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새터섹터-28- >
"다음은 땀방울로 하나 되는 무적 체육교육과 순서입니다."
MC를 맡은 단과대 회장이 체육과 새내기들을 무대 위로 소개했다.
"체육과답게 박력 있고 화끈한 차력쇼를 준비했다고 하는 데요, 그럼 일단 보시겠습니다."
반복되는 노래와 댄스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던 관객들은 차력쇼라는 이색적인 공연에 시작부터 열띤 호응을 보내왔다.
"와아! 기대된다!"
"체육과 파이팅!"
예상 밖의 함성에 체육과 새내기들은 제법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때 도훈이 MC에게 마이크를 인계받고 나와 대표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17학번 체육과 새내기들이 이틀 동안 열심히 차력을 준비했습니다! 혹시 실수하더라도 격려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킹카다!"
"꺄악, 오빠 번호 좀 알려줘!"
"잘생겼다!"
도훈이 무대에 오르자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격한 반향이 일어났다. 확실히 도훈의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는 어딜 가나 주목받는 편이었다.
그때 도훈이 말귀를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그쪽 분. 방금 뭐라고 하셨죠?"
"잘 생겼다구요!"
"네, 다시 듣고 싶어서 물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도훈의 위트 넘치는 멘트에 사방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자연스레 긴장이 풀리면서 얼어있던 체육과 학생들도 슬슬 자신감을 되찾았다.
도훈은 마이크를 잡고 진행을 이어갔다.
체육과가 준비한 코너는 모두 5가지.
송판이나 각목격파 같은 화끈한 묘기도 있고, 머리에 고무장갑 쓰기나 콧김으로 촛불 끄기 같은 코믹한 쇼도 있었다.
관객들은 다채로운 구성으로 진행되는 차력쇼를 크나큰 박수로 호응했다.
마침내 차력쇼의 하이라이트 호신술 시범.
새터 내내 츄리닝 차림이던 정음이, 동기 옷을 빌려 산뜻한 여대생으로 변신해 나오자 객석에 있던 남학우들 사이에 소요가 일어났다.
"오! 숏컷녀 엄청 이쁜데!"
"완전 내 스타일!"
"저 여학생 아까 송판 격파할 때 고난이도 발차기 하던 애 맞지?"
"태권소녀가 미모를 숨김!"
"꾸며놓으니까 얼짱이네 얼짱."
정음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웠지만, 애써 평정을 되찾았다. 지금은 오로지 공연에만 집중할 순간.
불량배 역의 태영와 찬혁까지 무대에 오르자 마이크를 잡고 있던 도훈이 진행을 시작했다.
"음, 아무래도 한 쪽이 불리해 보이는군요. 그럼 저도 남자 편에 가세하겠습니다."
"우우우우!"
"치사하게 남자 셋이서 여자 하나를 괴롭히냐!"
"혼쭐 내줘라 태권소녀!"
***
"혼쭐 내줘라 태권소녀!"
분위기는 충분히 무르익었다.
나는 태영에게 시작 신호를 보냈다.
태영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정음에게 수작을 걸었다.
"헤이 이쁜이! 한가하면 오빠들이랑 수강신청이나 하러 갈래?"
"싫은데요? 가던 길 계속 가시죠?"
이윽고 여러 차례 합을 맞춘 호신술이 전개되면서 객석의 반응이 뜨거워졌다. 정음의 화려한 발재간에 태영과 찬혁이 속절없이 두들겨 맞을 때마다 함성이 커져갔다.
"잘한다!"
"멋지다! 체육과 예쁜이!"
태영과 찬혁이 잔뜩 얻어터지고는 내 쪽으로 도망쳐왔다.
"형님, 장난 아닌데요? 쟤 진짜로 때립니다."
태영이 기지를 발휘한 애드립에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는 슬슬 마무리를 위해 구석에 준비한 각목을 집어 들었다.
"말로 안 통하겠군. 애들아 쳐라."
내 명령에 태영과 찬혁이 달려나갔다.
이제 놈들이 나래차기를 맞고 나가떨어지면 내가 각목을 휘두를 차례.
그런데 각목을 잡는 순간 뭔가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불쾌감? 찜찜함? 아니 그보다는 훨씬 기분 나쁜 감각이다.
마치 개미 떼 수백 마리가 내 몸을 타고 오르는 느낌은, 불행의 전조를 알리는 계시 같았다.
‘···로시, 방금 이거 뭐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감이 안 좋아.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야.’
[주인님, 그건 플레이어가 가진 직관의 권능입니다! 당장 공연을 중단하십시오!]
‘뭐? 이렇게 느닷없이?’
[플레이어는 신의 가호를 받는 존재. 그들은 인생의 크나큰 시련을 예지할 수 있는 기민한 감각을 타고납니다. 직관의 권능이 발동되었다면 필시 불행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나는 객석 쪽을 바라보았다.
그 어떤 공연보다 호응 좋았던 무대.
지금도 정음이 보여주는 호신술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있다.
이것을 갑자기 중단하라고?
그러나 이성으론 납득할 수 없지만, 직관은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나는 다급한 와중에 재빨리 머릴 굴렸다.
대체 뭐가?
설마 무대장치가 망가지기라도 하는 걸까?
그러나 바닥은 견고했고, 조명 역시 뒤쪽에 설치되어 있다. 갑자기 조명이 머리 위에서 떨어지거나 그런 사고는 아니다.
아니면 정음이가 실수라도?
그럴 리가.
그녀의 운동신경은 익히 하는 바다. 설사 상대가 동작을 잘못한다 해도 거기에 능히 맞춰줄 수준의 능력자다.
그러다 문득 내 손에 들린 각목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것을 드는 순간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이?
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실톱으로 미리 잘라 놓은 부위를 유심히 살폈다.
세상에!
각목은 톱질 자국이 전혀 없엇다.
처음 산 그대로의 통짜 각목이었던 것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연습대로 이것을 정음에게 휘둘렀다면 분명 정음이 크게 다쳤을 것이다. 다리가 부러지거나 얼굴을 심하게 긁혔을지도.
나는 소품을 준비한 동기들의 부주의함에 분노가 치솟았지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호신술 무대에서만 치명적 실수를 저지른 걸까?
과연 이것은 실수일까?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새롭게 받은 나의 능력은 그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로시, 사이코메트리 쿨타임은?’
[지금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각목을 쥔 손에 의식을 집중하자 찌릿하는 감각과 함께 머릿속으로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한솔아 소품 준비는 다 됐어?"
"응, 여기. 톱질 빡시게 해놔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거야."
"그래. 수고했다."
영상에 나타난 남자는 차력 소품을 담당했던 한솔과 찬혁이었다. 한솔이 건네준 각목을 받은 찬혁은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한솔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사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다른 각목과 바꿔치기했다.
‘크크. 쇼가 피바다로 변하면 참 볼만하겠군. 정음이 니가 나를 개 쪽 줬다 이거지? 어디 한 번 언제까지 웃을 수 있는지 보자고.’
각목에는 찬혁의 원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영상을 모두 확인한 도훈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동작을 추가하자느니, 연출을 위해 각목을 넣자느니 하는 것이 사실 정음을 해코지하려는 술책이었다니!
‘이 개새끼를 그냥!’
각목을 쥔 도훈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정음을 다치게 하려 한 것도 모자라, 자신도 가해자로 만들려는 놈의 야비함에 이가 갈렸다. 아마 진상조사에 들어가면 소품 준비한 스텝에게 뒤집어씌우고 유유히 빠져나가려고 했겠지.
‘이 개새끼를 어떻게 족친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무대를 망칠 순 없었다.
이틀 동안 열심히 준비했던 동기들의 노력을 봐서라도 흥분된 감정을 자제해야 한다.
마침 정음이 연습한 나래차기로 두 사람을 걷어찼다.
태영과 찬혁은 과장되게 날아가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찬혁의 시선이 도훈이 쥔 각목을 주시하고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불행한 사건을 미리 짐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본 도훈이 이를 부득 갈았다.
도훈은 각목을 바닥에 늘어뜨린 체 천천히 걸어갔다.
‘어디 나도 애드립 좀 쳐볼까?’
"야이 새끼들아!"
뜬금없는 도훈의 호통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태영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각목을 휘두를 타이밍에 도훈이 느닷없이 내용을 바꾼 것이다.
도훈은 쓰러진 태영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둘이 여자 하나를 못 이겨?"
퍽-
도훈은 최대한 힘을 조절해 태영을 싸커킥으로 걷어찼다. 눈치 빠른 태영이 도훈의 예고 없는 애드립에 호응했다.
"어이쿠, 형님! 죄송합니다!"
도훈은 이번엔 각목을 들고 찬혁에게 걸어갔다.
"이 쓸모없는 것들!"
도훈이 각목을 쳐들자 찬혁이 화들짝 놀라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저걸 얻어맞았다간 최소한 전치 4주다.
"사, 살려주십시오. 형님."
도훈은 자비 없는 표정으로 발바닥을 들어 찬혁의 얼굴을 짓이겨 버렸다.
퍼억-!
도훈의 과감한 액션에 객석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우아! 리얼하다."
"방금 진짜 찬 거 아니지?"
"에이 설마. 다 짜고 치는 걸 텐데."
면상을 발바닥으로 걷어차인 찬혁이 코를 부여잡고 뒤로 쓰러졌다. 그의 손아귀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사람들은 그마저도 준비된 소품으로 착각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저건 물감인가?"
"우아! 체육과 준비 엄청 했네?"
영문도 모르고 두들겨 맞은 찬혁이 고통으로 쓰러지자 도훈은 들고 있던 각목을 바닥에 집어 던지더니 정음에게 소리쳤다.
"니가 우리 애들 이렇게 만들었냐?"
"네, 네?"
다시 관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래, 지가 때려놓고."
"기억 상실증이냐!"
도훈은 이내 겨루기 자세를 잡더니 말했다.
"들어와. 혼구녕을 내줄 테니."
정음은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전혀 파악이 안 되었으므로 멀뚱하게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도훈은 이대로 있다간 쇼를 망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먼저 달려들었다.
"안 오면 내가 간다."
도훈의 발차기는 번개처럼 빨랐다. 정음의 능력을 복제한 그의 움직임은 오랫동안 수련을 한 무도인의 그것이었다.
발차기를 가까스로 피한 정음은 그의 숨겨진 태권도 실력에 화들짝 놀랐다.
‘뭐야? 오빠 태권도 유단자였어?’
도훈은 이어 연속된 발차기를 선보였다. 콤보처럼 이어지는 발차기가 아슬아슬 정음의 급소를 빗겨 지나갔다.
"멋지다!"
"연습 많이 했는데?"
"피하지 말고 반격해라! 태권소녀!"
정음도 슬슬 도훈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기왕이면 멋진 대결로 관객의 호응을 끌어내자는 뜻이겠지?
‘오빠도 진짜! 이럴 거면 리허설 때 미리 말이나 해주지.’
정음이 본격적인 겨루기 모드로 들어가자 도훈이 금방 수세에 몰렸다. 애초에 그의 능력은 정음에게서 온 것.
그것도 온전한 것이 아니라 3/4 정도의 모조품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화려한 공방을 선보이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서로를 향해 휘둘러 지는 발차기는 위협적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거두었기 때문에 사실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도훈은 슬슬 마무리를 짓기 위해 다시 윙크로 싸인을 보냈다.
‘여기서 끝내자.’
도훈의 신호를 알아들은 정음이 마지막으로 540도 턴 차기를 선보였다. 도훈이 발차기에 맞은 것처럼 공중 백 덤블링을 펼치며 날아갔다.
생전 처음 해 본 기술이었지만, 육정음의 능력을 복제한 도훈에게는 어렵지 않은 기술이었다. 도훈이 멋지게 낙법을 발휘해 떨어지자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아아아아아!!!"
"체육과 대박!"
"저걸 이틀 만에 준비했다고?"
마지막으로 모든 체육과 학생들이 올라와 다시 인사를 건네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단순히 코미디 같던 차력쇼가 마지막 정음과 도훈이 보여준 수준 높은 무술 연기로 수준 높은 공연으로 포장되었다.
심사를 맡은 마유미를 향해 다른 학회장들이 덕담을 건넸다.
"이야! 연습 빡세게 시켰네. 애들 너무 갈군 거 아니냐, 유미?"
"올해 대상은 무조건 체육과네."
"난 만점 줬어! 무대 참여율, 컨텐츠, 관객 호응도에서 완벽."
쏟아지는 칭찬에 유미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학회장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은 것과 교수님들 체면을 세워드렸다는 뿌듯함이 그녀를 고양 시켰다.
‘도훈 오빤, 역시 최고야. 오늘 밤 술자리 때 듬뿍 상을 줘야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비단 유미만이 아니었다.
교수석 뒷자리에서 공연을 지켜보던 조교 강민주 역시 도훈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못 하는 게 없구나. 섹스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아아, 하루종일 개처럼 따라다니면서 빨아드리고 싶어.’
무대 뒤에선 성수를 비롯한 선배들이 인사를 마치고 내려온 후배들을 격려했다.
"잘했다! 최고였어!"
"작년 우리보다 훨씬 잘하네."
"어? 근데 찬혁이 코피 난 것 같은데?"
누군가 코를 틀어쥔 찬혁을 보고 물었다.
"제가 실수로 발로 차버린 것 같아요. 숙소에 가서 상처 좀 보고 올게요."
***
"제가 실수로 발로 차버린 것 같아요. 숙소에 가서 상처 좀 보고 올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찬혁을 어깨동무했다.
말이 어깨동무지 강제로 목을 결박하듯 힘을 주어 끌어 안았다.
"그래. 도훈이가 잘못했으니 좀 봐줘. 나머진 일단 경연 끝날 때까지 관람석에서 대기하고 있어. 이제 과학교육과랑 미술교육과 공연 끝나면 바로 시상식 있을 거니까."
"네."
난 입을 틀어쥐느라 제대로 대답도 못 하는 찬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은 말 할 때 따라와라. 각목, 다 알고 있으니까.
다 알고 있다는 나의 말에 찬혁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너 이 새끼, 감히 정음이를 까려고 해?
숨겨왔던 나의 힘을 보여줄 타이밍이군.
< 65. 새터섹터-28-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