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새터섹터-27- >
***
"다녀왔어요."
"도훈이 형 왔어요?"
숙소로 복귀하자 태영이 나를 반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새내기들뿐.
"선배들 다 어디 갔어?"
"오전 운동 마치고 바로 스키장 갔어요. 과별 장기자랑 준비하라면서 저희만 남겨두고요. 으, 치사하게."
다 가버렸다고? 그럼 유미도 없겠군.
정음이 갈군 거로 한소리 하려 했더니···
"자 여기 송판. 5장이면 되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아침부터 고생하셨네요."
"아냐. 어차피 정음이도 격파 동작 몇 가지 더 추가할 거라 넉넉히 사왔어."
"참, 정음인 어딨어요?
"왜?"
"아까 찬혁이가 찾는 거 같던데."
찬혁이 놈은 역시 양반이 못되었다.
태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나타나더니 꾸벅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형. 정음이는요?"
"어. 여자방에 씻으러 갔어. 아침에 세수만 하고 가서 찝찝하다고. 정음이는 왜?"
"어제 호신술 말이에요. 생각해 보니까 동작이 너무 단순한 거 같아서 몇 가질 추가할까 해서요."
찬혁은 모처럼 의욕적인 모습이었다.
어제의 창피를 감추기 위함일까?
"추가?"
"정음이가 명색이 태권도 선출이잖아요. 일 대 일로 싸우는 것보다 여러 명을 동시에 제압하는 게 더 멋져 보이지 않을까요?"
"음,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서 저랑 태영이랑 동시에 덤비기로 했어요. 한 명 더 있으면 좋겠는데 형도 끼실래요?"
찬혁은 내 정체를 알고 난 후 꼬박꼬박 존대를 붙였다.
버릇없는 놈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위아래는 있는 놈이군.
그나저나 3 vs 1 로 싸우는 정음이라.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그림이군.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다.
"그럴까? 나도 어차피 뭐 하나 하려고 했는데."
내 대답에 찬혁이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형, 기왕이면 나쁜 놈들이 무기를 들고 싸우는 건 어떨까요?"
"무기라니?"
"저기 각목 있잖아요. 격파용으로 준비한 거."
찬혁의 설명은 이랬다.
맨손으로만 싸우면 연출이 너무 밋밋하니 한 명 정도 손에 무기를 들려주자는 것이다.
"정음이 실력이면 발차기로 각목 정돈 그냥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정음이 오면 물어보고 결정 하자."
잠시 후 샤워를 마친 정음이 몸에 쫙 붙는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평범한 디자인의 트레이닝복이었지만, 정음이 입으니 굴곡진 몸매가 여실히 드러나며 남자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특히 태영은 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이 노골적으로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훗-.
그래 봐야 한발 늦었다 이놈아.
벌써 내가 구석구석 침 묻혀놨거든.
"정음아. 혹시 호신술 시범 3대 1도 가능하겠어? 찬혁이가 혼자선 겁난다고 셋이 덤비겠다는데?"
태영의 짓궂은 농담에 찬혁이 살짝 안색을 굳혔다.
그러나 이내 굳은 표정을 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어제 한 방 맞아보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 세 명 정돈 괜찮지?"
자존심만 강한 타입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굽힐 줄도 아는군. 찬혁의 저자세에 정음이 시크하게 대답했다.
"얼마든지."
"나랑 태영이랑 도훈이 형이 삼인조로 나설 거야."
"도훈이 오...형도?
오빠라고 말하려던 정음이 갑자기 주변을 의식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는 나와 차를 타고 오며 약속한 것이었는데, 다른 사람에겐 둘이 좋아하는 사이인 걸 숨기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주위를 의식하게 되면 괜히 관계가 서먹해질 수 있다며.
"그리고 무기 들어도 상관없지? 각목 같은 거 말야. 무서우면 관두고."
응? 가만 보니 찬혁이 놈이 은근슬쩍 정음의 호승심을 도발하는 눈치다. 정음은 ‘무서우면 관두고’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기분 나쁜 투로 대답했다.
"나 시범단에서 호신술 시범 보일 땐 진짜 칼 들고도 해봤어. 각목 정도로 무섭다니?"
"하하. 역시, 정음인 겁이 없다니까? 물론 각목은 톱으로 잘라 놓을 거야. 발로 살짝만 차도 부러질 수 있게."
"알았어. 그럼 바로 연습할까?"
"그러자."
갑작스럽게 바뀐 찬혁의 태도가 어딘지 찜찜했지만, 나름 화해의 제스쳐라 생각하기로 했다.
***
"좋아, 거기서 둘이 달려들면 내가 나래차기로 동시에 칠 거란 말야. 그럼 최대한 폼나게 날아가 줘야 해."
"알았어."
"근데 진짜로 차는 건 아니지?"
"당연하지. 발끝만 갖다 댈 거야. 대시 호신술 시범은 맞는 사람이 더 실감 나야 돼. 혹시 백덤블링 같은 거 할 줄 알아?"
태영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난 앞구르기도 잘 못 돼."
"나도 복싱만 배워나서."
"어쩔 수 없지. 적당히 과장되게 날아가. 그리고 두 사람이 쓰러진 사이 도훈형이 각목 들고 나한테 휘둘러."
"이렇게?"
"아니 위에서 아래로 말고, 야구 베트처럼 옆에서."
"이렇게?"
"그렇지. 그럼 내가 그걸 찍어 차서 부러뜨린 다음 돌려차기로 가슴을 찰 거야. 그때 형이 쓰러지면 돼."
"오케이. 한 번 해보자."
수십 번 합을 맞춘 끝에 모든 동작이 완성되었다.
웃음 포인트를 위해 약간의 연기도 추가했다. 개별 연습을 마친 동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력쇼의 피날레를 장식할 호신술 시범의 최종 리허설을 선보였다.
"어이 아가씨, 한가하면 우리랑 수강신청이나 하러 갈래?"
태영이 껄렁거리는 모습으로 정음에게 다가갔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새내기들은 어처구니없는 대사에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수강신청이래."
"불량배들이 의외로 학구파란 말야."
정음의 연기는 어색했지만 못 봐줄 정돈 아니었다.
"싫은데? 귀찮게 마시죠?"
"뭐? 싫다고? 이게 건전하게 교양수업이나 같이 듣자고 했더니 어디서 튕겨?"
음, 이제 내 대사가 나올 차롄가.
"···말로 해선 안 될 아이군. 애들아, 쳐라!"
"크크크! 수강신청 거절했다고 치랜다."
"이거 장르가 코미디야?"
"오오! 시작한다. 어차피 액션 영환데 대사가 뭔 필요."
태영과 찬혁은 시종일관 얻어터지는 역할이었다.
서너 시간 동안 합을 맞춘 덕에 두 사람은 정음의 호신술에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물론 정음이 손속에 사정을 두어 때리는 순간 힘을 거두었기에 실제론 거의 아프지 않았다.
드디어 대망의 마지막 대결 장면.
나는 바닥에 떨어진 각목을 집어 들었다. 야비한 나의 모습에 관람하던 동기들 사이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우우! 맨손으로 안되니까 무기까지 드냐?"
"순전 나쁜 놈들 정음이 이겨라!"
"그래, 진짜로 패버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을 돌격시켰다.
"야! 뭉게버려!"
태영과 찬혁이 무작정 달려 나가다 정음의 나래차기를 맞고 쓰러졌다. 공중으로 뛰어올라 왼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오른발로 두 사람을 후려치는 기술에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우아! 대박!"
"완전 황비홍이네."
"꺄아~ 정음짱 다이스키!"
그 순간 뒤로 처져 있던 내가 각목을 들고 정음에게 달려들었다.
"받아랏!"
머리 뒤까지 돌아간 각목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휘둘러 졌다.
정음이 곧바로 발을 들어 각목을 후려쳤다. 반쯤 잘려있던 각목이 우찌끈 부러져 나가며 반 토막으로 변했다.
뒤이어 날아오는 돌려차기.
퍽-
"으악!"
나는 볼썽사나운 신음을 내지르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완벽한 호흡.
"와! 정음이 진짜 멋있다."
"예쁜데 싸움도 잘해!"
"육정음! 육정음!"
호신술 시범이 만족스러웠는지 박수갈채가 끝없이 이어졌다.
"잘했다. 엄청 멋있네."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숙소로 돌아온 성수가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부회장님."
"어, 나 신경 쓰지 말고 쉬고 있어. 연습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먼저 내려왔어.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너희들."
"아닙니다."
"저녁 먹으면 바로 시작이니까 마무리들 잘하고. 이도훈."
"네?"
"넌 잠깐 나 좀 보자."
성수가 손에 든 볼펜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다. 한 대 피우러 가잔 소리군.
나는 성수를 따라 숙소 밖으로 나갔다.
***
"언제부터 봤어요?"
"어, 시작부터. 호신술 시범 멋있네. 캬! 마지막에 각목 날아가는 거 이펙트가 압권이야."
"미리 잘라 놓은 거예요."
"그거야 그렇지만··· 그나저나 정음인 진짜 무술인이구나."
"그죠? 발차기가 일품이에요."
"찬혁이가 한방에 골로 간 것도 이해가 된다. 저 정도 빠르기면 어지간한 남자들은 피하지도 못할 거야."
"어쨌든 찬혁이 덕에 호신술도 하게 된 거죠. 계획에도 없던 건데."
"지금 보니까 잘한 선택 같아. 사실 너무 코믹으로만 가면 웃기긴 한데, 자칫하면 우습게 보일 수도 있거든. 마지막에 호신술에서 정음이가 딱 실력발휘 해주니까 전체적으로 그림이 산다. 아주 예감이 좋아."
"저도 그런 것 같아요."
담배를 태우며 한참 장기자랑 얘기를 하고 있는데 성수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근데, 너 유미랑 뭔 일 있었냐?"
"네?"
"아니. 오전에 말이야, 내가 너 소품 사러 읍내 갔다고 하니까 표정이 살벌하게 변하더라? 그렇게 정색하는 모습은 첨 봤어."
"아···. 보고를 안 하고 가서 그럴까요?"
"보고는 무슨! 여기가 군대냐? 막말로 나한테 말했음 된 거지. 암튼 그것 때문인진 몰라도 스키장에서 내내 저기압이더라고."
"제가 따로 가서 말할게요."
"그래. 뭐 유미가 후배긴 해도 학년은 위니까 친하게 지내는 편이 좋을 거야. 학회장이랑 괜히 사이 틀어지면 학과 생활 피곤하다."
"네."
유미가 너무 질투심이 심하구나.
따끔히 혼내 줘야지.
"참 그리고 너 진짜 정음이 한테 관심 있는거 아니지?"
"정음이요?"
"아니 둘이 차 타고 나갔잖아. 남자애들이 의심하는 것 같더라고. 니가 작업 거는 거 아니냐며."
"그냥 혼자 가기 심심해서 같이 간 거예요. 송판 직접 격파할 당사자니까 보고 고르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
내 해명에 성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말은 했어. 아무튼 정음이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2학년들도 상당히 눈독 들이고 있어."
"그래요?"
"혹시 진짜로 관심 있으면 얼른 채가 버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그것도 먼저 찍는 사람이 임자지."
열 번?
한 번으로 충분하던데 난.
벌써 정음을 따 먹은 나에겐 우습게 들리는 조언이었지만 나는 그려러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음이는 그냥 친한 동생이죠. 그리고 형도 아시겠지만 저 과씨씨에 대해 안 좋은 추억 있잖아요. 웬만하면 과씨씨는 피하려구요."
"아···. 맞다. 그렇지?"
성수는 머쓱한 듯 내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 대학에 널린 게 여잔데 뭘. 나중에 저녁 술자리 때 새내기 순회 인사 있을거야. 다른 과에 맘에 드는 애 있으면 딱 찍기만 해. 형이 너 확실하게 밀어 줄 테니까."
"하하. 말로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서라 임마. 나 먹을 건 알아서 잘 챙겨 먹고 다니니까.
그래도 친한 후배라고 나를 챙겨주려는 마음이 기특했다. 대학에 와 만난 인연 중에선 가장 믿을 수 있는 놈인 것 같다.
"가자. 이제 저녁 먹고 오면 바로 장기자랑 시작이야."
"네."
***
마침내 과별 장기자랑의 막이 올랐다.
국성대 사범대학 12개 학과 새내기들이 펼치는 무대는 이번 새내기 배움터의 하이라이트.
이벤트 업체를 불러 간이 무대를 꾸미고, 조명과 음향이 더해지자 제법 구색이 갖추어졌다.
특별석에는 사범대 교수진들 상당수가 자리하고 있다.
들리는 소문에 임용 합격률만큼이나 과별 자존심 싸움이 벌어진다고 했다. 꼴등한 학과는 1학기 내내 고개를 못 들고 다닐 만큼 치열하다나?
채점은 학과 회장들의 투표로 결정되는데 자기 과 공연에는 점수를 주지 못하는 방식이었다.
학회장 자격으로 심사위원 자리에 앉은 유미는 꿍한 표정으로 체육과 응원석을 지켜보고 있었다.
‘육정음이 이 앙큼한 계집애, 감히 도훈 오빠한테 꼬리를 쳐?’
유미는 오전의 일로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도훈이 소품을 사러 나가는데 왜 그녀가 동행을 한단 말인가?
‘순진한 줄 알았더니 질질 흘리고 다니는 걸레잖아. 혹시 차에서 한 건 아니겠지?’
도훈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주는 여자를 마다할 성격이 아니다. 정음이 작정하고 도훈에게 꼬리 쳤다면 분명 뭔가 일이 벌어졌을 거라 의심하는 그녀였다.
‘심사위원 소집 때문에 따로 불러낼 시간이 없었어. 나중에 술 자리 때 추궁해 봐야겠군.’
유미가 그런 생각을 하는 데 첫 번째 무대가 막이 올랐다.
사회교육과가 준비한 댄스 공연.
아이돌 음악에 맞춰 십여 명의 사회과 새내기들이 멋진 춤을 선보이자 관객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유미는 날카로운 눈으로 채점표에 체크를 시작했다.
‘안무도 전혀 안 맞고 호흡은 더 개판이야. 동선은 왜 저렇게 난잡해? 급조한 티를 못 벗어나네.’
가혹한 평가였지만, 유미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대부분의 학회장은 사회과의 댄스 공연에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번쩍이는 싸이키 조명과 빵빵한 음악에 가려있을 뿐, 사회과의 댄스는 메인을 맡은 두어명을 제외하면 기본기부터 부족한 공연이었다.
낮은 점수를 예감하듯 사회과 학회장의 표정에 실망감으로 얼룩졌다.
이어지는 공연도 역시 마찬가지.
자기 과에 점수를 못 주는 심사 특성은, 타과에 혹독한 잣대를 들이대는 근거가 되었다.
학회장들은 냉정한 눈으로 새내기들의 무대를 평가했고, 어설픈 춤이나 노래 정도론 결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그나마 중간까지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한 것은 국어교육과가 준비한 꽁트. 코미디 프로그램의 무대를 본 따 각색한 것으로 의외의 애드립이 터지면서 관객의 격한 호응을 이끌어냈다.
유미도 국어과 무대를 가장 경계했다.
‘음. 이대로라면 국어과가 가장 위협적이겠는데···.’
그리고 마지막 무대.
체육과의 차력쇼가 마침내 시작되었다.
< 64. 새터섹터-27-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