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새터색터-26- >
스텟창을 보니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다.
우선 개털이던 재정이 500포인트로 늘었다.
정음이를 공략한 보상으로 받은 것이다.
지난번처럼 소모성 아이템으로 날리기보다, 고급 아이템 구매를 위해 비축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육정음이 가진 태권도 재능도 흡수했다.
그녀가 지닌 능력의 3/4 정도라곤 하지만, 원본의 국대급 역량을 고려할 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그리고···
‘랜덤 스킬 박스라···.’
[저번에 말씀드린 플레이어 레벨 승급 보상입니다. 화면을 터치하시면 랜덤으로 스킬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스킬 가짓수가 몇 개나 되지?’
[셀 수도 없이 많죠.]
‘설마 파이어 볼 같은 스킬도 있는 건 아니지?’
나는 대학 시절 읽었던 판타지 소설의 마법 이름을 떠올리며 장난을 쳤다.
그러자 예상도 못 한 의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파이어 볼, 12th 가이아-1203 시스템에 존재하는 스킬이군요.]
‘뭐라고?’
[···아, 아닙니다. 조크였습니다.]
뭔가 기분이 싸하다.
로시가 나에게 그런 농담을 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왠지 말해선 안 되는 비밀을 실수로 언급해버린 느낌이지만, 당장은 그에 대한 추궁보다 새로 얻을 스킬 쪽이 더 궁금했다. 물론 캐묻는다고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아무튼, 존재하는 수천 가지 스킬 중에서 하나가 뽑힌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어떤 기준이나 자격도 없이?’
[네. 대신 칭호 승급 시 받게 되는 ‘랜덤 스킬 박스’에는 한가지 특전이 있습니다.]
특전?
귀가 솔깃해지는 소리다.
‘그게 뭔데?’
[두 가지 스킬이 동시에 제시되고, 그중 하나를 택일할 수 있는 선택권이죠.]
‘오오! 그럼 보고 고를 수 있는 거야?’
[네. 따라서 나쁜 스킬을 뽑을 확률이 줄어들게 됩니다.]
‘대박인데? 플레이어들이 위업에 목을 매는 이유가 있었구나!’
[물론 해당 특전은 호칭의 변동, 즉 하수, 중수, 고수 등 호칭명이 바뀔 시에만 적용됩니다. 해당 등급에서 레벨업 보상은 무조건 원스킬이구요.]
‘오케이. 알아들었어. 그건 그렇다 치고 스킬이 나쁠 수도 있나? 따지고 보면 거의 초능력이나 마찬가지잖아?’
[이렇게 설명해 드리면 이해가 빠르시겠네요. 만약 주인님이 돈이 아주 많은 재벌이라고 가정해보죠.]
‘상상만 해도 좋군.’
[그런데 랜덤으로 받은 스킬이 재정적 수입을 늘려주는데 특화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하! 어마어마한 부자에게 돈을 늘려주는 스킬은 별로 쓸모가 없겠구나.’
[그렇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나쁜 스킬은 없습니다. 다만 어떤 플레이어에게 필요 없는 스킬이 존재할 뿐이죠.]
‘한마디로 자신에게 쓸모많은 스킬이 가장 좋은 스킬이라는 거군.’
‘정확합니다.’
과연 어떤 스킬이 나올까?
긴장감에 크게 심호흡을 하며 슬쩍 옆을 쳐다보았다.
정음은 여전히 유미와 통화 중.
표정이 그닥인 걸 보아 통화 내용이 유쾌하게 흘러가고 있진 않은 모양이군.
"···부회장님께 말하고 갔다는데요? 네? 아니 전 어차피 피구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흠, 마유미 저 년이 감히 우리 정음이를 괴롭히는 건가?
나중에 따끔하게 혼구녕 한 번 내줘야지.
[준비 되셨습니까?]
일단은 스킬부터 받고.
‘누른다.’
디스플레이 창에 뜬 ‘랜덤 스킬 박스’를 터치했다. 그와 동시에 보물상자가 열리는 그래픽 효과가 발동되며 두 가지 스킬이 제시되었다.
1. [포토그라프 메모리(1Lv)]
-특정 순간을 사진을 보듯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기억의 지속시간은 일주일입니다.
-저장할 수 있는 슬롯은 10개입니다.
-다음 스킬레벨로 올리기 위해선 100포인트가 필요합니다.
-다음 스킬레벨에 도달하면 기어의 지속시간이 3일 더 증가합니다.
-다음 스킬레벨에 도달하면 메모리 슬롯이 2개 더 증가합니다.
2. [싸이코메트리(2Lv)]
-사물에 담긴 기억을 영상으로 보여줍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에겐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강한 원념이나 의지가 담긴 물건일수록 더욱 또렷합니다.
-재사용 대기 8시간.
-다음 스킬레벨로 올리기 위해선 200포인트가 필요합니다.
-다음 스킬레벨에 도달하면 영상 속의 장면을 원하는 각도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다음 스킬레벨에 도달하면 재사용대기시간이 10% 줄어듭니다.
‘으읏, 둘 다 괜찮은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도 그렇군요. 주인님께서 고민되실 것 같습니다.]
사진을 찍는것 같은 놀라운 기억력과 사물에 담긴 사람의 정보를 읽어내는 능력.
만화에서나 보던 엄청난 능력이 나오자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둘 다 갖는 건 안 돼나?’
[아쉽지만 둘 중 하나만 얻으실 수 있습니다. 선택까지 3분 남았습니다.]
‘젠장, 차라리 하나가 안 좋으면 미련이라도 안 남을 텐데···.’
어느덧 시계에서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이 시스템의 가장 큰 단점은 모든 선택에 있어 시간제한이라는 압박을 가한다는 사실이다.
하긴, 그런 것이 없다면 묵혀 두었다가 필요에 따라 고르는 꼼수가 발생할 수도 있겠군.
[2:45초 남았습니다.]
‘안 알려줘도 돼. 나도 보고 있으니까.’
잠깐 사이 시간이 빠르게 깎여 나갔다.
줄어드는 초침을 보자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한다.
‘둘 중 뭘 버려야 하지?’
포토그라프 메모리는 분명 시험에 유리할 것이다.
머릿속에 컨닝 페이퍼를 들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도훈의 꿈을 이루기 위해선 3년 뒤에 있을 임용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전생의 이정우였다면 전국 수석도 문제없겠지만, IQ가 100 이하로 떨어진 지금으로선 시험 합격을 장담할 수 없는 입장이다.
‘하지만 과연 이 스킬이 임용시험에도 효과가 있으려나?’
문제는 이 부분이다.
포토그라프 메모리가 무한대의 기억력을 제공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이라는 저장 기간, 10장이라는 메모리 슬롯의 한계가 발목을 잡았다.
대학에서 보는 쪽지 시험이나 중간, 기말시험까지는 어떻게 되겠지만 ‘고시’라고 불릴 만큼 빡빡한 임용시험은 커버하긴 다소 부족해 보인다.
다음은 싸이코메트리 스킬.
처음부터 2Lv이 제공되는 부분은 마음에 들지만, 증거물을 가지고 범인을 찾는 직업이 아닌 이상 쓸모가 없을 것 같다.아마도 형사나 탐정에게 이 능력이 주어졌다면 엄청난 범인 검거율을 자랑했겠지.
하지만 나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 능력을 접근해 보았다.
‘이 걸로 여자를 꼬시는 데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사물에 담긴 기억을 읽어내는 능력.
공략하기 어려운 상대에게 이 능력을 발휘한다면 과거를 캐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 들고 다니는 핸드폰이나 빽 혹은 거울이나 화장품에 손만 대어도 그녀의 취향을 완벽히 저격할 수도 있다.
‘어차피 포토그라프 메모리가 임용시험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나에겐 활용도가 떨어져. 차라리 싸이코메트리 스킬을 이용해서 난이도 높은 미션이나 108위업 달성을 가속화 시키는 편이 좋겠어.’
결정을 내린 나는 두 번째 스킬을 선택했다.
[후회 없는 선택이 되셨길 바랍니다. 현 시간부터 ‘싸이코메트리’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사용하고자 하는 사물에 손을 대고 정신을 집중하면 머릿속으로 연관된 영상이 떠오를 것입니다.]
새로운 스킬을 받은 나는 당장 사용해 보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정음은 여전히 통화 중, 지금이 스킬을 사용할 기회다.
‘어디 민주 차를 한 번···.’
마침 손으로 붙잡고 있던 핸들에 정신을 집중했다.
머릿속에서 뭔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오더니 갑자기 파노라마 같은 영상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
"Why do not you drive me?"
(왜 나보고 대신 운전을 시켜?)
"That's why it's easy to suck your cock."
(그래야 니 자지를 빨기 쉬우니까)
영상 속엔 허여멀건 한 외국인이 민주의 차를 몰고 있었다.
그리고 민주는 보조석에 앉아 백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지퍼를 내리자 서양인 특유의 거대한 양물이 튀어나온다.
"Wow! big and beautiful."
(와우, 크고 아름다워.)
"I really can not let you go. hmm!"
(너란 여잔 정말 못 말리겠군. 흠!)
백인 사내의 바짓가랑이 사이로 민주의 머리가 부표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으슥한 곳을 차를 몰아간 두 남녀는 결국 차를 세우고 카섹스를 시작했다.
그렇게 영상이 끝이 났다.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찌르르한 두통이 밀려왔다.
‘으읏, 뭐야 이건!’
[싸이코메트리 스킬은 일시에 많은 양의 영상정보를 유입시키므로 뇌에 과부하를 초래합니다. 주인님께서 보신 장면은 1분이지만, 현실의 시간은 1초가량 지났을 뿐이니까요.]
‘그런 거야?’
[네. 스킬을 사용하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엄청 리얼한데? 머릿속에서 직접 재생되니까 VR 기계를 착용하고 본 것 같아.’
[정확한 표현입니다. 스킬레벨이 5레벨 이상으로 올라간다면 현장감이 더욱 극대화될 겁니다. 그 당시의 기온과 습도, 냄새 같은 모든 감각들이 활성화되지요. 극성의 단계에 이르면 영상 속 상황이 현실처럼 눈 앞에 펼쳐집니다.]
‘대단하군.’
[하지만 스킬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결국엔 주인님께서 어떻게 활용하시는 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건 걱정 말라고.’
어렸을 때 씽크빅은 안 했지만, 창의력 하나는 자신 있는 나다.
비록 계산능력이나 암기력은 떨어졌을지언정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펼쳐내는 응용력은 여전히 자신 있다.
그나저나 민주 요 계집애. 대물에 환장한다 싶더니 코쟁이들 만나고 다녔구만? 오죽하면 니 핸들이 다 기억하냐.
민주가 옆에 있다면 이렇게 충고하고 싶었다.
-정신 차려 이것아! 우리 것이 몸에 좋은 것이여! 귀에다 때려 박아, 신토불이!
"···네, 회장님."
그사이 전화를 마친 정음이 한껏 짜증 난 표정으로 전화기를 내렸다.
"왜, 회장이 뭐라 그래?"
"몰라. 자기한테 말도 안 하고 외출했냐고 새내기가 개념이 있느니 없느니 그러잖아. 으이씨 짜증 나."
"뭐? 내가 분명 성수 형한테 말하고 나왔는데?"
"그래서 나도 그 말 했지. 그러니까 부회장은 부회장이고 회장한테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괜히 신경질이잖아. 내가 무슨 애야?"
"음···."
이건 나에 대한 화풀이다.
정음과 단둘이 차를 타고 나온 것에 질투를 부리는 것이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내가 돌아가서 다시 설명할 게."
"그럴 필요 없어. 괜히 오빠까지···."
"아니. 난 내 여자가 욕 듣는 거 싫어서 그래."
"오, 오빠···."
정음이 다시 발그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내 여자란 말이 그렇게 듣기 좋았을까?
"내가 말했지. 이제부터 넌 내꺼 라고."
"···으, 응. 그럼 우리 이제 사귀는 거야?"
나는 선뜻 대답을 주저했다.
심정 같아선 그녀에게 정착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좀 이르다는 판단이었다. 미션을 달성하거나 위업을 클리어하려면 여친이란 존재가 부담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것은 자승자박.
"정음아. 나 분명 너한테 호감이 있어. 하지만 아직 사귀기는 이른 것 같아."
"아···."
"우리 만난 지 겨우 이틀 됐잖아. 서로를 좀 더 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처녀까지 빼앗은 남자치곤 비겁한 변명이었다.
정음은 한껏 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알았어."
"난 있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실망한 그녀를 어루만질 멘트가 필요한 순간이다.
"···기왕이면 결혼할 여자랑 사귀고 싶어."
"결혼?"
"응. 그래서 사람 사귀는데 최대한 신중하려고 해. 사귀고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 만나고. 이런 거 너무 싫더라. 무슨 말인지 알겠니?"
"으, 응."
"그래서 내가 사귈 마음을 갖는다면 그건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야."
"아···."
"내가 정말 너에게 그런 확신이 들면 먼저 고백할 게. 괜찮겠니?"
"응!"
정음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이 먹히는 걸 보면 백치임이 분명하다.
물론 아주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껏 공략한 여자들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매일 밤 어린 아내인 정음이 명기로 나를 조여준다면, 상상만으로 행복할 것 같다.
다시 기분이 풀어진 정음은 그녀답지 않게 연신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녀와 즐거운 드라이브를 마치고 숙소로 복귀한 시간은 점심시간이 다 돼서였다.
***
도훈이 정음과 함께 읍내로 소품을 사러 간 사이, 체육과 남학우들은 풋살장에서 연신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 청년은 벤치에 삐딱하게 앉아 남들 공 차는 모습을 구경만 했다.
그 청년의 이름은 바로 강찬혁.
컨디션이 안 좋다는 핑계로 혼자 열외 된 찬혁은 어제의 일을 떠오르자 가슴 속에 불길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육정음. 이 육시랄 년!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개 쪽을 줬다 이거지?’
도훈의 제안으로 짜 맞춘 각본처럼 위장하긴 했지만, 그것관 별개로 정음에게 앙심을 품은 찬혁은 하루 종일 어떻게 복수할지를 구상하는 중이었다.
‘대놓고 깠다간 나만 매장당할 거야. 도훈이 형이 어제 일을 까발려 버릴지도 모르고. 우연히 벌어진 사고로 위장해야 돼.’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찬혁은 우연히 벤치 주변에 떨어진 각목을 쳐다보았다. 각목 격파 시범을 맡은 애들이 막간을 이용해 차력 연습한다며 들고나온 것이었다.
보기에는 위협적이지만 실제론 실톱을 이용해 2/3쯤 잘라두고 펼치는 묘기.
그것을 보는 순간 찬혁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 어쩌면 이걸 이용하면···.’
도훈이 기획한 차력 쇼는 분명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육정음도 그 잘난 얼굴에 스크레치가 나게 되겠지.
찬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 63. 새터색터-2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