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새터섹터-19- >
마라톤 용사 양말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하루 세 번은 확실히 무리였나 보다. 말이 세 번이지 이래저래 꼴려있던 시간을 감안하면 깨어있던 시간의 1/3은 발기되어 있었을 것이다.
바닥에 눕자마자 몰려오는 피로감에 스르륵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에 잠을 깼다.
"···도훈아, 일어나봐."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녘. 상대가 핸드폰 플래쉬로 나를 비추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야?"
"나다, 성수."
"···성수 형?"
"어. 사우나나 가자고."
시간을 보니 새벽 6시.
평소 8시까지 늘어지게 자는 나로선 조금은 이른 시간이다.
"갑자기 웬 사우나?"
"리조트 예약하고 나온 쿠폰 좀 챙겼어. 우리끼리 가려다가 한 자리 남아서 너 끼워주는 거야."
"우리요?"
고개를 들자 이미 채비를 마친 두 남학생이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17학번 새내기 김태영, 나머지 한 명은 2학년 과대 정우선이란 녀석이었다. 강찬혁 때문에 본보기로 팔굽혀 펴기를 100회 실시했던 바로 그 놈.
"형, 얼른 일어나세요."
"선배, 걔 안 일어나면 그냥 찬혁이나 데려가죠? 어제 돌려차기 맞고 하루 종일 뻗어서 쌩쌩 할 텐데."
"아냐, 도훈이 깼다."
잠에 취한 상태로 성수에게 끌려가다시피 사우나로 향했다. 슬리퍼 두개를 같은 짝으로 신을 만큼 정신이 없었지만, 사우나에 도착할 때쯤엔 어느 정도 잠이 깬 상태였다.
"너 어제 왜 일찍 간 거야?"
"저요?"
"애들 강습시키고 같이 상급자 코스 같이 가려고 찾았더니 벌써 가버렸더라?"
"좀 피곤해서요. 오랜만이라 생각대로 몸도 안 따라주기도 하고."
"그래? 하긴 너랑 같이 보드 탄 게 1학년 겨울 방학 때니까 벌써 2년도 더 지났네. 감을 잃을 만도 하지."
태영과 우선이 탕에 들어간 사이 나와 성수는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웠다.
역시 담배는 잠 깬 직후 모닝 땡이 최고다.
"근데 이 멤버 뭐에요?"
"우선이는 어제 얼차려 준 게 미안해서 데려왔어. 그리고 태영이라는 애는 보기보다 싹싹하더라고. 얘기 안해봤지?"
"네."
"크크. 그 새끼 엄청 골 때리더라."
"골 때려요?"
"어. 어제 보드 가르치다가 우연히 친해졌는데 과를 잘 못 선택한 거 같아. 아주 그냥 천성이 개그맨이야."
"그래요?"
솔직히 1학년 새내기 남자는 찬혁이 말곤 누가 있는지도 모른다. 여자들도 다 기억 못할 판국에 사내새끼들을 뭣하러 신경 쓴단 말인가.
"아무튼. 쟤들 너 복학생인거 모르니 조심해서 행동해. 우선이가 나쁜 애는 아닌데 선후배 관계 엄청 따지거든."'
"2학년 과대 말이죠?"
"어. 군대도 안 갔다 온 놈이 군기가 바짝 들었어. 어차피 너 복학하면 같이 수업 들을 사이니까 이 기회에 좀 친해져 봐."
"네 형, 근데 저 화장실 좀 들렀다 갈 게요. 갑자기 배가···."
"그래. 나 먼저 들어가 있을 게."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좌변기에 앉았다.
모닝땡 다음에 모닝똥. 원래는 같이 해야 제 맛인데.
[일찍 일어나셨군요. 컨디션은 괜찮으십니까?]
‘그럭저럭 이야.’
[터프 걸을 공략하라 미션 잔여 시간이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분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으! 어제가 절호의 찬스였는데, 하필 마유미 고년이 훼방 놓는 바람에.’
[그래도 두 사람 관계에 확실하게 못을 박아 다행입니다.]
‘안심하긴 일러.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잖아.’
[그렇지 않습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아이템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마인드리딩이 가능한 걸요. 4500포인트만 모으시면 구매 가능합니다. 아참, 반값 할인 쿠폰도 있으니 2500포인트면 되겠군요.]
‘근데 반값이 왜 2500이야? 2250아니고?’
[최대 할인 폭이 2000 포인트 까집니다.]
‘거참 상술 하고는. 아주 소셜커머스 뺨치는구먼?’
[잊으셨습니까? 저희가 원조라는 걸.]
‘맞다, 그랬지. 암튼 사람 성격이라는 게 쉽게 바뀌는 게 아냐. 40년 쯤 살아보니 그렇더라. 오죽하면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말까지 있잖아. 절대 방심할 수 없어. 마유미는.’
[주인님의 철두철미한 성격을 보니 뒤통수 맞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말이라고 해? 내가 치면 쳤지 맞곤 못 살지. 아참 너 방수 되는 거 맞지?’
[네. 마리아나 해구에 담그셔도 끄떡없습니다.]
‘오버 하지 말고. 탕에 들어갈 거니까 그리 알아.’
용변을 마치고 사우나에 들어가자 세 남자가 나란히 탕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입학 전이었는데, 제가 한 번 모 커뮤니티에서 키베를 뜬 적이 있거든요."
"키베?"
"키보드 배틀요. 아가리 파이팅 비슷한 거."
"아하!"
태영은 타고난 달변가였다.
그는 뻔한 이야기도 익살맞게 표현하는 재주가 있었고, 그것으로 사람을 웃기는 데 자부심을 가진 사내였다.
지금도 그는 선배들과 욕탕에 둘러 앉아 최근 자신이 겪었던 경험담을 풀어 내고 있었다.
"왜 요새, 메갈이라고 있잖아여? 완전 극단적인 여성우월주의 단체."
"어, 들어봤어."
"아마도 거기 회원이었나봐요. 제 댓글에 한남이니 소추니 평균이 6.9센티 하면서 엄청 시비를 터는 거예요."
"근데 한남 소추가 뭐야?"
"한국 남자, 작은 고추의 준 말이죠."
"엥? 별 지랄 같은 말이 다 있네."
"암튼, 제가 발끈해서 직접 눈으로 봐라, 한국 남자가 절대 작지 않다는 걸 보여주마, 했거든요."
"그럼 직접 만났단 말이야?"
"네. 그 커뮤니티가 오프가 좀 활발한 편이거든요. 여하튼 여차저차 연락처를 받아가지고 밤에 만나 1차로 소주 네뎃병 깐 다음에 모텔로 입성하는데···."
꿀꺽-
태영의 말솜씨가 워낙에 출중했기에 두 사내는 블랙홀처럼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특히 보통 사람들에겐 생소한 인터넷 오프라던가, 자극적인 원나잇 스토리가 남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태영이 뜸을 들이며 궁금증을 유발하자, 참다못한 성수가 재촉해 왔다.
"모텔로 입성했는데 뭐, 그래서 했다고, 못했다고?"
"물론 하긴 했죠."
"대박! 그러니까 첨 만난 여자를 그날 먹었단 말이야?"
"네."
"···이뻤냐?"
과묵한 우선마저 끼어 들었다.
평소 각도기라 불릴 만큼 군기 잡힌 사내, 우선이 입을 열 정도였으니 태영의 입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결론은 그렇긴 한데 중간 과정이 더 웃겨요. 그때 제 닉넴이 ‘남기남’이었거든요."
"남기남?"
"그게 뭔 뜻이야?"
"네, 그 여자애도 똑같이 묻더라구요. 닉네임 뜻이 대체 뭐냐고. 그래서 제가 가슴 까면 알려 준다 그랬죠."
"그래서 깠어?"
"술도 들어갔겠다, 정신도 알딸딸하겠다 바로 벗더라고요."
"햐-, 이 새끼 재주 좋네. 그리곤?"
"그러니까 다시 무슨 뜻인지 알려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빤쓰 오픈하면 알려줄게, 그랬죠."
"미친! 크크크."
"그런다고 진짜 벗어?"
"어차피 여자가 술 먹고 남자랑 모텔 온 순간 나 잡아 드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래."
"작정 했다 봐야지."
"그렇게 빤스까지 벗기고 나서 저도 확 따라 벗었거든요. 그러니까 훅 하고 제 물건이 튀어 나온 거예요."
"크크크크."
"솔직히 말해서 제가 어디 가서 좆 크기론 꿀려 본적 없거든요. 그 메갈도 한남 소추니, 평균 크기 6.9니 놀리다가 제 걸 보더니 깜짝 놀란 거예요. 한참 뻥진 얼굴로 쳐다보다가는 이렇게 묻더라구요. [그게 다 들어가긴 해?], 해서 제가 대답하기를 [그럼 남기남?]"
"푸하하하! 그래서 남기남이야?"
"이 새끼, 존나 미친 새끼네. 크크."
"햐, 그날 진짜 끝내줬죠. 그 여자가 대학교 2학년이라는데, 저도 동갑이라고 뻥쳤거든요."
"너 그때 민짜 아녔냐?"
"아니에요. 스무 살은 넘었으니까. 암튼, 그날 다 해서 3번은 뺀 거 같아요."
"캬! 정의 구현 제대로 했네."
"어쨌든 걔는 두 번 다시 한남 소추 같은 얘기는 못하겠죠. 내 대물 맛을 봤으니."
태영이 의기양양 다리를 활짝 벌리던 그때였다.
도훈이 욕탕에 발을 담근 것은.
***
"어쨌든 걔는 두 번 다시 한남 소추 같은 얘기는 안하겠죠. 내 대물 맛을 봤으니."
‘대물? 누가 또 나 같은 사람이 있나?’
나는 욕탕에 발을 담근 채 세 사람을 스윽 훑어보았다.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뒤늦게 나를 발견한 성수가 말했다.
"도훈이 왔냐? 방금 태영이가 빵 터지는 썰 풀었는데, 글쎄 자기가 그렇게 대물이란다."
"대물요?"
나는 그대로 탕 안에 앉은 태영을 내려다보았다.
예전 5cm 시절엔 항상 수건으로 가리고 대중탕을 이용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 활짝 그곳을 열어 보인 채였다.
태영은 무심결에 나의 물건을 쳐다보더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그렇게 크냐?"
태영이 슬그머니 다리를 움츠리더니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으헉! 진짜 대물은 따로 계셨네요, 제가 경솔했습니다!"
"크크크. 너 왜 갑자기 소심해졌나? 남기남 어쩌고 할 땐 언제고?"
나의 물건 크기를 익히 알고 있던 성수가 급격히 자신감을 잃은 태영을 놀렸다. 성수 옆에 앉은 우선도 내 물건의 크기에 혀를 내둘렀다.
"도훈이 장난 아니네"
"원래 도훈이가···."
성수는 원래부터 크다는 말을 꺼내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곧바로 실수를 깨닫고 말을 바꾸었다.
"···도훈이처럼 키 큰 애들이 거기도 실한 법이잖아."
"키 크다고 다 크진 않잖아요?"
"아니 그럴 확률이 높다는 거지, 내 말은."
"근데 왜 선배는···."
"뭐? 나는 원래 큰데 살에 파묻힌 거고! 이 새끼 지금 누구 놀리냐? 욕탕 바닥에 원산폭격 한 번 꽂아 드려?"
"노, 농담이었습니다."
성수와 2학년 과대 우선은 무척 친근한 사이로 보였다. 넉살 좋은 태영도 선배들 사이에서 주눅 들지 않고 금세 보조를 맞추었다.
남자 넷이 나란히 욕탕에 앉아 있으니 자연히 화제는 여자 이야기로 넘어갔다.
성수가 가장 선배답게 분위기를 주도해 갔다.
"이번 우리 과 새내기들 예쁘지 않냐? 관심 있는 사람 있음 솔직히 말해봐."
"없어요."
"하루 보고 어떻게 알아요."
"그럼 누가 젤 이쁜지나 말해봐."
"그건 역시 정음이가···."
"육정음요."
우선과 태영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확실히 정음의 외모는 누가 봐도 인정하는 수준이구나.
숏 컷에 제대로 꾸미지 않아도 그 정도인데, 작정하고 화장이라도 하면 엄청 인기 많을 타입이다.
"도훈이 넌?"
둘 다 정음을 언급하는 바람에 나는 괜히 딴 사람을 불렀다.
"전 학회장님이 예쁘던데."
"마유미? 유미가 예쁘긴 하지. 근데 유미는 새내기가 아니잖아. 너네 학번에서 제일 예쁜애 누구냐고."
우선과 태영이 시선이 내 입술로 향했다. 왠지 견제당하는 느낌에 생각나는 이름을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음, 서현이요."
"서현이?"
"학과 수석으로 들어왔다는 걔?"
사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서현이도 이쁘긴 하지."
"맞아요. 조용해서 그렇지 은근 매력 있는 타입이랄까?"
내 대답을 들은 우선과 태영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느낌이 쌔하다. 설마 나를 라이벌로 의식하고 있다는 소린가?
아니나 다를까 태영이 본심을 내비쳤다.
"저 솔직히 육정음한테 관심 있어요."
"진짜?"
"이 새끼 아깐 아무도 없다며?"
"도훈이 형이 정음이랑 친한 것 같아 혹시나 했죠."
"우선이 넌? 너도 설마 정음이 찍은 거야?"
우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예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우선이형 그럼 제가 정음이 작업해도 괜찮아요?"
"······."
"어, 이 새끼 대답 못한다. 크크."
세 사람은 한참 정음을 화제에 올리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차력 연습할 때 봤더니 은근 가슴도 크더라."
"운동 오래한 여자애들이 확실히 몸매가 좋아."
"진짜 말투 조금만 사근사근했으면 인기 터졌을 걸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내 눈에 예뻐 보이면 남들에게도 예쁜 법이구나. 하고.
"암튼 도훈이형이 라이벌 아니라니 진짜 다행이네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훈이 형은 감당 안 될 것 같았는데. 키도 크지 잘생겼지··· 거기도. 흠."
"근데 정음이 노리는 사람 한 둘이 아닐걸? 2학년 애들 사이에서도 엄청 인기 많아."
"어지간한 사람은 제가 다 커버 칠 수 있죠. 제가 얼굴은 이래 빻았어도 이빨 하나는 기가 맥히게 털잖아요."
태영은 손을 팩맨처럼 구부리더니 입가로 가져가 터는 시늉을 했다. 싼티 나는 동작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피식하게 만드는 제스쳐다.
[주인님, 드디어 연적의 등장이군요.]
‘태영이?’
[장우선이란 사람도 관심이 없진 않아 보입니다.]
‘먹음직스런 음식에 파리가 꼬이는 건 예상했던 바야.’
하긴, 지금까지는 비교적 무난한 흐름이었다.
기춘 정도를 제외하면 라이벌이라 부를 사람도 없었고,-솔직히 기춘은 맞수라기보다 상대를 돋보이게 하는 소품 같은 존재였지만- 대개의 경우 나만 열심히 하면 여자를 자빠뜨리는 데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의 두 사내를 본 순간, 대학이라는 정글에 나 말고도 수많은 사냥꾼들이 득실거리고 있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내 먹잇감을 내줄 생각은 전혀 없어.’
놈들이 돌팔매질이나 할 줄 아는 구식 사냥꾼이라면, 나는 최신 저격 총을 든 첨단의 헌터다. 나에겐 원주인이 물려준 압도적 피지컬과, 천상계의 가호가 함께하고 있다.
‘어찌됐건 최대한 빨리 정음을 자빠뜨려야겠군.’
욕탕 속에서 나의 대물이 꿈틀거렸다.
< 56. 새터섹터-1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