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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37화 (17/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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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눈이이08

"두 분 참 잘 어울리세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졌다.

수아는 고개를 떨구더니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말 한마디에 두 사람의 삐걱대는 관계가 적나라한 민낯을 드러낸다.

"...그래 보이세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완곡한 대답.

나는 눈치 없게 못 알아듣는 척 했다.

미안하지만 좀 더 상처를 후벼 파줄 필요가 있다.

기춘에 대한 실망감이 커질수록, 그녀를 흔들기 쉬워질 테니까.

"기춘이 형이 좀 터프하잖아요. 여자들은 은근 상남자 스타일에 끌리나 봐요."

"다..."

수아가 뭔말을 하려다 머뭇거린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여기서 함부로 말을 끊었다간,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릴 것 같다. 그리고 그 입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다.

끈질긴 인내심에 결국 수아가 입을 열었다.

"다...그렇진 않아요. 여자들도."

"그래요?"

"네."

답은 나왔다.

수아의 기춘에 대한 불만은 상상했던 이상이다.

흔들면 언제든 쓰러질 정도.

그러나 외모도 극히 평범한데다 이미 임자까지 있는 그녀에게 손을 뻗칠 남자는 드물었을 것이다. 소심한 그녀 역시 먼저 나서긴 힘들었겠지.

이런 관계는 극적인 반전이 없는 이상 관성처럼 흘러간다.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애정도 애증도 없는 남보다 못한 사이.

사귀고만 있을 뿐 사랑은 없는 연애.

"어? 잔이 비었네요?"

그녀의 빈 잔에 술병을 들이 밀었다.

수아가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나는 거품 가득 잔을 넘치게 따랐다.

다분히 고의적.

"앗!"

술이 넘쳐 흘러 손을 적시자, 급하게 옆에 있던 휴지를 꺼내 그녀의 손을 닦았다.

자연스러운 터치가 이루어진다.

그녀의 손은 생각보다 따뜻하고 보드랍다.

"괘, 괜찮은데..."

"죄송해요. 미인 앞이라 제가 너무 긴장했나 봐요."

"네, 네?"

"아니 수아씨가 너무 예뻐 가지고 수전증 왔나 봐요. 원래 이런 실수 잘 안하는데..."

기습적인 칭찬에 수아가 놀란 토끼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여자에게 예쁘다는 칭찬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질리지 않는다. 특히 그런 말을 자주 못 들어본 사람이면, 그것은 마음속 깊이 큰 울림을 남긴다.

태어나 한두 번 헌팅 받아본 여자들에게, 그것이 평생의 자랑거리가 되는 것처럼.

수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여세를 몰아 그녀의 기분을 더욱 들뜨게 해주었다.

"기춘이형 참 부러워요. 형수님 같은 미인이랑 사귀니까."

"왜 그러세요. 민망해요."

왜 그러다니?

정말 모르겠어?

오늘밤 너 따먹으려고 수작부리는 거잖아.

이쯤에서 슬쩍 나예림을 한 번 쳐다본다.

오징어를 잘근잘근 씹으며 나를 노려보는 그녀는, 어딘지 불만 가득한 얼굴이다.

관심 안주니까 열 받지?

너보다 안 예쁜 수아에게 아부 떠는 게 자존심 상하지?

그래, 좀 더 빡쳐라.

빡칠수록 나의 관심을 갈구하게 될 테니.

예상대로 예림이 나에게 먼저 물었다.

"근데 그쪽은 몇 살이세요?"

"저요? 스물 셋이요."

"어, 나랑 갑이네?"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수아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너랑 갑인 것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몸짓이다.

"수아씨는 나이가?"

"저요? 전 스물 둘이요."

"아! 그렇구나. 전 더 어리게 봤는데... 술집 가면 민증 검사 같은 거 받지 않아요?"

"뭐... 가끔?"

"진짜 어려 보이세요. 피부가 좋아서 그런가 보다."

실제로 수아의 피부는 티 없이 깨끗한 편이다.

화장을 거의 안한 것 같은데도 조명에 비춰지는 모습이 애기 피부처럼 뽀얗고 맑았다. 이런 경우 대게 속살도 부드럽다.

"저 너무 띄워주시네요."

"아니에요. 정말 좋아서 그렇죠. 제가 피부 좋은 사람이 이상형이거든요."

"정말요? 예림 언니도 피부 엄청 좋은데..."

수아가 자연스레 예림에게 바통을 넘겼다. 내가 오늘 그녀와 따로 소개팅을 할 것이라는 언질을 받은 모양이다.

"그래요?"

하지만 나의 시선을 얄궂게도 홀로 열심히 먹방을 찍고 있는 후덕녀 쪽을 향했다. 그리고 아직도 볼 가득 음식이 물고 있는 후덕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군요."

"아, 아니 그쪽은 선미언니고...저기."

수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예림을 가리켰다.

그녀는 거듭된 나의 무시에 잔뜩 뿔 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네까짓 게 날 무시해? 이런 기분 처음이야.’ 하는 표정으로.

***

‘네까짓 게 날 무시해? 이런 기분 처음이야.’

예림은 슬슬 약이 올랐다.

기춘이 데려왔다는 훤칠한 사내.

첫눈에 보는 순간, 이상형임을 직감했다.

180이 넘는 쭉쭉 뻗은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

게임에 찌들어 아재 냄새 풀풀 나는 클랜 사람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찝쩍거리는 기춘이 귀찮아 무심코 던졌던 말이 이런 킹카를 불러올 줄이야!

하지만 도훈은 처음 눈을 마주칠 때 말고는 자기 쪽으로 1g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섞인 모임에선 언제나 여왕벌 대접을 받던 그녀로선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이제껏 만난 모든 남자들은 자신의 미모에 쉽게 주늑들었다. 쭈뼛거리고 말을 더듬었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 갖은 허세를 부리고, 온갖 미사여구로 그녀의 미모를 추켜세웠다.

그게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런 대접이 너무도 익숙했다.

하지만 이 사내, 도훈은 달랐다.

누가 봐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수아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그녀의 젖은 손을 정성스레 닦아주고, 입 발린 칭찬을 서슴없이 건넨다.

어떻게?

나를 앞에 두고?

수아 따위에게?

그녀의 높디높은 자존심에 균열이 생겼다.

오기가 솟구쳤다.

그의 관심을 뺏어오고 싶었다.

"아, 좀 피곤하네."

예림은 기지개를 켜는 척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봉긋한 유방이 전면으로 밀려 나온다.

꽉 찬 비 컵이 존재감을 과시한다.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리는 게 느껴진다.

예림은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수컷들의 관심은 언제나 자신을 고양시켰다.

슬쩍 도훈 쪽을 쳐다본다.

너도 사내라면 별 수 없겠지.

그런데.

‘뭐, 뭐야! 저 새낀?’

도훈은 여전히 수아와 희희낙락 웃고 떠들고 있다.

자기에겐 눈길도 주지 않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예림이 피곤해? 오빠가 편의점가서 커피 사다줄까?"

맞은편에 앉은 오타구 새끼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물었다.

20대 후반임에도, 미소녀 애니에 빠져 관련 상품에만 한 달 수십만원을 지출한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자 그 옆에 앉은 깡마른 사내가 말했다.

"편의점 커피가 뭐냐? 예림인 스타버그 커피만 마시는 거 몰라? 저기 24시간 하는데 아는데, 내가 후딱 다녀올 게."

깡마른 사내는 그래도 직업은 괜찮았다.

9급이긴 하지만 나름 공무원이다.

그러나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 삐쩍 마른 몸에 움푹 페인 볼 살은 너무 빈티가 난다. 저런 사람을 남자친구랍시고 데리고 다니면 쪽팔려서 밖을 나갈 수 없을 것 같다.

‘어으! 왜 하필 저런 쭉쩡이 같은 새끼들만 꼬여가지고...’

두 사내가 경쟁하듯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예림은 조금도 성에 차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도훈에게 꽂혀 있었다.

‘이도훈이라고 했지? 두고봐. 너 나한테 찍혔어.’

***

‘로시, 나예림이란 애 부글부글하는 거 같은데? 저래도 괜찮을 거야?’

[잘하고 계시는 겁니다. 주인님이 무관심할수록 그녀는 더욱 애가 탈 테니까요. 정보창 스킬의 추천은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하긴 이것도 초능력의 일종이니까... 그나저나 쟤 제 정신 아닌 거 같지 않냐? 지가 무슨 재벌 딸이라도 돼?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한 네가 처음이야, 딱 이 표정이잖아?’

[사람의 성격은 타고난 기질과 자라온 환경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니까요. 아니면 극적인 사건을 겪어도 그렇죠.]

극적인 사건이라.

하긴 이도훈으로 환생하고 나서 내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

심한 콤플렉스 때문에 여자 앞에서 당당해 본적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늘어난 길이(?)만큼 자신감이 넘친다.

시스템의 힘을 이용한다면 세상 어떤 여자도 자빠뜨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실로 놀라운 권능이라 할 수 있다.

지구에서 가장 싸움 잘하는 남자가 모든 남성 위에 군림한다면, 나는 나머지 절반인 모든 여성을 지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수아에게 점수를 따는 동시에 예림의 질투를 유발하는 일타쌍피 전략을 펼치던 와중, 화장실에서 돌아온 기춘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도훈아, 나가서 한 대 빨고 오자."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기춘을 따라 나섰다.

***

"씨발 니 말 듣고 좆됐다, 완전."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기춘이 절반이나 남은 담배를 거칠게 집어 던지더니 또 다시 줄담배에 불을 당겼다.

"아니 씨발, 니가 그랬잖아. 나예림이 나한테 관심있는 거 같다고."

"예."

"그래서 내가 조금 들이댔거든 너 오기 전에. 근데 존나 씹정색 하는 거야. 와, 무슨 쓰레기 보는 줄?"

그거였나? 오자마자 나한테 후래자 삼배를 먹인 이유가?

요 후래자식 같은 새끼가 어디서 내가 깔아 놓은 판에 깽판을 놓을라고.

"왜 그랬어요, 형?"

나는 오히려 따지듯 물었다.

"뭐가 인마 나는 니 말 듣고..."

"형은 눈치가 있어요, 없어요?"

"어?"

신경질적인 나의 반응에 기춘이 자기도 모르게 장초를 떨군다.

늘 조용하던 내가 버럭 성내는 모습은 첨 봤겠지.

그와 나의 키 차이는 15cm.

어깨 넓이는 두 배가 넘는다.

애초에 체급부터 상대도 안 되는 수준이다.

위압감을 느낄만하다.

"형은 진짜 제가 밀어 드린다니까 왜 먼저 나서가지고..."

"아, 아니... 나는..."

"제가 말했잖아요. 예림이가 왜 그러는지. 형 옆에 수아 있었죠?"

"거야 뭐 여친이니까 항상."

"근데 거기서 들이대면 걔 입장이 뭐가 돼요?"

"아니 막 들이댄 정도까진 아니고, 그냥 오늘 옷 잘 어울린다, 뭐 이런 얘기를..."

"그게 그거죠! 여친 있는 남자가 그런 행동하면 당연히 사심이 있어 보이니까. 예림이도 그걸 아니까 정색한거구요."

"그, 그런가?"

기춘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가는 병신아, 니가 그냥 시궁창 사는 쥐새끼보다 싫은 거지.

"안 되겠다. 형은 그냥 이제부터 제가 하란 대로만 해요. 알았죠?"

"알았어."

"제 말만 잘 들으면 오늘 밤 예림이 꽂을 수 있어요."

"지, 진짜?"

"일단 이 자리 적당히 파장하고 넷이서 자리부터 옮기죠."

"알았어. 너 오기 전 클랜장이 먼저 가서 내가 왕고거든. 지금 끝낼 게."

"그리고 나중에 넷이 있으면 이렇게 말 못하니 카톡으로 보낼게요. 자연스럽게 핸드폰 보면서 행동하세요."

"응."

부쩍 고분고분해진 기춘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남자는 니미... 동생이 한 번 버럭했다고 쫄아가지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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