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62화 (42/2,000)

────────────────────────────────────

새터?섹터!16

정보창 스킬이 제안한 ‘추천멘트’를 이렇게 써먹을 줄은 예상 못했다.

성적으로 개방적인 선진국에서야 흔한 칭찬이지만,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섹시하다.’는 말은 무척 위험한 표현이 될 수 있다. 외모나 언행이 건강미 넘친다는 긍정적인 뜻보다는, 싸 보인다. 혹은 헤퍼 보인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벼, 별말을 다 하네. 형두, 참."

다행히 정음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나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신호. 이에 확신을 가진 나는 좀 더 말을 보탰다.

"요샌 청순가련한 스타일보단, 몸매 탄탄하고 활달한 여자들이 인기 많잖아. 걸 그룹들도 운동선수 출신 많이 뽑는 편이고."

"그만해. 사람 민망하게..."

정음은 거듭되는 칭찬이 부끄러운 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락만 꼼지락 거렸다. 저런 모습을 보면 육정음도 완전 여자여자한 성격같군.

그때 안방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도훈이 잠깐 나 좀 보자."

박성수였다.

***

"너희들 차력쇼 하기로 했다며?"

"네."

성수는 나를 건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아이디어는 괜찮은데 재료는 어떻게 하려고? 소품 구하려면 오늘이라도 차타고 읍내 나가야 할 텐데..."

"조교 샘한테 부탁해 보려고요."

"민주 선배?"

"네."

성수가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선배가 과연 해줄까? 누나 귀찮은 거 엄청 질색하는 스타일인데..."

"그래요?"

"솔직히 쫌 예쁜 편이잖아. 넌 잘 모르겠지만, 학부생 때부터 콧대 높기로 유명했거든."

"얼굴값 한다는 소린가요?"

"어.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외제차 몰던 남친이 1년 동안 매일 강의 끝나고 학교 앞으로 데리러 왔거든. 집에 태워다 주려고. 말이 남친이지 거의 운전기사 수준이었지. 근데 바쁜 일 때문에 딱 한 번 펑크 냈는데, 그길로 뻥 차버렸잖아."

"와...진짜요?"

"그렇다니까? 성격이 이상한 건 아닌데 하도 주변에서 들이대니까 남자를 좀 우습게 본다 해야 하나? 아쉬운 소리 할 일도 없으니 굳이 친절할 필요도 없고. 너도 그런 종목으로 결정할 거였음 나한테 상의부터 하고 하지."

성수는 좌불안석인 표정이었다.

재료 구입이 난항에 빠질까 지레 겁먹은 눈치랄까?

그래도 부회장이랍시고 자신이 함께 부탁하면 나을 거라며 당장 강민주에게 가보자 했다.

정 안되면 택시 타고서라도 나가야 될 판이라며.

크크. 성수, 이놈아.

네가 아직 모르는 사실이 있구나.

민주가 얼마나 콧대 높은 여자였는지 몰라도, 지금은 내 애완견에 불과하다는 걸.

나는 불안해하는 성수의 뒤를 따르며 피식 웃었다.

***

"당연히 도와줘야지."

"저,정말요? 고맙습니다 선배님. 귀찮으실 텐데..."

"귀찮긴. 새내기들이 학과를 위해 멋진 공연 준비한다는 데 그 정돈 당연히 해줘야지. 하나도 안 귀찮아."

쿨 하게 승낙하는 민주의 모습에, 성수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자기가 알던 강민주가 맞나? 하는.

거 봐. 내가 그랬잖아.

민주는 내 부탁이면 꼼짝을 못 할 거라고.

나는 성수의 사각지대에서 민주를 쳐다보며 혓바닥으로 윗입술을 핥아 보였다.

잘했으니 다음에 상을 주겠다는 사인.

그 모습에 자극 받은 민주가 말했다.

"말 나온 김에 지금 사러 나가지 뭐. 해떨어지면 산길운전 피곤하니까. 나랑 도훈이랑 같이 다녀오면 되겠네."

"그래 주시면 감사죠."

성수는 일이 잘 풀린 것이 기쁜지 덥석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튕긴 쪽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아, 전 계속 공연연습 해야 될 것 같은데... 사야 할 품목 제가 적어 왔거든요? 이대로만 사다 주시면 돼요."

나는 메모지를 꺼내 민주에게 건냈다.

단둘이 차를 타고 가면서 응큼한 짓(?)을 기대했던 민주의 얼굴에 순간 실망감이 내비췄다.

이를 오해한 성수가 나에게 대뜸 소릴 질렀다.

"인마! 조교 선생님이 귀찮은 걸 무릅쓰고 도와준다는데 넌 무슨..."

그러나 민주는 오히려 나를 두둔하며 성수를 나무랬다.

"너 왜 도훈이 한테 뭐라 그러니? 연습한다고 바쁘다잖아. 나 혼자 다녀와도 돼."

"에, 에? 아니 그래도 그게..."

"내가 괜찮다니까? 그렇잖아두 도훈이 엑스맨하느라 고생하는데."

중간에 낀 성수는 나와 민주를 번갈아 쳐다보며 누굴 편 들어야 할지 멘붕에 빠진 표정이었다.

둘 사이의 관계를 모르고 있는 성수로선, 도도하고 까칠한 조교가 왜 내게 꼼짝 못하고 설설 기는지 영원히 미스테리일 것이다.

짜샤, 옛 말에 서방이 밤일을 잘하면 아침밥부터 달라지는 법이라 잖니.

***

조교에게 떠넘기듯 일거릴 전달하고 온 성수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민주 선배 조교 되고나서 엄청 착해졌네?"

"그래요?"

성수가 어찌알았을까? 나한테 조교되서 착해진건. 크크.

나는 성수의 말을 들으며 몰래 민주의 폰에 문자를 남겼다.

-부탁 들어줘서 땡큐. 말 잘 들었으니 다음에 상 줄게.

"진짜 예전 같았음 얄 짤 없었지. 아까 뭐라고 한건, 내가 안 그랬다간 민주 선배가 먼저 짜증 낼까봐 그런 거야."

"그랬구나. 근데 제가 따라갔다간 애들 연습 안 될까봐서요. 게다가 자꾸 조교샘이랑 같이 돌아다님 엑스맨 들킬지도 모르고..."

"하긴 그것도 그렇네. 암튼 잘 해결돼 다행이다...담배나 한 대 빨고 가자."

"네."

그때 문자가 도착했다.

-아녜요. 저야 주인님이 행복한 거라면 뭐든 다 해드릴 수 있는 걸요. 주인님이 상주시기만 기다리고 있어요. 헤헤.

‘크크. 콧대가 높긴 무슨. 대물 맛 한 번 보고 나더니 정신 못 차리는 고만.’

나는 다시 문자를 남겼다.

-오는 길에 성인용품점 들러서 전동 딜도 하나 사와. 리모컨조작 되는 걸로.

내가 담배를 입에 문 채 폰을 만지작거리자 성수가 물었다.

"누구한테 문자 보내냐?"

"같이 알바하던 친구에요."

"오, 여자야?"

"네."

"이쁘냐?"

"그럭저럭요."

"썸타는 거?"

"아니 뭐 그런건 아니고..."

썸은 인마, 형은 시작부터 바디 타는데.

성수는 문자 상대가 누군지 짐작도 못한 채 나에게 조언했다.

"사귈 거 아님 적당히 해둬. 나도 알바 할 때 친하게 지내던 애들 많았는데, 개강하니까 금방 멀어지더라고. 학교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달라서."

"...그럴 거 같아요."

멀어진다라....

문득 수연의 얼굴이 떠오른다.

편의점에서 얽힌 인연들을 정리한다면 가장 먼저 청산될 가능성이 높은 그녀. 섹파로 지낼까도 고민 해봤지만,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며 관리해줘야 하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여자도 많은 데 굳이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을 계속 끌고 가고 싶진 않다.

‘그나저나 육정음에 앞서 마유미부터 공략해야 재능 모방자 스킬을 얻을 수 있을 텐데...성수에게 정보 좀 캐볼까?’

"형. 학회장 남친 있어요?"

"마유미? 내가 알기론 없을 걸? 왜? 너 관심 있냐?"

"아뇨. 제가 아니고 누가 궁금해 하길 레요."

"누가?"

나는 강찬혁의 이름을 팔았다.

"1학년 임시과대요."

"아, 찬혁이? 크크. 걔는 안 될 걸?"

"왜요?"

"유미가 키가 좀 큰 편이잖아. 그래서 키 작은 애들은 남자로 보지도 않는 것 같더라. 저번에도 국어과에서 누가 대쉬했다가 차였거든."

"키가 얼마나 커야 되는데요?"

"최소 180? 찬혁인 유미랑 키 비슷하잖아. 그래서 안 될 거야."

허허.

갑자기 180 이하는 루저라 부르던 여자가 생각나는군. 하지만 본인 키가 175 이상이라면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있다고 봐야지.

성수가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미도 안됐어. 그 정도면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은데 키가 너무 커서 남잘 못 사귀다니..."

"그럼 계속 남친 없었데요?"

"아니 아마 작년 초까지는 사귄 걸로 알고 있어. 어디 배구 선수라고 했던 거 같은데... 유미가 고등학교 때까지 선수 생활을 해가지고 그쪽으로 인맥이 있나 보더라."

"지금도 학교 대표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우리 학교는 프로로 진출하는 학교는 아니잖아. 유미도 고민하다가 진로 틀었을 거야. 솔직히 프로 되는 것도 힘들지만 안정적이지 않으니까."

성수는 한참 여자 프로 배구선수의 평균 연봉과, 선수 생활 이후의 진로. 그리고 교직의 안정성에 대한 심도 있는 비교를 해주었다.

"암튼 예체능 계통이 다 그렇잖아. 잘 터지면 진짜 한도 끝도 없이 날아올라도, 잘 안 풀리면 일반 직장인들보다 어중간해 지는 거. 근데 유미는 아직도 조금 미련 있는 거 같더라. 배구 꾸준히 하는 거 보면."

"그런가 보네요."

"암튼 찬혁이한테는 꿈 깨라고 전해줘. 아쉽지만 예선 탈락이라고."

"...네. 형."

전생의 이정우였다면 예선 탈락은커녕 서류 심사부터 낙방이겠군.

그나저나 성수를 통한 탐문은 별 다른 소득이 없었다.

180이 이하는 남자로 안 본다는 거랑, 1년 전까지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정도?

***

숙소로 돌아온 나는 차력쇼 연습 상황을 전체적으로 점검했다. 아직 소품이 없어서 제대로 된 연습은 불가능 했지만, 다들 의욕 넘치는 표정이다.

육정음이 나를 보더니 쪼르르 달려왔다.

"뭐하다 왔어? 부회장님이 뭐래?"

"어, 차력쇼 소품 구하는 것 때문에. 방금 조교샘한테 부탁하고 왔어. 갑자기 빠져서 연습 못 했지, 미안."

"아냐. 괜찮아. 찬혁이가 도와줬거든."

"...찬혁이가?"

정음의 뒤를 보니 찬혁이 한 손에 배게를 든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왠지 띠꺼운 표정으로.

저 새끼, 보면 볼수록 맘에 안 드는데...?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