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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섹터!17
찬혁이 건들거리며 말했다.
"혼자 심심해 보이 길래 미트 좀 잡아줬어. 그러게 파트너 놔두고 어딜 돌아다니는 데?"
위아래 없는 시건방진 말투는 여전했다.
처음엔 단순히 싸가지 없는 새끼라고만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나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방금 못 들었어? 소품 문제로 조교 샘한테 다녀왔다고 했잖아."
"아하. 그러셨구나? 난 또 우리들만 연습 시켜놓고 혼자 놀러 다니는 줄 알았지."
"...뭐 인마?"
명백한 시비.
나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패었다.
이쯤 이면 불혹의 인내심을 가진 나라도 도저히 참기 힘들다. 버릇없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저 놈은 말로 해서 깨달을 놈이 아니다.
내가 주먹을 움켜쥐는 데 로시가 경고해 왔다.
[고정하십시오, 주인님. 도훈군의 원만한 대학 생활을 위해서라도 참으셔야 합니다. 폭력은 감당할 수 없는 사태를 유발할지도 모릅니다.]
‘나 말리지마. 내가 언제까지 저런 핏덩이 새끼의 도발을 참아 줘야해? 이건 남자로서 자존심의 문제라고!’
[물론 억울한 심정은 십분 이해합니다만, 주인님께서 처한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좀 더 현명한 해결책을 찾아보는 것이...]
로시의 만류로 머뭇대는 사이 찬혁이 다시 도발해 왔다.
"어? 지금 주먹 쥔 거야? 왜, 나랑 스파링이라도 뜨게?"
‘...안 되겠다. 저승에 다시 끌려가더라도 저 새낀 응징해야 직성이 풀리겠다.’
결심을 굳히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내 앞을 끼어들며 소리쳤다.
"야! 강찬혁! 형한테 그게 무슨 말 버릇이야!"
나와 찬혁 사이를 가로 막은 사람은 나보다 훨씬 흥분한 육정음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워낙에 우렁찼기에 뿔뿔이 흩어져 연습하던 동기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생각지 않게 일이 커지는 것에 부담을 느낀 찬혁이 "쳇-!" 하고 이죽거리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니, 나가려 했다.
그러나 정음은 찬혁의 회피하는 태도가 못 마땅했는지 돌아선 놈의 팔목을 붙잡았다.
"사람이 얘기하는 데 어딜 가?"
"...놔라, 이거. 존말 할 때."
찬혁이 정색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정음은 어이가 없다는 듯 더욱 흥분해 소리쳤다.
"존말? 잘하면 한 대 치겠다?"
"경고하지만 난 여자라고 봐주는 거 없어."
찬혁의 말에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찬혁은 여전히 육정음과 실랑이를 계속했다.
"셋 셀 때까지 이거 안 놓으면..."
찬혁의 강압적인 태도에도 정음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세."
"...뭐?"
"셋 세, 새끼야. 이게 어디서 힘만 믿고 까불어. 복싱 좀 배웠다고 사람 우습게 보이냐?"
"이런 쌰아-"
아마도 찬혁은 "썅"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의 입모양이 "앙" 발음에 맞게 벌려졌다.
그러나 찬혁은 단어를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바닥으로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휘둘러진 정음의 돌려차기가 턱 끝에 적중했기 때문이었다.
퍽- 쿵-
둔탁한 사운드는 거의 동시에 울려 퍼졌다.
탁-하고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말처럼, 퍽-하고 맞는 순간 쿵-하고 쓰러진 것이다.
실이 끊어진 연처럼 방바닥에 처박힌 찬혁은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반쯤 뜬 눈이 흰자만 드러낸 것을 봐 충격으로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다들 놀란 가운데 옆방에서 선배들이 몰려왔다. 누군가 싸움이 벌어지기 전 선배들을 부르러 갔던 모양이다.
학회장인 유미와 부회장 성수를 비롯한 선배들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깜짝 놀랐다.
"뭐야? 싸움이라니?"
"얜 또 왜 이러냐? 죽었어?"
성수가 손가락으로 경동맥을 짚으며 말했다.
"아니. 기절한 거야. 영필이 넌 프론트 전화해서 리조트 의무실 있는지 확인해."
"넵."
"너희 둘은 찬혁이 부축해서 편안한 데 눕히고."
"네, 선배."
성수의 조속한 대처로 상황이 수습되었다. 그 사이 다른 후배들에게 대충 설명을 들은 유미가 말했다.
"다들 별일 아니니까 호들갑 떨지 말고 저녁 식사 갈 준비해. 그리고 정음이 넌 나 좀 보자."
마유미가 정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
"어떻게 된 거야? 애들 말로는 정음이 네가 일방적으로 팼다는데?"
"그 새끼가 먼저 시비 털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말로 해야지. 넌 태권도 선수 출신이라며? 사람을 다짜고짜 패면 어떡하니?"
"그 새끼도 운동 배웠거든요? 복싱."
"아니 그래도 그렇지..."
건물 복도에서 두 사람이 얘길 나누는데 어느새 다가온 도훈이 끼어들었다.
"정음인 잘못 없어요."
"도훈이...너도 관련 있어?"
"네. 제 문제니까 정음이는 보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면 안 돼지. 이건 너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학과 문제가 될 수도 있어. 가뜩이나 체육과 기합 주네 마네 말도 많은데... 폭력사태까지 벌어졌으니."
마유미는 지끈 거리는 이마를 붙잡았다. 하필 새터 첫날부터 새내기들끼리 싸움이 벌어지다니. 학회장을 맡아 의욕을 불태우기도 전에 시작부터 어그러진 느낌이었다.
"이러다 신고라도 하면 큰일 인데..."
"신고요? 하라 하세요. 저도 정당방위거든요?"
"정음아. 넌 일단 들어가 있어."
"아니 형도 봤잖아. 그 새끼가 나 먼저 치려고 하는 거."
"알았으니까. 일단 흥분 가라앉히고 들어가. 내가 해결해 볼 게."
도훈의 말에 정음이 분을 못 참고 씩씩거리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마유미와 둘 만 남게 된 도훈은 차분하게 앞뒤 사정을 설명했다. 도훈의 설명을 모두 들은 유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듣고 보니 찬혁이가 먼저 잘못한 건 맞는데..."
"너무 걱정 마. 지도 쪽팔린 줄 안다면 신고는 못 하겠지. 일단 깨어나는 데로 내가 잘 타일러 볼 게."
"괜찮을 까요 도훈 선배?"
단 둘이 남게 되자 유미가 자연스레 말을 높였다.
도훈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수습해 봐야지."
***
찬혁이 정신을 차린 건 기절한 지 10분 쯤 지나서였다.
"허억!!!"
비명을 내지르며 상반신을 일으킨 찬혁이 갑자기 허공을 향해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씨발, 뭐야 뭐야!"
"깨어났냐?"
"...어?"
텅 빈 방안에선 침대에 누운 자신과 옆에 의자를 끌어 앉아있는 도훈뿐이었다. 구조로 보아 숙소에 있는 방 중 하나로 보였다.
"너 정음이 돌려차기 맞고 기절했어. 기억나?"
"돌려차기? 앗..."
얻어맞은 부위로 통증이 밀려오는지 찬혁이 턱 끝을 움켜쥐었다.
"비, 비겁하게 사람 방심하고 있는데 때리다니!"
"비겁은 새끼야, 여자랑 싸우려는 니가 비겁이고."
"뭐, 뭐라고!"
찬혁이 흥분해 소리치는데도 도훈은 여전히 차분하게 말했다.
"쪽팔린 줄은 아냐?"
"...."
자존심이 구겨졌지만 찬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자신의 완패다. 펀치가 충분히 닿을 리치에서 발차기 한 방에 나가 떨어졌다. 정음의 공격은 보이지도 않았다. 정식으로 다시 붙는 다해도 자신 없었다.
"너 사람 놀리러 왔냐?"
"아니 도우러 왔다."
"돕는다고?"
"내가 지금 너라면 쪽팔려서 새터고 뭐고 집에 돌아가고 싶을 거 같거든."
"......"
"이래가지고 학교는 제대로 다니겠냐? 여자한테 쳐 맞고 기절했다고 학교에 소문 쫙 돌 텐데."
도훈의 펙트 폭력에 찬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자신이 평소 복싱 배웠노라 뱉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창피했다. 찬혁이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씨발...진짜 자퇴라도 해야 하나?"
"자퇴는 왜? 내가 더 도와준다니까?"
"...어떻게?"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사실 난 찬혁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다만, 자퇴나 휴학이라는 막다른 길에 몰린 찬혁이 유미를 곤란케 하거나 정음을 폭행죄로 고소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것은 찬혁을 돕는 게 아니라 정음을 돕는 것이고, 유미를 위하는 길이었다.
"내가 정음이랑 말 맞출 거야. 너랑 합을 맞춰본 거라고."
"합?"
"그래. 호신술 시범 리얼하게 하려다 오버해서 니가 맞은 거라고."
"......"
"그럼 애들도 니가 싸움에서 졌다고 생각 안하겠지. 정음이가 돌려차기 잘못하는 바람에 사고가 난 걸로 하자."
"그, 그게 통할까?"
"통하고 말고가 어딨어. 우기는 거지. 나랑 정음이, 그리고 학회장님까지 옆에서 지원해주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 게다가 실제로 차력 코너에 호신술도 넣음 더 확실하지."
찬혁은 대충 사이즈가 나오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퇴까지 고민하던 그에게 나의 제안은 동아줄처럼 느껴졌을 테다.
"근데 왜...날 도와주는 건데? 너 나 싫어하는 거 아녔어?"
"새꺄! 선배가 후배 위하는 게 당연하지."
"선배라고? 설마?"
"그래. 나 사실 14학번이고 스물 셋이다. 엑스맨 이벤트 한다고 새내기로 위장한 거고. 회장인 유미도 내 후배 뻘이야."
"아!..."
"감쪽같았지? 선배니까 당연히 너보다 아는 것도 많고 진행도 잘할 수 밖에 없지. 임시과대인 니 입장에선 그게 좀 고까워 보였을 수도 있는데, 나도 정체를 밝힐 수 없었어."
"저, 전... 그런 것도 모르고... 죄송했습니다."
찬혁은 내 정체를 알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흠, 아주 나쁜 놈은 아니었던 건가?
턱 끝이 퉁퉁 부운 놈의 얼굴을 보자 살짝 연민의 마음도 들었다. 사실 싸가지 없긴 하지만, 혈기 넘치는 스무 살 나이에 남보다 돋보이고 싶은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헌데 그것이 나로 인해 자꾸 존재감이 옅어지고 비교되다 보니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내 정체를 알고부터는 찬혁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한참 나이 많은 선배에게 반말 찍찍 한 게 미안했던 건지, 아니면 더 이상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서 마음이 편해진 건지는 모르겠다.
나는 찬혁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속여서 미안하고. 앞으로 잘 하자."
"네. 선배."
"사람들 앞에서 선배 소린 하지 말고. 끝날 때까지 안 들키는 게 내 임무니까."
"네!"
"편하게 반말 햄마. 아깐 잘도 하더니."
"도, 동기가 아닌걸 아는데 어떻게 그래요."
이놈 봐라?
속 터놓고 얘기하고 보니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네?
[주인님, 혹시 ‘숨겨왔던 나의...’ 위업을... 그렇군요. 복싱능력 또한 분명 탐나는 재능이지요.]
‘뭐, 뭔 소리야! 남자는 죽어도 싫다고!’
[전에도 말했지만 편식은 위업 달성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으으. 대가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절대 안 해.’
"암튼 애들한텐 내가 잘 말해 놓을 테니까 좀 쉬고 있어."
"네."
"반말 하라니까."
"으, 응."
찬혁이랑 계속 단 둘이 있다간 괜히 기분이 이상해 질 것 같아 밖으로 나왔다.
문밖에선 마유미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