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옆방의 BJ-2- >
처음 환생할 당시 로시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도훈 군에겐 5살 어린 여동생이 있습니다. 이름은 이혜은. 현재 그녀의 학업을 위해 온 가족이 함께 미국으로 넘어간 상태입니다.
-미국에 있으면 당분간 가족들 볼 일은 없겠네?
-네. 하지만 가끔 안부 전화를 하거나, 여동생이 페이스타임을 이용해 영상통화를 거는 편입니다.
‘아차! 이게 가끔 건다는 영상통화구나!’
그리고 로시는 분명 이렇게 경고했다.
-지금 말씀드린 사항을 꼭 기억해 절대 실수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에 하나 의심을 받게 되면 곧바로 저승사자가 따라붙을지도 모르니까요.
저승사자라니!
바로 전, 신의 분노 어쩌고 하면 수장 얘기를 들은 탓인지 부쩍 긴장되었다.
도훈을 아는 사람들이야 군대라는 2년의 공백이 있을지 몰라도 가족은 다르다. 가족이라면 나의 달라진 점을 눈치챌지도 모른다.
어느 때보다 신중해야 하는 순간.
나는 천연덕스럽게 폰 카메라를 보며 대답했다.
"얼굴 까먹긴, 볼 때마다 예뻐져서 몰라보겠다는 말이었는데···."
잘못된 대답을 해버린 것일까?
여동생 혜은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안 좋아졌다.
<오빠 뭐 잘 못 먹었어? 엄마아~ 오빠 이상해!!!
화면 속의 여동생이 고개를 돌리더니 엄마를 호출했다.
젠장! 이러다 진짜 들키는거 아냐?
나는 다급히 여동생을 만류했다.
"어, 엄마는 갑자기 왜 찾아? 농담한 거야 농담."
그러자 혜은의 표정이 돌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힝 속았지? 아빠 엄마 장 보러 가고 집에 없지롱! 그러게 엄마한테 전화 좀 먼저 해. 요새 뭐 하고 다니길래 연락도 없어?
이게 지금 나랑 장난하나?
나이도 쪼끔 한 것이 오빠를 놀리기나 하고.
하지만 난 아직 생전의 도훈과 여동생의 관계를 잘 모른다. 5살 어린 여동생이라고 오냐오냐 응석받이로 키웠으려나?
통화 태도만 봐선 그럴 확률이 높아 보였다.
"요새 복학 준비로 바빠서 그래. 방금도 막 행사 끝나고 알바 가는 길이야. 봐."
나는 폰 카메라를 들어 차창 밖의 풍경을 비추었다.
영상에서 다시 여동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오빠. 그나저나 나 이번 주 한국 갈거야.
헉! 뭐?
한국을 온다고?
"곧 3월인데? 개학 안 하니?"
무슨 소리야? 개학은 진작 시작했지. 미국은 9월 학기제라 겨울방학이 짧다고. 지금껏 쭉 공부하다 이번에 중간 겨울방학으로 일주일 쉬는 거고.>
혜은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나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어째 말을 할수록 실수 연발이다.
<설마 오빠 내가 한국 가는 게 싫은 거야? 흑흑.
동생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을 글썽였다.
젠장, 뭐 이런 암 덩어리 같은 게 어디서 튀어나왔담?
"아, 아냐. 내가 잠시 착각했어. 싫을 리 있니. 하나뿐인 동생이 귀국한다는데."
<히히! 또 속았징! 바보! 군대 갔다 오더니 어째 더 바보가 됐냐?
눈물 연기를 펼치던 동생은 배시시 웃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나를 놀렸다.
‘와, 진짜 죽여 버리고 싶네. 사람 가지고 노냐?’
아무리 예쁜 동생이라지만 하는 짓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도훈이 놈의 서열은 집안에서 가장 밑 바닥 이었을 거다.
여동생> 엄마> 아빠> 키우는 강아지 > 도훈 정도?
"혹시 부모님도 같이 오셔?"
<아니. 이번엔 친구들이랑 갈 거야.
"친구들?"
응. 내 친구랑 친구 언니. 친구 언니가 대학에서 한국어과 전공하는데 한국에 한 번 와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오기로 했어. 그러니까 이번에 가면 오빠가 가이드 해 줘야 해? 알았지?>
동생은 여행 일정과 숙소 관련해 말하다 전화를 끊었다.
영상통화가 끝나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휴-. 십 년 감수했네. 들키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잘 대처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크게 의심하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그나저나 갑자기 한국엘 온다니 어떡하지? 직접 만나면 달라진 걸 눈치채려나?’
[그 점은 주의하셔야죠. 어쨌든 가족 전부가 안 오는 것만으로 천만다행입니다.]
로시는 나를 안심시키더니 말했다.
[그나저나 앞으로 사흘 뒤에 온다니 미리 대비하셔야겠군요.]
‘대비? 무슨 대비? 방을 치울 필요도 없잖아. 어차피 친구랑 친구 언니랑 같이 와 숙소 잡아서 잔다는데.’
[어허! 이 좋은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시렵니까?]
‘기회라니? 뭐야 설마 업적 중에 근친도 있는 거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개발자들이 막장이라도 그런 업적은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현행법에 저촉되는 위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럼 뭘 말하는 건데?’
[79번 위업 백마 타고 흑마 타고 말입니다.]
아, 맞다!
그런 위업이 있었지?
외국에 나갈 필요도 없이 외국인이 제 발로 온다는 데 왜 그걸 깜빡했을까?
‘이런! 혜은이한테 미리 물어볼 걸 그랬네, 같이 오는 일행이 백만지 흑만지.’
[여동생 친구는 힘들더라도, 친구 언니라는 분은 충분히 공략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한국에 왔으니 한국산 고추 맛 좀 보여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암, 그렇고말고. 로시 너도 시도 때도 없이 그 생각밖에 안 하는구나.’
[주인님의 업적 달성이 저의 기쁨인걸요.]
로시와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알바 장소에 당도했다.
가게에 들어가니 사장이 카운터에 있었다. 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 알바생이 보인다.
"도훈 군 왔어? 새터는 재밌었니?"
말도 마쇼, 아주 섹터로 만들어 놓고 왔으니까.
"네. 덕분에요. 이쪽은 새로운 알바생인가요?"
"응. 도훈 군 대신 일할 학생이야. 군대 가기 전까지 해주기로 했어."
나는 새로운 알바생과 인사를 나누고 사장에게 말했다.
"가불해 주신 월급은 요긴하게 썼어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가불? 아, 뭘 그런 걸 가지고. 나 오늘 저녁에 모임 있어서 지금 가봐야 하는데 인수인계는 직접 할래?"
"네. 그럴게요. 퇴근하세요."
3일만 본 사장은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따로 불러 말했다.
"아쉽네, 도훈학생. 오랜만에 얼굴 봤는데···. 오늘은 하린이가 집에 있어서 좀 그렇고 다음에 시간 나면 맛있는 것 해줄게. 한 번 들러."
"그럴게요. 참, 저 금요일까지 마무리하면 될까요?"
"금요일?"
"네. 미국에 있는 여동생이 주말에 온다고 해서요. 주말부터는 일을 못할 것 같아요. 다음주부터 개강도 있고."
"그렇겠구나. 부담 갖지 말고 도훈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어차피 기춘 학생 대타도 다 구해놨으니까."
"죄송해요, 번번이."
"뭘 우리 사이에. 그럼 교육 좀 잘 부탁해."
사장이 떠나고 나는 새로 온 알바생과 야간 타임을 함께 보았다. 궁금해하는 것을 이것저것 알려주다 보니 금세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새로 바뀐 야간 알바에게 인수인계를 끝내고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가 넘은 시간.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려다 우연히 옆방 산다는 BJ가 생각났다.
‘성방BJ라고 했나?’
얼굴이 궁금하긴 했지만, 오늘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3일간의 강행군으로 이미 몸은 녹초가 된 상황이다.
나는 그대로 방에 들어가 바닥과 한 몸이 되어 쓰러졌다.
‘으··· 일단 자고 나서 생각하자.’
[안녕히 주무십시오 주인님.]
***
오랜만에 꿈을 꿨다.
꿈에선 도훈의 가족들이 도훈의 집으로 갑자기 들이닥쳤다.
"너 이 새끼! 우리 아들 아니지? 우리 아들 어떻게 한 거야?"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내 멱살을 잡았다. 어머니는 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흑흑!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우리 아들을 밀어내고 몸뚱이를 차지했구나!"
"나쁜 새끼야! 우리 오빠 돌려 내!"
나는 도훈의 가족에게 한참 시달리다 겨우 잠에서 깼다.
"헉-!"
벌떡 일어나니 입고 잤던 셔츠가 흠뻑 젖어있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으! 악몽을 꿨어. 도훈이 가족하고 상봉하는 꿈.’
[어제 여동생과 통화가 신경 쓰이셨던 모양입니다.]
‘그랬나 봐. 위업 달성도 좋지만, 우선 여동생에게 정체를 안 들키는 게 더 중요하겠어.’
[잘할 수 있을 겁니다. 주인님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까요.]
‘뭐? 스킬말야?’
[네. 꼭 여성을 공략하는 순간이 아니더라도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요긴하게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 그건 그때봐서.’
땀을 흘리니 샤워를 하고 싶어졌다.
샤워를 마치고 대충 아점을 챙겨 먹자 어느덧 12시.
‘오랜만에 헬스장이나 가볼까? 헬스장 그녀도 본지 오래되었는데···.’
나는 트레이닝 복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원룸을 나서려는데 입구에서 누군가랑 마주쳤다.
깊게 눌러쓴 야구모자, 입가엔 방한 마스크. 얼굴이 온통 가려져 있지만 드러난 눈매로 봐선 상당한 미인이다.
‘누구지? 원룸 거주민인가?’
"안녕하세요."
"어머!"
무심결에 인사를 건네는데 마스크 쓴 여자가 화들짝 놀래더니 손에 든 책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두꺼운 책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진다.
"죄송합니다.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여자는 후다닥 책을 챙겨 들더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표지를 보니 「9급 공무원 수험서」 종류같았다.
‘공시생인가 보네.’
유달리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구석 한편에 떨어진 수첩이 보였다. 아까 책을 떨어뜨릴 때 같이 떨어졌던 물건일까? 수첩을 집어 들고 곧바로 뛰어 올라갔지만, 그녀는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나랑 같은 층인 것 같긴 한데···.
"거참 성격 한 번 급하네."
수첩을 열어보니 영어 단어를 적어놓은 단어장이었다. 예쁜 손글씨로 정성 들여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보아 상당히 무척 아끼는 물건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디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방도 모르는 데다 연락처도 적혀 있지 않아 돌려줄 방법이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챙겨주려고 주머니에 넣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 이 글씨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눈을 가늘 게 뜨고 기억을 더듬는다.
상대적으로 크게 쓴 자음, 사각진 받침 형태.
개성 있는 필체가 자꾸 눈에 밟혔다.
‘어디서 봤더라? 아! 포스트잇?’
그랬다. 단어장 수첩의 글씨체는 나에게 두 번이나 경고장을 붙인 옆방 BJ의 글씨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헐! 그럼 새벽에 성방 BJ하던 애가 공시생이었단 말이야?’
우연히 줍게 된 그녀의 소지품.
나는 불쑥 그녀의 이중생활이 궁금해졌다.
‘로시. 여기다 싸이코메트리 스킬 쓸 수 있지?’
[가능합니다. 사용자와의 추억이 오래되어 있을수록 많은 기억이 남아있을 겁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의외의 득템이로군.
나는 싸이코 메트리 스킬을 이용해 수첩에 담긴 기억을 끄집어냈다.
***
-미안하구나. 용돈도 못 부쳐 주는데 생활비까지 받아 쓰려니.
-괜찮아요, 사장님이 일 열심히 한다고 이번 달 월급 더 주셨거든요.
-시험공부 할 시간도 모자랄 텐데 알바까지··· 엄마가 너무 미안해.
-그런 소리 마세요. 저도 이제 스물 다섯이라구요. 제가 쓸 돈을 스스로 벌어 쓸 나이잖아요. 아빠는 좀 어떠세요.
-응, 요샌 많이 호전되셨어. 의사가 그러는데 이제 한 번 만 더 수술하면 완치될 수도 있을 거래.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근데 수술비는 또 어디서 마련한다니··· 담보로 잡은 대출도, 아, 아니다. 서윤인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렴. 알았지, 우리 딸?
-네.
영상 속의 여성은 통화를 마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품속에서 단어장 수첩을 꺼내 맨 뒤 페이지를 펼쳤다.
빼곡하게 적혀있는 숫자들.
숫자 옆에는 월세며, 가스비며, 통신비 등 각종 생활비 항목이 적혀있었다.
서윤은 수없이 계산을 거듭하며 숫자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러나 결국 수첩 위로 또르르 눈물이 떨어져 잉크를 번져나갔다.
그녀가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거야. 나도 다른 애들처럼 공부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도훈은 갑작스레 머릿속을 가득 메운 정보에 뒷골이 당기는지 잠시 벽을 붙잡고 섰다.
"이런···. 가난한 공시생이었구나, BJ는."
도훈은 수첩의 뒤 페이지를 열어 기록된 가계부를 살피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 쉬었다.
어떻게든 생활비를 줄이려는 흔적들. 특히 1월 달 가스비가 2만원 이하로 적힌 부분에서 코끝이 찡해졌다.
‘그 한겨울에 난방도 안 하고 살았단 말이야?’
그뿐 아니었다.
식비며 통신비, 모든 필수 지출 항목들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타이트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줄여진 생활비 대부분은 부모님 수술비로 집약되었다.
옆방 BJ의 속사정을 알게 된 도훈은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사정 모를 땐 단순히 노출증 가진 변태거나, 쉽게 돈을 벌려고 몸을 파는 사람이라고 얕보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낮에는 열심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밤에는 아버지 수술비를 위해 부끄러움 무릅쓰고 돈을 버는 고학생이었다니···.
"다음엔 좀 시끄러워도 그냥 넘어가야지."
도훈은 수첩을 옆방 우편함에 넣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 73. 옆방의 BJ-2-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