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새터섹터-30- >
***
새내기 장기자랑에서 우승한 체육교육과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남학우들은 부상으로 받은 소주 박스를 전리품처럼 짊어졌고, 여학우들은 미리 장 봐둔 안주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안주라 해봐야 골뱅이 무침이나, 소세지 야채볶음, 오뎅탕 정도였지만 가난한 대학생들에겐 진수성찬이나 마찬가지.
"새내기들 정말 고생 많았다! 오늘 밤, 마시고 죽자!"
"우아아아아아아!"
유미의 화끈한 건배사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어젯밤 야간 스키 일정 탓에 술이 고팠던 학생들은, 시작부터 페이스를 올렸다.
"캬아~ 술맛 좋고!"
"이게 1등의 맛이로구나!"
"공짜로 받으니까 더 좋네~"
구석에 자리한 도훈 역시 뿌듯한 마음으로 술잔을 비우는데 성수가 다가왔다.
"여어, 고생많았다. 새내기."
일부러 새내기를 강조하는 성수의 칭찬에 도훈이 피식 웃었다.
"고생은요, 부회장님. 새내기가 한 잔 말아도 되겠습니까?"
"좋지. 기왕 마는 거 시원하게 말아봐라."
도훈이 큼지막한 사발 그릇에 맥주와 소주를 부으려고 하자 성수가 다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어어? 이거 어디서 가져왔어?"
"저기 가운데 그냥 있던데요?"
"야. 얼른 치워. 이거 이벤트 할라고 챙겨 둔 거란 말이야."
"이벤트요?"
"흐흐. 기억 안 나냐? 체육과 신고식?"
‘신고식이라고? 설마 쌍팔년도에나 하던 사발식을 아직도 한단 말이야?’
어이가 없어진 도훈이 물었다.
"형, 그거 뉴스에서 하도 때려서 없어진 거 아니었어요? 몇 년 전에 술 먹다 사람도 죽었다면서요."
"당연히 강제는 아니지. 요즘 누가 사발주를 억지로 먹이냐?"
"그럼요?"
"내가 말했잖아. 이벤트 할 거라고. 나중에 봐. 재밌을 거야."
"그래요 그럼. 일단 종이컵에 한잔 받으시고~"
도훈은 일부러 종이컵 가득 소주를 따랐다. 성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원샷으로 들이켰다.
커다란 덩치만큼 술통 또한 큰 것일까?
"캬, 좋다. 근데 찬혁이 이 새낀 왜 안 보이냐? 임시 과대 맡느라 고생했다고 술 한잔 따라주려 했더니만. 아까 공연 끝나고 너랑 같이 안 갔어?"
도훈은 뻔뻔하게 거짓말했다.
"집에 일 생겼다고 급히 나가던데요? 형한테 연락 안 왔어요?"
"뭔 일? 연락은커녕 전화기도 꺼져 있더만."
"이상하다? 분명 저한테는 전화한다 했는데···."
"근데 큰일이야? 이 시각에 가봐야 할 만큼?" "집안일 같아서 저도 자세힌 못 물어봤어요."
"허-. 별일이 다 있네. 뭐 지가 나중에 연락하겠지. 됐어."
성수는 늦은 밤 사라진 찬혁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여자가 아니라는 점도 있지만, 애당초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도훈과 성수가 한참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조교 강민주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머, 오늘의 주인공이 여기 있네? 잠깐 껴도 되니?"
***
"어머, 오늘의 주인공이 여기 있네? 잠깐 껴도 되니?"
짧은 치마를 입은 민주가 다소곳이 무릎 꿇고 앉자, 성수가 황급히 잠바를 벗어 민주에게 건넸다.
"선배님 이거 덮으세요."
"고맙다, 성수야. 나 챙겨주는 건 역시 너밖에 없구나. 도훈이도 이런 자상한 태도를 얼른 배워야 할 텐데···."
대놓고 핀잔을 놓는 민주의 말에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술을 들이켰다. 조교 말을 들은 채만 체하는 나의 태도에 머쓱해진 성수가 대신 변명했다.
"하하. 이 자식은 아직 멀었죠. 막 군대 제대한 놈이 뭘 알겠어요. 도훈아. 매너가 남자를 만드는 거야. 새겨들어라."
글쎄.
저런 암캐는 오히려 안달 나게 해주는 남자한테 더 끌릴 거 같은데? 매너도 갖출 사람에게나 갖추는 법이지.
예상대로 민주는 자신을 깍듯이 모시는 성수는 안중에도 없었다.
"참, 성수야."
"네?"
"저기 유미 혼자서 후배들 술 받아 주느라 고생하고 있던데."
"그래요? 회장은 부회장이 보필해야죠. 도훈아 조교 샘이랑 얘기하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축객령인 줄도 모르고 좋다고 달려나가는 성수의 뒷모습이 애처로웠다.
뭐? 매너가 남자를 만든다고?
매너가 호구를 만들긴 하네.
"공연 잘 봤어. 발차기 엄청 멋있던데? 태권도는 또 언제 배웠다니?"
"군대에서요. 군대 가면 다들 1단씩 따오거든요."
"그렇구나."
물론 내 실력은 군대 1~2년으론 어림없는 수준이다.
자그마치 국대급 태권도 선수의 76%기량이니까.
하지만 적당히 둘러댄들 민주가 알 리 없겠지.
민주는 그 뒤로도 멘트가 재치있다느니, 아이디어가 기발하다느니 칭찬을 건넸지만 나는 시종일관 단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냉담한 나의 반응에 민주가 몸이 다는지 슬며시 몸을 기대왔다.
"···애들 눈치 보여서 그래? 어차피 술 마시고 떠드느라 우리 얘기 듣는 사람도 없을 텐데."
이거 안 되겠다.
조교가 아직 조교가 덜 됐구나.
"저기 조교 샘."
"응?"
"이렇게 티 나게 행동하면 저 부담스러운데···."
"아앗, 미안."
민주는 주춤거리며 무릎걸음으로 물러났다. 구박받는 애완견 같은 태도에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나는 독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버릇은 처음부터 잘 들여야 한다.
"사람들 앞에선 되도록 친한 척 안 하셨음 좋겠어요. 괜한 오해 받기 싫거든요."
"으, 응. 그럴게. 내가 생각이 짧았어."
민주가 풀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떨궜다.
채찍만 때리긴 미안하니 당근도 살짝 줘볼까?
"···핫팩은 챙겨왔어?"
"으,응? ···네."
"어디?"
"안에요."
민주가 조심스럽게 치마를 가리켰다.
학부생이 모두 모인 술자리에 딜도를 품고 오다니.
참으로 음탕한 여자가 아닐 수 없군.
"리모컨 내놔."
"···네."
나는 민주가 건넨 리모컨을 ON 시켰다.
지이이잉-!
자극이 시작되자 민주가 다리를 오므리며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흐으으!"
"소리 내지 마. 애들 앞에서 창피당하고 싶어?"
"흑, 아니요."
"때 되면 꽂아 줄 테니 예열부터 시켜놔."
"네, 주인님."
"그럼 다른 애들한테도 가 봐. 나랑만 있으면 이상해 보이니까."
"알겠어요."
민주가 비틀거리며 떠나자 이번엔 유미가 앞에 와서 앉았다.
아주 쌍으로 귀찮게 구는구나. 태그 매치냐?
유미는 벌써 술이 됐는지 얼굴이 시뻘겠다.
"엇! 우리 새내기가 요기 있었네?"
"회장님 오셨어요."
"그래. 하도 안 와서 내가 왔지. 다른 애들은 다 술 따르러 오던데 넌 어쩜 코빼기도 안 비추니?"
얼씨구?
애들 앞이라 세게 나오시겠다?
"당연히 한 잔 따라드려야죠, 받으세요."
나는 빈 잔에 소주를 듬뿍 부어 유미에게 건넸다. 유미는 입가에 질질 흘리면서도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하-! 쓰다!"
"원래 술은 쓰죠."
"흐흐. 이도훈. 너···. 쫌 머싰더라?"
혀 꼬인 모습이 벌써 반쯤 맛탱이 간 것 같다.
이러다 대형사고 칠지도 모르겠군.
나는 유미쪽으로 몸을 기울여 조용히 물었다.
"마유미. 취했냐?"
"안 취했는데?"
"난 술 먹고 진상부리는 여자 극혐이야."
정색하는 나의 말투에 유미가 긴장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했다.
"앗. 죄송해요. 애들이 주는 데로 마셨더니···."
"밖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고 와."
"그래도···."
"얼른. 앞으로 내 말 잘 듣겠다며. 다 거짓말이었어?"
"아, 아뇨. 술 깨고 올게요."
"그렇지. 말 잘 들으면 오늘 밤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네."
유미는 무슨 상상을 하는지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휴-. 드디어 귀찮은 여자 둘이 정리됐군.
하여간 한 과에 파트너가 많으니 이런 게 문제구나.
고개를 돌려 정음을 찾으니 그녀는 다른 남자들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원래도 인기가 많은 편인데 이번 공연을 히트 치고 나서는 더욱 팬클럽이 늘어난 느낌이다.
정음을 구출하려 일어서는데 갑자기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땡땡땡-
빈 소주병을 숟가락으로 두들겨 이목을 집중시킨 성수가 숟가락을 소주병에 안에 꽂아 넣더니 마이크처럼 붙잡았다.
"자자! 에블바디 주목!"
"주목."
"어쭈. 벌써 군기 다 빠졌다 이거지? 주목!"
"주목!!!"
왁자지껄하던 숙소 안이 조용해지자 성수가 말했다.
"새내기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체육과엔 유구한 전통이 있다."
그는 놋그릇으로 된 사발을 들어 보였다.
"바로 이 사발주!"
"으으으으!"
"설마 저기다 소주 붓는 거야?"
"대박. 저걸 누가 다 마신담?"
놋그릇 크기에 놀란 새내기들로 주변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자자. 놀라지 말 것. 우리 관 절대 강제로 안 먹이니까. 마시는 것은 순전히 너희들 선택이야. 우선이, 술 가져와."
"넵."
2학년 과대 우선이 소주 3병을 들고 왔다. 거대한 놋그릇에 세 병을 털어 넣자 곧 넘치기 직전까지 술이 차올랐다.
"새내기들. 동기는 하나다, 맞나?"
"맞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의리 게임을 시작한다. 이 사발주를 너희 17학번 모두가 나눠마시면 내일 집에 돌아갈 때까지 무조건 야자 타임이다."
"오옷!"
"대신 다 못 마시면 너희들은 내일 아침에도 체력단련 준비해."
"으으!"
"자, 잔 비울 시간 5분 준다. 실시."
옆에 있던 우선이 스마트 폰 타이머를 켰다.
나를 비롯한 1학년 동기들이 모두 한데 모였다.
"나 소주는 입에도 못 대는 데."
"일단 술 도저히 못 먹는 사람부터 다 빠져봐."
태영의 말에 여학생 넷과 남학생 둘이 뒤로 물러섰다.
남은 사람은 이제 아홉.
"어? 과대 어디 갔어?"
"찬혁이? 아까부터 안 보이던데?"
"아, 이 새낀 이럴 때만 없더라."
한 사람이 아쉬운 상황이라 불만이 속출했지만 줄어드는 시간을 보니 떠들 여유가 없었다.
"일단 남자들이 최대한 마신 뒤에 남은 걸 여학생들이 처리하자."
"안 돼. 그러다 마지막에 많이 남으면? 원래 의리 게임은 제일 잘 마시는 사람이 뒤로 배치되야돼."
"난 맥준 자신 있는데 소주는···."
"야. 누군 뭐 좋아서 마시냐."
서로 미루는 분위기를 보다 못한 정음이 번쩍 손을 들었다.
"야! 그냥 내가 맨 뒤 할 게."
"정음이 니가?"
"시간도 없는데 니들이 자꾸 미루니까 그렇지!"
"미, 미안."
흠. 역시 정음이는 화통하구나.
그래도 그녀에게 막중한 책임을 떠넘길 순 없지.
"내가 정음이 앞에 설게."
"도훈이 형이요?"
"그래."
포지션이 구성되자 마침내 사발식이 시작되었다.
나는 옆에선 정음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너 근데 술 잘마셔?"
"아니. 나 두 잔이면 뻗는데?"
"근데 왜 맨 뒤에 섰어."
"서로 미루는 게 찌질해 보이잖아. 난 그런 거 싫다고."
"참나. 아무튼 나 술 쌔니까 너한테 최대한 안 가게 할 게."
"괜찮아. 무리하지 마."
그러나 사발주가 옆으로 넘어오면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사람이 절반이 지났는데도 술은 1/3도 안 줄어든 것이었다.
"어어? 뭐야 왜 아직도 이렇게 많아."
"미안. 최대한 마신다고 마셨는데···."
"아오! 진짜 이 의리 없는 새끼들!"
하지만 이미 떠난 버스를 잡을 순 없는 법.
중앙에 자리한 태영은 자기라도 뭔가 보여주겠다는 듯 벌컥벌컥 사발을 들이켰다. 그나마 태영이 분발해 주면서 양이 절반 가까이 줄었지만 이제 남은 사람은 모두 넷.
앞에 둘이 마시고 나에게 넘어왔는데도 여전히 술은 한 병 넘게 남아있었다.
‘와, 이건 너무 많은데.’
기세 좋게 말은 했지만, 한가득 남은 소주를 보는 순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도훈이 굳이 무리 안 해도 된다."
"그래. 동기들 의리 없는 게 네 탓은 아니잖아?"
"이것들이 장기자랑 우승했다고 벌써 빠져 가지고는 내일 새벽부터 땀좀 흘려 보자."
사발식을 지켜보던 2,3학년 사이에서 비아냥이 쏟아졌다.
미안해하는 17학번의 모습보다, 뒤에 남은 정음의 얼굴을 보자 도저히 술을 남길 수 없었다.
"20초 남았다."
성수가 남은 카운트를 알리는 순간 나는 사발을 집어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젊은 몸뚱인데 죽기야 하겠냐.’
나는 숨도 안 쉬고 사발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벌컥-벌컥-
놋그릇이 얼굴을 뒤덮을 정도로 깔끔하게 털어내자 잠시후 속에 불덩이를 집어넣은 것처럼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크헉. 너무 많았나?’
나는 거칠게 숨을 들이 쉬며 성수를 향해 말했다.
"성수! 야자 타임··· 약속··· 지켜."
쿵-
갑자기 바닥과 천장이 뒤집어진다.
설마 지금 나 쓰러지는 건가?
로시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머리를 울렸다.
[주인님! 주인님! 정신 차리십시오. 주인님!···]
정신이 아득해진다.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뭐지?
기분 좋은 느낌에 슬며시 눈을 떴다.
골이 찌르르 울리는 숙취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내 다리 사이에 뭔가 붙어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 물건을 빨고 있다는 것도.
‘허억-!’
어둠 속이라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깨어난 것도 모르고 펠라를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려고 하다 문득 옆에 잠든 태영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 사람이 옆에 있잖아?’
그뿐만이 아니다.
반대편에는 긴 머리를 한 사람이 등 돌려 자고 있다.
‘여, 여자까지? 뭐야 설마 혼숙인 거야?’
MT가서 때씹 한다는 게 설마 우리과 이야기였어?
꿈인 것 같지만 명백한 현실이었다.
내 다리 사이에 붙은 그녀가 속삭이듯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깼어?"
< 67. 새터섹터-30-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