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새터섹터-31- >
‘누구지?’
목소리가 작아 분간이 되질 않는다.
‘유미인가?’
그러나 유미라고 생각하기엔 덩치가 너무 작다.
어둠 속의 실루엣은 평범한 키의 여성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민주?’
하지만 조교가 아무리 성욕에 굶주렸기로서니, 술 취한 학부생들이 뒤엉킨 새터 방까지 잠입했을 것 같진 않다. 그녀의 지위와 체면을 참작할 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허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떤 대담한 년이 새터 한복판에서 내 자지를 물었단 말인가?
"···누구냐 넌."
잠을 깬 사람이 있었다면 또렷하게 들릴법한 목소리.
펠라를 하던 여성이 흠칫 놀라 이불을 뒤집어쓴다.
설마 내가 그렇게 크게 말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지?
나는 다시 또박또박 물었다.
"쥐새끼처럼 숨지 말고 나와. 사람 자고 있는데 이런 짓, 성추행으로 간주해도 할 말없어."
성추행이란 말에 이불 속으로 숨었던 그녀가 빼꼼 머리를 내민다.
"오빠, 나야 나."
어느새 암순응에 적응한 나의 눈에 펠라녀의 얼굴 윤곽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너, 너는···!"
***
도훈이 사발주를 마시다 혼절해 버리자 체육과엔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급성 알콜 중독이네 심정지네 하며 빨리 엠뷸런스 부르라는 사람부터, 단순히 술 먹다 뻗은 건데 무슨 오버냐는 사람들이 서로 악다구니를 쓰며 싸우는 모습이 난장판을 방불케 했다.
도훈의 기절에 당황한 강민주가 숙소에서 양주를 마시며 쉬고 있던 교수들을 호출하는 바람에 사태는 더욱 커졌다.
응급 구조학을 전공한 교수의 진단으로 도훈이 단순 졸도임이 밝혀지면서 한숨 돌린 것도 잠시, 학회장 마유미부터 부회장 박성수 그리고 새터를 주도한 집행부들 모두 교수에게 불려가 된통 쿠사리를 먹었다.
누가 사발주를 강제로 먹였느냐부터 시작, 학내 부조리 근절이다 뭐다 해서 가뜩이나 체육과가 요주의 감시를 받는 마당에 선배라는 것들이 먼저 나서서 설치느냐까지 온갖 쌍욕이 쏟아졌다.
당시 현장에 있던 조교 강민주까지 싸잡아 혼이 났으나, 신기한 것은 민주가 교수에게 깨지는 상황에서도 몸을 움찔거리며 "아, 리모컨 꺼야 하는데···" 하고 정신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더라는 믿거나 말거나 레젼설이 만들어 졌다고 한다.
아무튼, 상황은 일단락되었으나 체육과 새터 기념 축하파티는 덕분에 완전히 나가리 됐다.
선배들은 새터를 열심히 준비하고도 욕만 잔뜩 먹었다며 우울함에 자기들끼리 방에 틀어박혀 술판을 벌였고, 뻘쭘하게 남겨진 새내기들은 새내기대로 남은 술을 깔짝거리며 새터의 마지막 밤을 지새웠다.
도훈과의 짜릿한 밤을 기대하던 마유미는 우울감에 잔뜩 술을 들이붓다 가장 먼저 쓰러졌고, 팬티 속에 로터를 숨긴 강민주는 이번 일에 책임을 지고 숙소로 돌아가 근신해야 했다.
이제 남은 유일한 후보는 육정음.
그녀는 새내기들이 모인 자리에서 속에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니들 진짜 의리도 없는 새끼들이야! 알아?"
그녀의 맹비난에도 누구도 대꾸할 수 없었다.
사실 도훈이 졸도한 것은 한 번에 많은 양을 마신 것도 있지만, 이틀간 강행군(?)으로 체력이 소진된 탓도 있었다.
이틀 사이 파트너 셋과 5번의 섹스로 체력이 고갈된 육체가 갑작스레 밀려 들어온 알콜을 견디지 못한 것.
아마 평상시의 몸 상태였다면 소주 한 병을 들이부었더라도 기절까지 이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훈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던 정음은, 그가 책임감에 홀로 분투하며 쓰러진 것이라 착각하고 불같이 화만 낼 따름이었다.
태영을 비롯한 동기들이 정음을 만류했지만, 한 번 불이 붙은 정음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휴 내가 진짜 열 뻗쳐서!"
"미안. 설마 도훈이 형이 무리해서 그걸 다 마실 거라곤 생각 못 했어."
"맞아. 사실 억지로 먹을 필요도 없었는데···."
하지만 정음은 도훈이 자기에게 돌아갈 몫을 없애기 위해 무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미안했고, 그것이 더 화가 났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그래도 교수님이 단순히 잠든 거라고 했잖아."
"맞아. 큰일 안 났으니 그나마 잘 된 거지."
"근데 정음이 너 유난스레 화낸다? 혹시 도훈 오빠 좋아하니?"
"맞아, 사실 따지고 보면 오빠 혼자 술 마시다 뻗은 거잖아. 뭘 그렇게까지 오버해? 진짜 관심 있어 그러나?"
메시지에서 명분을 잃은 여자 동기들은 전략을 바꿔 이제 메신저를 헐뜯기 시작했다.
정음의 분노를 개인적 사감(私感)으로 격하시켜, 논거의 객관성을 희석하는 것이다. 그것은 효과가 주효했는지, 갑자기 정음의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벌떡 자리를 일어섰다.
"진짜 짜증 난다, 니들!"
"야, 갑자기 어딜 가려고?"
"놔! 여기 있으면 오늘 밤 누구 하나 작살 내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정음의 엄포에 감히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이제껏 그녀가 보여준 무용으로 보아, 능히 뱉은 말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정음이 밖으로 나가 버리자, 태영이 급히 뒤따랐다. 그는 문을 닫으며 동기들에게 한마디 쏘아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너무 한다 정말. 나중에 정음이 오면 사과해."
두 사람이 사라지자 남은 사람들은 한동안 뻘쭘함에 할 말을 잃었다.
조용한 가운데 모든 일의 발단이 된 도훈이 안방에서 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도 정말 천하태평이네."
"그러게. 나중에 깨고 나면 뭔 일 있었는지도 모르겠지?"
"솔직히 난 도훈이 형이 그렇게 기절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어떻게 남자가 소주 한 병에 쓰러지냐? 술 좀 약한 거 아냐?"
"야. 넌 못 마신다고 뒤로 빠진 주제에 그 말이 나와? 양심도 없네 이게."
"아, 아니 그거야 난 체질적으로 술이 안 받으니까 그렇지."
"근데 정음이 말도 틀린 말은 아냐. 우리가 의리가 부족했어. 소주 세 병에 찬혁이 빼고 열다섯이었어. 한 병에 7잔 반 나온다 치면 한 사람당 한잔하고 절반만 마셔도 클리어할 수 있는 미션이었다고. 그걸 못 해내서 이 사단을 만들었으니···."
"그러고 보면 선배들도 억울하겠다. 강제 사발식 이런 건 아니었는데···"
"회장님이랑 부회장님 교수님한테 엄청 깨졌을 텐데 낼 부터 얼굴을 어찌 보지."
"진짜 아침부터 기합받는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렇게 교수님들이 혼내고 갔는데 기합은 무슨."
"맞아. 어쨌든 지나고 나면 그냥 다 추억이지"
"얼씨구. 이제 1학년 주제에 누가 보면 예비역 졸업반인 줄 알겠네."
"하긴 얼굴은 그렇게도 보이긴 하네."
"뭐야? 뒤질래? 왜 나한테 시비?"
"야야. 싸우지 말고 술이나 먹자. 오늘 밤은 유미 선배 말대로 마시고 죽어버려야지."
"으으, 이제 소주 냄새도 싫다."
"술이 맛있어 마시냐?"
"그럼?"
"쓴맛으로 먹는 거야. 술이 왜 쓴 줄 몰라?"
"왜?"
"그게 인생의 맛이거든."
"아이고, 개소리 적당히하고 술이나 받아."
찬혁과 도훈, 태영과 정음을 제외한 새내기들의 술자리는 밤 새도록 이어졌다.
***
"그렇게 화내고 나가 버리면 어떻게 해?"
밖으로 따라 나온 태영은 벤치에 앉아 씩씩대는 정음을 위로했다. 그는 정음을 챙기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 기회에 둘 만의 시간을 갖겠다는 얄팍한 마음도 있었다.
‘흐흐. 정음이한테 점수 딸 좋은 기회다.’
"몰라. 짜증 나. 난 의리 없는 것들이 제일 싫어."
"그래도 4년간 같이 할 동기잖아. 적당히 풀어봐. 애들도 뉘우치고 있을 거야."
"흠···."
태영은 정음을 위로하는 척하며 벤치 옆자리에 앉았다.
"밤바람 추운데 이거라도 덮고 있어."
태영이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정음에게 건넸다. 정음은 물끄러미 잠바를 보더니 태영이 속에 반 팔을 입은 것을 보고 사양했다.
"됐어. 너나 입어. 너도 반 팔 입었구만."
"난 남자잖아. 괜찮아."
"남자는 안 춥냐?"
"엉?"
"무슨 남자들이 추위 안 타는 종족도 아니고."
그러나 정음도 태영의 호의를 마냥 사양하긴 미안했으므로 곧 잠바를 받았다. 그녀는 잠바를 걸치지 않고 입고 있던 반바지 위에 올렸다.
반바지는 핫팬츠에 가까울 정도로 짧았는데, 정음이 호신술 시범 때문에 빌려 입은 것이었다. 태영은 정음의 매끈한 다리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와···. 각선미 끝내준다 진짜. 운동한 여자가 확실히 몸매가 이쁘지.’
"너 평소에도 그렇게 입고 다녀라."
"뭐?"
"아니. 지금 입은 스타일처럼 말야. 맨날 츄리닝만 입지 말고."
"뭐래?"
"아니, 지금 모습이 훨씬 예쁘니까."
정음은 빤히 태영을 쳐다보았다.
‘얘 지금 나한테 아부하는 건가?’
본래 그런 식의 칭찬에 질색하는 정음이지만, 도훈과의 일이 있고 나서 조금은 유연해진 그녀였다. 남자를 무조건 터부시하고 거부하기보다,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내가 예쁘다고?"
정음은 불쑥 자신에 대한 평판이 궁금해졌다.
"그럼. 몰랐어? 너 체육과 새내기, 아니 사범대 전체에서도 얼짱이라고 불리는데."
"헐- 진짜?"
"잘 안 꾸미고 다녀서 그렇지 남자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걸?"
‘도훈 오빠도 그러려나?’
정음은 태영보다 도훈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지금 옆에 앉은 사람이 태영보다 도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들 다?"
"어. 너 진짜 눈치 없구나. 2,3학년 선배들도 그렇고 우리 동기들 사이에서도 너 좋다는 애들 엄청 많아."
"누군데?"
‘제발 도훈 오빠여라.’
"음. 그걸 내가 말하긴 그렇고."
"에잇, 그러면 왜 그런 말 꺼내서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아니, 이런 거 떠벌리고 다니면 네가 말하는 그 의리 없는 사람 되는 거야. 어느 남자가 다른 사람 통해 자기 맘이 알려지고 싶겠어? 직접 고백하면 모를까."
고백이라는 말에 정음의 얼굴이 살짝 발그레 졌다.
도훈이 차안에서 분명 말했다.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언젠가 자기가 먼저 고백하겠노라고.
‘아, 도훈 오빠가 빨리 고백해 줬음 좋겠네.’
정음이 수줍은 표정을 짓자 태영은 오해했다.
‘뭔가 대화가 좀 통하는 거 같은데? 분위기 좋고.’
"음, 그렇군. 미안. 내가 널 의리 없는 사람으로 만들뻔 했다. 근데 태영아."
"응?"
"남자들은 어떨 때 고백하고 싶어져?"
"무슨 소리야?"
"아니 좋아하는 감정 있어도 막상 고백하긴 그렇잖아. 어떻게 하면 그런 마음이 솟아날까?"
‘뭐지? 설마 날 떠보는 건가?’
태영은 의외로 적극적인 정음의 반응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정음에 대한 그의 인식은, 예쁘고 몸매는 좋으나 털털하고 터프한 선머슴 스타일. 단둘이 이런 꽁냥꽁냥한 대화를 나눌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그였다.
"음. 그러니까 확신을 줘야지."
"확신?"
"응. 확신. 남자들도 고백하는 거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야. 누가 차일 게 뻔한 고백을 하겠니? 그래도 자존심이 있는데."
"그렇군."
"그래서 남자들도 어느 정도 ‘아 지금 고백하면 여자가 거절하지 않겠지.’ 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고백하는 거야."
"그 확신은 어떻게 생기는데?"
"그러니까 넌지시 마음을 표현하는 거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해준 다던가?"
"좋아하는 거?"
"응. 그럼 남자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 챌 거란 말이지."
"가령 예를 들면?"
"이런 거 있잖아. 우연히 좋아하는 노래를 언급했는데 노래방 같은데서 그 노래를 불러준다든가, 그런 거 있잖아."
"아하!"
태영의 조언에 정음은 뭔가를 깨달았다.
‘오빠가 좋아하는 걸 하란 말이지?’
그리고 생각했다.
도훈이 좋아하는 것이 뭐였는지.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정음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정음아? 너 뭔 생각해?"
"어, 어? 아냐. 우리 들어가자. 나 이제 화 풀렸어."
"정말?"
"응. 너랑 얘기하니까 다시 기분이 괜찮아졌어. 고마워, 태영아."
태영은 정음이 뒤 돌아선 사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이렇게 조금씩 친해지는 거야. 잘하면 이번 학기 안에 17학번 최고 미녀를 꼬실 수도 있겠는걸? 크흐흐! 정음이 내여자가 되면 페북에 자랑 엄청 해야지!’
벌써 도훈에게 홀딱 빠져버린 정음의 속도 모르고 좋아하는 태영이었다.
***
"저, 정음이?"
"쉿-. 오빠 애들 자고 있으니까 조용히."
놀랍게도 새내기들 사이에서 자지를 빨고 있던 사람의 정체는 정음이었다. 어떻게 저런 대담한 짓을?
"너 취했니?"
"살짝 마셨지요. 헤헤."
그때 누군가 큰 소리로 소리쳤다.
"거 조용히 좀 합시다!"
헉-!
나는 들킨 줄 알고 숨이 멎을 뻔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사가 어딘가 이상했다.
"여기가 지 안방도 아니고 말이야, 어 사람들 공부 하는데에에엥···음냐, 음냐."
뭐야? 잠꼬댄가?
뭔 잠꼬대를 저렇게 리얼 하게 하냐 쟤는?
이불 속으로 숨었던 정음이 다시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자, 잠꼬대죠?"
"응. 그런 거 같아. 너 근데 뭐하는 거야?"
"오빠 좋으라구요."
"뭐?"
"오빠 이거 좋아하잖아요. 별루에요?"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들키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술 먹다 애들 꽐라 되 가지고 아무 데나 쓰러졌어요. 난 일부러 오빠 밑으로 왔구요."
허-! 요 앙큼한 아가씨를 보소?
다리 사이에 얼굴을 대고 이불을 뒤집어쓴 정음은 모습은 우렁각시 같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에 씌워진 이불을, 배 위까지 끌어 올리며 말했다.
"나 잠 다 깼으니까 책임져."
"네, 오빠. 다시 재워 드릴게요."
정음의 부드러운 혀가 성난 나의 대물을 감싸안았다.
이불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맥박을 시작한다.
< 68. 새터섹터-3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