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옆방의 BJ-3- >
***
‘버스 타고 갈까?’
잠시 고민하다 몸도 예열할 겸 헬스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어느덧 겨울도 막바지인지 내리쬐는 햇살은 훈훈한 온기를 담고 있다. 이제 3월이 되고 봄이 오면 캠퍼스에도 봄기운이 물씬 피어날 것이다.
‘그나저나 또다시 대학생이라니··· 이게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군.’
전생의 대학 생활은 낭만과 거리가 먼 삶이었다.
남들이 연애하고 여행 다니며 20대를 즐길 때, 나는 더 큰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마음으로 도서관을 전전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도서관에 출근 도장을 찍고, 강의가 끝나면 또다시 도서관으로 처박혔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치열하게 만들었을까?
원대한 꿈? 장밋빛 미래?
아니다.
절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은 보상심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솝우화에 나온 여우가 맛있어 보이는 포도를 따 먹으려 애쓰다 결국 실패하자 ‘저 포도는 어차피 시어서 맛도 없을 거야.’ 하고 포기하는 것처럼.
여자들에게 인기 없는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비겁한 자기합리화를 시도한 것이었다.
키 작고 볼품없는 나를 멀리하는 여자들을 보며, ‘저것들은 어차피 쭉정이에 불과해. 나중에 성공해서 나를 인정해 주는 멋진 여자를 만나고 말 거야.’ 라면서.
그래서 정말 나는 그런 여자를 만났던가?
나의 가치를 알아주고, 나의 외면보다 내면을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던가?
아니. 전혀 아니었다.
성공 후 찾아온 여자라곤 대학 시절 나를 무시했던 여자들보다 훨씬 악독한 마누라였다. 바람 핀 것도 모자라, 상간남과 모의해 나를 죽이려고 한 그 악녀 말이다.
남자 많이 사귀어 본 여자가 시집 잘 가고, 바람둥이라고 손가락질당하는 남자들이 꾸준히 인기가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다양한 연애 경험은 그 자체로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준다. 이성과 원만하게 관계를 유지하고, 적절하게 밀고 당기는 법을 배우며, 어떻게 해야 상대를 설레게 하는지 등.
나는 마누라의 외모에 홀려 그녀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여자를 제대로 사귀어본 적이 없으니, 눈치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던 탓이다. 그로 인해 뻐꾸기처럼 남의 새끼만 키워주다, 끝내 칼 맞고 인생을 마감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거지 같은 삶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미련스럽게 살았을까?
이도훈으로 시작하는 두 번째 삶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마음껏 여자들을 농락하고 자빠뜨리는 것은 전생의 반대급부다. 내가 낸 세금에 대한 권리 주장이랄까.
‘하지만 적당히 가지치기도 해야겠지.’
최근 들어 너무 많은 여자를 만났다.
조금 있으면 손발을 다 합쳐도 못 샐 정도다.
아무리 다다익선이라 하지만, 스스로 버거울 만큼 다리를 뻗치는 것은 곤란하다. 체력도 체력이고, 기존 여자들을 관리하느라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 데도 지장이 있다.
로시 말대로 108개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선, 최소 108명의 상대와 잠자리를 가져야 한다. 그뿐인가? 중간중간 보상 주는 미션을 포함하면 상대해야 할 여자가 수백을 넘어설지도 모른다.
적당한 끊고 맺기.
지금은 그것이 필요할 때다.
가장 먼저 정리할 대상으로 편의점 오전 알바 수연이를 떠올렸다. 사실 그녀는 새터 기간에도 간간이 깨톡을 보내 왔다.
나는 의도적으로 단답을 하거나, 메시지를 확인하고도 한참 뒤에 답을 보내는 식으로 그녀를 지치게 하였다. 결국, 이틀째 밤부터는 수연의 연락이 뜸해졌다. 문어 다리 어플 조언과 반대로 호감도를 낮추는 방법을 실행한 것이었다.
수연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제 대학으로 복학하면 편의점에서 만났던 인연들을 모두 정리할 예정이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허영자에게 용돈을 받는 것도 좋지만, 그녀의 딸 하린과의 관계는 잠재된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다. 관계를 들키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돈은 아쉽지만 뭐 따로 벌 방법을 찾아봐야지.
기춘으로 얽혔던 수아와 나예림 역시 자연스럽게 멀어질 것 같다. 두 사람은 의도적으로 만나려 하지 않으면 얽힐 만한 연결고리가 없다. 아웃 오브 싸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랄까.
문제는 새터 때 살을 섞은 여자들이다.
조교 강민주, 학회장 마유미, 새내기 육정음과 이효민은 싫든 좋든 몇 년간 얼굴을 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효민은 입막음 때문에 얽힌 것이라 적당한 핑계로 내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민주와 유미다. 집착이 강한 두 사람의 존재는 앞으로 위업 달성에 상당한 장애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잔가지들은 최대한 쳐내고 굵직한 가지 위주로 관리해야겠어. 지금은 너무 난잡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어느새 헬스장에 당도했다.
"어? 저 사람은?"
헬스장 들어가는 입구 옆 골목에서 익숙한 여자가 보였다.
"아, 쫌!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
"아, 쫌!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패딩을 걸친 여자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두툼한 패딩을 입었음에도 몸매가 밖으로 드러날 만큼 상당한 볼륨감을 자랑하는 여성.
"지금 두희 씨가 오해하는 거라고. 그냥 대학교 때부터 알던 친한 오빠였다니까. 아 몰라, 나 지금 PT 시간 되어가니까 나중에 얘기해. 아니, 뭘 자꾸 피한다는 거야! 일 끝나고 통화하자고!"
미나는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남친의 밑도 끝도 없는 의심에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다. 갑자기 흡연 욕구가 밀려온다. 근무 중엔 되도록 참으려고 했건만···.
패딩에 담배는 있었으나 어딘가 라이터를 흘린 것인지 아무리 품을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아씨, 또 라이터는 또 어디 간 거야."
"불, 필요하세요?"
미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엔 어느새 다가온 도훈이 라이터를 건네고 있었다. 회원에게 흡연 장면을 들켰다는 부끄러움에 미나가 황급히 손에 든 담배를 숨겼다.
"아, 앗. 이도훈 회원님. 오랜만이네요."
"네. 며칠 대학교 행사가 있어서 못 왔어요."
"그러셨구나."
"근데 방금 불 찾는 거 아니었어요?"
미나는 난감했지만, 이왕 들킨 거 순순히 불을 빌리기로 했다. 꺼내 든 담배를 도로 집어넣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원래 근무 중엔 잘 안 피는데··· 민망하네요."
"괜찮아요. 담배 피우시는 줄은 몰랐어요."
도훈이 라이터를 들이밀자 미나가 멋쩍은 표정으로 입에 담배를 물어 불을 붙였다. 불이 꺼지지 않기 위해 두 손을 모아 바람을 막는 동작이 전형적인 골초의 그것이었다.
도훈은 미나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의외군. 송미나가 흡연자였다니.’
이제껏 관계한 여자 중에 담배를 피우는 여자는 없었다. 도훈은 그녀의 색다른 모습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저도 한 대 피울게요."
"아, 네 그러세요."
도훈도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방금은 남자친구?"
"들으셨구나."
"일부러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통화가 들려가지구요."
"네, 맞아요."
"싸우시는 거 같은데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그냥 말다툼한 거예요."
‘이런, 미나에게 남자친구가 있었군. 하긴 이 정도 몸매와 얼굴에 애인이 없는 것도 이상하겠지.’
도훈은 미나의 공략이 예상보다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헬스장에서 공략하는 조건도 만만치 않은데 심지어 애인까지 있는 여자였다니. 하지만 우연히 들은 통화내용으로 보아 그녀의 관계에 뭔가 균열이 생긴 것 같다.
‘임자 있는 여자를 건드리는 건 찜찜하지만, 어차피 결혼한 사이도 아니니까···.’
도훈은 로시를 이용해 그녀의 정보창을 띄웠다.
-----------------------------
성명 : 송미나 (비 처녀)
나이 : 24
호감도 : 63/100
개방성 : ???
성감대 : ???
성욕지수 : ???
공략팁
*정보를 확인하기엔 아직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호감도를 상승시키기 위해 다음의 행동을 추천합니다.
-추천 행동 : 남자친구 흉보며 그녀의 환심 사기.
------------------------------
띄워진 정보창에는 아다폭격기 위업 보상으로 얻은 ‘처녀감별사’ 옵션이 자동 실행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정보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허, 아직도 정보창이 다 열리지 않았다니.’
***
하긴 송미나를 못 본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처음 확인할 당시 호감도가 58이었으니 지난번보다는 조금이나마 오른 셈인가.
‘로시, 송미나 공략 보상이 뭐였지? 포인트였나?’
[아닙니다. ‘아직 한 발 남았다’ 스킬입니다.]
‘스킬?’
[‘아직 한발 남았다’는 사정 직후 곧바로 발기력을 회복시키는 스킬로 주인님을 타고난 카사노바로 만들어 줄 요긴한 스킬입니다.]
확실히 공략 기간도 길고, 장소도 헬스장 한정인 것으로 보아 제법 난이도 있는 미션 보상다웠다.
‘그나저나 호감도 한 번 진짜 안 오르네. 그때 분명 추천 행동대로 한 것 같은데···.’
[정보창 스킬의 추천 멘트나 행동을 했다고 하여 호감도가 일률적으로 오르진 않습니다. 상대에 따라 차이가 있는 편인데 그녀의 경우 남자친구의 존재와 회원과 사적 관계를 허락하지 않는 방어기제 때문에 상승 폭이 유난히 적은 것 같습니다.]
‘의외로 철벽이란 뜻인가.’
확실히 그녀는 이제껏 만난 여자들에 비해 난도가 높은 축이다. 지금껏 공략에 성공한 여자들은 추천 멘트대로만 하면 대부분 호감도가 빠르게 올랐다. 그것은 정보창 스킬 이전에 나에게 이미 반해 있는 경우가 많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콧대가 높다고 쉽게 포기할 순 없지.’
나는 추천 행동에 따라 그녀의 남자친구를 흉보기 시작했다.
"혹시 남자친구 분 사신가요?"
"예? 사시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미나샘을 보고 짜증을 낼 수 있어요? 눈이 삔 게 분명하니 사팔뜨기가 아닐까 해서요."
"에이~ 뭐에요. 도훈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아재 스타일이네요. 호호."
시답지 않은 나의 농담에 미나가 피식 웃었다. 같이 담배 피우며 생긴 친밀감에, 추천 행동대로 남친을 흉보기 시작하자 그녀가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남자들은 왜 그렇게 의심이 많을까요?"
"의심요?"
"아니, 뭐 회원님한테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말씀해 보세요."
"실은 지난 주말 대학 동기들이랑 술자리가 있었거든요."
"대학교 졸업하셨다지 않았어요?"
"네, 다들 취직했죠. 여자들은 군대 안 가니까."
"아, 졸업하고 만나신 거구나."
"네. 그래서 오랜만에 달렸어요. 그러다 동기가 여자들끼리 놀긴 심심하다고 선배 오빠들을 부른 거예요."
"네."
"솔직히 오빠들이랑 대학 때부터 친하게 지냈거든요. 다들 여자 친구도 있기도 하고 졸업하고 오랜만에 얼굴 보니 반가워 늦게까지 놀았죠. 근데 남자친구가 새벽에 전화를 걸어선 주변에 남자 목소리가 들리니까 다짜고짜 화를 내는 거 있죠?"
"저런, 사정을 잘 몰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당연히 설명했죠.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근데도 제 말은 도통 듣지를 않아요. 만나서 얘기하면 좋은데 지난주에 부산에 출장 가서 모래나 오거든요."
"음···. 남자친구 분이 걱정돼서 그러는 게 아닐까요?"
"걱정이라뇨?"
"아니, 뭐 미나 씨가 워낙 매력적이다 보니."
"어머!"
미나가 수줍게 웃었다.
"제 대학 시절 별명이 뭐였는지 아세요?"
"뭔데요?"
"열녀요."
"네?"
"당시 제가 1학년 때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군대 갔을 때 2년을 꼬박 기다렸거든요. 그니까 친구들이 저보고 조선 시대에나 있을 법한 열녀라 하데요. 그만큼 지조 있기로 유명했는데 어떻게 오빠는 저를···."
미나가 불쑥 짜증이 나는지 다시 담배를 한 대 더 꺼내 물었다. 나는 자동으로 불을 붙여주며 생각했다.
‘생긴 건 뻔질나게 클럽 다니게 생겨서 의외로 조신한 타입이구나. 공략이 만만치 않겠는데···.’
"아무튼, 다음에 만나면 잘 얘기해 보세요. 사람이 얼굴 보고 대화를 해야지 전화로는 쉽게 안 풀리잖아요."
"고마워요. 도훈씬 무척 친절하시네요."
미나는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 다시 표정이 밝아졌다.
조금이나마 친밀감이 올랐으려나?
미나의 공략은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다.
***
헬스를 하는 동안에는 미나와 단둘이 대화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우리 헬스장의 스타였고, 골프 선수처럼 갤러리들을 끌고 다녔다.
나는 멀리서 그녀의 애플힙을 훔쳐보며 아쉬운 대로 입맛만 다셔야 했다.
‘햐, 골반 오지네. 분명 쪼임도 끝내주겠지?’
[주인님, 지난번 ‘명기를 찾아서’ 업적 보상으로 얻은 관상쟁이가 있지 않습니까?]
‘맞다. 그게 있었지?’
[해당 스킬은 주인님의 감식안에 패시브 화 되어 있습니다. 여성의 귀를 가까이서 살피면 질 수축도를 예측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얼마나 가까이서 봐야 하는데?’
[귓바퀴의 모양이 눈에 들어올 정도면 됩니다.]
미나는 회원을 상대로 PT 중이었으므로 당장은 다가가기 힘들었다. 일단 다른 사람을 상대로 실험해 볼까?
나는 비어 있는 러닝머신 위에 올랐다. 왼편에 아주머니 한 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뛰고 있다.
‘귓바퀴가 보이게라.’
벽에 걸린 티비를 보는 척 고개를 돌려 아주머니의 귓바퀴를 노려보았다. 한참을 쳐다보니 망막에 스카우터가 달린 것처럼 왼쪽 상단에 글씨가 떠올랐다.
{질 수축도 : 23%}
‘23%? 이게 어느정도야?’
[평균적인 여성의 질 수축도는 60% 즈음입니다. 23%면 매우 낮은 편이라고 할 수 있죠.]
‘완전 헐렁이란 소리네?’
[아무래도 출산을 경험하거나 노화가 진행 된 여성의 질 수축도는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오른편 러닝머신에 젊은 여성이 올라왔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꽤나 몸 관리가 잘 된 편이었다.
나는 수건을 찾는 척 슬며시 고개를 돌려 귓바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질 수축도 : 78%}
‘오! 평균 이상이네? 이 정도면 아래가 쫄깃쫄깃 하다는 소린가?’
[주인님, 정신 차리십시오. 너무 뚫어지게 보고 계십니다.]
"···저한테 무슨 할 말 있어요?"
"네, 네? 아닙니다."
"근데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여자는 기계를 멈춰 세우더니 기분 나쁜 표정으로 떠나갔다.
"별꼴이야, 진짜."
민망해진 나는 도망치듯 구석으로 이동했다.
‘로시, 내가 그렇게 기분 나쁘게 쳐다봤어?’
[네. 변태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음, 이 패시브 스킬엔 치명적인 단점이 있구만.’
[되도록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십시오. 스킬 특성상 10초 이상 시선을 고정해야 하기때문에 자칫 오해를 부를 수 있습니다.]
‘오케이.’
어쨌든 패시브 스킬의 사용법을 알게 된 나는 미나의 동선을 따라다니며 기회를 엿봤다.
과연 그녀는 얼마나 쪼일 수 있을까?
확 내 걸 터뜨려 줬으면 좋겠는데.
< 74. 옆방의 BJ-3-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