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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눈이이16
예림이 정색하며 소리쳤다.
기춘이 가끔 실없는 소릴 한다지만 이 정도로 경우 없는 태도를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오히려 평소엔 철저한 무시로 일관했기에 자신과 말 섞기를 어려워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
하지만 지금의 기춘은 달랐다.
그는 약이라도 빤 사람처럼 시뻘겋게 충혈 된 눈으로 예림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흡사 먹이를 노리는 파충류의 눈빛.
그리고 그 먹잇감은 아무래도 자신인 듯 했다.
'미, 미쳤어. 제 정신이 아냐. 이럴 때 도훈이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예림의 단호한 태도에도 기춘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버럭 성을 냈다.
"씨발! 고만 좀 튕기라고!!! 나도 니 맘 다 안다니까!"
"오, 오빠! 진짜 왜 그러...꺄악!"
기춘이 두팔을 치켜들고 덮칠것처럼 달러들었다.
비명을 질러보았지만 노래방 설비 된 방음벽을 뚫지 못했다. 더구나 다른 방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묻혀 바깥으론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문 벨을 누르지 않는 이상 종업원도 들러보지 않는 완벽한 밀실.
예림은 완전히 독안에 같이 쥐 신세였다.
다급해진 예림이 테이블을 빙 둘러 도망치며 도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빠, 빨리 좀 받아! 무서워 죽겠단 말이야!’
부르르르- 부르르르-
그러나 황당하게도 진동음은 룸 안에서 들려왔다.
소파 틈 사이에 낀 도훈의 전화기가 빛을 발하며 떨고 있었다.
‘노, 놓고 갔어? 폰을?!’
예림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어린 시절의 악몽이 또다시 재현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그것도 평소 손톱에 낀 때 정도로 취급하던 기춘에게서...
벼락 같이 달려든 기춘이 그녀의 전화기를 뺏어 던졌다.
예림의 폰이 벽면에 부딪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폰 질은 나중에 하고, 얼른 배꼽 인사부터 하자."
"오, 오빠 제발 진정하세요. 우리 말로 해요. 예?"
예림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도훈의 담배로 인해 성욕이 최고조에 오른 기춘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에겐 예림의 반항이 앙탈처럼 느껴졌다.
그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자들은 자지 박으면 꼼짝 못한다니까? 얼른 꽂아 버려. 그럼 예림인 영원히 니 거야.
"흐흐. 예림이 너도 나한테 박히고 나면 좋아질 거야. 수아도 처음엔 엄청 부끄러워했어"
"꺄아아악! 누구 없어요? 사, 살려 주..읍읍!"
기춘은 예림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우악스럽게 가슴을 주물렀다.
예림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욕망의 노예로 변한 기춘의 완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강간을 당하는 사람은 평소 힘의 3배가 세 진다는 속설이 있다.
위기의 순간 발휘되는 초인적인 괴력.
그러나 문제는 성폭행 하는 사람은 7배나 강해진다는 사실이었다. 기춘이 남자치곤 왜소한 체격이라곤 하나, 여자 하나 힘으로 굴복 못 시킬 정돈 아니었다.
저항하는 예림을 제압한 기춘이 득의만면한 웃음을 지었다.
"가만히 있어! 흐흐."
기춘의 손이 불쑥 예림의 치맛속으로 파고들었다.
"흡!"
"어쭈? 말로는 싫다면서 팬티 흥건한 것 좀 보소? 내가 그렇게 좋냐?"
"아, 아니 이건..."
도훈 덕에 팬티가 푹 젖어 있던 예림은, 기춘의 오해에 뭐라 항변할 말이 없었다. 기춘이 젖은 예림의 팬티를 끌어내리는 순간.
닫혀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도훈이 등장했다. 뒤로 종업원도 대동한 상태.
"제가 폰을 깜빡 놓고···"
"도, 도훈아!!!"
울먹이는 예림, 그 위에 정복군처럼 올라탄 기춘.
빠르게 사태를 파악한 도훈이 성난 표정으로 기춘에게 달려들었다.
"야이씨! 이게 무슨 개짓거리야!"
도훈이 발바닥을 들어 예림을 덮치고 있던 기춘의 면상을 밀어 찼다.
퍽-!
예림에게 올라 타 있던 기춘은 한 방에 고꾸라지며 테이블과 함께 나동그라졌다.
우당당탕탕-!
***
"아니 글쎄 제 말 좀 들어 보시라까요? 이 새끼도 공범이란 말이에요!"
경찰서로 끌려온 기춘이 조서를 쓰던 도중 나를 향해 소리쳤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개소리마 씹새꺄! 어디서 물귀신 작전을 쓰고 있어?"
경찰이 난감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저기 흥분하지 마시고 일단 참고인으로 오셨으니까..."
"아니 흥분 안하게 생겼어요? 저 새끼가 술취한 여자 친구 좀 집에 데려다 달라며 저를 택시 태워 보내더라구요.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여자 친구가 술에 취했는데 다른 사람보고 가라니요. 찝찝하긴 했지만 설마 그런 생각으로 저를 보낸 건 줄은 몰랐죠."
"그런데 왜 돌아오셨죠?"
"폰을 가게에 놔두고 가서요. 바로 기사님께 부탁해서 차 돌려서 왔더니, 글쎄 이 새끼가 예림이를 덮치고 있지 뭡니까? 택시는 저 새끼가 까까오 어플로 불렀으니까 기록 남아 있을 거에요. 기사님이랑 통화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경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해명을 들은 기춘은 황당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이도훈 이 씨발놈아!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냐? 형사님, 진짜로 저 새끼가 먼저 예림이 작업치자고 절 꼬득 였다니까요?"
"하-, 이놈 완전히 악질이네? 너 증거 있냐?"
"뭐?"
"내가 너 꼬득였다는 증거 있냐고!"
기춘이 불쑥 뭔가 생각난 듯 경찰에게 말했다.
"저 새끼가 룸소방에서 저에게 보낸 문자 있어요. 이거 보세요."
기춘이 폰을 들어 경찰에게 제출했다.
나 역시 같이 문자를 확인했다.
[도훈이]
-형, 슬슬 게임 시작하죠.
am.2:14
-ㅇㅇ
am.2:14
-형, 너무 심하게 하지 마요.
am.2:52
-형. 지금 화내시면 완전 나가리에요. 참아야 됩니다.
am.3:15
제출한 깨톡 내용을 본 경찰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기춘에게 물었다.
"이게 성폭행 모의를 한 증거라구요?"
"아, 아니 이게 왜 이렇지? ...이럴 리가 없는데?"
기춘이 황당해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는 분명 나와 지속적으로 메시지를 교환했다.
하지만 나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들은 처음부터 철두철미 배제했다.
그와 했던 모든 모의는 둘만 있을 때 대화로 해결했으며, 룸 안 에서도 중요한 부분은 눈빛이나 손동작으로 대신했다. 그러니 당연히 깨톡에는 의미 없는 내용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짐짓 화난 표정으로 경찰에게 따졌다.
"형사님, 이거 무고죄로 고소해도 되죠?"
기춘이 뜨악하며 소리쳤다.
"무, 무고죄라고?"
"그럼 새끼야. 죄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했으니 무고죄지. 너 콩 밥 먹을 준비나 해."
"저기 진정하시구요. 일단 피의자 조사부터 끝내고 진행합시다. 참고인 분은 이제 집으로 귀가하셔도 좋습니다."
다른 경찰이 나를 기춘에게서 때어 놓으며 밖으로 이끌었다.
계속 같이 두었다가 일이 확대될 것을 우려한 것 같았다.
기춘이 물러가는 나를 향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욕설을 퍼붓자 나는 중지손가락을 들어 빡 큐를 날려주었다.
쌤통이다. 그러게 왜 심보를 고약하게 쓰니?
경찰서 바깥으로 나오자 내가 형사에게 물었다.
"예림인 어떻게 됐어요?"
"아까 다른 형사님이랑 피해자 진술 마치고 부모님과 함께 귀가 한 걸로 압니다. 충격이 상당히 큰 것 같던데..."
내가 자조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제 잘못이에요. 설마 같이 술 먹고 놀다가 저런 짓을 벌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내용 대강 들어보니 아주 악질적이더군요. 심지어 여자 친구도 같이 있었다던데..."
"그러니까요. 어떻게 여자친구를 먼저 보내고 다른 여자를... 형사님, 저 경우엔 형량이 어떻게 됩니까? 합의하면 풀어주고 그런 건 아니죠?"
"예전엔 강간이 친고죄라 합의 종결도 되기도 했는데 요샌 무조건 형사처벌입니다."
"미수인데도요?"
"미수더라도 마찬가집니다. 아까 보니 피해자에게 폭행흔적도 남아있던데 그 경우엔 강간 치상혐의가 적용되어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미수범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나마 감형이 되려면 피해자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당사자가 절대 합의할 생각은 없다 하더라구요."
"그럼 오늘부터 구속인가요? 같이 알바하고 있어가지고 사장님한테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네, 현행범이니 유치창에서 구속영장 떨어질 겁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차후에 추가적인 조사에 응해야 할 수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차량이 없으시면 집까지 태워 드릴까요?"
"아뇨. 혼자 갈게요. 수고하세요."
나는 경찰서를 나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아를 만났다.
그녀는 기춘의 강간미수가 벌어질 당시 택시에 타서 졸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사건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는 집에도 못들어가고 계속 경찰서 바깥에서 대기하던 중이었다.
"어떻게 됐어요?"
수아는 내가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기춘 오빠가...세상에..흑흑."
"너가 충격이 크겠다. 너무 상심하지마."
"진짜 그런 사람인줄은 몰랐어요. 성격이 좀 이기적이긴 했지만..."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해."
"흑흑. 예림 언니한테두 미안하고, 쪽팔려 죽겠어요. 남자친구가 강간범이라니..."
"울지마. 수아야."
나는 자연스럽게 수아를 안아주었다.
수아는 내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벌써 5시가 넘었네. 많이 피곤하겠다. 오빠가 바래다 줄 게."
"고마워요 도훈오빠."
수아 역시 큰 충격을 받았는지 택시 안에서도 계속 몸을 떨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진정시켰다.
"겁먹었나 보구나."
"네... 무서워요. 저 자취하고 있거든요. 막 기춘오빠 찾아와서 해꼬지 하면 어쩌죠?"
"걱정마. 이제 감옥에 들어가면 얼굴 볼 일도 없을 테니까. 절대 그럴일 없을거야."
수아가 내 눈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빠... 오늘만 저랑 같이 있어주심 안되요? 아침까지만요."
안 되긴.
이 순간만 기다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