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새터섹터-18- >
한 바탕 격렬한 정사를 치르고 나자 흡연 욕구가 올라왔다.
사람을 면전에 두고 담배를 태우는 것은 결례이지만, 나는 거침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기서 피우시게요?"
"어차피 돈 주고 빌린 방이잖아."
유미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스쳐 지나간다.
실내에서 흡연하는 행위보다, 섹스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담배부터 찾는 나의 배려 없는 행동에 더 실망한 눈치다.
"창문 좀 열게요."
"그렇게 해."
라이터에 불을 붙이고 알몸으로 의자에 앉는데, 유미가 테이블 위로 재떨이를 들고 왔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화장지를 물에 적셔 재떨이 밑에 깔아 둔 채다.
"너도 한 대 필래?"
"아, 아뇨. 전 비흡연자라. 콜록-콜록-"
매캐한 담배 연기에 유미가 고개를 돌리며 기침을 했다.
‘이 정도면 확실히 정 떨어지겠지?’
[네, 주인님. 정말 쓰레기 같은 행동이군요.]
‘뭐 인마?’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진술해 보았습니다.]
‘나의 비서로서의 견해는?’
[집착이 심한 성격으로 봐선 이 정도로 나가떨어질 것 같진 않습니다.]
‘흠. 역시 더 차갑게 행동 해야 하나?’
솔직히 유미에겐 약간의 미안한 마음이 있다.
처음부터 욕을 허용한 것도 나였고, 업적을 위해 그녀의 성욕에 장단을 맞춘 것 역시 나다.
그러다 갑작스런 태세 전환.
그녀로선 마치 사기를 당한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 잠시 불편하다고 매몰차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존재는 앞으로 학과 생활에 지속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 관계 시마다 엉덩이에 스파이크를 꽂아대는 고통을 더는 견디고 싶지 않다.
내 엉덩이는 소중하니까.
"나 사실 맞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욕 듣는 것도 싫어하고."
"정말요? 전 오빠가 멜섭(Male Sub)인 줄 알았어요."
‘멜섭이 뭐냐? 혹시 알아?’
[SM플레이에서 남녀의 성향을 나타내는 축약어입니다.]
‘축약어?’
[남자를 뜻하는 Male과 여자의 Female 줄여 멜과 펨이라하며, Domination의 약자인 돔과 Submission의 약자인 섭을 조합해 모두 네 가지 형태로 표현 합니다 즉 펨돔-멜섭은 여자 주인에 남자가 노예인 형태, 펨섭-멜돔은 여자 노예에 남자가 주인인 형태를 의미하지요.]
‘헐, 뭔가 존나 체계적인데?’
[SM플레이어끼리 서로의 성향을 빠르게 캐치할 수 있도록 고안한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만? 넌 이런 단어를 어찌 아는 거야? 원주인이 설마?’
[아닙니다. 인공지능에겐 각각의 플레이어가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가이드북 기능이 제공됩니다. 주인님의 인생 목표가 ‘여자들이랑 원 없이 해보는 것’이라 하셨죠?]
‘남의 좌우명을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하지 말라고.’
[아무튼 그로 인해 저는 성적인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백과사전 급 지식을 장착하게 되었습니다. 맞춤형 도움말 시스템이라고나 할까요? 언제든 이런 쪽으로 궁금한 게 생기시면 기탄없이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잘났다, 이 음란 마귀 같은 녀석.’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인님께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오빠?"
로시와 대화 하느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것 같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담배를 비벼 끈 뒤 대답했다.
"그냥 한 번 맞춰 준거야."
"네?"
"맘에 안 들었지만 니 취향에 맞춰 준거라고. 여자 따먹으려면 뭔 짓을 못 하니?"
"······."
유미는 큰 충격 받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쓰레기 같은 대사다.
그러나 기왕 정 때기로 한 거 나는 거침없이 다음 말을 쏟아 냈다.
"그리고 굳이 따지면 난 멜돔에 가까워. 강간하듯 섹스하는 걸 즐기고, 완전 제 멋대로인 독재자 스타일이지."
"······."
"실망스럽니? 니가 생각했던 남자가 아니라서?"
당연히 실망스럽겠지.
이건 나쁜 남자 정도가 아니라, 그냥 쓰레기 새끼니까.
그녀가 스르륵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질끈 입술을 깨문다.
이제 뺨 한 대 맞고 관계를 마무리할 차롄가?
조금은 진부한 결론이지만, 여기서 손절할 수 있다면 그 정도 희생은 감수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참 말을 아끼던 유미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노력해 볼게요."
"뭐?"
"오빠한테 맞춰본다고요."
뭐야?
이야기가 왜 또 이렇게 돼?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다.
상성으로 따지면 그녀와 나는 자석의 같은 극처럼 서로를 밀어내는 관계다. 그런데 지금은 발언은 그녀 스스로 극을 바꾸겠다는 의미였다.
"사실···. 아깐 무척 당황했어요. 저한테 그토록 심하게 대한 사람은 오빠가 처음이었으니까."
이제는 내가 할 말을 잃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유미의 고백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저 느껴버렸어요."
"······."
"오빠가 절 함부로 대하는 데, 욕을 퍼붓고 머리채를 움켜쥐는 데도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당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아냐, 이게 아니라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굳이 나한테 맞출 필요는 없어. 각자 취향이란 게 있는 거잖아."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또 그렇게 하고 싶고요."
"내가 널 막 대해도 상관없단 말이야?"
"오빠가 원하신 다면요."
유미의 눈을 응시했다.
간절함? 절박함?
자존심을 내팽개치고서라도 나를 붙잡으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후후. 역시 떡정이 무서운 법이군요.]
‘떡정 같은 소리! 고작 두 번 했다고!’
[누군가에겐 하룻밤의 섹스가 평생의 추억거리가 될 수도 있는 법이죠. 그녀의 입장에선 오랜만에 속궁합 맞는 상대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거겠죠.]
‘젠장.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아까처럼 내 일에 사사건건 훼방 놓는다 생각해봐. 내가 어떻게 여자를 따먹고 다닐 수 있겠어? 그래서야 어떻게 미션을 해결하고 위업을 달성하겠냐는 말이야.’
[확실히 난봉꾼에게 가장 무쓸모 한 것은 조강지처랄까요.]
"난 한 여자에게 얽매일 생각 없어."
"제가 구속할 까봐 걱정 되세요?"
"솔직히. ···그래."
"그럴 생각 추호도 없어요. 어차피 오빤 손에 잡히지도 않을 바람 같은 사람이잖아요."
"그럼 내가 누구를 만나건, 아니 다른 여자랑 마구 자고 다녀도 상관없다는 거야?"
"네."
"질투하지도 않고, 방해하지도 않을 거고?"
"네."
햐-!
미쳤다, 진짜.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지?
"왜?"
"오빠가 좋으니까요."
"내가?"
"네."
"·····."
역시 남자는 잘생기고 좆 크면 장땡이었단 말인가!
또 다시 마주하게 된 냉혹한 진실 앞에, 나는 전생이 기억이 떠올라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이정우, 너란 녀석은 헬 난이도에 떨어진 최악의 망캐에 불과했구나.
연봉? 학벌? 씨바, 다 개나 주라 그래!
"오빠랑은 하는 게 좋아요. 저 아까 완전 느껴버렸거든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이 남자라면 내 취향을 바꿔도 괜찮겠구나 하고."
젠장, 나름 고심했던 비장의 한 수가 혹 때려다 혹만 붙인 꼴이군.
물론 여자는 다다익선이다.
그렇지만 같은 학과에서만 벌써 두 명 째.
이러다 진짜 팔선녀 옆에 끼고 체육과 기둥서방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흠···."
머릿속이 복잡해진 나는 담배를 한 개비를 더 꺼내 물었다.
유미가 곧장 테이블에 놓인 라이터를 들었다. 부싯돌을 여러 번 돌리고서야 겨우 불을 붙인 걸로 보아,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사람 같았다. 그래도 나를 위해 봉사하려는 태도가 제법 기특하다.
‘하긴 이대로 내치긴 아깝단 말이지. 키가 좀 큰 게 부담스럽지만 이정도면 와꾸도 괜찮고, 속궁합도 잘 맞는 편이고.’
[그냥 받아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저렇게 까지 저자세로 나오는데.]
‘내 정액은 무슨 마르지 않는 샘인 줄 아냐? 이러면 진짜 감당 못 한다고. 게다가 같은 과에 섹파를 여럿 두었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편의점 알바야 안보면 끝이라지만, 대학을 중퇴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그럴 때를 대비해 문어다리 어플을 구비 해놓지 않았습니까?]
‘하긴 문어는 다리가 여덟 개지.’
결심을 굳힌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유미에게 말했다.
"좋아. 이렇게 하자."
"네. 오빠 하자는 데로 따를 게요."
"너랑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구속하는 기미가 보이면 난 당장 관둘 거야."
"네."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난 소문나는 거 싫어.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절대로 티내지 마. 그럴 수 있어?"
"네."
"마지막으로 이건 설마 하는 거지만 우리 사이에 안전장치가 필요할 것 같아."
"안전장치라뇨?"
"니가 나랑 잘못되고나서 이상한 소문이라도 내면 곤란하니까."
"오빠,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런 사람이 처음부터 어딨어. 감정이 틀어진 이후가 문제지."
내 우려는 그것이었다.
집착이 심한 유미가 나중에라도 나를 옭아맬지 모른다는 생각. 물귀신 작전을 펼친다면 그녀 역시 타격을 입겠지만, 나에겐 너무나 큰 리스크다.
이를 위해선 확실한 입막음이 필요했다.
"사진 하나만 찍자."
"사진요?"
"그래. 헐벗은 모습 그대로."
순순히 대답하던 유미도 마지막 요구엔 망설이는 기색을 내비췄다. 너무나도 불공정한, 여자인 유미에겐 수치심이 들 정도로 일방적인 계약 조건.
"왜 못 하겠어?"
"···할게요. 그래야 오빠가 마음이 놓인다면요."
나는 폰 카메라를 이용해 그녀의 적나라한 나신을 찍었다.
얼굴과 가슴이 나오게 한 컷.
그리고 밑에 다 노출되게 또 한 컷.
이제 그녀는 나와의 관계가 틀어지더라도 결코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같이 나가면 의심 받을 거야. 먼저 숙소로 갈 테니 10분 뒤에 와."
유미와 헤어지고 숙소로 복귀하는데 로시가 말했다.
[조금은 잔인한 요구가 아니었을까요?]
‘사진 말이야?’
[네.]
‘어쩔 수 없었어. 남녀 사이라는 게 자칫하다간 막장까지 치닫기 쉬운 법이거든. 네가 그랬잖아. 내가 무사히 교사가 되지 못하면 위험하다고.’
[그건 그렇죠.]
‘다른 사람이었음 이렇게까지 안 했을 거야. 하지만 유미는 학과에서 발언권이 센 사람이야. 잠재된 기질 역시 폭력적이지. 지금은 나에게 푹 빠져서 고분고분 따르지만, 수틀리면 내 앞길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위협적인 상대랄까? 하지만 안전 장치가 내 손에 있는 이상 자폭은 못 하겠지.’
[과연 주인님은···. 무시무시한 분이시군요.]
‘너만 하겠냐, 야동 백과사전.’
[왠지 모욕적인 표현 같은데요?]
‘어쭈, 인공지능에게도 인권이 있어?’
[안드로이드도 전기양의 꿈을 꾸는 법입니다.]
‘그래. 전기양이잖아. 실제 양 말고.’
[으읏!]
크크.
드디어 로시를 말싸움에서 눌렀군.
자꾸 깐죽대더니 한 방 먹은 소감이 어떠냐?
***
도훈이 떠난 뒤 홀로 남아 샤워를 하던 유미가 히스테릭한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악!"
‘이도훈, 이 나쁜 새끼.’
거울에 비춰진 그녀의 표정에선 방금 전의 순종적인 여인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독기를 가득 품은 마유미가 분을 못 참고 씩씩 거렸다.
"니가 감히 날 가지고 놀아?"
사실 도훈에게 맞춘다는 말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전략이었다.
순순히 따르는 척 하다 결정적인 순간 학과 전체에 씨씨를 선포,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구속하고,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의 먹음직스런 몸뚱이를 다른 여자에게 양보하고픈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도훈이 마지막 순간 사진을 요구할 줄이야.
이렇게 되면 씨씨 선포를 통한 속박 전략은 불가능해 진다.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린 유미가 싸늘한 얼굴로 입술을 비틀었다.
‘두고 봐. 이번엔 이렇게 넘어가지만 언젠간 널 내 걸로 만들고 말 거야. 넌 날 벗어날 수 없어. 이도훈.’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가 젖꼭지를 자극하자 유미의 손이 스르륵 가랑이 사이로 내려갔다. 비누칠을 하지도 않았는데 잔뜩 미끌거리는 그곳을 향해 유미의 손가락이 깊숙이 파고 든다.
"하아···."
유미는 도훈의 커다란 자지를 떠올리며 자위를 시작했다.
크고 단단했던 도훈의 육봉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한 자신의 손가락.
두 개, 세 개를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에 유미가 안타까운 숨을 내뱉었다.
"도훈이 자지는 내 거야.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을 거야."
욕망의 화신으로 변한 유미는 한참을 샤워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
숙소로 복귀하자 먼저 돌아온 동기들이 나를 향해 물었다.
"도훈이 형, 오셨어요?"
"어, 다른 애들은?"
"거의 다 복귀한 거 같아요."
나는 두리번거리며 정음을 찾았다. 그러나 정음은커녕 여자동기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애들이 한 명도 안 보이네?"
"잔다고 옆방으로 다 옮겨갔어요. 저쪽 방은 선배들이 쓴다니까 1학년은 거실이나 작은 방에서 자면 되요."
젠장.
혼숙이 불가능한 새터의 분위기를 깜빡했다.
이대로라면 오늘 밤 정음을 만나는 것도 불가능하겠군.
여자방으로 가서 정음을 불러내는 것도 이상해 보일테고.
혹시나 해 폰을 뒤지자 부재중 전화 두통과 문자가 여럿 와있었다.
그러나 모두 조교 강민주가 남긴 것이었다.
-주인님, 어디 계세요? 전화를 안 받으시네요.
-주인님, 수동으로 바이브 켜고 정상에서부터 내려가는 중이에요. 아아, 밑이 젖어버려.
-주인님, 음란한 민주를 어서 와서 혼내주세요. 눈밭에서 개처럼 따먹어 주세요.
-···도훈아?
문자를 확인하고는 어이가 없어 한참을 웃었다.
팬티 속에 딜도 꽂고 활강하는 여자 조교라니···.
정말 체육과엔 변태가 한 둘이 아니구나.
나는 피곤해 먼저 와 잔다는 답장을 남긴 체 구석으로 가 잠을 청했다.
생각해 보니 정음이랑 번호 교환을 안 했었다.
이러니 연락이 올 리 없지.
아쉽지만 오늘은 넘어가야겠다.
< 55. 새터섹터-18-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