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39화 (19/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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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눈이이10

"무슨 난데없는 소리야!"

화들짝 몸을 뺀 예림이 빼액 소리쳤다.

예상 밖의 격렬한 반응에 나 역시 주춤거렸다.

‘너무 나갔나?’

[글쎄요,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의 의미가 아닐까요?]

‘그렇기도 하지만...어쨌든 괜한 소릴 했나 싶은데.’

사실 손금 따위는 볼 줄 모른다.

철학관 외삼촌도 모두 지어낸 얘기다.

그녀를 한 번 떠보기 위해 무심코 던진 말이, 한창 달아오른 분위기에 찬물을 뿌린 격이 됐다.

하긴 첫 만남부터 싸 보이고 싶은 여자는 없을 것이다.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우라면 더더욱.

동시 공략에 대한 부담감에 마음이 조급했던 것 같다.

"뭘 그렇게 정색까지 해?"

"나 그런 애 아니거든? 사람 대체 뭘로 보구..."

"아니, 그냥 손금이 그렇게 읽혔다는 거지. 너가 진짜로 그런 사람이라는 소리가 아니고. 오해 말아."

"쳇, 순 엉터리잖아, 그거."

애써 둘러댄 변명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예림은 여전히 화기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토라진 것처럼 고개를 휙 돌렸다.

기껏 잡은 주도권이 다시 팽팽해 졌다.

이런 경우라면 마법의 터치도 아무 소용없다.

치녀가 아닌 바에야, 성감대를 자극하는 손길만으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순 없는 노릇이다. 그게 정말로 가능했다면 지하철 치한들이 구속될 일도 없었을 거다.

‘젠장,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확실히 수연이나 하린이보다 레벨이 높은 여자야.’

그런 생각을 하는 데 노래를 막 끝마친 기춘이 모니터를 보고 버럭 화를 내고 있었다.

"뭐야! 겨우 82점이라고? 이거 순 엉터리잖아!"

쟨 또 무슨 개소리람?

국어책처럼 가사를 읊어 댄 것에 비하면 오히려 후한 것 같은데...

하지만 속마음과 달리 나는 박수를 보냈다.

"노래방 점수야 다 랜덤이잖아요. 노래 잘 하시네요, 기춘이형."

기춘은 그것이 아부인지도 모르고 잔뜩 어깨를 추켜세운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가 틀림없다, 저 놈은.

"하핫, 쑥스럽구만. 내가 발라드 쪽은 좀 약해도 랩은 되거든. 원래 힙합은 플로우와 라임을 살려야 제 맛이 나지."

"어쩐지... 진짜 래퍼 같았어요, 형."

우쭐거리던 기춘은 갑자기 나에게 들고 있던 마이크를 건넸다.

"말나온 김에 도훈이 너도 한 곡 해라."

"저요?"

"그래. 노래방 기계까지 있는데 한 곡은 뽑고 가야지."

"노랜 자신 없는데..."

"어허! 남자는 이런데서 빼는 거 아냐."

기춘이 은근슬쩍 나를 도발해온다.

자신이 노래를 잘한다고 착각하고, 예림 앞에서 비교우위를 점하려는 얄팍한 수작으로 보였다. 내가 선뜻 나서지 못하는 모습에 더욱 적극적으로 부추겼다.

그의 의도를 눈치 챈 내가 거듭 사양하는데, 옆에 있던 수아마저 거들기 시작했다.

"그래요, 저도 듣고 싶어요. 도훈오빠 노래."

그녀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단순히 남친 편들기가 아닌, 진심으로 내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눈치. 이쯤 되면 너무 빼는 것도 없어 보인다.

"알겠어요. 그럼..."

전생의 나는 노래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음치까진 아니지만 고음부가 잘 안 올라가고, 박자 몇 개 놓치는 수준.

그것은 이도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험 삼아 도훈의 목으로 아는 노래 몇 개를 불러보니, 음정이 영 불안하고 리듬감도 없었다. 여러모로 잘난 녀석이지만 노래 실력까진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닮은 구석이라곤 전혀 없던 두 사람이 유일하게 닮은 게 노래 못하는 거라니, 조금은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이제 걱정 없다. 나에겐 아이템이 있으니.

나는 노래방 책자를 뒤적이며 미리 준비한 목캔디를 입에 삼켰다. 다섯 알에 200포인트나 하는 아이템이다.

[‘오늘은 내가 가수다’, 목캔디입니다. 제아무리 음치라도 목캔디를 먹고 나면 5분 동안 가수에 필적하는 노래 실력을 갖추게 되지요.]

‘그게 가능해? 이럴 거면 교사 말고 차라리 가수 데뷔 쪽이 빠르겠는데?’

[하지만 효과가 일시적 입니다. 또 소모성 아이템임에도 한 번 사용하면 24시간 동안 약효가 들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렇군. 그나저나 200포인트가 아깝긴 한데... 뭐 꼭 이번 건 아니더라도 나중에 써먹을 데가 있을 테니까.’

목캔디를 삼킨 나는 故김광석의 히트곡 [사랑했지만...]을 선곡했다. 자리로 돌아간 기춘은 화면에 제목이 뜨자 곧바로 빈정거렸다.

"아이고, 도훈아. 무슨 쌍팔 년도 노랠 고르고 있니."

"왜 그래요 오빠, 나 저 노래 좋아하는데."

수아가 나를 변호해 주었다.

사실 오래된 노래를 고른 것은 최신 곡에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김광석의 명곡은 여러 후배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으므로, 젊은 사람들 귀에도 익숙할 것 같았다.

간주가 나오는 도중 슬쩍 뒤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기분이 안 풀린 듯 팔짱을 끼고 있는 예림.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는 식으로 이죽대는 기춘.

그리고 두 손을 꼭 맞잡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는 수아.

좋다.

이번 노래는 수아, 너를 위해 바친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

도훈이 노래를 시작하자 좌중이 모두 숨을 죽였다.

뛰어난 가수는 첫 소절만으로 청자를 압도한다고 한다.

도훈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故김광석의 환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특유의 처연한 음색과 창법을 빼다 박아 있었다.

목소리는 도훈의 그것이지만, 음악은 완벽한 김광석의 재림이었다.

"사랑했지마안~~~~~~~~~~"

노래의 클라이막스가 터져 나오자, 수아는 온 몸 쫘르르 전율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오르가즘에 가까웠다.

‘세상에!!! 저렇게 노래 잘하는 남자는 처음 봐. 엄청 멋있다!’

도훈의 실력에 놀란 것은 비단 수아만이 아니다.

방금 전 말실수로 기분이 상해있던 예림은 도훈의 노래 솜씨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

잘 생겼지, 키 크지, 운동도 잘하고, 거기다 노래까지 잘하는 남자.

‘이 남자, 침대에선 어떨까?’

부쩍 호기심이 생기는 예림이였다.

기춘 역시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새낀 진짜다. 왜 이런 새끼가 편의점 알바나 하면서 처박혀 있었던 거지? 차라리 슈퍼스타나 케팝에 나갈 것이지.’

놀라운 재능 앞에선, 시기나 질투조차 일지 않는 법.

평소 그를 고깝게 보던 기춘이였지만, 노래를 마치고 조용히 마이크를 내려놓는 도훈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기립 박수를 날리고 있었다.

"우아, 니 진짜 노래 잘하네? 대박."

"오빠 저 감동했어요."

"흥... 노래는 좀 하네?"

반응은 제각기 달랐지만, 모두 감탄한 표정이다.

사실 자신의 목소리를 스피커로 들은 도훈 역시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아이템의 능력이란 정말 무궁무진 하구나!’

***

노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자 세 사람의 반응이 급격히 달라졌다. 확실히 뭔가에 특출 난 재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은 180도 달라 보이는 법이다.

평범함 속에 감춰진 비범함.

압도적인 천재성에 대한 열광은, 노력으로 결코 이룰 수 없는 ‘특별한 재능’에 보내는 찬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태도가 급변한 것은 수아였다.

그녀는 아마도 김광석을 특별히 좋아하거나, 아니면 음악 자체를 무척 즐기는 사람으로 보였다.

"오빠 저 진짜 눈물 날 뻔 했어요. 좋은 노래 들려주셔서 고마워요."

"하하, 너무 비행기 태우지마. 부끄럽다."

"아니에요, 진짜로..."

실제 수아의 눈망울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증거.

이걸로 수아에게 상당한 점수를 확보했다.

동시 공략은 여전히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다.

‘로시, 아이템 효과 진짜 최고다.’

[두말하면 잔소립니다. 천상계의 기술력은, 천조국이라 불리는 미국조차 미개해 보일 정도니까요.]

‘하지만 너무 비싸. 비싸서 손이 덜덜 떨릴 정도야.’

[그건 다른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미션 수행과 위업을 달성하는 방법 밖에는요.]

그래, 맞는 말이다.

기춘에 대한 복수와 오늘의 동시공략을 위해 다소 출혈을 했지만, 포인트는 다시 벌면 된다. 아까워 말자.

나는 스마트폰으로 기춘에게 사인을 보냈다.

-형, 슬슬 게임 시작하죠.

-ㅇㅇ

메시지를 확인한 기춘이 분위기를 몰아갔다.

"우리 심심한데 게임이나 할까?"

"게임요?"

"술이 줄지를 않잖아. 술 비우는 데는 게임이 최고지."

"나 그런 거 잘 못하는데..."

수아가 머뭇거리자 내가 바람을 잡았다.

"에이, 남자친구가 옆에 있잖아요. 걸리면 대신 마셔 주겠죠."

그러자 기춘이 미리 짜준 대사를 읊었다.

"안 돼! 게임은 게임일 뿐. 여자 친구라고 봐주는 건 재미없지. 안 그래?"

"오빠!"

"그니까 안 걸리면 된다고. 걸릴 생각으로 게임 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나저나 무슨 게임 할 건데요?"

"일단은 가볍게 몸 풀기로 369부터."

"에이, 시시하게."

잠자코 있던 예림이 한 마디 했다.

시시하다고?

그러면 ‘3’은 빼고 69나 하는 건 어떠니?

너랑 나랑.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센 게임을 달려선 곤란하다.

하이라이트는 술이 좀 취해야 재밌을 테니까.

"그냥 바로 해요. 몸 풀긴데 뭐."

"1"

"2"

짝-

"4"

"5!"

짝-

안한다고 빼던 여자들도 막상 게임이 시작되자 분위기에 이끌려갔다.

자, 이제부터 본 게임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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