비판을 하던 로시가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나를 타일렀다.
[플레이어들은 가끔 고난과 역경에 봉착합니다. 아무리 신의 선택을 받았다 한들 주변엔 언제나 훼방꾼들이 넘쳐 나거든요. 위대한 플레이어였던 징기스칸도 젊어서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고, 갈릴레오의 경우 종교 재판으로 사형에 처해질 뻔도 했죠.]
‘나에게도 그런 고난이 닥칠 수 있다는 소리야?’
[아뇨. 위의 두 플레이어는 스스로 추구한 목표가 애초부터 외부세계와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의 경우는 아마 ‘현실에의 안주’가 가장 큰 위기가 될 것입니다.]
‘안주라니?’
[이미 공략한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굳이 미션을 해결하지 않아도 페널티도 없고, 레벨업을 안 해도 사는데 지장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주인님의 성공을 바라는 저로서는 매번 이렇게 초심을 환기시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로시의 일침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확실히 녀석의 지적처럼 최근 들어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던건 사실이다.
이 업적은 이래서 안 한다, 저 업적은 저래서 못 한다.
어차피 이거 안 해도 다른 걸로 달성하면 된다. 그런 식으로 하나 둘 제하다 보면,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업적은 점점 희미해질 것이다.
70살 비구니면 어떻고, 육덕이면 어떤가?
얼굴이 못 생겼다고 구멍이 없는 것도 아니잖는가?
‘그래. 네 말이 맞다. 여잔 가려 먹는 게 아니지. 까짓 거 이 번 기회에 후배위 업적을 모두 달성해주지. 희주 정보창 띄워봐.’
[훌륭한 판단의 표본입니다.]
로시가 들뜬 목소리로 디스플레이에 정보창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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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양희주 (비 처녀)
나이 : 20
호감도 : 66/100
개방성 : ?
성감대 : ?
성욕지수 : ?
공략팁
*정보를 확인하기엔 아직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호감도를 상승시키기 위해 다음의 행동을 추천합니다.
-추천행동 : 장점인 몸매를 칭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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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얘 후다였네?’
정보창을 보자 놀라운 기록이 보였다. 자동으로 실행된 처녀 감별사 옵션에 비 처녀로 나온 것이다.
[그렇군요.]
‘스무 살에 후다면 언제 아다를 땠단 소리지? 설마 고딩 때?’
희주의 비밀을 알게 되자 왠지 그녀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까진 여자애였구나. 하긴 얼굴은 좀 빻았지만 몸매의 굴곡을 보면 남자들의 방심을 자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 한번 본격적으로 희주나 꼬셔 볼까나?
***
음료를 다 마시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한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멀티방의 이용시간은 두 시간.
"아직 한시간 남았는데 이젠 뭐 하지?"
"전 이제 가봐야 될 것 같은데···."
"응? 기남이 벌써 가게?"
"어. 가족들이랑 어디 가기로 했거든. 지금 출발해야 안 늦을 것 같아."
"아쉽네. 좀 더 놀다가지."
"미안. 다음에 또 보자. 죄송해요 형, 저 먼저 가볼게요."
기남은 꾸벅 인사하더니 먼저 자리를 떴다.
이제 남은 사람은 남자 둘, 여자 둘.
"사람 수도 딱 맞는데 보드게임은 어때요?"
"보드 게임?"
"응. 아까 보니까 보드 게임도 빌려 주더라고요."
"내가 가서 빌려올게."
태영이 카운터에 가더니 직육면체의 커다란 박스를 들고 왔다.
"그게 뭐야?"
"젠가요."
"젠가?"
"아, 그 나무 쓰러뜨리는 거?"
"재밌겠다."
박스를 뒤집어 내용물을 꺼내자 나무 블록으로 쌓인 탑이 등장했다.
"다들 어떻게 하는지 알지?"
"순서대로 뽑아서 무너뜨리는 사람이 지는 거잖아."
"벌칙은 뭘로 해?"
"이런 건 음료수 내기가 딱 인데, 정음이가 이미 사버렸으니···."
"딱밤 맞기 어때?"
"안 돼. 나 피부 약하단 말야."
"그래. 맞는 걸로 하면 괜히 기분 상할 수도 있잖아."
그때 조용히 앉아 있던 희주가 말했다.
"무너질 때마다 옷 하나씩 벗는 건?"
"헉!"
"뭔 소리야 얘는!"
"하하. 농담한 거야. 어디서 그렇게 하는 걸 봤는데 재밌겠더라고."
"됐고, 그냥 딱밤 맞기나 하자."
벌칙을 정하고 한참 게임을 진행했다.
젠가는 생각보다 쉽게 쓰러지지 않아 한 번 무너지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하나둘씩 돌아가면서 딱밤을 맞는데 갑자기 정음의 전화가 울렸다.
"앗. 엄마다. 저 잠깐 밖에서 통화 좀 하고 올게요."
"그래."
밖에서 통화를 마치고 온 정음은 표정이 좋지 못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데. 지금 병문안 간다고 오라는데 어쩌지?"
정음은 도훈을 쳐다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치마도 입고 나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게 될 줄이야.
"죄송해요. 선배, 먼저 가봐야 할까 봐요."
"아니야. 얼른 가봐. 걱정되겠다."
정음이 서둘러 짐을 챙겨 나가자 이제 셋 뿐.
활기 넘치던 멀티방의 분위기도 다소 잠잠해졌다.
"셋이서 하니까 별로 재미없네. 이런 건 사람 많아야 재밌는데."
태영은 정음과 친해지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그녀가 떠나고 나서부터 부쩍 의욕을 잃었다. 그는 희주가 잠시 화장실에 간 틈을 타 도훈에게 말했다.
"형 그냥 여기서 쫑 낼까요?
"왜? 아직 시간 남았는데."
"하나 둘 씩 가니까 별로 재미가 없잖아요."
"하긴 그렇긴 하네. 근데 희주가 좀 섭섭하지 않을까?"
"희주가 왜요?"
"아니 정음이 가자마자 끝내자고 하면···. 가뜩이나 예민해 보이더만."
"아···. 걔가 자격지심이 있어서 그래요. 아까보니까 은근히 질투심이 좀 있더라구요."
"질투심이라니?"
"정음이 노래 할 때 말이에요. 제가 우연히 봤거든요. 희주가 발로 리모컨 밟아서 끄는 거."
"그랬어?"
"네. 정음이가 주목 받는 게 아니꼬운 거죠. 그래서 아까 일부러 들으라고 말 한 거예요."
"예쁜 여자가 성격 좋다는 말?"
"네."
"크크. 너도 참, 어지간하네."
"하여간 못 난 애들이 더 독하다니까요."
"그래도 같은 동기잖아. 너무 미워하진 마."
"하는 짓이 밉상인데요, 뭘."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요?"
"너가 일 생긴 것처럼 해서 먼저 가. 그럼 나랑 희주만 남으면 뻘쭘 할 테니까 자연스럽게 헤어질게."
"아하. 역시 형님은 배려 쩌시네요."
"인마, 내가 사회생활 잘하는 법 하나 알려줄까?"
"뭐요?"
"적을 만들지 말 것."
"적요?"
"응.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자기 무시했던 사람은 반드시 기억하거든. 친구 많이 사귀는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적을 만들지 않는 거야."
"키야~ 역시. 형은 나이보다 엄청 생각이 깊으신 것 같아요. 진짜 회귀자 아니세요?"
"아까부터 무슨 회귀다 타령이야? 그냥 군 생활 빡시게 하다 보니 깨달은 거지."
"암튼 그래요 그럼."
희주가 돌아오자 태영이 자연스럽게 핑계를 댔다.
"아빠한테 방금 문자 왔는데 밖에서 차키 잃어 버렸다고 집에 가서 보조키 좀 들고 튀어 오라네요."
"어? 그럼 너도 가야 돼?"
"죄송해요. 키박스 교체하려면 돈 너무 든다고···."
"흠, 어쩔 수 없지."
태영이 먼저 떠나자 이제 멀티방에는 도훈은 희주만 단 둘이 남게 되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도훈이 먼저 말했다.
"우리도 이만 갈까?"
"아직 시간 많은데···."
희주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연히 갖게 된 도훈과 둘만의 시간을 이대로 보낼 순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미 1학년 여자들 사이에서 도훈은 워너비 남친 1위.
새터에서 엑스맨으로 활약한 그의 모습에, 희주 역시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하긴 좀 돈 아깝긴 하네. 그럼 뭐하지?"
"이거 계속 할까요?"
희주가 무너져 있는 젠가를 가리켰다.
"둘이서?"
"네. 원래 둘이서도 하는 게임이에요."
"벌칙은 딱밤 그대로?"
"오빠가 때리면 아플텐데···."
‘요것 봐라?’
도훈은 희주의 속셈을 눈치 채고 넌지시 제안했다.
"그럼 아까 네가 말한 벌칙 해 볼래?"
"뭐요?"
"옷 벗기."
"헛. 진짜요?"
"왜, 자신 없어?"
도훈이 희주의 몸을 위아래로 스윽 훑었다.
"너 몸매 좋아 보이는데?"
도훈은 어디서 검은 비닐봉다리 하나만 구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87. 옆방에 BJ-1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