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새터색터-29- >
***
도훈은 찬혁을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갔다.
분리수거장처럼 보이는 이곳은 룸 클리닝 시간대를 제외하면 특별히 사람이 오가지 않는 곳이다.
"무슨 소리에요? 전 전혀 모르는 일인데요?"
"···모른다고?"
"네, 소품은 제 담당이 아니잖아요. 그 누구지? 한솔이? 혹시 걔가 실수한 거 아닐까요?"
찬혁은 뻔뻔하게 부인했다.
각목을 바꿔치기한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증인이 없는 이상 심증만으로 우길 수 없을 거란 판단.
찬혁의 발뺌에 도훈이 싸늘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 각목, 네 짓이지?"
"진짜 나 아니라니까 그러네!"
반말이나 다를 바 없는 반항적인 말투.
가만 생각해 보니 다짜고짜 사람을 외진 곳으로 끌고 와 핍박하는 도훈의 태도가 괘씸하기 짝이 없다.
‘지가 선배면 선배지 형사라도 돼? 뭔데 날 취조야?’
찬혁은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바지에 슥 문지르더니, 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피가래 섞인 침 무더기를 보는 순간, 도훈에게 걷어차인 콧잔등이 다시 아려왔다.
"그리고 선배면 선배지 사람 막 때려도 돼?"
"돼? 너 지금 반말했냐?"
"왜? 너보다 어린 놈한테 반말 들으니까 좆같냐? 어? 씨발, 꼬우면 계급장 떼고 한판 뜨든가?"
찬혁은 생각했다.
어차피 이곳엔 둘 뿐.
설사 하극상이 벌어진다 해도 아무도 보지 못한다.
‘저 새낀 처음부터 맘에 안 들었어. 따지고 보면 정음이랑 시비가 붙은 것도 다 저놈 때문이잖아? 선배라서 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냥 확 강냉이 털어 버려야지. 지도 쪽팔린 줄 알면 어디 가서 딴소리 못 하겠지.’
찬혁의 도발에 도훈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겁을 먹은 것으로 착각한 찬혁은 복싱 스텝을 밟으며 상체를 건들거리기 시작했다.
"왜? 이제 와서 쫄려? 그러게 내가 형 대접해 줄 때 적당히 멈췄어야지. 좆같은 새끼가 나이 좀 처먹었다고 더럽게 재고 있네."
"너 어금니 꽉 깨물어라."
"···?"
퍽-!
도훈의 벼락같은 옆 밀어 차기가 날아오더니 찬혁의 옆구리를 두들겼다.
전진 스텝으로 거리를 좁힌 뒤, 그대로 무게를 실어 밀어치는 발차기에 가벼운 찬혁이 수 미터를 날아가더니 알류미늄 분리통에 처박혔다.
와르르-!
플라스틱 재질의 분리수거함이 박살 나면서 안에 있던 빈 깡통이 요란스럽게 쏟아져나왔다.
복제한 원본에 비해 속도는 느리지만, 도훈의 발차기는 긴 리치 덕에 정음의 그것과 엇비슷한 수준의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다.
더욱이 라이트 헤비급의 체중이 실린 발차기를 정통으로 맞았으니 아무리 운동으로 단련 된 찬혁이었다고 한들 버틸 재간이 없었다.
"으윽, 이 자식 치사하···"
찬혁이 바둥거리며 일어서려고 했지만, 옆구리에서 밀려오는 찌르르한 통증에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모르긴 몰라도 조금 전의 발차기로 갈비뼈 두 개 이상은 나가버렸을 것이다.
"아직도 입 털 여유가 있어?"
도훈은 찬혁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머리통을 향해 그대로 싸커킥을 후렸다. 골킥이라도 차는 양 디딤발에 힘을 주어 후려갈긴 공격앞에 찬혁이 얼굴을 가드하며 몸을 웅크렸다.
퍼억-!
도훈은 그 정도론 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발차기를 계속했다.
"다시 말해봐 새끼야"
퍽-
"뭐? 계급장을 떼?"
퍽-
"미필 새끼가 뗄 계급장은 있고?"
퍽-퍽-
"아주 니 눈엔 선배가 호구로 보이지?"
퍽퍽-
이미 첫 기습에서 갈비뼈가 나가버린 찬혁은 저항 불가의 상태였다. 몸을 웅크려 어떻게든 급소만 막고 있는데도, 매서운 도훈의 발차기에 온몸이 으스러질 듯 아팠다.
"크흑, 제, 제발 그만···."
"그만은 새끼야. 이제 막 시작했는데."
도훈이 그로기 상태가 된 찬혁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축 늘어진 찬혁이 좀비처럼 강제로 들어 올려졌다. 도훈은 멱살을 쥐지 않은 반대 손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찬혁의 뺨을 사정없이 올려붙였다.
쫙-!
찬혁의 입안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이빨인가 하고 봤더니 단순 피가래다.
"운동 너만 배웠냐?"
쫙-!
"너만 싸움할 줄 알아?"
쫙-!
뺨 세 방에 찬혁의 한쪽 얼굴이 팅팅 부었다. 입술은 찢겨지고 겨우 멎었던 코피가 다시 흘러내리며 입술을 붉게 물들였다.
"익을수록 고개 바짝 엎드리란 말 들었어 못 들었어?"
"죄, 죄송합···"
"죄송하니까 한 대 더 맞자."
쫙-!
찬혁은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축 늘어졌다. 도훈은 그 모습에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기절한 척하면 정신 들 때까지 패준다."
"아, 아닙니다."
"너 내가 태권도 배운 거 모르지?"
"네, 네."
"당연하지. 난 한 번도 떠벌인 적 없으니까."
오전에 정음의 능력을 흡수해 익힌 주제에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도훈이었다.
"어린놈의 새끼가 어쭙잖은 주먹질 좀 배웠다고 선배가 우습게 보이냐?"
"그, 그런 거 아닙니다."
"왜? 나이 좀 처먹었다고 더럽게 잰 척한다며?"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또 맞고!"
쫙-!
도훈의 구타는 무자비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첫 일격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뼈를 다치게 한다든지 급소를 가격하는 일은 삼갔다.
"다시 묻자. 각목 니가 그랬지?"
"그, 그건 진짜 아닙니다."
찬혁은 진실을 말했다간 오늘 밤 초상을 치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또다시 거짓말을 했다. 지금 얻어맞은 거야 선배한테 버릇없이 덤빈 깽 값으로 치더라도, 각목 사건은 자칫 살인미수까지 얽힐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도훈의 얼굴이 다시 차갑게 굳었다.
"요 새끼 끝까지 오리발이네."
"지, 진짭니다.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이유야 충분하지. 정음이한테 쪽 당한 게 분했을 테니까."
"제가 바꿔치기했다는 증거도 없잖아요."
"증거?"
도훈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비틀어졌다.
"너 그럼 증거 있으면 인정할래?"
도훈의 자신 있는 태도에 찬혁은 순간 주저했다.
그러나 각목을 바꿔치기하는 장면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 몇 번을 주위를 둘러보았기 때문에 그것만은 확실하다.
도훈이 자신을 떠보는 것이라 판단한 찬혁은 더욱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네, 인정할게요. 진짜 본 사람이 있다면요."
***
"네, 인정할게요. 진짜 본 사람이 있다면요."
결국, 제 무덤을 파는구나.
사실 찬혁이 자신 있어 하는 이유는 알고 있다. 사이코메트리 능력으로 돌려본 영상에서, 찬혁의 바꿔치기 장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
그것은 각목에 남아있던 또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었다.
싸이코메트리는 사물에 담긴 기억을 들춘다.
내가 각목을 쥐었을 때 본 영상은 찬혁의 것만이 아니었다.
그가 각목을 빼돌리기 이전 스쳐 갔던 사람들의 기억.
그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
"아저씨 격파용으로 쓸 각목도 있을까요?"
민주의 물음에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철물점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격파? 그라믄 다루끼로 하면 되겄는디."
"다루끼요?"
"한치각 짜리 말여."
"뭔 소린 줄 하나도 모르겠어요. 알아서 적당히 주세요."
"알았어 기다려봐잉, 나가 후딱 구석에서 찾아 올라니께."
주인은 창고로가 33mm각재를 찾았다.
12개 한 묶음으로 든 세트.
그러나 이가 빠진 듯 한자리가 비어 있다.
"맞네, 지난번 옆집 김씨가 쓴다고 하나 빼가브렀제잉."
난감해진 주인은 창고 주변을 둘러보다 같은 사이즈의 각목을 찾아냈다.
"으따, 그란디 요것은 빼빠질이 안 된 것인디···"
그것은 다른 각목과 달리 마감처리가 되지 않아 표면이 거칠었다. 하지만 철물점 주인은 어차피 격파용으로 쓴다는 말에 빈자리에 밀어 넣었다.
그것이 각목에 남겨진 첫 번째 클립 영상이었다.
다음은 두 번째 영상.
"한솔아. 톱질 몇 개나 더 해야 돼?"
"거의 다 했어. 리허설 용으로 쓸 것까지 이제 두 개만 더 하면 돼."
"아야! 씨, 이거 뭐야. 표면이 왜케 거칠어? 손바닥 다 까졌네."
"너 괜찮냐? 어? 진짜 다른 거랑 다르네. 이건 따로 빼놓자. 애들 잡다가 손 다치겠다."
한솔이 각목을 치우고 잠시 뒤 찬혁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야, 나 각목 하나만 쓰자."
"격파 연습하게?"
"응. 바쁜 것 같은데 내가 알아서 챙겨갈 게."
찬혁은 미리 잘려놓은 각목을 만지작거리다가 구석에 치워진 생짜 각목을 집어 들었다.
‘흐흐. 안 잘린 각목이 제격이지.’
찬혁이 떠나고 소품을 만들던 학생들은 작업한 각목을 헤아렸다. 찬혁이 챙겨갔으니 하나를 더 만들어야 할 상황. 그런데 잘라놓은 각목의 수가 그대로다.
"어라? 찬혁이 다른 거 들고 간 것 같은데?"
"진짜? 그걸로 연습하다간 다칠 텐데···
"에이, 바보도 아니고 설마 톱질도 안 된 각목을 때리겠어. 지가 바꾸러 오겠지."
"하긴 그래."
두 가지 영상은 클립처럼 스쳐 갔기에 당시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상들은 찬혁이 각목을 빼돌려 바꿔치기했음을 드러내는 명백한 증거였다.
기억을 떠올리며 도훈이 말했다.
"니가 빼돌린 각목은 12개짜리 세트 중에서 유일하게 마감처리가 안 된 공사용 각목이었어. 한솔이가 따로 빼놓은 것도 모르고 너가 집어간 그 물건 말이야."
"?!"
"공연 끝나고 나서 태영이한테 챙겨놓으라고 했으니 가져와서 대질 심문해보면 되겠네. 어째서 니가 연습용으로 챙겨간 각목이 공연무대까지 올라갔는지 말이야."
"어, 어떻게 그걸···."
찬혁은 소름이 돋았다.
도훈은 마치 모든 장면을 지켜본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이래도 끝까지 발뺌할래? 그 각목이 왜 거기 들어갔는지 철물점에도 확인해줘?"
"그, 그게 저는···."
퍽-!
도훈의 주먹이 찬혁의 복부에 들이박혔다.
찬혁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알량한 자존심에 사람을 죽이려고 해? 미쳤어?"
"지, 진짜 그럴 생각까진 아니었습니다. 그냥 좀 골탕을 먹이려고···"
"골탕? 니 대가리 각목으로 후려치고 장난이었다고 해줄까?"
"크흑.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찬혁이 끝내 눈물 콧물 울음을 터뜨렸다.
"으흑, 으흑. 형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후회할 짓이라면 애초 시작을 말았어야지."
찬혁은 무릎까지 꿇고 사정했다.
"죽은 듯 조용히 살겠습니다. 아싸처럼 그냥 학교만 다니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조용히 넘어가 주시면···."
도훈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찬혁을 바라보았다.
안하무인에 왕싸가지.
복수심에 불타 정음을 다치게 하려던 놈.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춘의 경우처럼 콩밥을 먹일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실제 다친 사람도 없을뿐더러, 증거 또한 불충분하다. 거기다 구타를 가한 쪽은 오히려 자신이다.
법적으로 파고들면 빠져나갈 면죄부만 주게 될 공산이 컸다.
그러나 이대로 넘어가기엔 지은 죄가 너무 막중했다.
놈에겐 합당한 벌이 필요했다.
결심을 마친 도훈이 입을 열었다.
"강찬혁."
"네, 선배님."
"선배라고 부르지 마. 난 너 같은 후배 둔 적 없으니까."
"예, 예?"
"일 더 키우기 싫으면 자퇴해라."
"···자, 자퇴요?"
"그걸로 퉁 치자."
"······."
"난 너 같은 새끼랑 절대 학교 못 다닌다. 내가 그만 두리?"
"아, 아닙니다."
"그렇지? 그러니까 자퇴해. 그렇게만 하면 각목 건은 조용히 묻어 주마. 1년 동안 재수하면서 죗값 달게 받아. 그래도 우리 학교 들어올 머리라면 재수 좀 한다고 폭망하진 않겠지."
"······."
"왜, 억울하냐?"
"아닙니다."
"이 길로 짐 싸서 집으로 곧장 가. 니 꼴도 보기 싫으니까."
"···네."
도훈은 확인 사살을 하듯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너랑 나랑 얘기한 거 여기다 녹음되어있으니 딴 생각 말고."
"네."
도훈이 녹음을 종료하며 말했다.
"근데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그런데 너 진짜 복싱 배운 거 맞냐?"
"네?"
"아니 아무리 대비를 안 해도 그렇지 복싱 챔피온 먹었다는 새끼가 발차기 한 번을 못 피해?"
기왕 자퇴로 마음 굳힌 찬혁이 속 사정을 밝혔다.
"그게 실은···."
찬혁은 복싱을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3년 넘도록 배웠으니 제법 태는 났지만, 절대 우승할 실력은 못 되었다. 그러나 16강에만 들어도 대학 진학 시 도움이 될 거라는 관장의 말에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그의 대전은 운빨의 연속이었다.
눈감고 때린 럭키 펀치가 얻어걸리며 16강에 안착한 찬혁은 16강 상대의 원인 모를 기권, 8강 상대의 계체량 실패, 그리고 4강 상대의 반칙패로 엉겁결에 결승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믿을 수 없는 강운은 결승전까지 이어졌다.
하필 상대가 대회 당일 배탈이 나면서 컨디션 최악인 상태로 붙게 된 것이었다.
졸전 끝에 고교 아마 복싱 타이틀을 거머쥔 찬혁은 스스로도 타이틀을 차지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오히려 스스로 자신의 업적을 떠들고 다녔다.
사실 인터넷 스포츠란에서도 한두 줄밖에 언급되지 않는 아마 복싱이었기에 찬혁이 우승한 기록 외에 디테일한 부분은 모두 생략되어 있었고, 이를 이용해 찬혁은 더욱 허세를 부렸던 것이다.
"헐, 진짜 그렇게 우승한 거였어?"
"···네."
"너도 진짜 어처구니없는 새끼구나."
"죄송합니다."
"그만 죄송하고 이제 가라.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네."
그렇게 찬혁은 짐을 챙겨 떠났다.
떠나는 찬혁을 보는 도훈을 향해 로시가 물었다.
[주인님. 힘을 보여주신다길래 저는 ‘숨겨왔던 나의···’ 업적이라도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뭔 소리야? 내가 남자랑 그 짓을 왜 해?’
[그럼 힘을 보여준다는 게···]
‘아하, 그거야 정음이한테 얻은 태권도 실력이지. 사실 저 새끼 진작부터 두들겨 패고 싶었는데 아마 복싱 챔피온이라길래 솔직히 쫄았었거든. 근데 내막을 알았더라면 확 그냥···’
[휴, 성병 면역의 특혜는 아직이로군요. 정말로 좋은 보상인데···]
‘절대 안 해! 남자랑은!’
[후후, 호언 장담은 금물입니다.]
도훈이 로시랑 티격태격하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성수였다.
-어딘데 안 오냐? 암튼 도훈아 대박이다! 우리과 참피온 먹었어!
< 66. 새터색터-2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